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 대산세계문학총서 163
한스 폰 그리멜스하우젠 지음, 김홍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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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빽빽한 활자로 본문만 765 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다. 열심히 읽어서 사흘 반 걸렸다. 17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독일의 30년 전쟁을 무대로 했다. 30년 전쟁은, 아이고, 정말 복잡하기 이를 바가 없는 신교와 구교도 간의 정치싸움으로 역사책을 읽어봐도 도무지 어떤 이들이 신교를, 어떤 이들이 가톨릭을 옹호했는지 막 헷갈리는 복잡한 양상을 띈다. 이건 당시 보헤미아와 독일이 수다한 영방領邦들로 구성된 봉건사회라서 각 영주에 따라 지지하는 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나 기웃거리는 이웃집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까지 종교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막 들쑤셨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느라고 당시 그곳 농민과 평민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 지는 안 보고도 눈에 훤할 지경이다.
  애초엔 신성로마제국이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잡아 죽이려고 시작했다가 나중엔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등이 독일 땅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려 들어와 전 독일 백성들에게 총체적인 약탈을 감행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하긴 역사상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억지로 전쟁의 의의를 찾자고 하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내에서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가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는 정도. 당시 엉망이 된 독일을 구경할 수 있는 작품으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쓴 <보헤미아의 숲>을 꼽을 수 있겠다. 또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대본을 쓴(혹은 대본작업에 참여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평화의 날>. 요새 함락 직전에 수하 병사를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은 사령관이, 요새 안에 살고 있는 주민과 병사들 가운데 나가고 싶은 사람은 요새에서 나가 생명을 보전하라고 주문하며, 용감한 아내와 함께 마지막 옥쇄를 각오하는 순간 베스트팔렌 조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와 공격군의 사령관과 포옹하면서 종전의 평화를 만끽하는 장면이 피날레다. 내용은 좋지만 음악은 지겨워 듣기 곤혹스럽다.

 

