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 일기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3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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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서른세 살이 되던 1915년 1월 1일부터 규칙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 자살하기 나흘 전인 1941년 3월 28일까지 장장 27년간이나 꼼꼼하게 일기를 적고 있다.

_해설


제임스 조이스의 부고를 듣고 쓴 1941년 1월 15일의 일기에서는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쪽마다 음란스러웠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어떤 사람이 일기를 쓸까


가끔 몇 년 전의 오늘 나는 뭐라고 적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면 한번씩 찾아볼 때가 있다 일기든 메모든 그런걸 써버릇 하는 대개의 사람들은 느낄것이다 과거 일기가 내가 쓴게 맞나 싶은 낯선 느낌을


그리하여 꽤나 오래전 오늘 일기를 찾아보니 나이보다 몇 개 더 많은 팔굽혀펴기나 웟몸일으키기... 뭐 그런 내가 할법도 쓸법도 아닌 걸 써놓았다

전혀 이해불가다


제임스 설터 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로 쓴 것들은 우리와 함께 늙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늙은 내가 덜 늙었던 나의 생각을 읽는 낯섦은 당연한 것인가 지금 이것도 결국 그런 하나의 일기로 남겠지


언젠가 사뒀던 울프 일기를 꺼내 나이 별 페이지에 표시를 해보았다 딱 오늘 날짜의 일기가 있다면 어떤 일기를 남겼나 궁금했다


42세인 1924년의 일기 가운데 12월 13일을 찾을 수 있었는데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전속력으로 "댈러웨이 부인" 전부를 처음부터 다시 타자하고 있다. 이것은 "출항" 때도 비슷했는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지금 쓰고 쓰고 또 쓸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이다.


이것만보면 쓰고 있는한 울프는 절대 자살을 하지 않았을것 같기만한데 인생이란게 한 인간의 내면이란게 그리 단순한것만은 아니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는 논쟁적이다 일기에 드러난 면모를 우리는 어디까지 작품으로 보고 어디부터 인간의 내면 모습이라고 인정할수 있을까


때론 작품보다 작가의 일기가 더욱 흥미로울 때가 있다 작품보다 한 인간으로써의 작가가 더욱 감동적일때 말이다 삶이 곧 작품인 인간을 만나보고자 하는 갈망을 작품 속 주인공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마음에 기껏 허구뿐인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42세 울프의 12월 겨울 어느 하루는 행복했음을 확인한 오늘의 일기를 찾아볼지 어떨지 모를 언젠가의 나도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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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1
에밀리 디킨슨 지음, 강은교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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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

허무에 대해-

세계를 새롭게 하는

힘인 허무



언젠가 헌책방에서 책꽂이를 구경하다가 빛바래보였지만 헌책 치고는 괜찮아 보여 빼보았을 때 처음 접했던 시였고 그렇게 알게 된 시인이었다

세계를 새롭게 하는 힘인 허무’’라는 표현이 좋았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어본다면 허무, 죽음, 고독의 이미지를 많이 느낄 것이다

 

많은 예술가 가운데 당대에 주목받지 못하고 사후에 유명해진 경우는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경우도 그렇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도시 애머 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24살 무렵에는 가족들에게 나에게 무슨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절대로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만큼 외출을 삼가하고 외부인을 만나지 않으며 집에서 약 1,8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 발표했던 시는 지역 신문에 실린 7편에 불과했고 시집은 출간하지 않았다.




국내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선집이 몇 가지 있지만 주목해볼 시선집은 파시클 출판사에서 펴낸 시선집이 아닐까 한다


출판사가 이름으로 삼은 파시클이란 말은 에밀리 디킨슨은 친한 사람들에게 편지 형태로 시를 보내곤 했는데 40여 편씩 시를 묶어 직접 필사하고 편집하여 파시클이라는 시집을 만들어 두었다고 하는데 거기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


한편 이 파시클 44권이 시인의 사망 후 발견되었고 4년이 지나 첫 시집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그후 시선집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대부분 제목이 없다

따라서 편의상 첫문장을 제목으로 붙인 것이므로 감상하는데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 밑엔 바다가 있는 것같이.

