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랜드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놀랍게도 줄리언 반스의 데뷔작이다. 이 책을 써서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서머싯 몸 상을 받고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역자 신재실은 책의 해설을 통해 말한다. 동시에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완벽한 성장소설. 주인공 잭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1963년, 1968년, 그리고 1977년을 그리고 있다.
  1963년. 화자 ‘나’이기도 한 크리스는 열여섯 살. 쌍안경을 목에 걸친 ‘나’는 노트와 필기구를 든 절친 토니와 함께 국립미술관에 가서, 그들이 좋아하는, 반다이크가 그린 말에 탄 찰스 1세의 초상화 앞에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중년 부인이 의자에 앉아 넋을 읽고 감상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30년 안에 세계 영문학을 주름잡을 청년 작가 줄리언 반스의 데뷔작은 시작한다. 줄리언 반스와 존 파울스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로 일부러 이들의 작품을 검색해 찾지는 않지만, 검색을 했다가는 한 번에 다 사서 읽어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띄면 일언이폐지하고 일단 사고 보는 이들이다. 이번에도 헌책방에 들렀다가 여태 읽어보지 못한 반스가 눈에 보이기에 주저 않고 집어 들었는데 아이쿠, 이이의 데뷔작이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나’와 토니는 구석진 곳에 놓여 있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파에 앉아, ‘나’는 망원경으로 이 부인을 묘사하면, 토니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
  “도킹? 아니면 백셧? 마흔다섯에서 쉰 정도. 구매자들이 반품한 상품. 기혼, 자녀들. 더 이상 그녀를 집안에 처박아두지 않음. 표면적 행복, 내면적 불만.”
  위의 인용이 빨간 레인코트을 입은 중년부인에 대한 셜록 홈스 식 분석의 결과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바지 앞섶이 책상모서리에 닿기만 해도 불쑥 발기가 되는 열여섯 살 최 극성 사춘기 소년이 정말 이런 묘사를 해서, 그 노트가 반스의 서랍에 남아 있어 그걸 찾아 썼을까, 아니면 책을 발표한 서른네 살(상은 발표 1년 후에 탔다.)의 반스가 도킹 아니면 백셧에 사는 중년의 부인을 떠올리며 썼을까? 나는 서른네 살의 반스에 만 원 건다. 나 역시 열여섯 살이었을 시절도 있고 서른네 살이었던 때도 있었다. 열여섯에 저렇게 쓸 수 있으면 말이 필요 없는 천재, 그러나 천재가 그리 흔한가, 어디.
  ‘나’와 토니는 전형적인 문과형 소년들. 당연히 이들과 반대쪽에 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나’와 토니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수학의 특별 수업을 두 개 씩이나 더 듣는 괴물로 보였을 터.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거쳐 은행에 대리로 근무하게 될 거라고 단정한다. 물론 1977년, 14년이 흘러 서른 살이 되어 다시 만난 이들 가운데 은행 대리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하여튼 ‘나’ 크리스 로이드와 토니는 일찌감치 미술, 음악,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과 언어에 관심이 많아 온갖 감각적인 상태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엄마가 만든 양면코트, 한 면은 빨간 색, 다른 면은 흑백의 체크무늬로 지어 어느 쪽으로도 입을 수 있게 만든 코트가 있었는데, 빨간 코트 상태일 때 주황색 나트륨 등 아래를 지나갈 때 코트는 빨간 색을 잃어버리고 회색으로 변한다는 걸 발견, 주황 더하기 빨강은 회색이란 결론을 내린 후 이를 확신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건 14년 후, 이제 어른, 이라기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변한지 않을 진실이기 때문. 14년이 흐르는 동안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 / 잊지 못 할 사랑을 하고 / 잊지 못할 이별도”해서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린 느낌도 실감했으며,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 지금 행복한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행복함이란 없을 것 같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동안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이거, 나트륨 등 아래에선 빨간 코트와 입술과 손톱이 갈색으로 보이는 거 하나 뿐이란 거다. 신을 믿지 않았던 소년들에겐 색깔은 최종적 가치이며 순수이어서 이것마저 어른들과 관리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기를 원치 않았었음에도.
