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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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읽었냐

2. 작품에 대하여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2-2 내용적인 면에서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3. 그럼에도

 

이 작품을 왜 읽게 되었는지 주변 이야기를 해보고 다음으로 작품의 내외부적인 면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이 작품을 추천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마치게 되겠다

 

 

1. 왜 읽었냐

 

2019년의 노벨 문학상은 다른 해보다 좀 더 관심을 끌지 않았나 싶다.

발표가 연기된 전년도의 수상자와 함께 동시에 두 명의 수상자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2018년 수상자로 국내에는 생소한 폴란드의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방랑자들>>을 읽어보았다.

 

좀 삐딱한 승질머리에서 나온 편견 때문인지 다른 상보다 특히나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이었으나 먼저 읽은 지인의 리뷰를 보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막상 집어든 책의 600페이지라는 두툼한 두께감에 처음에 놀랐고 차례 페이지에 빼곡하게 나열된 120개의 소제목 개수에 두 번째는 뜨악했다.

 

600/120 = 5

 

산술적으로 따져보자면 한 꼭지당 5페이지라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무슨 이야기가 될까 싶은 의구심이 읽기 전부터 들었다. 물론 기계적으로 5페이지씩 쓰여지지는 않았다. 어떤 건 중단편으로 묶어도 될만한 분량이었고 그만큼 다른 건 기껏 몇 문장도 되지 않는 한 페이지짜리도 있다. 거기에 본문에 삽입된 지도가 12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2008 니케상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2018 노벨룬학상

 

이 작품은 200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2008년 폴란드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니케상을 수상하고 2018년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까지 수상한데 이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근사한 권위까지 갖추게 되었다. 작가 프로필을 살펴보니 여러모로 상복이 많은 작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만한 작품을 써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의 수상 이력을 지우고 이야기한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상의 권위에 눌려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인정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겐지스 강가의 모래 한톨도 되지 않을 한 독자의 어설프고 설익은 이 품평이 작품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작품에 대하여

 

총평부터 해보자면

파편적인 몇몇 단편들과 아포리즘적인 어떤 문장들은 빛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모두를 잘 꿰어서 한 편의 완성된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나는 잘 볼 수 없었다.

어리석은 나는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파편화된 비만 소설이라고 하겠다.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120개의 소제목이 있고 그만큼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선 호평할 수 있고 통일성이나 일관성 면에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독자의 성향에 따라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는 부분이 아닐까 싶고 나는 부정적으로 읽혔다.

 

600페이지 가운데 300페이지가 넘어갈 즈음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싶어 뒤편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기도 했다.

<<방랑자들>> 이라는 한 권의 소설이 어떤 작품이란 게 희미하게 짐작 안가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형상화 시켜 독자들에게 들이대야 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그 일은 좀 나태했거나 나 같은 아둔한 독자가 읽어내기에는 문턱이 높은 소설이 아닐까 한다.

 

두세 꼭지로 나누어 쓴 것들을 하나로 합치고 내가 보기에 필요 없다 싶은 꼭지들을 쳐낸다면 분량적으로 2/3 또는 1/2까지 소설의 다이어트가 가능하지 않나 싶다. 소설의 뼈대만 간신히 추려낸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라면 과연 어느 정도 추려낼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참고삼아 찾아본 한 페이지짜리 꼭지는 대략 24개였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형식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엔 하나의 완성된 어떤 이미지가 생성되면서 해당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다는 큰그림으로 남으리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 역시 그랬다. 다 읽어갈 즈음엔 뭔가 있겠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읽어 나갔다. 100여 개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 고작 서너 편이 될까. 특히나 공을 많이 들인듯한 인체 해부에 관한 역사와 세부 묘사의 부분은 결과론적으로 건너 뛰고 싶을 만큼 읽고 싶지 않은 성격의 내용이었다. 불멸에 가까울만큼 사후 인체 보존 기술을 통한 영원성을 이야기 하면서 작품의 주제와 대비시켜보자는 게 작가의 의도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별로였다.