난 몰랐네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한편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영화가 2017년에 국내에 개봉된 적이 있다


조용한 열정

A Quiet Passion 2015

국내개봉 2017. 11

 

 

영화를 보지 않아 뭐라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시인에 관한 영화를 보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영화의 한 장면 가운데 출판사 측에서 구두점을 바꾼 것에 대해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는걸 볼 수 있는데 에밀리는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에밀리의 시를 보면 많은 대시 표를 볼 수 있는데 그 작은 줄표 조차 시인에겐 의미가 있는 것이니 시를 읽을 때 무심코 지나쳤다면 다시 한번 살펴 볼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구제불능인 자신에게 신이 준 유일한 선물은 시라고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거의 두문불출하며 어머니를 돌보고 그당시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었다고 하는 자신의 병을 견뎌야했던 에밀리에게 시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구원과도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시인이 생존했던 당대에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아 세상으로 나와 활동했다면 그게 행복이 되었을까 싶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좀머씨 이야기를 쓴 쥐스킨트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처럼 자발적 은둔자들도 있으니 그들을 세상으로 불러내는건 폭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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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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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 왜 이래?

두서 없는 주절거림


좀 어거지일 수 있고 어그로스러울 수도 있는 리뷰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소설 내용을 자세하게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도 아니다.


제목을 요즘 소설이라고 했는데 그 요즘이란 것이 어디서부터 인지에 대해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이 아닌 시절 그러니까 요즘 이전은 언제를 말하는거냐 할 수 있겠는데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나는 김애란, 황정은, 한유주 같은 작가들의 데뷔와 대략 그들의 두 번째 소설집이 출간되는 그 어디 즈음부터 출간되는 신인 작가들의 소설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린게 아닐까 싶다 물론 사실관계를 들춰 확인해보면 전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막연하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최근 두 번째 소설집을 낸 정영수 작가처럼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든 작가들의 소설만 읽어온 건 아니고 그 사이 발표된 다른 작가들의 소설도 많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읽지 않은 것도 아니란 점도 말해 둔다


흥미가 시들해진 예를 하나만 말해보자면 이렇다

2016년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가 출간되고 나름 많은 소설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니 나 역시 궁금해 쇼코의 미소를 읽어봤는데 나는 좀 시큰둥했다

잘 쓰여진 작품이고를 떠나 소설을 쓰는 방식이라고 해야하나 그런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요점이 헷갈린다는 것이다. 해당 소설이 특정 사건과 관련된 걸 다루려는가 하면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슬쩍 냄새만 피우거나 흔적만 남길 뿐 주요 이야기는 그것들을 곁가지로 세워두고 그 주변의 이야기만 해서 김 빠지더라 뭐 그런 것이다.

작가의 작법이 그렇다면 할 말은 없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안읽으면 그만인 문제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금희 작가의 복자에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김금희 작가의 작품에 별 관심이 없다 어떤 이유가 있어 한번 읽어보자 하게 되었고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이나 해설을 먼저 읽는 편이라 평균 이상의 길이로 쓰여진 작가의 말을 우선 읽어 보게 되었다


소설 복자에게뒤편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 일부를 옮겨와 본다


복자에게는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사건과 그 소송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개 과정은 각색 되었거나 허구이며 특히 복자라는 인물은 창작된 인물임을 밝히고 싶다. 그럼에도 그 산재 인정을 위해 무려 팔 년간 싸워온 분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가져와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짚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알고 나서야 제주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열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이 작가의 말만 믿고 너무 기대가 컸거나 아니면 그 기대 때문에 오독을 한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했다.

일단 저 옮겨온 작가의 말만 보면 복자에게란 소설은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 사건과 그 투쟁과정 그리고 그에 따르는 여성 노동자의 권리가 소설의 주를 이루는 소설이어야 할지 모른다. 물론 그 사건이 모티프라고는 했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소설 안에서 앞서 언급한 것들이 얼마나 소설화 되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전체 230여 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무식하게 무 자르듯 전후반으로 나눠볼 때 전반부는 거의 이영초롱과 복자의 이야기에 머무르고 있다. 의료원 산재 사건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밀도는 부족하다 느낀다.


