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묻고 세계의 지성 100인이 답하다
윌 듀런트 지음, 신소희 옮김 / 유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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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출판사에서 "나온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리뷰가 된다


1. 책을 쓰게 된 계기

2. 책의 구성

3. 보내온 답장들

4. 당신과 나는 왜 살고 있나


 

1. 책을 쓰게 된 계기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나는 당장 자살할 생각입니다


책 제목이 다소 직설적이고 자극적으로 읽힐 수도 있고 뒤표지의 카피는

살짝 한 술 더 뜨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없는 말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것을 당시의 유명인들에게

편지로 물어보고 답장을 받은 내용을 간추려 엮은 것이다


책의 저자 윌 듀런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철학자, 역사가, 작가로

1968년에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는 노년에 대하여” “문명 이야기” “철학 이야기등이 출간되어 있다.


책 제목을 보고 살펴보던 중 이 책을 쓰게 된 일화가 인상적이어서 소개해 본다


1930년 가을 윌 듀런트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와 듀런트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다면 자신은 자살할 생각이라고 한다.

듀런트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이 남자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살하겠다는

사람들의 편지를 몇 통 더 받았다고 한다.

고심 끝에 듀런트는 당시의 유명인사 100명에게 삶의 의미에 관한 기본적인

답변과 그들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의미와 목적과 만족을 찾았는지도

이야기해 줄 것을 부탁했다.


듀런트의 편지 일부 내용이다

 

(......)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2. 책의 구성


이 책은 대략 210여 페이지의 3부로 되어 있는데 150여 페이지는 보내는 편지의 내용과 과학, 종교, 철학 등의 암울한 전망을 내세워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있다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당시의 상황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휘몰아친 혼란스러운 시대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100여 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수신자의 상당수는

이런 일에 연루 되고 싶지 않아 답변 할 수 없다는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책의 2부에는 28편의 답장이 실려 있다.

3부에서는 질문에 대한 저자 자신의 답변이 실려 있다.


3. 보내온 답장들


과연 누가 답장을 보냈으며 그 답장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이 책을 읽어보는 이유가 될 것이다여기에서 일일이 답장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몇몇 답장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답장을 보낸 많은 이들은 종교와 가족 그리고 각자의 직업을 삶의 이유로 꼽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답할 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조금 유별나 보이는 답장을 소개해 본다


버트런드 러셀의 답장이다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1931. 6. 20)


그리고 버나드 쇼의 답장이다


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

(1931. 6. 18)


다소 신경질적인 버나드 쇼의 짧은 답장의 말이 정답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많은 오답과 정답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인상적인 답장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의 답장이었다.

어쩌다가 종신형의 죄수가 되었는지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범죄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답장에서 보여준 그의 생각에

동감되는 부분이 있어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찌보면 온갖 문헌과 역사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주장에 한 방 먹이는듯한 주장을 하는 그가

어떻게 종신형의 죄수가 되었는지 결국 그는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했나 싶었다.

그는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 건전하다고 믿기만 한다면 삶이란, 심지어 감방 안에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삶만큼이나 흥미로우며 가치로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배우, 극작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한

윌 로저스가 주간지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일부를 소개해 본다

 

인생이란 결국 한바탕의 야단법석이다. 그러니 웃을 일을 만들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자. 아무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지금 이 세대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확실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이전 세대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구하려하지 말자. 간절히 구할수록

오히려 함정에 가까워 질 뿐이니까. 하나의 이상에 헌신하지 말자.

그건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신기루를 향해 말을 달리는 일과 같다.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호수는 이미 없을 것이다. 사후 세계에 관해

뭔가를 믿는 건 괜찮지만 그곳이 이러이러할 거라고 너무 확고하게

믿지는 말자. 그러면 그곳에서의 삶도 그리 실망스럽게 시작되진 않을

테니까. 패배할 때마다 한 발짝 앞서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자.