제목을 직접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주 쇼킹한 결말의 해당 꼭지는 인상적으로 읽혔다. 일정 정도의 분량이 되는 것들만 묶는게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더 쉽고 충분하게 의도가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뜬금없는 한두 페이지 짜리 메모와 비슷한 글들이 오히려 작품의 의도하는 바를 흐리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물론 한 편의 소설 안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 안들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품 요리가 됐든 잡탕이 됐든 그것대로 맛이 있는 것인데 아무리 잡탕이라도 그 비율에서 오는 맛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뷔페에 대한 호, 불호는 갈릴 수 있다. 나는 뷔페에서 뭘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오면 메인 요리가 없이 이것저것 많이 먹긴 했는데 도무지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방랑자들>>이라는 소설이 거기에 해당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사방 팔방 옛날부터 요즘까지 흩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주인공도 딱히 없는 소설을 읽고보니 도대체 뭘 읽었나 싶다 그 말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에 토를 단다는 게 웃길 수도 있고 작품 하나를 읽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도 이른 감이 있다는 것은 안다만 이런 볼멘소리를 하지 않고 좋은 게 왜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 하기엔 내 소양이 부족하다.

 

 

2-2 내용적인 면에서

 

소설을 읽기 전에 원제목의 단어를 검색해 봤다

 

Bieguni

 

이 단어가 무슨 뜻인가 구글 번역기를 돌려봤으나 번역되는 뜻은 없었다

그 뜻은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제목은 고대 러시아 정교의 한 교파인 달리는 신도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체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꾸는 것만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_609p

 

그리고 작가가 직접 밝힌 <<방랑자들>>을 쓰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카코포니(귀에 거슬리는 음향)와 불협화음, 단일화의 불가능성, 혼돈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재배치되는 일련의 과정을 충실히 그려 내고자 했다. 나는 경계의 주변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흐릿하고 모호한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나는 고유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_608p

 

이 책을 한 마디로 여행기라고 한 옮긴이의 말이나 원제목의 뜻과 번역한 제목 그리고 알듯말듯한 작가의 집필 의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대략 어떤 작품이겠구나 짐작은 가능하고 그리고 일독 한 후 그래서 이렇게 씌어졌나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돌이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는 공항과 같은 공간이든 비행기나 크루즈선 또는 지하철 등등 여행과 이동에 관한 많은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충분히 짐작이 가는데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갔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게 내 생각이고 그것이 부족하다는 게 이 리뷰의 요지랄 수 있다. 노벨상을 받았든 폴란드 최고의 상을 받았든 어쨌든 간에 말이다.

 

120개의 소제목 가운데 지금 기억나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서너 개의 이야기 정도다. 만약 누군가 내게 600페이지 전부는 못읽겠으니 몇 개만 추려달라고 하면 꼽을수도 있겠다.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그 몇 개만 읽고 그 느낌을 가진다면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책 제목과 동일한 <방랑자들><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는 같은 이야기의 연속선 상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를 몇 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놓거나 책의 앞 뒤에 따로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

 

길이와 상관없이 인상적이었던 꼭지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모스크바>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신의 구역>

<여행 안내서> <여행 심리학 짧은 강연1> <적절한 시간과 장소>

<재의 수요일 축일> <지도 지우기><순례자의 성향> <여행에 대한 이야기>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깃털처럼 가볍게 떠도는, 그런 걸 상징하고 싶은 북커버 디자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해외 표지는 어떤가 싶어 찾아보니 다소 충격적이거나 좀 뜬금없다 싶은 표지였다

아무리 인체 해부에 관한 내용이 다른 이야기에 비해 상당 부분 비중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작품의 첫인상이 될 표지에 전면 배치하는게 적절한가 하는 것과 시각적으로도 호감이 가는 디자인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한국 표지가 낫지 않나 싶었다. 지도를 표지에 사용한 표지도 나빠보이지는 않지만 제목과 맞물려 상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책을 덮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이

제목 방랑자들과 그럭저럭 아귀가 맞는다고 할 만한가?