제주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작가는 말했지만 소설적 공간이 제주가 아니라 다른 도서 지방에서 일어난 산재 사건이라면 소설은 어떤 모습이 될까? 꼭 제주여야 하는 필연적 요소는 무엇일까? 솔직히 제주가 가진 역사적 피해와 그 그늘에서 살아오고 제주를 지켜온 제주도민의 삶을 그렸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굳이 제주를 언급할 필요가 있었냐 그 말이다.


소설을 보는 관점에 따라 판단은 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제주를 언급하고 작가의 말대로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짚어봤다는데 점수를 줄 독자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거기에 대해 강한 부정적 입장이라는 것이고.


복자에게라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작가가 이 소설을 왜 썼을까 하는 생각만 남는다.

2017년 이탈리아 대표 문학상인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소설을 바란 건 아니다.


어떤 실패도 삶 자체의 실패가 되지 않도록,

모든 넘어짐을 보듬는 작가 김금희의 가장 청량한 위로


위 문장은 이 소설의 띠지 카피 문장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작가의 말 일부를 옮겨와 본다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쓰게 된 모티프가 무엇이 되었든 모티프는 그 발화점으로 남겨두고 일단 불 붙이는데 성공했다면 그 불을 더 키워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하는 것이다.

이영초롱의 입장에서 복자라는 어릴적 친구와 함께 지나왔던 과거를 전개하고, 그리고 현재의 복자가 처한 상황의 배경으로 의료원 산재사건이 배경처럼 깔리는데 그 사건으로써의 제주도 배경은 소설의 초점만 흐리는 게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에서 무엇무엇 누구는 허구이며 어디는 가상의 섬이다 라고 했다. 나는 이것 역시

작품에 대해 안개를 둘러친 보호막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은 취재 파일의 나열이 아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라는 걸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알고 있다. 굳이 안해도 될 말을 붙여 놓는 건 내 소설에 대한 일종의 안전 장치일 수 있는데 이 안전 장치 없이 작가는 더 뻔뻔하게 철판을 깔거나 더 확실한 위장을 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많이 아쉬운 소설이었다


소설의 모티프는 의료원 산재사고로 시작 되어 결국엔 일상적 실패가 있더라도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는 아니길 바라며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나처럼 투덜대는 독자도 있겠고 격려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판단은 각자 하는 것이니 이쯤에서 투덜투덜은 그만하기로 하자.


이런 이야기는 반대 의견을 가진 상대방과 물고 뜯고 씹고, 치고 박는 난상토론을 해야 재미가 있는데 일방적 주장만을 전달한다는 게 아쉽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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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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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의 신작 연년세세가 나왔다

문예지에 나눠 발표한 두 편과 미발표작 두 편을 모은 연작소설 형식이지만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고 경장편 소설처럼 읽어보면 될 것 같다


1. 기본적 소설 소개

2. ‘작가의 말을 통해 생각해 보는 소설 연년세세



1. 기본적 소설 소개


이 소설은 순자씨로 불리는 1946년생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과 한세진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나는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일 경우 인물들의 이름과 직업 서로간의 관계 등을 그려보곤 하는데 연년세세를 읽으며 등장 인물들을 정리해보았다.

대가족은 아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먼저 주인공이랄 수 있는 이순일(순자 씨)과 그의 남편 한중언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장녀 한영진, 차녀 한세진, 막내 아들 한만수가 있고

결혼한 한영진은 남편 김원상과의 사이에 예범, 예빈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수록작 파묘에서 이순일이 찾아가는 묘는 외조부의 무덤이다.

그리고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미국 이름 안나)과 그의 아들 노먼 카일리 그리고 카일리의 딸 제이미 정도를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가족관계는 아니지만 한세영의 여자친구 하미영 역시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관계들을 연년세세라는 제목의 소설로 써냈는데 제목에서 느껴지는 느낌의 소설일지 읽기 전부터 궁금하기도 했다.