이외에도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나 인도의 네루와 간디 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인사들의 답장이나 잘 모르는 인사들의 답장이라해도

그들의 인생관은 어떠했나를 보며 왜 살아야 하나 같은 안해도 그만인 생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4. 당신과 나는 왜 살고 있나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난상토론을 한다해도 그 결과대로 살아갈 인간은 없다. 100억 명의 인간이 있다면 100억 개의 인생이 100억 개의 방향으로 살아갈 뿐이다. 왜 사냐는 물음 자체가 할 필요도 대답할 가치도 없을 그런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 물음에 답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의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빅뱅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이 1930년대에 씌어졌다는 시간적 거리감과 3부에 씌어진 저자의 입장이 그리 탐탁치는 않다. 좋은게 좋은거다 같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 식의 끝맺음이 철학자로서 너무 관대한건 아닌가 싶은 것이다. 1부에서의 비관적 전망을 한 그 사람 맞나 싶기도 하다 그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원초적 질문에 대한 답변들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읽어볼만한 책은 맞다.


어쨌든

어느날 우리에게도 이 책의 저자 듀란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살아야 할 이유를 물었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자꾸만 삶의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찾는 사람도 있겠고 못찾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유를 찾는다해도 그것이 끝까지 가란 법도 없다

왜 사람들은 삶에 이유가 있어야 해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삶에 이유나 의미가 없다고 무의미한 삶이라고 허무하고 무목적적인 그런 허무한 삶은 아니다

산과 바다가 그냥 그것대로 있듯이 인간 역시 자연 속에 그냥 있을 뿐이다 우주 속에 한 점 티끌도 되지 않는 것으로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다 거기에 이유나 의미 같은 건 없다

언젠가 이야기 했듯 그냥 사는 것 뿐이다 산이 좋으면 그냥 좋고 물이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붙나 그냥 좋다는데 아무 이유 없이 보기만 해도 그냥 좋은 사람과 같은 거다 이유나 의미는 거추장스런 핑계거리일 뿐이다

천지사방에 기댈 것 없이 혼자 선 인간이 삶의 이유나 삶의 의미라는 이름으로 기대야 한다면 그것이 종교든 가족이든 일이든 기댈면 되겠지만 그것 역시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댐 없이 혼자 서는 인간만이 제대로 서는 인간이라고 감히 개똥같은 썰을 풀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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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 철학이 있는 우화
최승호 지음 / 달아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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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시인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이 출간 되었다.

신간은 아니고 1997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황금털 사자>>의 개정판인 셈이다.

이 우화집에는 74편의 글과 43점의 명화들이 함께 실려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기도 하다.

이번 개정판 시인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소감이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건 나 뿐만은 아닐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말을 읽어 본다.


책머리에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책 황금털 사자(해냄, 1997)를 다시 내게 되었다. 책 제목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새로 정하고, 작품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_부분


시인의 말처럼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작품은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간

내가 읽고 느껴온 최승호 시인의 작품들과 이 우화집의 작품들의 결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시라고 해도 되고 시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게 우울과 슬픔에서 그쳤다면 우화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표면이 슬쩍 감추고 있거나 세태에 대한 단순해 보이는

조롱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읽어낼 때 이 우화집은 빛을 발할 것이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죽어야할 이유도 살아야할

이유도 없다는데 나는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은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기도 한다. 정말로 인간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떤 승려는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냥 사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냥 좋아하고 그냥 사랑하는 게 나는 맞다고 본다. 어떤 이유가

붙게 되었을 때 그 이유가 사라지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라는 문장은

너무나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녹아 사라진다는 눈사람의 죽음처럼

우리 인간 역시 각자 언젠가 죽게 마련이란 점은 눈사람과 동일하지만 어떻게

살고 죽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내가 눈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해 봤다. 눈사람처럼 춥게 살아 왔으니

따뜻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죽음을

유예 시키는 선택을 할 것인지.

그 어느 선택도 만족한 선택은 아닐 것 같다가도 그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내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때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찾지 못한다는 건 실패한 것일까?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그만큼 삶이 좁아지는 일이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우화 또는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두툼한 소설 한 권

보다 더 묵직한 느낌을 안겨준다. 시인들의 글에서 자주 느껴지는 지점이다.



이 우화집에 실려 있는 다른 작품도 소개해 본다.