방랑여행이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이나 뜻은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방랑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여행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목적적인가 아닌가 또는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는가 등등을 따져본다면 과연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이 적합한지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방랑과 여행을 동류항으로 묶을 수 없다고 앞에서 말한 나는 제목 방랑자들의 방랑과는 다르게 여행기라고 정의한 옮긴이의 말에도 수긍할 수 없었다. 뭔가 따로 논다는 그런 말이다.

 

 

3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아쉽다면 아쉬운 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홍어찜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홍어찜 먹방에 초대받아 먹방을 하게 된 그런 경우랄 수 있다.

 

누군가에겐 내가 꼽은 단점들이 장점으로 읽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소설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일 수 있으며 나름의 쇼킹한 반전과 같은 이야기 역시 숨어 있다. 그리고 작가가 들려주는 역사적 사실이나 의학적 지식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특히나 거의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낯선 작가의 작품은 더욱 반길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발간 예정작으로 잡혀 있는 <<낮의 집, 밤의 집>>과 같은 작품도 궁금하다.

 

독서란 것도 결국은 취향의 영역이라 보면 절대적으로 재밌거나 재미없는 건 없다.

어설픈 독자의 이러한 삼류 리뷰에 판단을 흐리지 말고 일단 훑어보기라도 한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홍어도 싫고 멍게 해삼도 안먹는 입맛을 가졌을 뿐이다.


192 몸집 -> 몸짓
303 왼쪽의태아는 -> 왼쪽의 태아는
369 에스컬레이터이나 -> 에스컬레이터나
453 좀 붙어 줘 ->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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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 고양이랑 사는 현실남의 생활밀착형 에세이
김용운 지음, 박영준 그림, 스튜디오 고민 디자인 / 덴스토리(Denstory)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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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혼에 관한 잡썰

2: <<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리뷰

 

참고로, 1비혼에 관한 잡썰은 리뷰 책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얄븐독자의 주관적 견해임을 밝히는 바이다.

 

1부 비혼에 관한 잡썰

 

일전에 비혼자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오고 간 대화 때문에 리뷰까지 써본다.

 

얄븐독자 : 지금이야 1인 가구 비혼자에 대한 복지 지원이라든가 사회적 안전망 지원 이야기하기에 다소 이른 시기라면 비혼자들 간의 사적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개씨 : 국가나 사회에서 왜 비혼자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경제적 측면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여유가 있지 않나? 자녀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급할 복지 비용도 부족한 상황에서 왜 비혼주의자들에게 복지 측면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해줘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얄븐독자 : 국가라는 조직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사람만을 국민으로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혼자들 역시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비혼자라고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오류다. 청약주택제도 같은 경우 비혼자가 감히 명함을 들이밀 수 없다. 각자의 입장 차이가 있는 만큼 어떤 논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를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개 : 그렇다면 우선순위가 밀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얄븐독자 : 글쎄. 비혼에도 자의적 비혼과 타의적 비혼이 있을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싶어도 경제적 능력이 안되기에 못하는 경우도 많다. 3포니 4포니 그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비혼자가 기혼자보다 더 열악한 생활 환경에 놓인 경우도 있다. 화려한 싱글족만이 비혼자인듯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고쳐져야 할 시각이다. 비혼인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란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선택하는 것인데 차별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막말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결혼은 했지만 출산을 하지 않는 경우는 비혼과 무슨 차이가 있나.

 

 

지금 여기에서 비혼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인구 절벽 시대에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혼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혼을 개인적 선택에 의한 자의적 비혼으로만 볼 수는 없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비혼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복지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가야 할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국가적인 차원이나 사회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비혼자들의 사적인 공동체와 같은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수명은 갈수록 길어질테고 그만큼 혼자 늙어가는 시간도 길어질 테니까.

