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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느날은 인생이 싫은 날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는 쏘주를 마시기도 하겠고
또 어떤 누군가는 지독하게 싫은 인생에서 그만 퇴장해버리기도 한다
그 어떤 결정을 하든 인생의 주인은 각자이므로 각자의 결정이 있을 따름이다
개중에 어떤 이는 괜히 서점가를 서성이다가 시집 한 권을 들고 오기도 한다고 내게 얘기 했다
잔소리 그만 하고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시를 일단 읽어 보자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턱이 내려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잠시 머물게 된 이 바지 안에서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또 다른 세월이 기다린다니!’
우리 부모님들은 돌 밑에 묻히셨다.
부모님들의 서글픈 기지개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형제들, 나의 형제들은 온전한데,
조끼 입고 서 있는 나라는 존재.
나는 산다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삶에는 나의 사랑하는 죽음이 있어야 하고,
커피를 마시며 파리의 무성한 밤나무를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이거와 저거는 눈, 저것과 이것은 이마...’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한다.
‘그렇게 많은 날을 살아왔건만 곡조는 똑같다.’
‘그렇게 많은 해를 지내왔건만, 늘, 항상, 언제나...’
아까 조끼라고 했지. 부분, 전신,
열망이라고도 했지. ‘울지 않으려고’라는 말을 거의 할 뻔했지.
저 옆 병원에서 정말 많이 아파서 고생깨나 했지.
내 온몸을 아래에서 위까지 다 훑어본 것은
기분 나쁜 일이긴 하지만, 뭐 괜찮아.
엎드려서 사는 거라 해도 산다는 것은 어쨌든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고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2017년 가을 어느날, 더 정확히 말하자면 9월 8일 그날의 날씨는 좀 흐렸거나 다소 쌀쌀했다. 시집의 제목만 보고 냅다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구입하고 찾아간 카페에서 허기진 듯 여기저기 페이지를 훑어봤던 기억이 고스란히 sns에 남아 있다.
산다는 것이 항상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때론
자기를 향해 한 방 쏘고 싶을만큼 인생이 싫은 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가하면
엎드려 사는 거라 해도 사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고
어찌되었건 저 앞에서 세월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도 하니까
이 시를 어떤 시선으로 읽을지는 독자의 마음에 따라 달렸다
이렇게 읽어도 되고 저렇게 읽어도 된다
살기 싫을 때 읽어도 되고 살아볼만하다 싶을 때 읽어도 된다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1892년 페루 광산촌 산티아고 데 추코 출생이다
첫 시집으로 검은 전령이 있고 대표작으로는 트릴세가 있다.
파블로 네루다와 동시대 시인이기에 두 사람은 곧잘 비교 되기도 했는데
네루다는 바예호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하늘과 땅, 삶과 죽음에서 두 번이나 버림받은 내 형제’ 라고 바예호를 추모했다.
1938년 4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는데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 했는지 모른다
‘흰 돌 위의 검은 돌’ 이라는 시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파리에서 죽겠다 /.../
어쩌면 오늘 같은 가을날 목요일일 거다
라고 했는데
1938년 4월 15일 목요일 파리에서 의식불명 상태가 되며 금요일에 사망했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선집은 1998년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시집의 개정증보판이다. 그당시 외환위기의 국내 사정을 생각해 그나마 밝은 제목으로 정했다고 하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역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스페인 내전을 가장 생생하게 그린 시집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의 전편을 번역하고 수록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첫 시집 『검은 전령』에 수록된 ‘아가페’ 라는 시를 소개해 본다
아가페
그 누구도 오늘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에 그 아무것도 내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찬란한 빛의 행렬 아래에서
단 한 송이 묘지의 꽃마저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이 오후에, 모든 이들은
내게 묻지도, 청하지도 않은 채 지나갑니다.
저들이 잊은 것이 무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손에서는 남의 것처럼 이상합니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어서요.
여러분이 잊은 거, 여기 있어요!
이 인생의 오후에는 사람들이 왜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남의 것이 됩니다.
그 누구도 오늘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는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습니다
책 뒷표지에 ‘체 게바라의 유품 ‘녹색 노트’에 가장 많이 필사된 시인‘이라는 카피가 눈길을 끌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띠지 카피 또한 와닿는다.
한편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인 찰스 부코스키는 바예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우리는 대부분의 예술에 넌더리가 난다. 바예호는 예술가로써 쓰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으로 쓴다.
다음은 사후에 출간된 유고 시집 『인간의 노래』 에 수록된 시다
파리, 1936년 10월
이 모든 것에서 떠나는 유일한 존재는 나.
이 의자를 두고 떠나리. 바지도 두고,
나의 위대한 상태, 나의 일도 접어두고,
산산조각이 나서 갈라져버린 숫자도 두고.
이 모든 것에서 떠나는 유일한 존재는 나.
엘리제 궁전 앞의 거리, 달나라의
이상스러운 거리를 한바퀴 돌면서
내 주검은 떠난다, 내 요람도 떠난다.
사람들에 에워싸인 나처럼 생긴 인간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한바퀴 돌면서
그림자를 하나씩 둘씩 떠나보낸다.
나만 모든 것에서 떠난다. 나머지 모두는
알리바이 때문에 남아야 한다.
내 구두, 구두의 입, 구두에 묻은 진흙,
단추가 채워진 내 셔츠의
접힌 소매까지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가까운 지인이나 누군가의 죽음으로 우리는 ’부재‘ 라는 느낌을 알게 된다.
그 부재의 대상을 바로 자신으로 상정해보면 이 시에 한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는 읽기가 될 것 같다. 특히나 마지막 연의 두 행
단추가 채워진 내 셔츠의
접힌 소매까지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얇은 종이에 살을 베이는듯한 그런 서늘하면서도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걸치고 있는 옷가지에서 몸만 유령처럼 빠져나가고 남은 옷가지가
텅빈 벽에 걸려 있고 시인의 시선은 주인없이 접혀진 소매자락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해보자면 죽음이란 그리고 부재라는 상황을 이렇게 선명하게 쓸 수가 있나 싶다.
시 한 편이나 시집 한 권의 물질적 환산 가치가 얼마나 될까 하면
아무렇지 않게 사마시는 커피 한 잔보다 훨씬 못하다거나 그것도 양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도 맞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곱만큼의 물질적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괜한 시간 낭비 인생 낭비라 해도 시를 읽는 사람은 읽는다. 제목처럼 인생이 뭣 같은 날 그 어떤 시집이 되었든 시집 한 권을 골라 들고 아무 쪽이나 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뭣 같은 인생이 더 뭣 같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