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임마누엘 칸트 / 이원봉 / 책세상 / 206쪽

(2018. 8. 16.)

오늘날 우리는 인간 복제, 안락사, 낙태, 동물의 권리, 사형 제도, 테러리즘, 동성에 등 수많은 도덕적 문제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인간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살든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피할 수 없고, 현대 사회라고 해서 그 요구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인간 외에는 그 무엇도 절대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도덕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보다, 오히려 도대체 도덕성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가 더 쉬운 것, 그토록 치열한 논쟁을 거쳐도 '도덕의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고,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도덕성은 문화에 따라, 계급에 따라. 집단에 따라, 개인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애당초 도덕성이 있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오만과 허영에서 비롯한 '망상'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덕성은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정작 지신은 죽어간 젊은 청년의 이야기에서, 아무런 대가도 비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삶에서, 극심한 장해를 딛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모진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에서,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우리는 매일매일 도덕성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P.7)

수많은 도덕 철학자들의 논쟁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매일매 일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존경심을 표하는 이 '도덕성' 이야말로 칸트가 도덕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바로 그것이다. 도덕성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을 뛰어넘는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일상적이고 평범한 '도덕 의식' 만 있으면 된다. 칸트는 만약 이 세상에 '도덕성' 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도덕성일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도덕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도덕적' 이라고 평가하고 그 가치를 존경할 때, 거기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존경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도덕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성의 근거'가 어떻게 인간을 움직여 '도덕적 행위' 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는 평범한 도덕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확실한 기초를 확인함으로써 다시는 섣부른 회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 이것이 칸트의《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Gmnd1egungzurMetapbikderSitten》가 노리고 있는 전부다.

(P.8)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칸트의 주저인《순수 이성 비판Kritikderreinen vernunft》(1781)이 출판된 지 4년 뒤 인 1785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오랜 침묵 끝에《도덕 형이 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를 통해 자신의 도덕 철학을 완결된 저서의 형태로 내놓았고, 그 뒤로 《실천 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과《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1797)이 발표됨으로써 그의 도덕 철학의 전 체계가 왼성되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칸트의 저작들에 비해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으며, 특히 제1장과 제2장은 칸트의 이론 철학에 대한 예비 지식 없이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히는 '도덕성'을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적인 사상이 빠짐 없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점 때문에《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는 칸트의 도덕 철학을 이해히는 데 그야말로 기초가 되어왔다. 모든 위대한 사상이 그렇듯, 칸트의 도덕 철학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도덕적 문제' 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칸트의 도덕 철학을 비판하거나 수용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 이것만으로도 오늘의 우리가《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를 읽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P.10)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가지 학문, 즉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분류는 주제의 본성에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더 개선할 점은 없고 다만 분류의 원칙만 덧붙이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분류를 확실하게 완성하고,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하위 분류를 올바르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의 모든 인식은 내용적이어서 어떤 한 객체에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형식적이어서 객체를 가리지 않고 지성과 이성 그 자체의 형식, 그리고 사유 일반überhaupt의 보편적 규칙에만 몰두하거나 한다. 형식적인 철학은 논리학으로 불리지만, 내용적인 철학은 특정한 대상과 그 대상이 따르는 법칙에 관련되고,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이 자연의 법칙이거나 아니면 자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 관한 학문은 자연학이고, 자유의 법칙에 관한 학문은 윤리학이다. 앞의 것을 자연론, 뒤의 것을 도덕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논리학경험적인 부분,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사유의 법칙이 경험에서 경험에서 가져온 근거에 의지하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그런 경험적인 부분이 있다면, 지성이나 이성을 위한 규준, 모든 사유에 적용되고 증명되어야 하는 규준인 논리학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연 철학이나 도덕 철학모두 경험적인 부분을 가질 수 있다. 자연 철학은 경험의 대상인 자연에게 법칙을 정해주어야 하고. 도덕 철학은 본성에 영향을 받는 한에서 인간 의지에게 법칙을 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법칙은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이 발생하는 법칙이고, 뒤의 법칙은 종종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고려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이 발생해야만 하는 법칙이다.