 

 

이 책의 저자가 출연한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책도 찾아보고 살짝 빡친 대화 때문에 리뷰까지 만들고 있다. 책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2

 

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김용운

 

고양이랑 사는 현실남의 생활밀착형 에세이

남자 혼자서도 잘 삽니다

 

 

이 책은 제목과 표지 그림만 봐도 고양이와 함께 사는 비혼남의 이야기란 걸 알 수 있다.

저자는 비혼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저자 소갯말에도 앞으로도 결혼생활 무경험자로 살겠다는 목표는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직 기자의 생활밀착형 에세이다 보니 소소하고 때론 찌질해보일 수도 있는 일상 속의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나 하나의 에피소드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시작 페이지는 가히 촌철살인적일만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이 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해 본다.

 

좋은 집의 조건

 

넌 좋겠다 좋은 집에 살아서

선배 우리 집은 30년 된 아파트입니다

그래도 제일 좋은 집에 사는 거 같다

왜요?” 하니

집에 가면 아무도 없잖아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푸념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을 바라는 기혼남의 푸념과 누군가 있었으면 하는 비혼남의 아이러니한 대비가 가슴 한 구석 짜안하게 만든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40대 남자 혼자 사는 살풍경한 모습들과 유기묘 송이를 만나고 살아가는 이야기 등 그야말로 저자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혼이라면 남녀를 떠나 공감할만한 장면장면들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하든 비혼을 하든 개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그 선택이란 것도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다. 어느 한쪽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자신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프면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쉴 수 있을 때 미리 쉬어야지

_28p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비혼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참 녹록치가 않다. 그렇다고 결혼을 동경하는 건 아니다. 지금 내 옆에 처자식이 있다면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슬픔이자 기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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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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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책자 크기의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난 후 든 느낌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길지 않은 작품 속에 시종일관 유지되는 아슬아슬함이 이 소설 최고의 매력

말하지 않음으로 말해짐을 압살하는 소설

 

공쿠르상 수상작이기도 한 소설인 <<연인>>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1958년 작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대한 인상이다

 


소설 내용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소설을 읽고 난 다음이나 할 수 있을 이야기,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후려쳐 물어보자면,

 

당신이라면,

상대방이 나를 죽여줬으면 하는 사랑, 또는

상대방을 죽여버렸으면 하는 사랑 아니면

내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사랑

 

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미친 집착일 뿐이라고 비난한다면 우리의 젊은 베르테르는 어쩌라는 것인지 싶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든 알려지지는 않았겠지만 죽음으로 귀결된 사랑의 사례는 실재하는 것이고 나 자신이 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사람 있을까?

 

물론 그런 것만이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절정 뒤의 파국으로 끝맺는 게 아니라 소설의 제목인 모데라토 칸타빌레처럼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흘러가는 일상 속의 사랑 역시 사랑인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욕망의 폭발과 그 폭발에 자신을 투사해보는 주인공 안의 모습을 읽어가노라면 어떤 죽음이 되었든 죽음만이 궁극의 선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 이 소설의 의미가 아닐까 싶고 이야깃 거리로 삼아보면 팽팽하게 의견이 갈리지 않을까 짐작도 해봤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결혼한지 10년이 넘은 안 데바레드는 피아노 학원에서 아들의 피아노 레슨을 지켜보고 있다

그 사이 학원 근처 카페에서 한 남자가 여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여자를 살해한 남자가 죽은 여자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걸 보게 된다. 그 다음날 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산책길에 그 카페에 들르게 되고 카페에서 쇼뱅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그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안과 쇼뱅의 대화에 치중하지 말고 그 외의 문장들을 꼼꼼하게 살펴 가며 읽어야 작품의 맛을 좀 더 만끽할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일듯 말 듯 끊길 듯 아슬하게 이어지는 암시의 문장들과 짧은 분량에서 오는 압축미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소설 초반 카페에서 쇼뱅과 이야기를 나누는 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가 여자에게 한 행동을 보면하고 여자는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여자가 살았든 죽었든 별 상관이 없게 된 건 아닐까요? 절망 때문이 아니고서야 다른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될 수 있겠어요?”