고슴도치 두 마리


고슴도치 두 마리가 가시를 상대방의 몸에 찌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죽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사랑했던 모양이다.


도둑


황소를 훔친 도둑이 경찰서에 끌려와 말했다.

저는 고삐를 하나 훔쳤을 뿐입니다. 고삐를 들고 오니까 소가 따라오더군요.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경찰서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자네 손을 잡아왔을 뿐이네. 손만 오지 자네는 왜 따라왔나. 우리는 자네를 형무소에 넣지 않겠네. 자네 손만 집어넣을 걸세.”


나는 이 우화집을 읽고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나 싶어 몇몇 리뷰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이 우화집을 다소 불편하게 읽었다고 했다.

안도현 시인은 우리나라에 우화가 드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하기도 했다.


일차적으로 현실 비판을 토대로 하는 우화가 설 땅을

우리 사회가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비판을 싫어하는 위정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은연중에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허상이 우화라는 틀을 통해 들춰지고

까발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

문학사가 보유하고 있던 넉넉한 풍자와 해학의 정신은

텔레비전 속 천박한 코미디물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닐까.


_안도현



우화가 이야기하는 표면적인 이야기나 대상에만 치중하면

우화는 이게 뭔 말인가 싶고 조롱조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달을 바라보라는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경우와 같다고 할 것이다.


면도날로 가슴을 긋는 듯한 서늘한 이야기

온 가슴이 더 이상 물을 머금을 수 없는 스펀지가 된 듯한 이야기

그러다가도 피식 옆구리를 찌르는 이야기

이토록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책을 요근래에 만난적이 있었던가 싶다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직접 두 눈으로 읽어볼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으며 다음 우화들을 소개하며 마친다



열등감


황소개구리에 놀란 도롱뇽들이 바위 그늘에 모여서 깨알만 한 심장을 할딱이며 말했다.


우리 조상님은 공룡이다.”



물 위에 쓰는 우화


글을 쓰고 싶을 땐 강가로 나가 흐르는 물 위에 손가락

으로 글을 쓰던 다올 씨가 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혼자

슬퍼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으나 우화집 한 권 내지 않

았기 때문에 함께 웃은 독자도 없고 함께 눈물 흘린 독

자도 없는 영원한 무명작가였다.


다올 씨가 죽고 나서 세상에 그의 기이한 행동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소문에 헛소문이 덧보태져 나중에는 많은 사

람들이 다올 씨가 살던 마을을 찾게 되었다. 그가 손가락

으로 글을 썼던 개야강은 관광지가 되었으며 작가의 집

은 명소가 되었다. 주위에는 작은 호텔들과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기념품 가게들도 생겨났다.


관광 안내원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어찌된 일인지 앵무

새들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개야강이 바로 다올 씨의 책입니다. 물의 책, 혹은 물

의 우화집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글씨가 보이지는 않지

만 이 흐르는 물에 숱한 우화들이 녹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다올 씨가 강으로 내려오면 낚시

가 전혀 안 됐다고 합니다. 슬픈 우화를 쓸 때면 물고기

들이 슬퍼하여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우스운 우화를

쓸 때는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며 물 위로 튀어 올랐다는

군요. 물고기들만이 그의 독자인 셈이었죠. 아름답지 않

습니까. 전해 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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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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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읽었냐

2. 작품에 대하여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2-2 내용적인 면에서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3. 그럼에도

 

이 작품을 왜 읽게 되었는지 주변 이야기를 해보고 다음으로 작품의 내외부적인 면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이 작품을 추천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마치게 되겠다

 

 

1. 왜 읽었냐

 

2019년의 노벨 문학상은 다른 해보다 좀 더 관심을 끌지 않았나 싶다.

발표가 연기된 전년도의 수상자와 함께 동시에 두 명의 수상자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2018년 수상자로 국내에는 생소한 폴란드의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방랑자들>>을 읽어보았다.

 

좀 삐딱한 승질머리에서 나온 편견 때문인지 다른 상보다 특히나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이었으나 먼저 읽은 지인의 리뷰를 보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막상 집어든 책의 600페이지라는 두툼한 두께감에 처음에 놀랐고 차례 페이지에 빼곡하게 나열된 120개의 소제목 개수에 두 번째는 뜨악했다.