​ 경험이라는 근거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철학은 경험적인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고, 반면에 오직 선험적a prion 원칙 들로만 가르침을 제시히는 모든 철학은 순수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순수한 철학이 단지 형식적이기만 하다면 논리학이라고 한다. 반면에 지성Verstand의 특정한 대상들에 한정된다면 형이상학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자연 형이상학도덕 형이상학이라는 두 가지 형이상학 개념이 생겨난다. 자연학은 경험적인 부분도 갖지만, 이성적인 부분 또한 갖는다. 윤리학도 마찬가지일 텐데, 윤리학에서는 특히 경험적인 부분을 실천적 인간학이라고 하고, 이성적인 부분을 원래의 도덕Moral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5)

훗날 도덕 형이상학을 내놓기에 앞서. 나는 이 '기초 놓기'를 먼저 내놓는다 이미 출간된《순수 사변이성의 비판Kitik der spekulativen vemunfi〔순수 이성비판〕》이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 놓기' 인 것처럼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은 바로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 놓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은 순수 사변이성의 비판만큼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인간 이성을 이론적으로 순수하게 사용할 때는 매우 변증적이지만. 도덕적인 것에서는 아주 평범한 지성이라 해도 쉽게 정확하고 충분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나는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이 완성될 경우. 그것이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 공통의 원칙 안에서 하나 임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결국은 적용될 때만 구별될 뿐인, 동일한 하나의 이성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그렇게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데, 그렇게 하려면 전혀 다른 방식을 고려해야 하고 독지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수 실천이성 비판이라고 이름 짓는 대신에,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라는 이름을 쓴다.

(P.21)

(온전한 가치로서의 선의지)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성취나 목적과 상관없이〕그 자체로 볼 때, 어떤 한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나아가 모든 경향성을 합한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행복해지기 위해〕그 선한 의지가 실행하는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존경받아야 한다. 운명이 특별히 미워했기 때문이든 자연이 계모처럼 인색하게 차려주었기 때문이든,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도저히 끝까지 성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성 되지 않고 선한 의지만이(물론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닿는 한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서)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보석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빛날 것이다

(P.28)​

(선의지 원리)

의지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선하다고 불리기 위해서, 그 법칙을 표상하는 것이 거기에서 기대된 작용을 고려하지 않고도 의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법칙이란 도대체 어떤 종류일 수 있는가? 내가 어떤 법칙을 따르면서 의지에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충동을 의지에서 제거했기 때문에, 행위라는 것 전부가 보편적으로 '법칙에 맞는다'는 것만 남았는데. 이것 만이 의지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준칙이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 또한 바랄 수 있도록 오직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순히 '법칙에 맞음' 이라는 것 전부는([구체적으로〕어떤 행위들을 규정하는 어떤 법칙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의지의 원칙이 되는 바로 그것이며. 의무가 결코 공허한 망상과 변덕스러운 개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의지에게 원칙이 되어야만 하는 바로 그것이다. 평범한 인간 이성 역시 실천적인 판단을 할 때는 이 원칙에 철저히 따르며. 언제나 앞서 말한 원칙을 염두에 둔다.

(P.39)

나의 '하려고 함' 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자상하게 알려주는 통찰력이 전 혀 필요치 않다. 세상살이에 능숙하지 못하고, 살아 가면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물을 뿐이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너 또한 바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준칙을 내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너나 다른 사림에게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원칙으로서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주기'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은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주기' 에 직접적인 존경심을 가지라고 나에게 강요한다. 나는 아직도 그 존경심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는(이것을 철학자가 연구했으면 한다) 통찰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잘 알고 있다. 경향성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그런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의무란 바로 '실천적인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때문에 내가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자, 또한 모든 가치를 능가히는 가치를 지닌. 그 자체로 선한 의지가 따라야 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동인 〔경향성〕에 우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P.42)

모든 도덕 개념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가장 평범한 인간 이성이나 고도로 사변적인 인간 이성이나 이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도덕 개념은 경험적인, 그래서 단지 우연적인 인식에서 뽑아낼 수 없다. 도덕 개념은 그 근원이 이렇게 순수하기 때문에〔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인식에서 뽑아낼 수 없기 때문에〕존엄성을 갖고, 우리에게 최상의 실천적인 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경험적인 것을 덧붙임으로써 언제나 그만큼 도덕 개념의 진정한 영향력과 행위의 무한한 가치를 빼앗게 된다. 그 도덕 개념과 법칙들을 순수한 이성에서 얻어내 순수하고 잡티 없이 제시히는 것, 바로 이 실천적인 또는 순수한 이성 인식 범위 전체를, 즉 순수한 실천적인 이성의 능력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사변에만 매달리는 이론적인 의도에서도 필요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P.56)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오직 이성적인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 즉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을 갖는데 이것이 의지이다. 행위를 법칙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법칙에 따라 행위하기 위해서는〕이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의지는 바로 실천적 이성인 것이다. 이성이 의지를 불가피하게 결정한다면〔의지가 항상 이성을 따른다면〕, 그러한 존재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되며 또한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경우의〔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인〕의지는, 이성이 경향성을 떠나, 필연적으로 실천적이라고 인식하는,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인 것이다.

