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를 바라보며 창비시선 153
민영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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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장斷章



  외로울 때는

  눈을 감는다,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


  목마를 때는

  돌아눕는다,

  눅눅한 바람벽에

  허파를 대고……


  하지만, 내연內燃의 피

  독毒이 되어 거꾸러질 땐

  뜨겠다, 죽어도 감지 못할

  새파란 눈을!  (전문)



  20대 초중반에 암송하던 시 가운데 하나다. 그의 첫 시집 《단장》의 표제시로 간결한 시어만을 사용했다. 시집 출간이 아닌, 내가 시집을 읽은 시절에 유행하던 민중시, 마치 논문을 읽는 것처럼 대단한 서사로 울부짖던 운동시와 완전히 차별되는 서정. 그러면서 결국 드러나는 시선에 대한 각오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이어 두번째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까지 읽고 나도 생활, 삶의 유사quicksand에 빠져 오랜 세월 민영을 잊고 살았다. 술과 살림에 젖으면 가끔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으면서. 연초에 시집을 읽어볼까, 싶어 인터넷 책방을 뒤지다가 문득 이이의 이름을 기억했다. 전에 좋아했던 시인.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구입한 민영의 시집이 창비시선 153번 《유사流沙를 바라보며》와 367번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이렇게 두 권. 예전에 읽은 시집을 뒤져보다가 또 눈에 띈 시인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그의 시집 《그리운 나무》도 덩달아 샀다. 민영, 정희성. 마치 오래된 형님들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다.

  《유사流沙를 바라보며》는 1996년 초판 1쇄. 당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인당 시집 구입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음에도 25년이 지나도록 초판 1쇄의 새 책을 살 수 있으니 세상에 시 읽는 사람이 참 적구나. 민영이라면 그래도 알 만한 독자는 다 아는 시인인데. 얼마나 오래 창고에 있었는지, 틀림없이 새 책이라지만 워낙 바싹 말라 제본한 것이 갈라지고 손에 먼지가 검게 묻는다. 시인 생각을 하니 내가 괜히 미안해질 정도로.


  민영은 강원도 철원에서 1934년에 태어난 갑술년 개띠다. 올해 89세. 그러나 만 3세가 되는 1937년 부모를 따라 만주의 간도 화룡현에 살러 갔다가 해방이 되던 소학교 4학년 때 간도가 팔로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쟁터로 변모하자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때 세라복에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던 구장 집 외동딸 순영이는 그대로 화룡에 남아 1990년대 예순이 넘은 나이가 되도록 창가에 앉아 풍금을 치던 화사한 얼굴을 시인의 마음 속에 지우지 못하게 만든다.

  시인이 난 곳은 철원 가운데서도 지금은 이북 땅인 모양이다. 그래 시인이 휴전선 남쪽의 첫 마을 철원군 월정리라는 곳에 들렀을 때, 기차도 다니지 않는 정거장을 새로 만든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월정리에서



  남들은 모두 신록을 찾아서

  남쪽으로 떠날 때

  나 홀로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눈 덮인 산야에는

  오랑캐꽃 한 송이 피지 않았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길 잃은 노루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그리운 고향은

  백설白雪의 산마루 저편에 있었다.


  흰 저고리에 감색 치마

  애젊은 누이가 탄불을 갈아 넣고

  아들을 떠나보낸 늙은 어머니는

  동구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전문)



  시인의 고향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건만 거기서 한 발짝도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곳. 그곳을 꽃이 만발할 상춘의 계절, 봄에 찾았다. 봄은 봄이건만 아직 철조망 사이엔 눈이 덮였고, 그 산마루 너머에 고향이 있다니, 유년의 봄은 늙은 시인에겐 여전히 유년에 머물러, 아들을 보내는 늙은 어머니는 동구 밖을 내다보고 계시는데, 만 세 살의 시인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 장면을 정확한 유년의 기억이라 말할 수 없다. 독자가 읽기에는, 오십 살이 되기까지 시인의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던 어머니, 삼천포에서 잠깐 살고, 단양에서도 산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떠나 보내던 모습을 그린 것이려니 한다. 지금은 용인의 땅 속에서 여전히 자식 걱정을 하는. 그래서 ‘월정리 – 백설 쌓인 산마루 저편의 고향 – 어머니’로 연결되는 게 아닌지.

  아마도 고향에 관해서는 주로 어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을 터. 어떤 시 속에서도 아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민통선 안에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절이 있고, 이 절에서 모시는 부처가 비로자나불인 모양이다. “사변 전만 하더라도 철원 사람 모두의 원찰이었다”는데, 이 도피안사를 우리말로 하자면 “해탈에 이르는 절” 정도겠다. 철원 사람들은 이 절의 이름 ‘도피안’을, 물론 처음엔 제대로 발음했겠지만, 현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외래어인 도피안도 우리말로 발음하기 편하게 “되피”로 일컫게 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도피안사’는 간략하고 쉽게 “되피절”이 돼버린다. 똑바로 세운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 안은 비로자나불 역시 그냥 “부처님”으로 삼아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은 여러 세대를 거쳐 “되피절 부처님”이 되었겠다.