 

600/120 = 5

 

산술적으로 따져보자면 한 꼭지당 5페이지라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무슨 이야기가 될까 싶은 의구심이 읽기 전부터 들었다. 물론 기계적으로 5페이지씩 쓰여지지는 않았다. 어떤 건 중단편으로 묶어도 될만한 분량이었고 그만큼 다른 건 기껏 몇 문장도 되지 않는 한 페이지짜리도 있다. 거기에 본문에 삽입된 지도가 12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2008 니케상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2018 노벨룬학상

 

이 작품은 200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2008년 폴란드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니케상을 수상하고 2018년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까지 수상한데 이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근사한 권위까지 갖추게 되었다. 작가 프로필을 살펴보니 여러모로 상복이 많은 작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만한 작품을 써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의 수상 이력을 지우고 이야기한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상의 권위에 눌려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인정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겐지스 강가의 모래 한톨도 되지 않을 한 독자의 어설프고 설익은 이 품평이 작품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작품에 대하여

 

총평부터 해보자면

파편적인 몇몇 단편들과 아포리즘적인 어떤 문장들은 빛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모두를 잘 꿰어서 한 편의 완성된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나는 잘 볼 수 없었다.

어리석은 나는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파편화된 비만 소설이라고 하겠다.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120개의 소제목이 있고 그만큼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선 호평할 수 있고 통일성이나 일관성 면에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독자의 성향에 따라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는 부분이 아닐까 싶고 나는 부정적으로 읽혔다.

 

600페이지 가운데 300페이지가 넘어갈 즈음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싶어 뒤편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기도 했다.

<<방랑자들>> 이라는 한 권의 소설이 어떤 작품이란 게 희미하게 짐작 안가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형상화 시켜 독자들에게 들이대야 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그 일은 좀 나태했거나 나 같은 아둔한 독자가 읽어내기에는 문턱이 높은 소설이 아닐까 한다.

 

두세 꼭지로 나누어 쓴 것들을 하나로 합치고 내가 보기에 필요 없다 싶은 꼭지들을 쳐낸다면 분량적으로 2/3 또는 1/2까지 소설의 다이어트가 가능하지 않나 싶다. 소설의 뼈대만 간신히 추려낸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라면 과연 어느 정도 추려낼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참고삼아 찾아본 한 페이지짜리 꼭지는 대략 24개였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형식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엔 하나의 완성된 어떤 이미지가 생성되면서 해당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다는 큰그림으로 남으리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 역시 그랬다. 다 읽어갈 즈음엔 뭔가 있겠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읽어 나갔다. 100여 개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 고작 서너 편이 될까. 특히나 공을 많이 들인듯한 인체 해부에 관한 역사와 세부 묘사의 부분은 결과론적으로 건너 뛰고 싶을 만큼 읽고 싶지 않은 성격의 내용이었다. 불멸에 가까울만큼 사후 인체 보존 기술을 통한 영원성을 이야기 하면서 작품의 주제와 대비시켜보자는 게 작가의 의도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별로였다.

제목을 직접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주 쇼킹한 결말의 해당 꼭지는 인상적으로 읽혔다. 일정 정도의 분량이 되는 것들만 묶는게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더 쉽고 충분하게 의도가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뜬금없는 한두 페이지 짜리 메모와 비슷한 글들이 오히려 작품의 의도하는 바를 흐리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물론 한 편의 소설 안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 안들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품 요리가 됐든 잡탕이 됐든 그것대로 맛이 있는 것인데 아무리 잡탕이라도 그 비율에서 오는 맛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뷔페에 대한 호, 불호는 갈릴 수 있다. 나는 뷔페에서 뭘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오면 메인 요리가 없이 이것저것 많이 먹긴 했는데 도무지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방랑자들>>이라는 소설이 거기에 해당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사방 팔방 옛날부터 요즘까지 흩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주인공도 딱히 없는 소설을 읽고보니 도대체 뭘 읽었나 싶다 그 말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에 토를 단다는 게 웃길 수도 있고 작품 하나를 읽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도 이른 감이 있다는 것은 안다만 이런 볼멘소리를 하지 않고 좋은 게 왜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 하기엔 내 소양이 부족하다.