(P.58)

모든 명령법가언적〔조건적〕이거나 아니면 정언적〔무조건적〕으로 명령한다. 가언적 명령법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달성하려고 하는(또는 달성하고 싶다고 바랄 수 있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언적 명령법은 행위를 그 자체로서 목적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명령법일 것이다.

그 행위가 단지 다른 것에 대해 수단으로써만 선하다면 그 명령법은 가언적이다.〔반면에〕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하다고 생각되고, 띠라서 스스로 이성을 따르는 의지에 필연적인 것으로, 그 의지의 원칙으로 생각된다면 그 명령법은 정언적이다.

가언적 명령법은 그 〔명령된〕행위가, 어떠한 가능한 의도나 현실적 의도를 고려할 때 선하다는 것만을 말한다. 가능한 의도의 경우 가언적 명령법은 개연적problematisch 실천 원칙이고, 현실적 의도의 경우, 실연적assenorisch 실천 원칙이다. 정언적 명령법은 그〔명령된〕행위가 어떤 의도와도 상관없이, 즉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선언하므로 필연적apodiktisch (실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P.60)

의무를 위반할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사실은 우리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바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준칙에 반대되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기를 바란다. [의무를 위반할 때]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또 이번 한 번만) 우리의 경향성을 위해서,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그 법칙에 예외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P.76)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도덕 법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심을 발견해서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제로 도덕 법칙에 관심을 갖는데. 우리 안에 있는 그 관심의 기초가 되는 것을 '도덕적 감정' 이라 부른다. ​몇몇 사림들이 이것[도덕적 감정〕을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표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오히려 도 덕적 감정은 법칙이 의지에 주관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간주 되어야 하고, 그것의 객관적인 근거들을 주는 것은 오직 이성뿐이기 때문이다.

(P.135)

자연에 관해 이성을 사변적으로〔이론적으로〕사용하면, 세계의 어떤 최상의 원인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게 된다. 자유를 의도해서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해도 역시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에 이르지만, 다만 이성적인 존재가 이성적인 존재로서 하는 행위의 법칙만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 본질적인 원칙은, 그 필연성이 의식될 때까지 자기의 인식을 밀고나가 것이다(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성의 인식이 아니 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이성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떤 것이 지금 있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나야 하는 조건에 근거하지 않는다면〔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이성은 지금 있거나 일어나고 있는 것의 필연성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의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무엇인지 이렇게 끊임없이 물어 들어가도 이성의 만족은 언제나 멀리 미루어질 뿐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것' 을 끊임없이 찾지만, 개념으로 파악하게 하는 어떤 수단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전제와 조화를 이루는 개념을 찾아낼 수 있기만 해도 아주 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실천 법칙(그러한 것은 정언적 명령법일 수밖에 없다)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을 이성이 개념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가 도덕성의 최상 원칙을 연역한 것에 흠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인간 이성 일반이 받아야 할 비난인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어떤 조건에 의해, 즉 관심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이성을 나쁘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도덕 법칙, 즉 자유의 최상의 법칙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명령법[정언적 명령법〕이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개념을 통해서는 파악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한 수 없다는 것만은 파악한다 이것이 인간 이성의 경계선까지 원칙들을 추구하는 철학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전부이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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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Metaphysik der Sitten)(1785)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4호)

김재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33쪽

(2018. 8. 14.)

 

 

인간에 대한 규명을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던 칸트는 그의 도덕철학을 통해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은 전 비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초의 본격적인 도덕철학에 관한 저술은 1785년에 출판된 『윤리형이상학 정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의 머리말에서 칸트가 밝히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학문, 즉 넓은 의미의 철학은 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와 관련된 윤리학이 선험적 학문으로 성립하는 한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따라서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일차적인 목표는 ‘모든 도덕성의 최성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윤리학을 선험적인 학으로서 정초하려는 칸트의 노력이 이 저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이론이성이 자연법칙의 입법자였다면 이제 실천이성을 가진 우리는 동시에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자발적인 존재이다.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한 근대의 정신이 칸트의 이러한 윤리사상을 통해 정점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칸트의 도덕철학적 사유의 여정을 추적하는 첫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P.0)

​​

이론적인 초월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의욕과 행동의 심리적 조건들, 예컨대 볼프철학의 “일반 실천 철학”(allgemeine praktische Weltweisheit)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공통적인 원리에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의 통일을 서술해야만 하는 ‘실천이성비판’과 ‘윤리 형이상학’은 뒤의 과제로 남겨두고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칸트는 단지 ‘모든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das oberste Prinzip aller Moralität)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다음의 세 개의 절로 이루어진다. 첫째: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 둘째: 철학적 이성인식으로부터 윤리 형이상학으로의 이행. 셋째: 윤리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천 이성 비판으로의 이행.