소설 연년세세를 이루고 있는 네 편의 단편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짜임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파묘 : 이순길과 한세진이 외조부의 무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이순길의 과거 이야기와 함께 현재 이순길의 집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하고 싶은 말 : 제목의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순길의 장녀 한영진의 하고 싶은 말이다

사위와 함께 사는 친정 부모, 그리고 번듯한 직업이 없는 동생 한세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한영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장녀로써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명 : 이순일의 어렸을 적 이야기가 한층 더 깊이 있게 다뤄진다. 이순일과 이름이 같았던 어렸을 적 친구 순자의 이야기나 고모네에서 허드레일을 하게 된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사위집에서 딸과 함께 사는 현재의 이야기와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이모 윤부경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다가오는 것들 : 한세진과 이모 윤부경의 손녀 제이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한세진의 여자친구이자 동거인 하미영 까지 포함해서 생각해보면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2. ‘작가의 말을 통해 생각해 보는 소설 연년세세


비교적 얇은 분량의 소설인 연년세세를 다 읽고 한 며칠 동안 딱히 떠오르는 말이나 느낌이 없었다 일전에 나는 앞서 나온 디디의 우산을 읽고 들뜬 마음이 되어 이 작품으로 황정은 2기의 시작이 되는건 아닐까라는 말을 했었다.


그만큼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은 어떤 변화 아니면 도약 같은 그런 느낌을 준 작품이었다 연년세세의 발간 예정 소식을 듣고 다른 때보다 살짝 기대가 더 컸던 건 그 디디의 우산다음으로 나온 첫작품이기 때문이다

연년세세를 다 읽은 지금 다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와 염려가 동시에 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황작가는 잘 써낼것이라 의심의 여지는 없지만서도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_작가의 말



책 제일 뒤편에 실린 작가의 말 일부를 옮겨와 봤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1946년 생 이순일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순자. 우리 가운데 자신의 어머니가 이순길과 비슷한 세대라면 순자, 미자, 혜자처럼 이름이 ~자 로 끝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황정은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에 주목했고 그것을 소설로 썼다. 그 말은 곧 누구나 알 법한 흔한 이야기의 소설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물론 흔하고 별 것 아닌 걸 낯설게 만드는 게 소설가의 재능이 하는 일이긴 하다.

이 리뷰 영상을 보고 소설을 볼지 안볼지 모르겠지만 사실 소설 연년세세속의 이야기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과연 그 흔함을 어떻게 소설화했는지 궁금하다면 읽어봐도 좋겠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_작가의 말


황정은이 이 소설에 대해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라고 한 것은 가족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싶다.


읽기에 따라 가족이라는 관계가 읽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가족 구성원 개인의 이야기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것은 이순길의 세 자식들이 각자 선택한 상황이다.

첫째 딸 한영진은 결혼과 출산을 거쳐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하는 그런 가족 형태의 일원이 되었다.

둘째 딸 한세진은 아직 미혼이지만 동거인인 여자친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동거가 일시적인지 아닌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한세진과 하미영의 정서적 교감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들의 동거는 단순 동거 이상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 형태 역시 가족의 한 형태로써 충분히 자리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내 아들 한만수는 현재 뉴질랜드에 나가 있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영진이나 한세진도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것이 막내에게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전통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아들인 한만수가 집안의 대를 이어나가야 하겠지만 그런 사정과는 좀 멀어 보인다.

이렇듯 세남매의 경우만 보더라도 제각각의 형태로 가족을 꾸려 나갈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각 단편이 발표된 지면을 보았는데 두 번째로 실린 하고 싶은 말의 경우 발표 당시의 제목은 연년세세1: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제일 앞에 배치하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지만 최종 결정 과정에서는 파묘를 제일 앞쪽에 배치했다

이 이야길 왜 하냐하면 방금 전 이야기한 이순길의 세남매 이야기와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파묘에서 이순길은 자신이 돌봐오던 외조부의 무덤을 앞으로는 거동이 불편해진 자신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고 자식들 또한 찾아올 것 같지 않아 무덤을 파내고 화장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가정의례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이 단편 파묘를 제일 앞에 배치시킨 것은 이 작품이 단순하게 가족내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과 시스템의 와해를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담겨진 게 아닌가 한다.