  되피절 부처님



  내 어린 시절

  한다리 건너 관우리 지나

  되피절 부처님 찾아가던 길은

  초록빛 비단의 꿈길이었네.


  바늘에 찔린 오른손가락

  왼손으로 지그시 감싸 쥐시고

  이승의 새빨간 노을을 보며

  안스러이 웃으시던 되피절 부처님.


  내 고향 철원이

  모을동비毛乙冬非라 불리던 아득한 옛날

  가난한 집 아이들 누더기옷을

  꿰매주시다 다친 손가락.


  그 손에는 흘러내린 자비의 피가

  싸움에 지친 마음에 연꽃을 피워

  철원 평야 매운 바람 거두어 가고

  통일의 봄볕을 비쳐주소서!  (전문)



  염원하는 시. 시의 내용보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이 되피절 부처님으로 변하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다. 앞에 소개한 시 <월정리에서>와 비슷하지만 <되피절 부처님>은 한 시절 모을동비라는 이름이었던 철원의 실향민을 대표해서 아직 눈이 녹지 않은 휴전선이 해동되어 진정한 통일의 봄볕이 쬐기를 바라고 있다.

  이외에도 이 시집에서는 멕시코와 북미 지역의 원주민의 아픔과 바람을 이야기하고도 있는데, 1996년이면, 내년 외환위기, 즉 세계통화기금에 의한 구제금융과 이에 따른 옵션의 실행을 위해 엄청난 시련을 앞두고 있었으니,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가장 흥청망청 외화를 써버리던 시기였다. 1 달러에 7백원 대의 환율이었으니 김영삼 정권은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어 누구나 다 국경 밖으로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 한 편을 팔아서 오십 평생 찬 없는 밥을 먹으며 아이 기르는 일 빨래하는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아내의 약을 사야 했던 시인도 미국이며 멕시코를 방방곡곡 여행했나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원주민의 애사를 알게 되고 이에 감화되어 많은 시편을 쓰고 이 시집에 게재했으나, 그저 내 생각엔 굳이 시집의 1/3 이상을 채울 필요가 뭐……

  그보다는 시인이 예순을 꽉 채웠을 때 다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을 쓴 이 시가 훨씬 좋았다.



  반가 返歌



  나이 예순이 꽉 차는 날

  탄탄한 대로를 나는 버리고

  외진 산길을 걷기로 했다.


  조숙한 천재 랭보는

  열아홉 피끓는 어린 나이에

  돈 안되는 시를 외면했다지만,


  후진국에 태어나서

  가난밖에 보답없는 시를 써온 나는

  이제야 지나온 먼 길을 돌아본다.


  불면으로 뒤척이던 기나긴 밤을

  한 구절의 시를 찾아 헤맨 적도 있지만

  꽃보다 소중한 목숨을 위해


  이 아침,

  동해바다의 거센 물결

  모래 위에 쓴 글씨를 다시 지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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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03 1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쪽길, 외진 산길, ,,
세상과 다른 길을 선택한 고독이!
마지막시 마지막 2연에서는 시인의 마음이 어떨지 알것 같아요 ㅠ

Falstaff 2022-02-03 17:00   좋아요 3 | URL
ㅎㅎㅎ 참 오래 전에 좋아한 시인입니다. 역시 서정시가 좋아요. ^^

mini74 2022-03-08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골트문트님 서재에서 시공부 하네요~~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3-08 17:51   좋아요 3 | URL
벌써 나왔군요~! 골드문트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Falstaff 2022-03-08 21:54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두 분도 축하합니다. ^^

그레이스 2022-03-08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시 좋았어요

Falstaff 2022-03-08 21:52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님도 페이퍼 축하합니다. ^^

이하라 2022-03-08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골드문트님^^

Falstaff 2022-03-08 21:5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

독서괭 2022-03-09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2-03-09 05:4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thkang1001 2022-03-09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Falstaff 2022-03-09 14:4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서머싯 몸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2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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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집을 이야기하기 위해 지난 연말에 읽은 <케이크와 맥주>로 운을 떼보자.