(P.21)

‘의지’(Wille)는 객관적인 이성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간의 의지는 종종 객관적인 실천 법칙에 일치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실천 법칙은 이러한 인간에게 명령의 형태를 띠고 ‘지시명령’(Gebot)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도덕적인 명령은 가언적(hypothetisch)으로, 즉 어떤 특정한 목적에 유용한 행위를 지시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정언적(kategorisch)으로, 그러니까 무조건적(unbedingt)으로 지시명령한다. 가언 명령은 (기술적인) 숙련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윤리성의 법칙이다.

(P.23)

윤리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학문으로 성립하는 한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이어야만 한다. 이론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듯이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한다. 즉 인간 지성이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할 때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데, 특정한 대상을 다루는 물리학과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원리에 관한 학문이고자 할 때, 이로부터 자연 형이상학과 윤리 형이상학의 이념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목표는 ‘모든 도덕성의 최성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P.29)

선의지(ein guter Wille)(善意志)

‘선의지’라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이 세계 내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 조차도 유일하게 그 자체로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의지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무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어질 수 있기에 모든 기질상의 성질들과 행운의 자질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이들의 유용성이나 결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는 것이다. 칸트는 선의지라는 이러한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으로부터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P.29)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定言命令)

칸트는 의지에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두 가지 종류, 즉 가언적(hypothetisch)(假言的)인 것과 정언적(kategorisch)(定言的)인 것으로 구별한다. 가언적 명령이,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다른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다. 즉 가언 명령이 기술적인 숙련의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그 자체로 윤리성의 법칙이다. 법칙의 보편성과 이 법칙에 맞게 행위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포함하고 있는 정언 명령의 순전한 개념이 자신의 정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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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언명령 : 칸트철학에서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가리킨다

(P.30)

자유(Freiheit)

칸트에 따르면 자율성은 윤리성의 최상의 원리이며 모든 사이비 원리들의 원천인 타율성과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윤리성을 하나의 환상적인 이념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의욕의 순전한 형식을 자율로서 근저에 놓아야한다. 결국 선의지로부터 말미암은 윤리성이 실제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유의 개념이 전제되어진다면 윤리성의 원리는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분석적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으로 보인, 자기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러한 의지’라는 것은 선의지의 분석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없는 종합명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합명제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와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매개해줄 수 있는 제3의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칸트는 이러한 매개개념으로 적극적 의미에서 의 자유, 즉 자율을 제시한다.

(P.30)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머리말(Vorrede)에서 먼저 전통적인 학문의 분류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칸트는 순수 도덕철학으로서의 ‘윤리 형이상학’을 실천적 인간학이나 도덕적 심리학으로부터 엄격하게 구별해낸다. 이론적 초월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 형이상학’“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 형이상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순수 실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노리는 바도 바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목표‘모든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P.41)

모든 이성 인식을 ‘질료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먼저 ‘논리학’은 구체적인 객관들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을 다루는 형식적 철학이라는 점에서 후자에 속한다. 반면에 전자에 해당하는 구체적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따라야할 법칙에 관해 다루는 질료적 철학은 이들이 다루는 법칙의 종류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눠진다. 즉 다루어지는 법칙이 자연의 법칙이냐 자유의 법칙이냐에 따라 질료적 철학은 자연이론윤리이론으로 나눠진다. 물리학이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윤리학바로 자유의 법칙을 다루는 윤리이론에 해당한다.

(P.42)

논리학은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만을 다루고 그법칙을 경험으로부터 취해 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경험적인 부분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현상과 인간의 의지를 그 대상으로 하는 물리학윤리학은 각각 경험적인 부분을 가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물리학은 경험의 대상인 자연에게 법칙을 부여해야하고 윤리학은 인간의 의지가 자연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그 의지에 법칙들을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논리학을 제외한 질료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경험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자신의 이론을 전적으로 선험적 원리로부터 구성해 내는 경우에는 ‘순수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또한 순수 철학이 순전히 형식적인 것일 때는 논리학이라 칭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 지성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할 때는 ‘형이상학’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들을 다루는 물리학과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원리에 관한 학문이고자 할 때, 이로부터 형이상학의 이념, 즉 자연 형이상학윤리 형이상학의 이념이 생겨나게 된다.

