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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를 바라보며 ㅣ 창비시선 153
민영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평점 :
단장斷章
외로울 때는
눈을 감는다,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
목마를 때는
돌아눕는다,
눅눅한 바람벽에
허파를 대고……
하지만, 내연內燃의 피
독毒이 되어 거꾸러질 땐
뜨겠다, 죽어도 감지 못할
새파란 눈을! (전문)
20대 초중반에 암송하던 시 가운데 하나다. 그의 첫 시집 《단장》의 표제시로 간결한 시어만을 사용했다. 시집 출간이 아닌, 내가 시집을 읽은 시절에 유행하던 민중시, 마치 논문을 읽는 것처럼 대단한 서사로 울부짖던 운동시와 완전히 차별되는 서정. 그러면서 결국 드러나는 시선에 대한 각오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이어 두번째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까지 읽고 나도 생활, 삶의 유사quicksand에 빠져 오랜 세월 민영을 잊고 살았다. 술과 살림에 젖으면 가끔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으면서. 연초에 시집을 읽어볼까, 싶어 인터넷 책방을 뒤지다가 문득 이이의 이름을 기억했다. 전에 좋아했던 시인.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구입한 민영의 시집이 창비시선 153번 《유사流沙를 바라보며》와 367번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이렇게 두 권. 예전에 읽은 시집을 뒤져보다가 또 눈에 띈 시인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그의 시집 《그리운 나무》도 덩달아 샀다. 민영, 정희성. 마치 오래된 형님들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다.
《유사流沙를 바라보며》는 1996년 초판 1쇄. 당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인당 시집 구입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음에도 25년이 지나도록 초판 1쇄의 새 책을 살 수 있으니 세상에 시 읽는 사람이 참 적구나. 민영이라면 그래도 알 만한 독자는 다 아는 시인인데. 얼마나 오래 창고에 있었는지, 틀림없이 새 책이라지만 워낙 바싹 말라 제본한 것이 갈라지고 손에 먼지가 검게 묻는다. 시인 생각을 하니 내가 괜히 미안해질 정도로.
민영은 강원도 철원에서 1934년에 태어난 갑술년 개띠다. 올해 89세. 그러나 만 3세가 되는 1937년 부모를 따라 만주의 간도 화룡현에 살러 갔다가 해방이 되던 소학교 4학년 때 간도가 팔로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쟁터로 변모하자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때 세라복에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던 구장 집 외동딸 순영이는 그대로 화룡에 남아 1990년대 예순이 넘은 나이가 되도록 창가에 앉아 풍금을 치던 화사한 얼굴을 시인의 마음 속에 지우지 못하게 만든다.
시인이 난 곳은 철원 가운데서도 지금은 이북 땅인 모양이다. 그래 시인이 휴전선 남쪽의 첫 마을 철원군 월정리라는 곳에 들렀을 때, 기차도 다니지 않는 정거장을 새로 만든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월정리에서
남들은 모두 신록을 찾아서
남쪽으로 떠날 때
나 홀로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눈 덮인 산야에는
오랑캐꽃 한 송이 피지 않았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길 잃은 노루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그리운 고향은
백설白雪의 산마루 저편에 있었다.
흰 저고리에 감색 치마
애젊은 누이가 탄불을 갈아 넣고
아들을 떠나보낸 늙은 어머니는
동구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전문)
시인의 고향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건만 거기서 한 발짝도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곳. 그곳을 꽃이 만발할 상춘의 계절, 봄에 찾았다. 봄은 봄이건만 아직 철조망 사이엔 눈이 덮였고, 그 산마루 너머에 고향이 있다니, 유년의 봄은 늙은 시인에겐 여전히 유년에 머물러, 아들을 보내는 늙은 어머니는 동구 밖을 내다보고 계시는데, 만 세 살의 시인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 장면을 정확한 유년의 기억이라 말할 수 없다. 독자가 읽기에는, 오십 살이 되기까지 시인의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던 어머니, 삼천포에서 잠깐 살고, 단양에서도 산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떠나 보내던 모습을 그린 것이려니 한다. 지금은 용인의 땅 속에서 여전히 자식 걱정을 하는. 그래서 ‘월정리 – 백설 쌓인 산마루 저편의 고향 – 어머니’로 연결되는 게 아닌지.