  거기서는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나하고 잠을 자고,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낭비해버리는 열혈 여성 로지 드리필드가 출연한다. 거의 대다수가 이렇게 단정하는 여성을 단 한 명, 작가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어셴든이라는 중견작가만이 이이를 위하여 변호를 하는 바, “새벽처럼 순수한 여자”, “청춘의 여신인 헤베 같은 여자, 월계화 같은 여자”이며 방탕한 생활도 천성일 뿐이라서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은 내어준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한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라고까지 칭송하기에 이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라고 하면 남들과는 좀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사람을 읽을 수 있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서머싯 몸 단편선 1》을 통해 서머싯 몸 만의 “시선의 전환”을 확실하게 체감하게 된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따르면 적어도 남의 신세는 지지 않고 산다는 건데, 몸은 (자꾸 “몸은”, “몸은” 이러니까 꼭 body를 말하는 거 같다. 앞으로는 “M은”이라고 쓰겠다.) 이런 시각을 아예 외면해버린다. 이건 역설적으로 (한 번 더 주장하자면 ‘나처럼’) 건전한 의식으로 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여태 우라질 “성실하게”를 엄수하기 위하여 누르고 누르며 지내느라 가슴 속에 맺혔던 응축된 스프링을 한 방에 풀어놓는 듯한 쾌감, 적어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가장 짧은 작품 가운데 하나인 <개미와 배짱이>를 보면, 조지와 톰 램지 형제가 등장한다. 조지는 진지하고 고상한 성품을 지닌 성실한 봉급쟁이 변호사다. 계속 이런 삶을 유지하여 쉰 살이 되고, 3만 파운드의 노후자금을 비축하고, 교외에 집을 지어 정원을 가꾸며 건강을 위해 골프를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말 그대로 개미의 삶. 조지의 가장 큰 불운은 동생, 친동생 맞다, 톰을 다른 서양 형제들과 비교해 과하게 사랑한다는 것. 톰은 직장에 다니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생산해 적어도 생물학적 의무는 다 했지만, 어느 순간, 이제 난 돈벌이 안 해, 라고 선언하더니만 가정과 직장에서 자발적으로, 즉 자기 발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물쓰듯 돈을 펑펑 쓰는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을 하나.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줄레줄레 찾아가 돈 좀 빌려달라고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하고, 얼마나 구변이 좋은지 상대방은 빌려준 돈은 절대 갚지 않을 거란 분명한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도 다만 얼마라도 줘야 당연할 거 같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누구든 톰 램지를 알았고, 모두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를 좋아했다.”

  톰은 심지어 사기도 쳤다. 어떤 사기인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바로 형한테. 세월이 흘러 예순은 돼 보이는 얼굴을 한 성실 그 자체인 조지 램지가 어느 새 마흔일곱 살이 되었다. 서른다섯 살처럼 보이는 톰은 마흔여섯. 이제 인생이 제대로 되려면, 조지는 전원주택에서 골프를 즐겨야 하고 그렇게 될 거 같은 반면, 평생 베짱이같이 놀고 먹은 톰은 얼어 죽기 일보직전이어야 하건만 불과 몇 주 전에 엄마 나이의 늙은 여자와 약혼을 하자마자 신부가 죽어 그에게 전 재산, 50만 파운드의 현금, 요트 한 척,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런던의 집 한 채, 그리고 전원주택 한 채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평생 일개미로 산 조지 램지의 복장이 터지겠어, 안 터지겠어? 반면에 졸지에 큰 부자가 된 톰은 여전히 화자를 만나면 이렇게 얘기한다나? “어이, M! 주머니가 비지 않았으면 1 파운드만 빌려줄래?”

  그동안 내가 상세한 스토리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으면서 통째로 이야기해버리는 건 죽을 때가 되어 마음이 변한 건 아니고, 제일 짧은 단편이기도 하고, 위에서 얘기한 M 특유의 “사고의 전환”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모두 열한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작품 모두가 기대한 대로 M의 필력을 자랑하지만, 내가 읽기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첫번째로 실린 <비>였다.

  의사 맥페일 박사가 영국에서 사모아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사모아 북쪽 일대에서 열성적인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귀국해 일년만에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데이비슨 부부를 배에서 만나 친해지게 된다. 그런데 홍역이 돌아 이들은 중간 기착지에서 내려 상당한 기간동안 호텔이 없는 기착지의 현지인 집 2층에 머무르게 되고, 1층엔 통통한 다리가 도드라져 보이고 흰 드레스를 입은 톰프슨 양이 들어온다.

  M이 글쎄, 선교사들에게 무슨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책에 등장하는 모든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데이비슨 부부 역시 선교사 집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구사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정도로 묘사를 했던 바, 들어온 날부터 스윙 재즈와 남자들을 불러들여 춤판을 벌이는 톰프슨 양을 호놀룰루의 유곽에서 온 여성으로 간주하여 총독에게 압력을 넣어 가장 가까운 시간 안에 쫓아내려 하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쫓아내려 하는 데”에만 성공했다는 거. 톰프슨 양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게 되면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질 수밖에 없어서, 앨프래드 데이비슨 씨에게 울며불며 참회를 해 샌프란시스코 말고 시드니로 가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선교사 데이비슨은 이래서 또 한 명의 집 나간 검은 양을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의 품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문제는 이 작품을 쓴 작가가 다른 이도 아닌 M이라는 거. 그게 어디 쉽나. M이 원래부터 종교하고 그리 친하지 않은 건 다들 아시지?

  이 작품이 대표적으로, 독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거하고 결말이 조금 과하긴 해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확인하고 쾌감을 느낀다. 사실 독자를 가장 만족하게 하는 건, 이런저런 단서를 꾸준하게 제시하면서 미궁에 빠뜨리려 노력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자기 독법이 좋아서, 결코 작가가 그것까지 넘보지는 않았으리라고 착각에 빠져, 자기 예상과 비슷하게 결말을 맺는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딱 그렇다. 철없는 독자는 결말을 읽으면서 그것 봐, 내 생각대로 되잖아, 라고 흐뭇해 하다가, 조금 후, 커피 두 모금 마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혹시 M이 애초부터 계산하고 있던 거 아냐? 라는 의심이 들게 된다.