  작가 야코프 크리스토펠 폰 그리멜스하우젠은 1622년인지 23년인지 하여튼 이 근방에 헤센 지방의 제국 직할시 겔른하우젠에서 이미 기둥뿌리 뽑힌 귀족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말만 귀족이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리멜스하우젠은 겨우 열두 살이던 1635년에 황제군에 붙잡혀 시동 노릇을 하면서 전선을 전전하는 신세로 떨어진다. 그래 비트슈토크 전투와 브라이자흐 포위전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너무 어려 총을 잡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단다. 그런데, 황제군에 붙잡힌 1635년은 30년 전쟁이 이미 4기로 넘어가 이젠 종교전쟁이라기보다 본격적으로 누가누가 독일땅과 독일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더럽게 약탈, 노략질하는가 하는 경연의 장으로 변질해서 애초에 종교전쟁의 ‘더러운 근엄함’과 ‘유치한 성스러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튼 그리멜스하우젠은 이 때부터 1648년 조약 조인 때까지 때로는 황제군, 때로는 포로로 잡힌 스웨덴 신교군에서 이리저리 병역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열두 살의 소년이 어느새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됐고, 전쟁이 끝나고 1년 후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하사관의 딸과 결혼해, 오메, 금슬도 좋지, 열 명의 자식을 두었다. 사는 틈틈이 소설을 썼고, 쉰 살이 넘어 자기가 사는 렌헨 지방이 엉뚱하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터가 되자 폐허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다시 군에 입대해, 전쟁의 와중에 숟가락 놨다고 하는데, 총맞아 죽었는지, 낙마해 죽었는지, 급성 맹장염인지, 술에 취해 다리 위에서 아직도 뜨끈한 개똥을 밟아 미끈덩, 미끄러져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는지는 내 검색실력으로 알 도리가 없다. 하여튼 55세에 갔다. 독일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지만 아시아 변방의 독자 입장에선 이 작품 하나 정도만 기념으로 읽어보면 충분하리라.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라는 황제군의 용맹한 사령관이 있었다. 이이는 개전 초기에 적은 수의 병사를 규합하여 불꽃 같은 맹렬함으로 적군을 물리치기를 수십 번이었는데, 적군 입장에서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언제 하루 날을 잡아 막대한 대군을 보내 아예 거덜을 내리라 작정을 했다. 아무리 세상 없는 폰 푹스하임이라도 병력의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사들을 이끌고 지형상 유리한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럼에도 사령관에게 워낙 학을 뗀 적군은 아예 씨를 도려낼 각오를 하고 중대 단위로 집단을 이루어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새에 남아있던 사령관의 스코틀랜드 출신 아내 수잔나 램지 폰 푹스하임 여사는 이때 마침 산달을 맞아 오늘 낼 하고 있다가 사령관이 요새를 비운 사이에 점령당한 것을 알고 단신으로 말을 타고 슈페사르트 숲으로 숨어든다. 아무리 급해도 산달에 말을 타다니! 젊은 푹스하임 부인은 말에서 내려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울부짖기 시작했고, 운명적 공명이었는지 이를 저 멀리서 농사 짓고 사는 멜히오 씨가 듣고 부인을 집에 들여 곧바로 아들을 받는다. 부인은 멜히오 씨 부부에게 아이의 부모 이름을 알려주고,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유언을 한 다음 곧바로 절명하고 만다. 마음 좋아 나중에 복을 받는 멜히오 씨는 부인의 유언대로 아이를 성당에 데려가 앞으로 열 몇 해 동안 키워줄 아기에게 자기 이름을 붙여, 멜히오 슈테른펠스 폰 푹스하임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해주고 순박하게 완전 촌놈으로, 무구한 소년으로 키운다.
  폰 푹스하임 사령관은 요새도 떨어졌지, 만삭의 아내는 혼자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가 죽었다고 하지, 도무지 인간이 왜 살고, 우라질 전쟁은 왜 하는지 삶의 회의에 젖는다. 아직도 봉건주의가 팽만한 독일 지역이라, 스페인이나 프랑스, 영국이었다면 이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대항해를 떠나는 범선이라도 탔겠건만, 전적으로 종교에 귀의하여 온몸에 사슬을 감고 사는 “은자”hermit가 되기로 하고, 진짜로 거의 완벽한 은자 생활에 접어든다. 귀족 가운데 귀족인 폰 푹스하임은 겨우 자기 몸이나마 눕힐 정도의 초막을 짓고 냉난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채 백이숙제의 예를 좇아 고사리만 뜯어먹다가 항문이 째지는 불상사를 당한 이후, 간혹 덫에 걸린 날짐승이나 토끼 같은 걸 구워 주변 동네 목사한테 얻은 소금만 뿌려 단백질 보충을 하고는 했다. 이러길 십여 년.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흘러, 멜히오 씨의 의붓아들은 정식 이름인 멜히오 슈테른펠스라고 불리지 않고 그냥 ‘아들’이라 불렸는데, 이 아들이 열두 살이 됐을 때, 일단의 황제군이 슈페사르트 숲의 멜히오 씨 댁에 쳐들어와 가축을 다 잡아먹고, 가지고 가지 못할 거 같은 가구와 비싼 유리창 같은 건 다 때려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홀랑 지른 다음에, 갑자기 눈알이라도 돌아갔는지 겨우 열 몇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누이이자 농부 멜히오의 친딸 우르겔레를 강간한다. 이 와중에 가족을 뿔뿔이 흩어져 십 수년이 지나야 다시 상봉을 할 터이지만, 우르겔레는 그 때 그랬는지, 이후에 그랬는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다. 아들은 자기 이름도 모르고 숲 속을 헤매다 거의 헐벗은 옷을 입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만 양식을 먹고 늘 기도만 올리고 있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은자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은자가 물어보기를, “이름이 뭐냐?”, 아들이 대답하는데, “아들이요.”
  “아니, 늬 아버지가 널 어떻게 부르느냐고?” “아버지가 누구예요.” “널 낳고 키워준 남자 말이다.” “아, 우린 아부지라고 불러요.” “그래, 아부지는 뭐라고 불렀냐?” “아들이요.” “하, 이거 갈수록 태산이로세. 이제부터 널 짐플리치우스라고 하겠다.”
  짐플리치우스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뜻. 이후 얼마 동안 은자와 천둥벌거숭이는 함께 기도하고, 조악한 음식을 먹고, 험한 자리에서 자면서 세상의 이치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자는 이제 자기가 죽을 날이 온 것을 알고, 천둥벌거숭이와 함께 땅을 판다. 그 속에 들어가 짐플리치우스에게 유언을 하기를,
  “더욱 더 긴 시간을 두고 자신을 깨닫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사악한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해로움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항심을 지켜라. 끝까지 버티는 자는 복을 받는 법이다.”
  그리고 정말로 편안하게 죽는다.
  이제 숲에서 나온 어린 짐플리치우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이상하게 자신의 모습을 닮아 의아해하는 황제군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령관 램지 대령에게 불려가 대령의 시동으로 임명된다. 램지 사령관은 그에게 풀 네임을 선물하니 바로, 짐플리치우스 짐플리치시무스..
  여기서 책의 각주에 램지 사령관이 짐플리치우스의 외삼촌이란 걸 밝히는 바람에 여태까지 혹시, 싶었던 독자의 김을 빼버린다. 그리하여 평소에 이런 정보를 밝히기 극히 싫어하는 나로 하여금 독후감 초장에 주인공의 족보를 열어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면 적어도 5백쪽 이상 읽어야 혹시, 하는 의심이 밝혀질 건데 말이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전형으로 읽힌다. 짐플리치우스는 평생 자신의 삶에 명문銘文이 될 은자의 유언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게 되나? 은자의 고귀한 유언은 숲을 떠나자마자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짐플리치우스는 특유의 영리한 지능과 점점 자라면서 어마무시하게 고귀하고 잘 생긴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도 모자라, 기운 센 천하장사마저 비록 쉽게는 아니지만 싸워 이길 수 있는 완력을 지니게 된다. 때에 따라 황제군이었다가, 체포당해 스웨덴 군에 복무하고, 다시 또 상황이 바뀌면 저쪽 군대에 들어가며, 사냥꾼이란 별호로 전국이 이 별호 아래에 벌벌 떠는 최상의 약탈자, 노략꾼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절대로 인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하여튼 좌충우돌하는 짐플리치우스의 한 평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처음과 중간까지. 그러다가 중간을 넘어가면서 21세기 독자 입장에서는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도 자주 나와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나중엔 막 염증이 날 때쯤,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창궐해, 지구의 중심에 들어가 물의 대왕을 만나고, 지옥의 루시퍼까지 등장하면, 슬슬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니 정말로 읽어보실 분은 마음을 단디 하셔야 한다는 걸, 세 번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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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8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읽어서 3일반!;;;;