아마도 고향에 관해서는 주로 어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을 터. 어떤 시 속에서도 아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민통선 안에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절이 있고, 이 절에서 모시는 부처가 비로자나불인 모양이다. “사변 전만 하더라도 철원 사람 모두의 원찰이었다”는데, 이 도피안사를 우리말로 하자면 “해탈에 이르는 절” 정도겠다. 철원 사람들은 이 절의 이름 ‘도피안’을, 물론 처음엔 제대로 발음했겠지만, 현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외래어인 도피안도 우리말로 발음하기 편하게 “되피”로 일컫게 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도피안사’는 간략하고 쉽게 “되피절”이 돼버린다. 똑바로 세운 엄지를 왼손으로 감싸 안은 비로자나불 역시 그냥 “부처님”으로 삼아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은 여러 세대를 거쳐 “되피절 부처님”이 되었겠다.
되피절 부처님
내 어린 시절
한다리 건너 관우리 지나
되피절 부처님 찾아가던 길은
초록빛 비단의 꿈길이었네.
바늘에 찔린 오른손가락
왼손으로 지그시 감싸 쥐시고
이승의 새빨간 노을을 보며
안스러이 웃으시던 되피절 부처님.
내 고향 철원이
모을동비毛乙冬非라 불리던 아득한 옛날
가난한 집 아이들 누더기옷을
꿰매주시다 다친 손가락.
그 손에는 흘러내린 자비의 피가
싸움에 지친 마음에 연꽃을 피워
철원 평야 매운 바람 거두어 가고
통일의 봄볕을 비쳐주소서! (전문)
염원하는 시. 시의 내용보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이 되피절 부처님으로 변하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다. 앞에 소개한 시 <월정리에서>와 비슷하지만 <되피절 부처님>은 한 시절 모을동비라는 이름이었던 철원의 실향민을 대표해서 아직 눈이 녹지 않은 휴전선이 해동되어 진정한 통일의 봄볕이 쬐기를 바라고 있다.
이외에도 이 시집에서는 멕시코와 북미 지역의 원주민의 아픔과 바람을 이야기하고도 있는데, 1996년이면, 내년 외환위기, 즉 세계통화기금에 의한 구제금융과 이에 따른 옵션의 실행을 위해 엄청난 시련을 앞두고 있었으니,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가장 흥청망청 외화를 써버리던 시기였다. 1 달러에 7백원 대의 환율이었으니 김영삼 정권은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어 누구나 다 국경 밖으로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 한 편을 팔아서 오십 평생 찬 없는 밥을 먹으며 아이 기르는 일 빨래하는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아내의 약을 사야 했던 시인도 미국이며 멕시코를 방방곡곡 여행했나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원주민의 애사를 알게 되고 이에 감화되어 많은 시편을 쓰고 이 시집에 게재했으나, 그저 내 생각엔 굳이 시집의 1/3 이상을 채울 필요가 뭐……
그보다는 시인이 예순을 꽉 채웠을 때 다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을 쓴 이 시가 훨씬 좋았다.
반가 返歌
나이 예순이 꽉 차는 날
탄탄한 대로를 나는 버리고
외진 산길을 걷기로 했다.
조숙한 천재 랭보는
열아홉 피끓는 어린 나이에
돈 안되는 시를 외면했다지만,
후진국에 태어나서
가난밖에 보답없는 시를 써온 나는
이제야 지나온 먼 길을 돌아본다.
불면으로 뒤척이던 기나긴 밤을
한 구절의 시를 찾아 헤맨 적도 있지만
꽃보다 소중한 목숨을 위해
이 아침,
동해바다의 거센 물결
모래 위에 쓴 글씨를 다시 지운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