 

 

내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여자가 살았든 죽었든 별 상관이 없게 된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마지막 문장을 가져와 본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웃어도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이나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황 속에 처해버린 인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하며 또 그 선택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초반 안의 아들은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뜻을 다그치는 피아노 선생에게 고집스럽게 답하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돌이켜보면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라는 일상의 무덤덤함을 작가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침묵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나름의 짐작을 해본다. 그것은 곧 주인공 안의 심리상태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식으로 끼워 맞추는 독서를 해보면 이 소설이 얼마나 탄탄하고 밀도가 높은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뒤라스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밝히는 것인데,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나는 비밀스레 겪어낸 개인적 체험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을까 두려워 이 경험 주변에 벽을 쌓고 거울로 둘러놓았지요. 경험이 격렬했던 만큼 더욱 엄격한 형식을 택한 것이랍니다. 이 작품 속에는 내가 숨어 있어요.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그리고 여담으로 안과 쇼뱅은 카페에서 만나 줄기차게 와인을 마셔대는데 와인 없이 읽었던 나는 읽는 내내 와인 생각이 간절했다. 이왕이면 그들처럼 와인 한 병을 까놓고 독서를 시작하는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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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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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민정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출판사 <난다>의 대표이면서 문학동네 시집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왜 출판사 대표가 다른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지 이해불가라고도 했지만 출판사 대표와 시인으로써의 김민정이라는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속 좁은 오류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껏 네 권의 시집이 나왔고 나는 그 가운데 세 권의 시집을 보았다. 특별히 애정하거나 관심을 가진 시인은 아니지만 첫 시집부터 보여주던 특유의 걸죽한 입담을 시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오래 기억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물론 sns상에서 보여지는 소식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아는 시라는 것의 두루뭉술한 이미지나 흔히 생각하는 시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단박에 박살내 버리는 게 김민정 시인의 시이니만큼 그렇게 직진 일변도의 시가 궁금한 독자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번 네 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에는 재미있는 시들이 많았다. 이 재미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수 있겠다. ‘곡두라는 부제에 번호가 매겨진 시가 44편 실려 있다.

지난 1116일부터 18일까지 신내림을 받듯 시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걸 받아 적었다는 신문 인터뷰 기사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의 행렬이 유난히 많이 읽힌 시집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나 제목의 거기여기’, ‘는 저승과 이승,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만큼 유명을 달리한 가까운 문인들에 대한 시가 많은 것도 특징이랄 수 있겠다.

그 한 예로, 고인이 된 허수경 시인을 떠올릴 수 있는 수경의 점 점 점이란 시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이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수경의 점 점 점일부

 

 

김민정의 시에는 시인의 일상이 곧잘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가 많은 편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 시인들이나 작가들이 선배, 동생, 친구들로 소설 속 인물들처럼 등장하며 시인과 혈연 관계에 놓인 인물들도 곧잘 등장한다.

이쯤에서 첫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를 소개해 본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

 

 

다음으로는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더 소개해 본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이 시는 이번 네 번째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도 언급되는데 그 부분을 소개해 본다

 

 

 

...제각각 쳐진 하나의 커튼 너머로 앞을 보고 누워 있을 남자와 뒤를 보고 누워 있는 나를 젓가락 두 짝처럼 여기자니 젖이라는 이름의 좆2탄 쓸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게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구나...

 

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곡두 44 _부분

 

앞뒤 맥락 없이 읽자면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란 걸 알지만 꽤나 오래전에 썼던 시를 다시 언급한다는 건 그만큼 시인에게도 각별한 시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좀 발칙한 시이기도 해서 많이 옮겨졌지 않을까 짐작도 해본다. 누군가는 이게 왜 시냐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는데 조금만 찾아보면 시인 이유를 나름 설명해놓은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와 작가의 글도 함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면에서 시인들의 시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시에도 나이듦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좀 잘 읽힌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번 시집의 첫 시를 소개 한다.