Falstaff 2022-01-28 13:1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이 책이 그렇습니다. ^^;;;

잠자냥 2022-01-28 13: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이 책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다가..... 와,,, 초반 읽는데 이거 증말 내 취향 아니구나 잘못 걸렸구나 싶어서 포기하고 반납했습니다. ㅋㅋㅋㅋㅋ 골드문트 님 리뷰 특히 마지막 문단 읽다 보니 역시 잘 반납한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물의 대왕이랑 루시퍼라니...ㅋㅋㅋㅋ

Falstaff 2022-01-28 13:1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잘 하셨습니다. 저도 후반에 가서는 거의 졸음 반, 책 반 이렇게 읽었어요.

stella.K 2022-01-28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잘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ㅋㅋ

Falstaff 2022-01-28 16:44   좋아요 3 | URL
아휴,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루시퍼 나올 때부터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지요. ㅜㅜ

coolcat329 2022-01-28 14: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안하시고 읽으셨으니 보람있으시겠어요. ㅎ
소설의 시조같은 (맞나요?ㅎㅎ) 이 책 문학청년 골드문트님과 어울리네요. 👍

Falstaff 2022-01-28 16: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저 문청 아녜요. 그저 책 읽는 거 재미있어서 계속 파고 있는 중입니다.

바람돌이 2022-01-28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진짜 30년전쟁이라기에 음 볼까하고 리뷰를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 파삭!!!! 갑자기 예전에 본 캐빈어쩌고 하던 공포영화가 생각나 막 웃었습니다. 공포영화 컨셉에 충실하게 숲속 오두막의 귀신으로 시작했다가 지구멸망까지 가던 영화였는데 제목이???? 이놈의 기억력...ㅠㅠ 하여튼 취향은 아닌걸로
.. ㅠㅠ

Falstaff 2022-01-28 16:48   좋아요 2 | URL
정말 마지막 편은, 작품의 분량을 늘이기 위해서 되도 않는 이야기를 가져다 땜빵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난데없이 심각한 종교 이야기가 나오고 해서, 아휴, 참. 그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괜찮았는데 아쉽게 된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