  책을 읽기 전에, 물론 당신이 정말로 《서머싯 몸 단편선 1》을 읽을 때 쯤에는 이 충고를 잊겠지만, 절대로 여태 배운 선한 공식을 염두에 두지 마시라. 즉,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부도덕의 끝은 파멸이다, 이런 건 M 앞에서 거의 언제나 공염불이 될 터이니 괜히 읽으면서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다. 근데 문제는 그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 정말이다. 물론 구라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읽어보시라. 특히 <삶의 진실들>에서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몬테카를로에서 도박하기, 남에게 돈 빌려주기, 여자와 접촉하기를 순서대로 차근차근 저지르는 한 청춘의 앞날에, 아,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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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2-02 0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왠지 이 책 제 취향일듯... ㅎㅎ 달과 6펜스는 사춘기소녀에게 진짜 강렬한 책이었는데 사실 그게 이후 나이들면서는 꼭 서머싯 몸을 읽겠다는 생각을 오히려 없애더라구요. 하지만 골드문트님 리뷰를 보니 내가 아는 서머싯 몸이 아닐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관심 뿡뿡!!!

Falstaff 2022-02-02 20:20   좋아요 0 | URL
핸펀으로는 답글 달기가 쉽지 않아서 좀 늦었습니다. ㅋㅋㅋㅋ
이 책 재미납니다. 6펜스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삶의 역설을 드높이는 작품이 대부분이고요. <비>는 영화로도 만들었고, 심지어 오페라로 만들어 실제로 공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해변의미풍 2022-06-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머싯 몸 단편 1,2편이 민음사에서 나왔네요. 예전에 삼중당문고에 몸의 단편이 10여편 실려있었는데 그때 읽은 이야기의 내용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비>,<레드>, <편지>,<인간의 요건>,<열두번째 아내>,<시인>,<점심>등의 직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네요. 이번에 나온 단편1에 있는 작품 중에서는 특히 <샘>과 <에드워드 버나드의 몰락>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본 단편1에 수록된 <삶의 진실들>도 예전 KBS인가 EBS를 통해 본 기억이 있는데 유투브에 Quartet 이라는 제목의 내용으로 올라와 있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을 올려주시고 언급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레이트존스 거리
돈 드릴로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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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하여간 20세기 후반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돈 드릴로의 세번째 작품. 이 네 명의 작가를 최근에 하도 여러 번 거명해서 이젠 조금 지긋지긋한 느낌도 난다. 토머스 핀첨, 돈 드릴로, 필립 로스, 그리고 코맥 매카시. 하여튼 난 이 네 명 가운데 토머스 핀천이 제일 좋다는 것만. 좋잖아?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했다 하면 여지없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빠지는 바람에 끝없이 집중을 요구해 다 읽을 때쯤 해서는 심신이 너덜너덜해지게 만드니 말이지. 이런 면에서 핀천 만큼 대책 없이 심통을 부리지는 않지만 돈 드릴로도 묵직한 한 방이 있다.

  드릴로의 작품은 주로 1980년대 이후에 쓴 것들로, 전미 도서상을 받으며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1985년 작 <화이트 노이즈>, 대중적 성공까지 거머쥔 88년의 <리브라>, 1992년 펜포크너 상을 받은 <마오 II>를 먼저 읽고, 이어서 2016년 <제로 K>, 2020년 작 <침묵>까지 가게 된다. 책 뒤에 실린 역자해설에 이이가 “1971년부터 78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컬트’ 작가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하는데 데뷔 초기엔 어떤 책을 썼을까, 궁금해했다가 1973년에 출간한 이 책 <그레이트존스 거리>를 읽어보고 드디어 원풀이 했다. 70년대 작품으로 치면 이이를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 칭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나는 영미 대중음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록 밴드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팀 역시 내 또래 세대라면 거의 당연히 열광했던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와 리드 싱어 재니스 조플린이다. 당연히 조플린 전집도 가지고 있고, 조플린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하는 베티 미들러 주연의 DVD <더 로즈>도 있었는데 술김에 친구 줘버리고는 지금 열라 후회하는 중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재니스 조플린은 스물일곱 살인 1970년에 그만 코카인 과다 섭취로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데, 같은 해에, 같은 나이인 지미 헨드릭스 역시 약물 과다 섭취로 앞서거니뒤서거니 해서 갈 길 갔다. 헨드릭스는 42년 11월, 조플린은 43년 1월생이니 미국식으로 같은 나이 맞다. 1973년에 출간한 <그레이트존스 거리>가 이 죽음(들)을 모델로 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쓰는데 적어도 계기가 된 사건이 됐다는 건 그럴 듯해 보인다.


  작품의 주인공 버키 웬덜릭이 화자 ‘나’로 등장하는데, 자신이 겪었던 한 기억,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에 대하여, 공과국의 꿈에 에로틱한 테러를 나누어 주는 한 남자의 주변환경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버키 웬덜릭은 한 시절 로큰롤의 영웅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그에게 남은 진정성 있는 죽음을 위해서라면 그의 의지, 즉 ‘자신의 손으로 죽고, 가능하면 이국의 도시에서 죽어야만 죽음이 성공적인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걸 깨닫는다. 말이 한 세대의 영웅이자 우상이지, 영웅 또는 우상 본인은 이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일까.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벅, 버키는 휴스턴 공연을 하다가 슬그머니 그룹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에게는 오염된 성지이자 고향인 뉴욕으로 가버리고 만다.