 

 

11일 일요일

-곡두 1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대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과연 시인의 다짐대로 쓰지 않겠다고 한 말을 안썼을까 궁금하다면 시집을 찬찬히 읽어봐야 할 것이다

 

시집을 읽기 전이든 후든 박준 시인이 쓴 발문의 일부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발문의 일부다.

 

저도 시인의 시가 어떤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계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무용합니다. 무용하지만 무용한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더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시인이 만들어낸 경계는 그간 우리가 시라고 합의한 것과 이제껏 합의되지 않은 것의 사이에 있습니다. 동시에 시인과 화자가 만들어내는 거리에 대한 각각의 경계입니다.

 

박준 시인은 시인 이장욱이 쓴 첫 시집의 해설 가운데 경계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의 지지자이지만, 나의 지지를 넘어선 곳에서조차, 이 시집은 여전히 경계에 걸려 아슬하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해설 시인 이장욱

 

당신이 이 시집을 읽어볼지 안볼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읽어본다면 앞에서 언급된 시라는 것의 합의라는 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4편의 시를 읽어가다보면 이게 뭐지 싶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시도 분명 있다. 한편으로는 아닌척 하면서 능글맞게 요즘 말로 뼈 때리는 말을 하는 시도 있다. 누군가는 하얗게 빛나는 백골과도 같은 게 시여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뼈에 붙은 부들부들한 살점을 뜯는 맛에 시를 읽는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비만에 가깝거나 골다공증에 걸려 쉽게 부러지는 뼈와 같은 시는 걸러져야 하고 그런 안목은 많은 시를 읽어보는데서 갖추어질 것이다.

 

시집이 나온걸 핑개삼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번 시집에서 딱 한 편을 골라 읽어본다면 서슴없이 다음의 시를 택하겠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라고 하는 반복이 가져다주는 리듬감과 마냥 시소 위에 앉아 있게 하는 정황들의 이끌림이 마음에 들었다

일부만 낭독해 본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곡두 35

 

 

엉덩이가 시려 보니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반팔 티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정글짐도 있고 그네도 있고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는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정말 없는 걸까 노려보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누가 불러 나왔나 내가 홀려 나왔지 혼자니까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발에 묻은 모래 털기 귀찮으니까 모래 속에 발을 더 파묻어가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어느 밤 그랬으니까 다신 그런 밤 없기를 하였는데 또

까먹고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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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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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보든 빌려 보든 베껴 보든 빼앗아 보든 훔쳐 보든!”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다면 볼만한 소설

121군데 출판사가 거절한 베스트셀러


오늘의 소설은 소설 같지 않지만 분명 소설인 소설이다.

제목의 조합부터 이게 소설인가 아니면 철학이나 종교서적인가 하겠지만

그 무엇도 아닌 여행기이기도 한데 또 여행기라기엔 좀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이 책을 정의하라면 신념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먼저 소설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주목하고 읽게 된 건 특이한 제목도 제목이지만 저자의 이력을 훑어보는데 있었다.

9살 때 아이큐 170을 기록했다거나 15살 때 대학 화학과 신입생 과정을 수료했다는 것보다 그가 생화학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지만 궁극적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해

학업을 중단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후 저자는 입대하여 한국에 근무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어떤 대단한 신념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신념이란 것을 몸으로 실천한다거나

인생에 직접 대입해 살아가기는 의외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신념이 하찮으면 하찮을수록 흔들려

그만 포기해야겠다 싶을 때 이런 책을 한번 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당신에게 용기를 북돋우거나

얄팍한 감상적인 위로를 줄 거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책의 어려웠던 탄생 과정을 소개해 본다.