그러기 위해 그 신호로써 무덤을 없애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진다는 뜻의 연년세세라는 제목은 어제 오늘까지는 어찌어찌 이어져 왔지만 내일은 장담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반영해보자면 아이러니한 제목이며 작가적 센스가 돋보이는 지점 같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읽는다면 채 100년이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전통적 가족의 해체와 내일의 가족 형태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제도적인 측면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다루는 소설은 아니라고 말해 둔다.


그리고 소설 속의 작은 장치같은 것들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해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파묘에서 이순길은 외조부의 무덤가에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등산화를 벗어두고 오게 된다. 그 등산화의 경우 파묘해 없어진 무덤의 허전함이나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이라는 쓸쓸한 마음을 두고 돌아서야 하는 이순길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읽고 나서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벗겨진 신발이 남겨지는 장면은 쉽게 쓰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편으론 과잉 해석이랄 수도 있겠는데 장녀 한영진의 직업을 이부자리 판매 사원으로 설정한 것도 예사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불이라는 사물의 쓰임새나 이미지를 떠올려 봤을 때 인물을 부각 시켜주는 설정이었다.


나는 앞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오만 가지 경험을 다 한다고 했는데 그 경험을 통해 부모 자식 간이나 형제 지간에도 끝내 하지 못하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 말도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것이다. “연년세세에서 식구들 간의 하지 못한 말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의 여운은 이 소설을 읽는 이로 하여 깊이감을 한층 더 느끼게 하는 지점이었다.


이 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하는 문장을 꼽으라면 다음의 문장이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_182p


어쩌면 이 한 문장과 만나기 위해 읽어왔나 싶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는 것이라는, 그게 나는 작가 황정은이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쯤에서 도대체 이 소설은 뭐냐고 할법한데

딱히 이거다 하고 할 말은 없다. 내가 읽은 건 이것밖에 없다.

가족소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끝으로 다시 한번 작가의 말 일부를 옮겨보며 영상을 마친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_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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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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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정은 소설의 느낌적 느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녀의 소설, 또는 소설 속의 목소리, 아니면 황정은이라는 자연인.

그 모두가 결국 하나겠지만 그것을 읽어가는 일은 묵묵하다거나 담담하다거나 뭐 그런 느낌, 기분이다.

'이건 뭐야'하고 황당한 소리와 함께 책장을 덮을 사람도 있겠지만

비틀린 것, 비틀렸다는 표현은 뭔가 적절하지 않지만, 어쨌든 잠시 곰곰이 들여다보고

그 비틀린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황정은 식이야기를 알아먹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뭐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뻔해서 하나마나한 생각들이나 투명할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게 소설이라면 굳이 소설을 쓰거나 읽을 필요는 없다.

뻔해 보이는 것도 '낯설게 하기'가 소설가들의 본업이다.





하지만 영상을 만들고 있는 2020년 현재의 어떤 소설 어떤 작가들은 일상을 복사하듯 소설을 쓰고 또 대중들은 그런 소설에 환호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야 뭐 안보면 그만이긴한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게 소설이란 것인지 대중의 기호란 것인지 그런 시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곧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 같기도 해서 씁쓸할 뿐이다.


황정은이 그려내는 낯선 풍경들이 장쾌한 그랜드 캐니언도 아니고

대기권 밖의 신비스런 장면도 아닌 입술 거스러미나 뜯고 있는

옆 사람 이야기인데 나는 그런 장면들에 탐닉하는 독자일 것이다.