 

 

2-2 내용적인 면에서

 

소설을 읽기 전에 원제목의 단어를 검색해 봤다

 

Bieguni

 

이 단어가 무슨 뜻인가 구글 번역기를 돌려봤으나 번역되는 뜻은 없었다

그 뜻은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제목은 고대 러시아 정교의 한 교파인 달리는 신도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체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꾸는 것만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_609p

 

그리고 작가가 직접 밝힌 <<방랑자들>>을 쓰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카코포니(귀에 거슬리는 음향)와 불협화음, 단일화의 불가능성, 혼돈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재배치되는 일련의 과정을 충실히 그려 내고자 했다. 나는 경계의 주변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흐릿하고 모호한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나는 고유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_608p

 

이 책을 한 마디로 여행기라고 한 옮긴이의 말이나 원제목의 뜻과 번역한 제목 그리고 알듯말듯한 작가의 집필 의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대략 어떤 작품이겠구나 짐작은 가능하고 그리고 일독 한 후 그래서 이렇게 씌어졌나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돌이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는 공항과 같은 공간이든 비행기나 크루즈선 또는 지하철 등등 여행과 이동에 관한 많은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충분히 짐작이 가는데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갔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게 내 생각이고 그것이 부족하다는 게 이 리뷰의 요지랄 수 있다. 노벨상을 받았든 폴란드 최고의 상을 받았든 어쨌든 간에 말이다.

 

120개의 소제목 가운데 지금 기억나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서너 개의 이야기 정도다. 만약 누군가 내게 600페이지 전부는 못읽겠으니 몇 개만 추려달라고 하면 꼽을수도 있겠다.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그 몇 개만 읽고 그 느낌을 가진다면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책 제목과 동일한 <방랑자들><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는 같은 이야기의 연속선 상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를 몇 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놓거나 책의 앞 뒤에 따로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

 

길이와 상관없이 인상적이었던 꼭지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모스크바>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신의 구역>

<여행 안내서> <여행 심리학 짧은 강연1> <적절한 시간과 장소>

<재의 수요일 축일> <지도 지우기><순례자의 성향> <여행에 대한 이야기>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깃털처럼 가볍게 떠도는, 그런 걸 상징하고 싶은 북커버 디자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해외 표지는 어떤가 싶어 찾아보니 다소 충격적이거나 좀 뜬금없다 싶은 표지였다

아무리 인체 해부에 관한 내용이 다른 이야기에 비해 상당 부분 비중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작품의 첫인상이 될 표지에 전면 배치하는게 적절한가 하는 것과 시각적으로도 호감이 가는 디자인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한국 표지가 낫지 않나 싶었다. 지도를 표지에 사용한 표지도 나빠보이지는 않지만 제목과 맞물려 상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책을 덮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이

제목 방랑자들과 그럭저럭 아귀가 맞는다고 할 만한가?

방랑여행이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이나 뜻은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방랑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여행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목적적인가 아닌가 또는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는가 등등을 따져본다면 과연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이 적합한지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방랑과 여행을 동류항으로 묶을 수 없다고 앞에서 말한 나는 제목 방랑자들의 방랑과는 다르게 여행기라고 정의한 옮긴이의 말에도 수긍할 수 없었다. 뭔가 따로 논다는 그런 말이다.

 

 

3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아쉽다면 아쉬운 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홍어찜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홍어찜 먹방에 초대받아 먹방을 하게 된 그런 경우랄 수 있다.

 

누군가에겐 내가 꼽은 단점들이 장점으로 읽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소설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일 수 있으며 나름의 쇼킹한 반전과 같은 이야기 역시 숨어 있다. 그리고 작가가 들려주는 역사적 사실이나 의학적 지식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특히나 거의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낯선 작가의 작품은 더욱 반길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발간 예정작으로 잡혀 있는 <<낮의 집, 밤의 집>>과 같은 작품도 궁금하다.