칸트는 모든 산업의 분야가 분업에 의해 발전했듯이 철학의 경우에도 이것(분업)이 요구되어짐을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윤리학의 경우에도 경험적인 부분이성적인 부분이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물리학이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가지듯이 윤리학도 양자를 가지게 되는데 윤리학에서는 ‘실천적 인간학’(praktische Anthrophologie)이 전자(경험적인 부분)에 해당한다면 후자(이성적인 부분)는 ‘도덕학’(Moral)이라 부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학문은 그 본성상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잘 구별하여 경험적인 것 앞에 이성적인 것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험적인 물리학 앞에 자연 형이상학이 요청되어진다면 윤리학의 경험적 부분인 실천적 인간학 앞에는 윤리 형이상학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성적 부분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그 자신이 얼마만큼의 일을 수행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원천으로부터 선험적인 원리를 찾아내는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모든 경험적인 것을 배제해야만 한다. 이것이 윤리학에서 분업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P.44)

칸트는 윤리 형이상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두 가지를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① 우선 윤리 형이상학은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사변적인 동인에서 볼 때 필수불가결이다. ② 다른 한편으로 윤리 형이상학은 최상의 규범을 제공해줌으로써 인간의 행위가 부패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만약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의 원천은 심리적 동인이 아닌 순수 철학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순수 원리들을 경험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혼동하는 것은 철학에 속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이 분리된 학문으로 진술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이성인식과 구별된다면 도덕철학은 더더욱 그러해야만 한다. 따라서 도덕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순수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하고 이런 점에서 윤리 형이상학은 필수불가결이라고 할 수 있다.

(P.46)

칸트는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책의 제목을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라 이름 붙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정초’(Grundlegung)라는 말이 ‘기초를 놓음’을 뜻하듯이 이 저서의 목적은 결국 장차 저술할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이러한 예비적 작업은 ‘순수 실천 이성 비판’에 다름 아니다. 마치 순수 사변 이성의 비판이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이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표현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칸트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이성이 순전히 이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항상 변증적이 된다는 문제점으로인해 순수 사변 이성 비판이 반드시 필요한 반면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은 순수 사변 이성과 같이 그렇게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천 이성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의 통일이 서술되어 야만 한다. 비록 이론과 실천의 영역이라는 적용에서의 구별은 있을 지라도 오직 하나의 동일한 이성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윤리 형이상학은 사실 매우 대중적이고 평범한 지성이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기에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은 순수 실천 이성 비판과 분리시키는 것이 오히려 유용하다.

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이 책에서의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을 칸트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닌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 부르고 있다.

(P.48)

칸트는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책의 목적과 탐구 방법에 대해 밝히고 있다. 다른 모든 윤리적 연구들과는 구별되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만의 고유한 과업‘도덕성의 최상의 원리’(das oberste Prinzipder Moralität)를 탐색(Aufsuchung)하고 확립(Festsetzung)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 책에서 취한 방법은, 우선 보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는 데에 이르는 분석적인 길을 취하고, 다음으로 다시 거꾸로 이 원리의 검토 및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출발하여 그 원리가 사용되고 있는 보통의 인식에 이르는 종합적인 길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탐구방법에 의거해서 칸트는 이 책의 목차에 해당하는 세 개의 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제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제2절: 대중적 도덕철학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제3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실천 이성 비판으로의 마지막 발걸음.

(P.50)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첫 번째 절(Abschnitt)은 ‘선의지’(einguter Wille)에 대한 칸트의 유명한 정의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선의지’라는 것은 이 세계 내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 조차도 유일하게 그 자체로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의지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무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어질 수 있기에 모든 기질상의 성질들과 행운의 자질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이들의 유용성이나 결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는 것이다.