버키가 정착한 곳이 그레이트존스 거리에 있는 삼층짜리 아파트의 2층, 창틀이 휘어 찬 겨울 황소바람이 틈새로 숭숭 들어와 옷가지로 막아야 하고, 전원을 꼽지 않은 냉장고엔 비닐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하게 차 있으며, 난방조차 지극히 낮은 열효율을 자랑하는 다 찌그러진 건물이었다. 1층엔 정신이 조금 이상한 여자 미클 화이트가 날 때부터 두개골이 거의 없어 뭉글뭉글한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지적 장애아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는 이름이 없다. 낳고 4개월 이상 살지 못할 줄 알아서 이름 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아이 아빠는 순회 서커스단에 팔아 돈이나 만들거나 의과대학에 무상 제공해 연구 대상으로 사용하게 하자고 했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처럼 애초에 이도 들어가지 않을 얘기였다. 그리하여 여태 데리고 살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음, 여기까지 하자.

  3층엔 에디 페니그, 본명인 에드워드 B. 페니그로 작품을 발표한다는 작가가 살고 있다. 시인이기도 하나 주로 소설을 쓴다. 미스터리, 공상과학, 낮 방송의 연속극 대본, 단막극, 그리고 포르노까지. 하지만 독자들 누구도 똥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자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페니그의 고민은 새로운 장르인 아동 포르노 문학을 쓰고 있는데 조금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거란다. 아직까지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 다룬 적이 없는 유일한 분야로 자신의 작품에는 성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포르노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포르노를 쓰려 한다는 것. 이게 팔릴까? 하는 질문에 페니그는 한 마디로 잘라버린다. “시장성? 셀로판지에 새똥을 싸서 팔아도 사는 사람은 있는 거야.”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연히 실패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 아파트의 2층은 버키의 집이 아니다. 텍사스에 있는 작은 은행의 은행장, 공공시설회사 이사, 자동차대리점 동업자인 사업가의 외동딸 오펄의 집으로, 오펄은 가족들로부터 도망해 로큰롤에서 안식처를 구하다가, 멕시코에서 버키를 만났다. 꿈은 코카인을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스튜디오 파티에서 탬버린을 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둘은 짧지 않은 동안 한쌍으로 지내면서 둘 사이에 진정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서로 더 열심히 가고, 더 많이 가지고, 무엇보다 더 먼저 죽으려 했으나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오펄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나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버키가 아파트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속사 트렌스페러노이아의 운영자이자 버키의 매니저인 글롭키가 피난처를 찾아낸다. 버키가 번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과정에 절대로 크지 않은 부동산을 매입했고, 이 아파트 역시 그런 과정에 지금은 회사 소유로 되어 있어서 금방 찾아낸 것도 모자라 마스터 키로 문을 열고 빈 방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후 글롭키는 일종의 비서를 통해 얼마 안 되는 현금을 버키에게 주기도 하지만, 버키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당장 현금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거금은 절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큰 단위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서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면 현금화가 안 되는데, 파기했다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을 감당해야 한단다. 대강 감 잡히시지? 버키는 책이 끝날 때까지 많은 현금을 쥐기는커녕 흘깃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이상한 소녀 스키피. 어떤 사람이 전해주라는 포장물을 안고 있었다. 꾸러미를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하며 때가 되면 누가 와서 가져갈 거라는 말을 한다. 버키, 속도 좋지. 그키피에게 하는 대답이, 너네들이 꾸러미를 가지러 왔는데, 내가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여기에 없으면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가져가면 돼. 그리고는 신경 꺼버린다. 며칠 후, 드디어 모로코 사막에서 따뜻한 날씨를 즐기고 뉴욕으로 돌아온 오펄. 그녀의 옛 희망은? 맞다. 코카인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 오펄은 꾸러미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맞춘다. 그건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국 정부의 극비 연구실에서 유출된 것으로 지상최고의 마약이 될 원료 샘플이란다. 가격을 책정하지도 못할 수준이라고. 아니나 달라, 이 샘플을 얻기 위해 주로 영국에서 유럽의 판권을 좌우하는 거물도 뜨고, 연예기획사 트랜스페러노이아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해피밸리 농장공동체에서도 지하세계의 천재과학자 페퍼 박사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단서는 붙지만 무지막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대강 아시지? 미국 영화, 소설에서 마약이 등장하면 몇 명이 죽어나가야 한다는 거.

  이 와중에 뭐 조연 출연자는 다음으로 하고, 어쨌든 지상최고의 마약을 일정기간 보관하고 있었던 버키 웬덜릭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버키가 공연, 방송, 기타 등등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까지 개입을 하고 있으니 말이지.