 

독서란 것도 결국은 취향의 영역이라 보면 절대적으로 재밌거나 재미없는 건 없다.

어설픈 독자의 이러한 삼류 리뷰에 판단을 흐리지 말고 일단 훑어보기라도 한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홍어도 싫고 멍게 해삼도 안먹는 입맛을 가졌을 뿐이다.


192 몸집 -> 몸짓
303 왼쪽의태아는 -> 왼쪽의 태아는
369 에스컬레이터이나 -> 에스컬레이터나
453 좀 붙어 줘 ->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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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 고양이랑 사는 현실남의 생활밀착형 에세이
김용운 지음, 박영준 그림, 스튜디오 고민 디자인 / 덴스토리(Denstory)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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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혼에 관한 잡썰

2: <<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리뷰

 

참고로, 1비혼에 관한 잡썰은 리뷰 책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얄븐독자의 주관적 견해임을 밝히는 바이다.

 

1부 비혼에 관한 잡썰

 

일전에 비혼자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오고 간 대화 때문에 리뷰까지 써본다.

 

얄븐독자 : 지금이야 1인 가구 비혼자에 대한 복지 지원이라든가 사회적 안전망 지원 이야기하기에 다소 이른 시기라면 비혼자들 간의 사적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개씨 : 국가나 사회에서 왜 비혼자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경제적 측면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여유가 있지 않나? 자녀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급할 복지 비용도 부족한 상황에서 왜 비혼주의자들에게 복지 측면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해줘야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얄븐독자 : 국가라는 조직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사람만을 국민으로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혼자들 역시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비혼자라고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오류다. 청약주택제도 같은 경우 비혼자가 감히 명함을 들이밀 수 없다. 각자의 입장 차이가 있는 만큼 어떤 논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를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개 : 그렇다면 우선순위가 밀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얄븐독자 : 글쎄. 비혼에도 자의적 비혼과 타의적 비혼이 있을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싶어도 경제적 능력이 안되기에 못하는 경우도 많다. 3포니 4포니 그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비혼자가 기혼자보다 더 열악한 생활 환경에 놓인 경우도 있다. 화려한 싱글족만이 비혼자인듯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고쳐져야 할 시각이다. 비혼인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란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선택하는 것인데 차별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막말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결혼은 했지만 출산을 하지 않는 경우는 비혼과 무슨 차이가 있나.

 

 

지금 여기에서 비혼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인구 절벽 시대에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혼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혼을 개인적 선택에 의한 자의적 비혼으로만 볼 수는 없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비혼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복지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가야 할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국가적인 차원이나 사회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비혼자들의 사적인 공동체와 같은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수명은 갈수록 길어질테고 그만큼 혼자 늙어가는 시간도 길어질 테니까.

 

 

이 책의 저자가 출연한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책도 찾아보고 살짝 빡친 대화 때문에 리뷰까지 만들고 있다. 책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2

 

두 명은 아니지만 둘이 살아요

김용운

 

고양이랑 사는 현실남의 생활밀착형 에세이

남자 혼자서도 잘 삽니다

 

 

이 책은 제목과 표지 그림만 봐도 고양이와 함께 사는 비혼남의 이야기란 걸 알 수 있다.

저자는 비혼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저자 소갯말에도 앞으로도 결혼생활 무경험자로 살겠다는 목표는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직 기자의 생활밀착형 에세이다 보니 소소하고 때론 찌질해보일 수도 있는 일상 속의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나 하나의 에피소드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시작 페이지는 가히 촌철살인적일만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이 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해 본다.