초판 출간이 1974년이니까 출간된지 좀 오래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99년 출간 25주년 기념 서문이 실려 있다는 것은 반짝 팔리고 만 책이 아니라

꾸준히 사랑받았을 만큼 책에 힘이 있다는 반증이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을 위해 122곳의 출판사에 의뢰를 했으나

1곳의 출판사만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담당 편집자와 4년간의

서신 교환 작업 끝에 책으로 묶을 수 있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본론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렇게 리뷰랍시고 떠들고는 있지만

이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쩌면 자가당착에 빠진 해석을

떠들어댐으로써 행여나 잘못된 사실의 전달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800여 쪽에 다다르는 제법 두꺼운 책의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이나 모터싸이클 관리술에 대한 책인가 싶을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선 보다는 오히려 서양 고전 철학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나

플라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모터싸이클 관리술이라고는 했지만

거기에 다른 모든 것을 대입해도 무방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깨끗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간이라는 말과 같이 형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나는 이 책은 여행기라고 하면서도 신념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 한 가지는 화자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부터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여정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그 여정에서 이야기 되고있는 이 책에서는 줄곧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부제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이 책에서 quality’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비슷한 말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 아레테arete


덕이라거나 아레테 같은 말들이다.


다음은 작품 속에서 질에 대해 설명한 문장이다.


질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지속적인 자극 요인, 세계의 모든 것을, 어느 한 부분도 빠짐이 없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자극 요인이다.

p623



이 질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그것이 실현된 대상을 저자는

한국의 성벽에서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을 읽어보자.



파이드로스가 한국에서 보았던 성벽은 기술 공학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는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아니었고,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 성벽을 멋들어지게하기 위해

과외로 지출한 경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초월의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던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p516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성벽 이야길 왜 하냐고 할 것이다. 앞뒤 맥락 없이 읽다 보면

이해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이 부분을 읽고 지나가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책 후반부쯤 읽어나가다보면 그게 그 뜻인가보다 하고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소개한 부분에서 강조 표시한 단어들을 연결해보면 그나마 짐작할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초월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비유를 나름대로 해보자면

우리는 達人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면

그 일이 몸에 붙어 그 일을 할 때 지금 내가 이 일을 한다는 자각을 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실수 없이 해내는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을 달인의 경지라고 한다.

달인이 자신의 일에 몰입해 있는 그 순간을 자기 초월이라거나 주체와 객체의 합일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 환경을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육 받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라는 합리성을

거의 신봉하고 있는 수준임을 한번 생각해볼만한 말이다.



정서적으로 공허하고, 미학적으로 무의미하며, 영적으로 빈곤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합리성의 본래 모습이다.

p211


그렇다고 이 합리성을 포기하자는 게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해결책은 합리성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합리성 자체의

본질적 경계를 넓힐 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p305


나와 타자 또는 인간과 사물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장을 소개해 본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놓는 영원히 이원론적인 모터사이클 접근 방법이

우리에게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는 항상 현실 위에 덧씌워놓은

인위적 해석일 뿐이다.

p500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우침의 경지다.

p258


여기까지 살펴보면 이 책은 철학적인 부분에 치우친 게 아니냐 할 수 있다.

앞에서 이 소설은 두 이야기가 병렬로 흐른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부자지간은 뭔가 서먹한 관계임이 노출 된다.

파이드로스로 소개 되고 있는 화자 자신과의 불화와 함께 아들과의 갈등과 해소가

이 소설을 소설로써 읽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줄기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니만큼

여기에서 소개하지 못하는 많은 읽을거리들이 있다.

여행기이기도 한 만큼 여행기에서 공감갈만한 문장들도 있다.


때때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p213


무언가 미래의 목적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피상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비탈이지 산꼭대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가 만물이 성장하는 곳이다.

p365


신념에 관한 소설책이라고 나름 장담하면서 이야기해봤는데

정작 제대로 이야기했나 싶기만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분명 그것이구나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너무 파편화시켜 이야기한 것만 같다.

단순하게 지루한 철학적 문학소설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두꺼운 책이 201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4년만에 7쇄를 찍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는 당신이라면

일독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 책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일라 도덕에 대한 탐구>>를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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