  이들, ‘나’와 토니는 자신들이 젊기 때문에 절대 선으로 착각을 한다.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들과 다른, 불과 생각 하나가 다른 모든 연령대의 선배들을 비난하는 귀여운 시절을 거치지만 자신들의 이런 치기가 귀엽다고는 절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더 귀여울밖에.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파리 유학을 하는 시절이 딱 하필 1968년. 파리의 1968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요점은 ‘나’가 증권거래소가 소실되고, 파리국립극장이 점령되고, 비양쿠르가 점거되어 탱크가 밤새 독일국경에서부터 굉음을 내며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던 5월 내내 그곳에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영국 청년이 본 1968년의 파리는 학생들이 너무 멍청해서 제 갈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좌절했으며, 체육시설의 부족 때문에 폭동진압 경찰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현상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단다. 스물한 살의 ‘나’는 비트 쇼몽의 원룸에 싼 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다가 파리 체류 한 달 만에 카페에서 로렌스 더럴을 읽고 있던 애닉이란 프랑스 여성을 만나고, 즐거웠으며,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다음, 만나러 갈까 말까 잠깐 고민하고 두 번째 만나, 드디어, 세기적인 기적이여, 드디어 총각 딱지를 뗀다. 1968년 5월 25일 밤. 그러면서 ‘나’는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상한가? 남자가 자기의 동정을 잃은 날을 기억한다는 것이? 여자들은 정확하게 기억한다는데, 남자라고 기억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정말? 여자들은 자신의 동정을 없앤 날을 정확하게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기억하고 평생을 사나? 나는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거 신기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모든 여자가? 좋다, 양보해서 90퍼센트 이상의 여자들이 기억을 한다고? 우와. 여태 몰랐네.
  하여튼 파리에서 총각 딱지를 떼고, 공부를 하고, 잊지 못할 연애도 하고 실연도 당하고, 다시 이번엔 ‘잊지 못할’이 아니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나’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이제 성인이 되어 런던의 메트로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으며, 무엇보다 ‘나’가 생각하는 방법 역시 훨씬 성숙해졌지만 그만큼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그게 세월인 것을 어찌하랴. 삶인 것을. 여태 열여섯 시절과 흡사하게 생활하는 토니. 그는 적어도 ‘나’가 보기엔 여전히 불안하다. 변하지 않아서.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나’처럼 사는 것도 한 세상이요, 토니처럼 정관을 절제해버리고 평생을 자유스럽게 사는 것도 한 세상인 걸. 독자인 내가 보기에 크리스나 토니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둘 다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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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28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습니다! ㅎㅎㅎ
열린책들에서 나온 줄리언 반스 책 가운데 절판된 책이 꽤 많더라고요.

암튼 이 책 커버 벗기고 책등 한 번 보셨어요? <메트로랜드봐>라고 되어 있을 텐데 ㅋㅋㅋㅋㅋㅋ
증거 사진...
https://blog.aladin.co.kr/socker/8237959

Falstaff 2020-09-28 09:3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이 포스트 읽은 기억 납니다. 그때도 웃느라 허리가 끊어졌는데, 정작 이번엔 그걸 몰랐네요. ㅍㅎㅎㅎ
집에 가서 저도 한 번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절판 또는 품절된 반스의 책은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반스 전문가인 신재실 선생하고 계약이 삐긋거린 거 같습니다. 심지어 신재실 선생이 반스보다 나이가 더 들었거든요. 이런 책이 한 둘이 아니예요. 에휴....

Falstaff 2020-09-28 20:13   좋아요 1 | URL
와, 정말 있어요, 있어!!!
메트로랜드봐! ㅋㅋㅋㅋㅋㅋ
저절로 생각나는 초인 가운데 한 명, ㅋㅋㅋ 나만 바라봐! 공중부양의 달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