  미국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레이트존스 거리, 기도할 때처럼 피로의 순간, 버키는 스스로 절반은 성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고, 알 수 없는 시련이 다가올 것에 대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데 몰두하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과 사건들이 저 앞에서 말한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이었으며 자신만의 공화국, 즉 사생활의 꿈에 대한 테러였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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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31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술김에 <더 로즈>를 친구에게 넘기셨다니….. 술이 정말 잘못했네요. 한동안 술 끊고 싶었을 듯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골드문트 님이 술 취했을 때 옆에 있으면 클래식 음반 막 넘기는 거 아닌가 싶어서 ㅋㅋㅋㅋㅋㅋ 술 좀 멕여보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31 11:56   좋아요 3 | URL
흑흑흑... 술이 웬숩니다. 술김에 그거 나한테 있는데 너 줄게, 쉽게 약속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술 깨자마자 아침부터 완전 해탈의 경지, 미네르바를 구경합니다.
남아일언풍선껌이긴 해도 한 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줘버리고 말았습니다. 흑흑흑....
그래서 코비드 세상이 조금은 좋습니다. 혼술이 95% 이상이니까요. 흑흑흑....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아, 이 어이없는 편집자야. 작품의 스토리를 ˝해제˝라는 제목으로 책의 가장 앞에 배치하면 독자는 어떻게 하라고.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고? 알려줘서 고마워, 이럴 줄 알았어?
나, 2백쪽 넘게 읽었다가 무슨 지랄 났다고 새삼스레 해제 들춰보고는 지금 괴멸이다,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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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01-30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 표지의 ‘우먼 인 레드’는 어찌 되는데요?

Falstaff 2022-01-30 10:07   좋아요 2 | URL
총 650쪽 분량에 지금 220 부근인데요, 빨간 드레스의 아가씨가 누군지는 알겠는데 왜 토끼는 줄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읽었다고 유부님한테도 해제를 말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ㅋㅋㅋ

잠자냥 2022-01-30 09: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재미는 있는데 참 짜증나쥬 ㅋㅋㅋㅋ

Falstaff 2022-01-30 10:08   좋아요 3 | URL
빅토리아 시대 로맨스 물 가운데 짜증나지 않는 거, 전 아직도 못 읽어봤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래도 하디는 재미라도 있지요!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01-3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앞에 해제가 있으면 일단 읽으면 안되는군요 ㅋ 골드문트님의 빡침이 느껴집니다 ㅜㅜ

잠자냥 2022-01-30 12:26   좋아요 2 | URL
심지어 이 책 해제는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01-30 12:37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ㅋ 스포에 문제도 좀 있군요~~ 그런데 전 아직 <더버빌가의 테스>도 못읽었어요 😅 읽고싶은데 ㅋ

Falstaff 2022-01-30 20:37   좋아요 3 | URL
책 앞에 해제가 있어도 좋습니다. 서문이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 이 책의 해제를 앞에 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물론 알라딘의 명사 중의 명사께서 쓴 해제라서 함부로 얘기하면 줘 터진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완벽한 스포에다가..... 에잇, 저도 깡다구가 없어서 더 이상 뭐라 못하겠습니다.
다만 여러 광고문구에 속아서 이 책을 페미니즘 우짜고 저짜고 하는 거에 현혹되신 분들이 많은 거 같아 그런 독자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 대산세계문학총서 163
한스 폰 그리멜스하우젠 지음, 김홍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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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빽빽한 활자로 본문만 765 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다. 열심히 읽어서 사흘 반 걸렸다. 17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독일의 30년 전쟁을 무대로 했다. 30년 전쟁은, 아이고, 정말 복잡하기 이를 바가 없는 신교와 구교도 간의 정치싸움으로 역사책을 읽어봐도 도무지 어떤 이들이 신교를, 어떤 이들이 가톨릭을 옹호했는지 막 헷갈리는 복잡한 양상을 띈다. 이건 당시 보헤미아와 독일이 수다한 영방領邦들로 구성된 봉건사회라서 각 영주에 따라 지지하는 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나 기웃거리는 이웃집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까지 종교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막 들쑤셨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느라고 당시 그곳 농민과 평민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 지는 안 보고도 눈에 훤할 지경이다.
  애초엔 신성로마제국이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잡아 죽이려고 시작했다가 나중엔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등이 독일 땅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려 들어와 전 독일 백성들에게 총체적인 약탈을 감행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하긴 역사상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억지로 전쟁의 의의를 찾자고 하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내에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가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는 정도. 당시 엉망이 된 독일을 구경할 수 있는 작품으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쓴 <보헤미아의 숲>을 꼽을 수 있겠다. 또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대본을 쓴(혹은 대본작업에 참여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평화의 날>. 요새 함락 직전에 수하 병사를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은 사령관이, 요새 안에 살고 있는 주민과 병사들 가운데 나가고 싶은 사람은 요새에서 나가 생명을 보전하라고 주문하며, 용감한 아내와 함께 마지막 옥쇄를 각오하는 순간 베스트팔렌 조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와 공격군의 사령관과 포옹하면서 종전의 평화를 만끽하는 장면이 피날레다. 내용은 좋지만 음악은 지겨워 듣기 곤혹스럽다.