 

좋은 집의 조건

 

넌 좋겠다 좋은 집에 살아서

선배 우리 집은 30년 된 아파트입니다

그래도 제일 좋은 집에 사는 거 같다

왜요?” 하니

집에 가면 아무도 없잖아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푸념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을 바라는 기혼남의 푸념과 누군가 있었으면 하는 비혼남의 아이러니한 대비가 가슴 한 구석 짜안하게 만든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40대 남자 혼자 사는 살풍경한 모습들과 유기묘 송이를 만나고 살아가는 이야기 등 그야말로 저자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혼이라면 남녀를 떠나 공감할만한 장면장면들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하든 비혼을 하든 개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그 선택이란 것도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다. 어느 한쪽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자신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프면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쉴 수 있을 때 미리 쉬어야지

_28p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비혼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참 녹록치가 않다. 그렇다고 결혼을 동경하는 건 아니다. 지금 내 옆에 처자식이 있다면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슬픔이자 기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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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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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책자 크기의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난 후 든 느낌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길지 않은 작품 속에 시종일관 유지되는 아슬아슬함이 이 소설 최고의 매력

말하지 않음으로 말해짐을 압살하는 소설

 

공쿠르상 수상작이기도 한 소설인 <<연인>>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1958년 작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대한 인상이다

 


소설 내용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소설을 읽고 난 다음이나 할 수 있을 이야기,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후려쳐 물어보자면,

 

당신이라면,

상대방이 나를 죽여줬으면 하는 사랑, 또는

상대방을 죽여버렸으면 하는 사랑 아니면

내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사랑

 

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미친 집착일 뿐이라고 비난한다면 우리의 젊은 베르테르는 어쩌라는 것인지 싶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든 알려지지는 않았겠지만 죽음으로 귀결된 사랑의 사례는 실재하는 것이고 나 자신이 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사람 있을까?

 

물론 그런 것만이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절정 뒤의 파국으로 끝맺는 게 아니라 소설의 제목인 모데라토 칸타빌레처럼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흘러가는 일상 속의 사랑 역시 사랑인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욕망의 폭발과 그 폭발에 자신을 투사해보는 주인공 안의 모습을 읽어가노라면 어떤 죽음이 되었든 죽음만이 궁극의 선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 이 소설의 의미가 아닐까 싶고 이야깃 거리로 삼아보면 팽팽하게 의견이 갈리지 않을까 짐작도 해봤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결혼한지 10년이 넘은 안 데바레드는 피아노 학원에서 아들의 피아노 레슨을 지켜보고 있다

그 사이 학원 근처 카페에서 한 남자가 여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여자를 살해한 남자가 죽은 여자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걸 보게 된다. 그 다음날 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산책길에 그 카페에 들르게 되고 카페에서 쇼뱅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그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안과 쇼뱅의 대화에 치중하지 말고 그 외의 문장들을 꼼꼼하게 살펴 가며 읽어야 작품의 맛을 좀 더 만끽할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일듯 말 듯 끊길 듯 아슬하게 이어지는 암시의 문장들과 짧은 분량에서 오는 압축미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소설 초반 카페에서 쇼뱅과 이야기를 나누는 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가 여자에게 한 행동을 보면하고 여자는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여자가 살았든 죽었든 별 상관이 없게 된 건 아닐까요? 절망 때문이 아니고서야 다른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될 수 있겠어요?”

 

 

내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여자가 살았든 죽었든 별 상관이 없게 된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마지막 문장을 가져와 본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웃어도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이나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황 속에 처해버린 인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하며 또 그 선택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초반 안의 아들은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뜻을 다그치는 피아노 선생에게 고집스럽게 답하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돌이켜보면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라는 일상의 무덤덤함을 작가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침묵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나름의 짐작을 해본다. 그것은 곧 주인공 안의 심리상태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식으로 끼워 맞추는 독서를 해보면 이 소설이 얼마나 탄탄하고 밀도가 높은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뒤라스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밝히는 것인데,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나는 비밀스레 겪어낸 개인적 체험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을까 두려워 이 경험 주변에 벽을 쌓고 거울로 둘러놓았지요. 경험이 격렬했던 만큼 더욱 엄격한 형식을 택한 것이랍니다. 이 작품 속에는 내가 숨어 있어요.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그리고 여담으로 안과 쇼뱅은 카페에서 만나 줄기차게 와인을 마셔대는데 와인 없이 읽었던 나는 읽는 내내 와인 생각이 간절했다. 이왕이면 그들처럼 와인 한 병을 까놓고 독서를 시작하는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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