체인즐링
토머스 미들턴 지음, 조성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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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뒤편에 실린 지은이 소개를 읽어보면, 토머스 미들턴(1580~1627)은 '또 다른 셰익스피어'로 불릴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일한 극작가라고 했다. 그의 희극과 비극은 동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으며,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비교되고, 17세기 중엽 영어권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 애프러벤, T.S. 엘리엇까지 숱한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의 16년 연하니까 영국의 르네상스 뿐 만 아니라 세계 르네상스 문학에서 거의 독보적 존재로 이름을 굳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는 없겠지만, 토머스 미들턴이란 극작가가 있었다는 것만 알지 정말로 그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은 적 없고, 우리나라에서 막을 올렸다는 공연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는 사람을 "또 다른 셰익스피어니”, 다른 이름도 아니고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맞먹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면 조금 무리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여튼 토머스 미들턴은 미미하게 시작해 젠틀맨의 위치에까지 오를 정도로 입신양명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의긴 했으나 학업을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옥스퍼드에 입학했다. 이때쯤 극단 생활에 매력을 느껴 학교를 때려 치우고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긴 했지만, 대부분의 극단 종사자처럼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낀 건 아니라서 극단에 소속된 작가, 배우가 아니라 요즘 말로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체인즐링> 역시 야외무대가 아닌 완전한 실내 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쓴 것으로 보아 프리랜서가 맞다는 짐작도 해본다.


​  작년 연말에 오에 겐자부로가 쓴 <체인지링>을 읽은 적 있다. 오에의 '체인지링'이 미들턴의 '체인즐링'과 같은 단어다. 다만 일본어의 제한된 발음과 표기방식으로 쓰인 카타카나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서 "Changeling"이 '체인지링'이 된 것일 뿐이다. 오에 작품의 독후감에서도 한 번 이야기했지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소개하면, (1) 주저하는 사람, (2)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혹은 아이(아이의 경우 요정에 의해서 바뀜), (3) 모자란 사람을 의미한다. 근데 내 경우에는 (2)번의 의미 말고 달리 쓰인 경우는 보지 못했다.

  19세기, 양보해서 18세기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쓴 희곡이 현재와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고, 당시의 주류 연극행위에 관한 성격이 어떻고 하는 건 중세 영어를 연구하는 영문학자에게 맡겨 두기로 하자. 미들턴이 <체인즐링>을 처음 공연하고 정확하게 4백년이 흐른 오늘, 공연이 아니라 희곡을 읽은 현대인의 감상을 솔직하게 적고자 할 뿐임을 먼저 양해해주기 바란다.

  미들턴과 로울리가 공동작업을 해 완성한 <체인즐링>은 스페인의 버만데로 성과 인근의 정신병원, 이렇게 두 장소에서 번갈아 펼쳐지는데, 성 안에서의 비극과 정신병원의 희극 씬이 서로 교차해 전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5막에 가서 인물들이 합해져 비극으로 마감한다. 역자는 해설에서 이를 주 서사(버만데로 성)와 보조 서사(정신병원)으로 설명한다. 보조서사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두 명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나중에 성주 버만데로의 하인으로 밝혀진다. 주 서사나 보조 서사나 주제는 같다. 불륜과 부정. 지금은 아침 드라마의 막장에서조차 발견하기 힘든 범죄 등등.


  스토리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보조 서사. 정신병원. 병원장은 나이 많은 알리비우스. 나이가 많으니 전립선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배뇨에 문제가 있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발기부전을 겪고 있는 바, 알리비우스의 이마에도 뿔이 돋으려고 하는지 근질근질하기 시작한다. 배우자는 자기 나이 근처에서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병원장이니 4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돈푼 깨나 만지는 덕분에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이한 건 뭐 알리비우스 개인의 욕심을 채운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사벨라 역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절정기의 여성인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이 의심 많은 원장선생은 아내를 자기 병원 안에 들여놓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해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탐하는 남자들이 많긴 하다. 이 가운데 위에서 얘기했듯 버만데로 성주의 하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곧 숨이 넘어갈 만큼 상사병에 걸려 얼굴에 노랑병이 들어 죽어가려다가 드디어 고의로 미친 척을 해, 병원에 입원하는데 성공한다.


​  그리고 주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데로 성이다.

  막이 올라가면 주인공 알세메로가 친구 자스페리노와 함께 몰타로 항해를 하려다 바람이 좋지 않아 출항하지 않고 버만데로 성을 방문한다. 연극의 속도를 위해 곧바로 알세메로는 여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마주치고, 둘은 언제나처럼 한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이미 알론조 드 피락쿠오와 정혼했고 일주일 후에 결혼을 할 예정이다. 아뿔싸. 알세메로는 이제 막 세상의 기쁨을 알았구나, 하는 순간에 사랑을 다시 거둬들여야 함을 알고 단칼에 포기해버리지만, 베아트리스는 정혼자 알론조를 자신의 남편으로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알세메로한테 뭐가 씌었는지 그를 위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하는 버만데로 가의 하인 드플로레스. 콰지모도보다 흉하게 생긴 얼굴을 한 사나이. 자신이 자신의 외모를 품평해 놓은 것을 보자.