 

  작가 야코프 크리스토펠 폰 그리멜스하우젠은 1622년인지 23년인지 하여튼 이 근방에 헤센 지방의 제국 직할시 겔른하우젠에서 이미 기둥뿌리 뽑힌 귀족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말만 귀족이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리멜스하우젠은 겨우 열두 살이던 1635년에 황제군에 붙잡혀 시동 노릇을 하면서 전선을 전전하는 신세로 떨어진다. 그래 비트슈토크 전투와 브라이자흐 포위전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너무 어려 총을 잡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단다. 그런데, 황제군에 붙잡힌 1635년은 30년 전쟁이 이미 4기로 넘어가 이젠 종교전쟁이라기보다 본격적으로 누가누가 독일땅과 독일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더럽게 약탈, 노략질하는가 하는 경연의 장으로 변질해서 애초에 종교전쟁의 ‘더러운 근엄함’과 ‘유치한 성스러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튼 그리멜스하우젠은 이 때부터 1648년 조약 조인 때까지 때로는 황제군, 때로는 포로로 잡힌 스웨덴 신교군에서 이리저리 병역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열두 살의 소년이 어느새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됐고, 전쟁이 끝나고 1년 후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하사관의 딸과 결혼해, 오메, 금슬도 좋지, 열 명의 자식을 두었다. 사는 틈틈이 소설을 썼고, 쉰 살이 넘어 자기가 사는 렌헨 지방이 엉뚱하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터가 되자 폐허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다시 군에 입대해, 전쟁의 와중에 숟가락 놨다고 하는데, 총맞아 죽었는지, 낙마해 죽었는지, 급성 맹장염인지, 술에 취해 다리 위에서 아직도 뜨끈한 개똥을 밟아 미끈덩, 미끄러져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는지는 내 검색실력으로 알 도리가 없다. 하여튼 55세에 갔다. 독일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지만 아시아 변방의 독자 입장에선 이 작품 하나 정도만 기념으로 읽어보면 충분하리라.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라는 황제군의 용맹한 사령관이 있었다. 이이는 개전 초기에 적은 수의 병사를 규합하여 불꽃 같은 맹렬함으로 적군을 물리치기를 수십 번이었는데, 적군 입장에서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언제 하루 날을 잡아 막대한 대군을 보내 아예 거덜을 내리라 작정을 했다. 아무리 세상 없는 폰 푹스하임이라도 병력의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사들을 이끌고 지형상 유리한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럼에도 사령관에게 워낙 학을 뗀 적군은 아예 씨를 도려낼 각오를 하고 중대 단위로 집단을 이루어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새에 남아있던 사령관의 스코틀랜드 출신 아내 수잔나 램지 폰 푹스하임 여사는 이때 마침 산달을 맞아 오늘 낼 하고 있다가 사령관이 요새를 비운 사이에 점령당한 것을 알고 단신으로 말을 타고 슈페사르트 숲으로 숨어든다. 아무리 급해도 산달에 말을 타다니! 젊은 푹스하임 부인은 말에서 내려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울부짖기 시작했고, 운명적 공명이었는지 이를 저 멀리서 농사 짓고 사는 멜히오 씨가 듣고 부인을 집에 들여 곧바로 아들을 받는다. 부인은 멜히오 씨 부부에게 아이의 부모 이름을 알려주고,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유언을 한 다음 곧바로 절명하고 만다. 마음 좋아 나중에 복을 받는 멜히오 씨는 부인의 유언대로 아이를 성당에 데려가 앞으로 열 몇 해 동안 키워줄 아기에게 자기 이름을 붙여, 멜히오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해주고 순박하게 완전 촌놈으로, 무구한 소년으로 키운다.
  폰 푹스하임 사령관은 요새도 떨어졌지, 만삭의 아내는 혼자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가 죽었다고 하지, 도무지 인간이 왜 살고, 우라질 전쟁은 왜 하는지 삶의 회의에 젖는다. 아직도 봉건주의가 팽만한 독일 지역이라, 스페인이나 프랑스, 영국이었다면 이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대항해를 떠나는 범선이라도 탔겠건만, 전적으로 종교에 귀의하여 온몸에 사슬을 감고 사는 “은자”hermit가 되기로 하고, 진짜로 거의 완벽한 은자 생활에 접어든다. 귀족 가운데 귀족인 폰 푹스하임은 겨우 자기 몸이나마 눕힐 정도의 초막을 짓고 냉난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채 백이숙제의 예를 좇아 고사리만 뜯어먹다가 항문이 째지는 불상사를 당한 이후, 간혹 덫에 걸린 날짐승이나 토끼 같은 걸 구워 주변 동네 목사한테 얻은 소금만 뿌려 단백질 보충을 하고는 했다. 이러길 십여 년.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흘러, 멜히오 씨의 의붓아들은 정식 이름인 멜히오 슈테른펠스라고 불리지 않고 그냥 ‘아들’이라 불렸는데, 이 아들이 열두 살이 됐을 때, 일단의 황제군이 슈페사르트 숲의 멜히오 씨 댁에 쳐들어와 가축을 다 잡아먹고, 가지고 가지 못할 거 같은 가구와 비싼 유리창 같은 건 다 때려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홀랑 지른 다음에, 갑자기 눈알이라도 돌아갔는지 겨우 열 몇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누이이자 농부 멜히오의 친딸 우르겔레를 강간한다. 이 와중에 가족을 뿔뿔이 흩어져 십 수년이 지나야 다시 상봉을 할 터이지만, 우르겔레는 그 때 그랬는지, 이후에 그랬는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다. 아들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숲 속을 헤매다 거의 헐벗은 옷을 입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만 양식을 먹고 늘 기도만 올리고 있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은자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은자가 물어보기를, “이름이 뭐냐?”, 아들이 대답하는데, “아들이요.”
  “아니, 늬 아버지가 널 어떻게 부르느냐고?” “아버지가 누구예요.” “널 낳고 키워준 남자 말이다.” “아, 우린 아부지라고 불러요.” “그래, 아부지는 뭐라고 불렀냐?” “아들이요.” “하, 이거 갈수록 태산이로세. 이제부터 널 짐플리치우스라고 하겠다.”
  짐플리치우스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뜻. 이후 얼마 동안 은자와 천둥벌거숭이는 함께 기도하고, 조악한 음식을 먹고, 험한 자리에서 자면서 세상의 이치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자는 이제 자기가 죽을 날이 온 것을 알고, 천둥벌거숭이와 함께 땅을 판다. 그 속에 들어가 짐플리치우스에게 유언을 하기를,
  “더욱 더 긴 시간을 두고 자신을 깨닫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사악한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해로움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항심을 지켜라. 끝까지 버티는 자는 복을 받는 법이다.”
  그리고 정말로 편안하게 죽는다.
  이제 숲에서 나온 어린 짐플리치우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이상하게 자신의 모습을 닮아 의아해하는 황제군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령관 램지 대령에게 불려가 대령의 시동으로 임명된다. 램지 사령관은 그에게 풀 네임을 선물하니 바로, 짐플리치우스 짐플리치시무스..
  여기서 책의 각주에 램지 사령관이 짐플리치우스의 외삼촌이란 걸 밝히는 바람에 여태까지 혹시, 싶었던 독자의 김을 빼버린다. 그리하여 평소에 이런 정보를 밝히기 극히 싫어하는 나로 하여금 독후감 초장에 주인공의 족보를 열어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면 적어도 5백쪽 이상 읽어야 혹시, 하는 의심이 밝혀질 건데 말이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전형으로 읽힌다. 짐플리치우스는 평생 자신의 삶에 명문銘文이 될 은자의 유언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게 되나? 은자의 고귀한 유언은 숲을 떠나자마자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짐플리치우스는 특유의 영리한 지능과 점점 자라면서 어마무시하게 고귀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도 모자라, 기운 센 천하장사마저 비록 쉽게는 아니지만 싸워 이길 수 있는 완력을 지니게 된다. 때에 따라 황제군이었다가, 체포당해 스웨덴 군에 복무하고, 다시 또 상황이 바뀌면 저쪽 군대에 들어가며, 사냥꾼이란 별호로 전국이 이 별호 아래에 벌벌 떠는 최상의 약탈자, 노략꾼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절대로 인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하여튼 좌충우돌하는 짐플리치우스의 한 평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처음과 중간까지. 그러다가 중간을 넘어가면서 21세기 독자 입장에서는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도 자주 나와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나중엔 막 염증이 날 때쯤,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창궐해, 지구의 중심에 들어가 물의 대왕을 만나고, 지옥의 루시퍼까지 등장하면, 슬슬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니 정말로 읽어보실 분은 마음을 단디 하셔야 한다는 걸, 세 번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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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8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읽어서 3일반!;;;;