물론 또래의 여러 작가들이 그렇고그런 일상에 대해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황정은 특유의 색깔이 강렬한 빨강이나 서늘한 청색은 아니고

그녀 특유의 색깔은 첫소설집으로부터 이제 착색되지 않나 조심스레 생각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지려는 이율배반적인 색도 색이듯이

C M Y K R G B 같은 대표색이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파스텔 톤을 끄집어내

대표색으로 만들어 낸 것이 황정은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의 매력을 본다면 황정은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각 단편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읽었거나 읽을 사람의 몫이기 때문에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관심이나 팬심과 같은 의무감에서 읽어야 할 이들은 찾아 읽을테니 굳이

미주왈고주왈 떠든다는 건 무의미 하다

하지만 11편의 단편 가운데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8번째 작품인 오뚝이와 지빠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본다



2. 단편 오뚝이와 지빠귀에 대한 후기


오뚝이와 지빠귀에는 한 집에 살고 있는 기조와 무도 두 사람이 등장하고 어느날 느닷없이 기조가 작아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설정을 두고 좀 황당한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설정보다 소설이 보여주는 몇몇 장면에 주목했다.


첫 번째 장면

기조는 여러 아이들과 수영을 하는 꿈을 꾸는데 그 꿈에 대해 무도에게 이야기 해준다

그 과정에서 자꾸만 되풀이 되는 꿈 속 장면에 대해 라고 묻는 걸 무도는 이해하지 못한다


두 번째 장면

작아진 기조가 한번씩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증상 때문에 실업자가 되고 평소처럼 행동하는 무도의 행동이 왜 그렇게 빠르냐는 말에

무도는 이 정도면 보통이라고 한다. 보통이라는 것에 대해 기조는 여러 예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이야기가 소개 된다.



나는 저 두 장면을 통해 라고 묻지 않는 무감각한 일상에 파묻혀 사는 것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보통이라는 잣대에 대한 것 그리고 개미 이야기 등을 아주 잘 버무린 황정은 식의 비틀기로 써낸 소설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내가 읽기엔 그렇더라 그 말이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볼 수 있다

오뚝이와 지빠귀에서 오뚝이라는 장난감은 누구나 알듯 넘어뜨려도 금새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상복귀와 반복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빠귀라는 것은 조류의 일종으로 본문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길 해보자면 나는 하고 많은 조류의 이름 가운데 왜 하필 지빠귀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하고 의심을 해본다

지금부터는 진~짜 엉뚱한 주장일 수도 있는데 지빠귀라는 말과 자빠지다라는 말은 뭔가 좀 비슷하게 들리지 않나? 그 말이다.

나만의 터무니 없는 과대해석이겠지만 자빠진다는 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닥쳐오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 대부분은 그렇게 닥쳐오고 그런 일상에 파묻혀 산다.

그것에 대해 라고 생각하는 순간 보통 의 범주라 할 수 있는 일상에는 미세한 균열이 시작 되고 그것은 곧 비상상황으로 연결 된다

다들 자빠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생활을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고들 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 ''를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쓸쓸하고 때론 비루하게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다

여하튼 자빠졌다가 거의 자동으로 다시 원상태로 일어나는 오뚝이라는 것과 지빠귀 라는 이름을 함께 배치한 작가의 감각은 예사롭지가 않다는 이야길 하고 싶었다 이렇게 읽어주기를 작가는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건 지나친 나만의 억측이겠지만 말이다



살짝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소설가 황정은의 팬이라면 경장편 백의 그림자를 읽어 봤을 것인데 백의 그림자를 먼저 읽고 이 오뚝이와 지빠귀를 읽는다면 어떤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소설 백의 그림자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소설 초반부에 은교와 무재가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그 장면과 이 오뚝이와 지빠귀시작 부분을 다시 읽었을 때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백의 그림자라는 이야기의 씨앗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이또한 나만의 망상을 해보기도 했다

참고로 이 영상을 만드는 현재 백의 그림자는 절판 상태다. 내가 알기로 아마 20~30쇄 이상 많이 팔린 작품인데 출판사와 작가는 왜 절판시켜버린 것인지 어떤 내부 사정이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신작 소식에 첫 소설집을 꺼내 들춰봤는데 다시 읽어본 작품은 내가 언제 읽었나 하는 낯섦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지점들이 있어 역시나 독서는 많이 읽기 보다 여러번 읽기가 맞는거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우중충한 시절에 신작 소설은 소소한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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