​  "내 얼굴이 꽤 추하다는 건 인정해. 매독에 걸려 얼굴에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마녀 같은 턱, 대여섯 가닥의 머리털이 서로 붙어 있기 두려워서 얼굴 여기저기 구석에서 중얼대고나 있고, 여물통 같은 주름에 비열하고 정직하지 못한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고인 돼지만큼 추악한 얼굴"

  콰지모도를 창안해낸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사람이다. 19세기 작가는 이처럼 못생긴 인물의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만 17세기 초반 미들턴 시대의 작가들은 이런 인물에게 대개 괴물인간이나 악당, 비열함과 비겁함을 선사해주었다. <체인즐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플로레스는 성주의 아름다운 딸 베아트리스를 사랑, 사랑 좋아하네, 사랑 말고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해온 인간이다. 당연히 베아트리스는 극의 도입부에서 흉한 외모의 드플로레스에게 "가까이 오지 마, 냄새가 지독해." 같은 경멸의 말도 서슴지 않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정혼자 알론조 대신 알세메로와 결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드플로레스에게 다정하게 제의를 하니, 괜찮은 남편감이라고 생각해온 알론조를 죽여 달라는 거였다. 알론조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루기로 약속을 하고.

  그리하여 드플로레스는 알론조에게 성을 안내해줄 테니 구경 좀 하시라고 제의하고 이를 받아들여 한 바퀴 돌던 중, 좁은 틈바구니를 가야하는 동안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더니 가슴에 품고 있던 단도를 알론조의 가슴에 정확하게 박아버린다. 이 당시 젠틀맨 정도의 일년 생활비가 백 파운드였다는데, 베아트리스는 드플로레스에게 3백 파운드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드플로레스는 천만의 말씀. 베아트리스의 순결한 몸을 원한다. 일단 몸을 얻으면 돈이야 저절로 따라오는 거란 걸 알고 있는데 이 악당이 미쳤냐 말이지. 자기 목숨은 워낙 하찮은 거라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백해 둘이 같이 죽는 길을 갈 거라고 협박을 하니, 결국엔 매독에 걸린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대여섯 가닥 머리털이 얼굴 여기저기에 붙은 드플로레스 앞에 누울 수밖에.

  알론조가 죽었다. 연극이니까 속도감을 위해 베아트리스는 일 분의 애도기간도 없이 곧바로 알세메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여성의 순결은 명예와 직결되는 가치였다. 첫날 밤에는 당연히 출혈을 수반해야 했지만 이미 그건 드플로레스와 그렇게 해버렸으니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베아트리스는 알세메로의 의약품 상자에서 신기한 약물을 발견한다. 처녀 감별 시약. 티스푼으로 하나를 먹이면 곧 하품을 하고, 재채기를 하고, 크게 웃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처음보다 우울해진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순결한 하녀 다이아판타에게 이 시약을 먹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관찰을 하고, 남편 알세메로가 자신은 너무 수줍어 결혼 첫날 밤은 도저히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니 불을 끈 다음에 더듬어서 침대에 오르겠다고 요구해 허락을 맡는다. 하녀 다이아판타와 알세메로의 친구인 자스페리노가 베아트리스-드플로레스의 이야기를 우연히 옅들은 다음이다. 근데 허락했다고? 그렇다. 알세메로가 처녀 감별 시약을 아내에게 먹여 보았고, 아내는 하녀에게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연기해 새색시의 순결 여부를 확신했었으니까.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린 날, 베아트리스는 아직 남자의 손길을 경험해보지 못한 하녀 다이아판타를 완전히 어두운 신방에 자기 대신 들여보내기에 이른다. 즉,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 가운데 (2)에 속한다는 말씀.


​  이후 어떻게 되느냐? 이 책 읽어 보실 분이 별로 없을 거 같아서 시원하게 말씀드립자면, 베아트리스 입장에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녀를 살려 둘 수 없다. 그리하여 악당 드플로레스는 베아트리스의 묵인하에 다이아판타의 방에 불을 지르고 총으로 쏴 죽인 다음, 불에 타 죽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친구 자스페리노가 알세메로에게 진실을 밝혀 두 악당은 최후를 맞는다. 물론 훨씬 드라마틱하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대의 음담패설, 혹은 야한 상징들로 가득하다. 하긴 셰익스피어도 간간히 그런 농담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뭐 그래서 더 재미라도 있으면 좋은데, 정의는 살아 있다, 결국 정의가 이긴다는 식의 권선징악의 길을 똑바로 걷는 작품이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당시엔 어떤 평가를 받았고, 영문학적 위치를 감안하지 않은 아마추어 독자의 감상으로는 굳이 책값 비싼 지만지 드라마 책을 사서 읽을 필요까지는 있겠나 싶었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희망도서 신청을 해 "첫빠따"로 읽을 수 있으면 장땡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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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7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제목과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어요. 시대도 인물도, 영화랑 다르네요^^ 영화나 소설이나 (2)번 의미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지만^^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0 | URL
아하. 보신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거, 맞을 겁니다. 영화화 하면서 각색한 거겠지요.

yamoo 2022-12-17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이거로 인해 저는 패수~~
이런 친절한 멘트, 너무 사랑합니다. 문트님..^^
이 한 권은 건너 뛸 수 있군요..ㅎㅎ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너무 오랜 텍스트라 도무지 권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

그레이스 2022-12-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침드라마;;;
여기서부터 골드문트님 써주시는 글 읽고 패스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침드라마 보진 않지만 우연히 한번 보면 그 한편으로 앞뒤 스토리를 다 꿰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래서라기보다 막장 스토리때문인듯 합니다.^^

Falstaff 2022-12-19 06:28   좋아요 1 | URL
본문에도 썼지만 17세기 초에 읽었으면 재미있었을 듯합니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