Falstaff 2022-01-28 13:1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이 책이 그렇습니다. ^^;;;

잠자냥 2022-01-28 13: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이 책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다가..... 와,,, 초반 읽는데 이거 증말 내 취향 아니구나 잘못 걸렸구나 싶어서 포기하고 반납했습니다. ㅋㅋㅋㅋㅋ 골드문트 님 리뷰 특히 마지막 문단 읽다 보니 역시 잘 반납한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물의 대왕이랑 루시퍼라니...ㅋㅋㅋㅋ

Falstaff 2022-01-28 13:1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잘 하셨습니다. 저도 후반에 가서는 거의 졸음 반, 책 반 이렇게 읽었어요.

stella.K 2022-01-28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잘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ㅋㅋ

Falstaff 2022-01-28 16:44   좋아요 3 | URL
아휴,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루시퍼 나올 때부터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지요. ㅜㅜ

coolcat329 2022-01-28 14: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안하시고 읽으셨으니 보람있으시겠어요. ㅎ
소설의 시조같은 (맞나요?ㅎㅎ) 이 책 문학청년 골드문트님과 어울리네요. 👍

Falstaff 2022-01-28 16: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저 문청 아녜요. 그저 책 읽는 거 재미있어서 계속 파고 있는 중입니다.

바람돌이 2022-01-28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진짜 30년전쟁이라기에 음 볼까하고 리뷰를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 파삭!!!! 갑자기 예전에 본 캐빈어쩌고 하던 공포영화가 생각나 막 웃었습니다. 공포영화 컨셉에 충실하게 숲속 오두막의 귀신으로 시작했다가 지구멸망까지 가던 영화였는데 제목이???? 이놈의 기억력...ㅠㅠ 하여튼 취향은 아닌걸로
.. ㅠㅠ

Falstaff 2022-01-28 16:48   좋아요 2 | URL
정말 마지막 편은, 작품의 분량을 늘이기 위해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가져다 땜빵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난데없이 심각한 종교 이야기가 나오고 해서, 아휴, 참. 그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괜찮았는데 아쉽게 된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