(P.52)

칸트에 따르면 선의지는 그것의 선함의 이유를 다는 것에서 부터는 찾을 수는 온전한 가치이다. 즉 선의지는 선한 의지가 생기게 되는 다른 동기에 의해서나 혹은 선의지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함을 의욕하는 것만으로 인해,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따라서 선의지는 그로 인해 생겨나는 어떠한 경향성보다, 아니 모든 경향성들 전체를 위해 이루어 낼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

(P.55)

선의지의 의미를 ‘의무’라는 개념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칸트는 먼저 ‘의무로부터’(aus Pflicht)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만약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는 어떤 경우인가라고 묻는다면 칸트는 단지‘의무로부터’ 생겨났을 경우라고 답한다. ‘의무에 맞는’(pflichtmäßig) 행위가 모두 도덕적 가치의 영역에 들어갈 수는 없다. 만약 어떤 행위가 ‘의무에 맞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이를 행하는 주체가 그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경향성’(unmittelbare Neigung)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경우는 단지 사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지 결코 도덕적인 의무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에게 있어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의무에 맞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의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듯이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단순히 ‘의무에 맞는’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칸트는 단지 ‘의무로부터’의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P.62)

마음의 경향성(Neigung)으로부터 말미암은 인간의 행위는 칸트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 이를 칸트는 동정심(Symphathie)과 의무의 관계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가장 선한 마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관대함이나, 자비, 인간애와 같은 동정심도 그것이 ‘의무로부터’(aus Pflicht) 시작된 행위가 아니라면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단호한 생각이다.

아무리 공익적인 행위라도 의무로부터가 아닌 공명심이라는 경향성으로 말미암았다면 도덕적일 수 없듯이, 동정심으로부터 말미암은 선한 행위도 의무로부터가 아니라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박애주의자가 자신의 불행과 슬픔으로 사람들에 대한 모든 동정심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타인을 위한 자신의 가능한 자선을 행할마음의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aus Pflicht) 자선을 행한다면, 그때 비로소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칸트는 말한다.

(P.64)

의무에 관한 두 번째 명제를 칸트는 이렇게 정식화한다.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하게 되는 준칙(Maxim)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행위의 대상의 현실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욕구능력의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Prinzip des Wollens)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도덕적 가치가, 기대하는 행위들의 작용결과와 관계된 의지 속에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의지의 원리’(Prinzip des Willens)에만 있을 수 있는데, 이 ‘의지의 원리’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 결과할 수 있는 목적들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이 의지로부터 모든 내용의 원칙이 제거되고,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면, 의지는 ‘의욕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의무의 두 번째 명제이다.

(P.66)

칸트는 의지에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두 가지 종류, 즉 가언적(hypothetisch)인 것과 정언적(kategorisch)인 것으로 구별한다. 가언적 명령을 칸트는,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에 반해 정언적 명령‘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으로 구별한다. 즉, 가언 명령이 기술적인 숙련의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윤리성의 법칙이다.

(P.77)

칸트는 먼저 실천 법칙으로서의 명령이 요구하는 행위가 수단으로서 선한 것이냐 아니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냐에 따라 가언적 명령정언적 명령구별한다. 실천 법칙을 표현하는 모든 명령은 칸트에 따르면 의지의 원리에 따라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공식들이다. 그러나 이 명령이 요구하는 행위가 단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서, 즉 수단으로서 선할 때, 그 명령은 가언적이다. 반면에 행위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된다면,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된다면, 그 명령은 정언적이다.

(P.78)

(첫번째 정식)

칸트에 따르면 정언 명령은 하나의 유일한 명령법으로 다가온다. 그 내용은 우리가 준칙에 따라 행위하되, 주관적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를 칸트는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정식화 시키고 있다.

(P.89)

(두번째 정식)

칸트는 의무의 보편적 명령이 말하는 바는 주관적인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의해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과 같이 행위하라는 것이다. 정언 명령의 두 번째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의무의 보편적 명령을 칸트는 따라서 이렇게 정식화 한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이러한 두 번째 정식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 ‘완전한 의무’, ‘불완전한 의무’라는 네 가지 경우에 나누어서 설명한다. 이를 통해 칸트는, ‘사람들은 우리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평가의 규준(Kanon)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P.90)

(세번째 정식)

모든 인간 행위의 주관적 원리이자 동시에 객관적 원리인, 최상의 실천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칸트는 이로부터 도출된 실천 명령을 정식화한다. 즉,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 바로 최상의 실천 원리로부터 도출된 정언 명령이다.

(P.101)

자유로부터 자율을 도출하고 이로부터 다시 도덕법칙을 도출하는 순환 논증의 형식은 제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칸트의 논증은, 자유의 이념을 도덕법칙의 성립을 위한 근거로 전제하고, 이 도덕법칙을 다시 자유로부터 추론해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을 자유롭다고 할 때에는 자신을 예지계에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만약 의무 아래에 있다고 할 때에도 이는 자신을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오성세계에도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적 존재자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로운 것을 의식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가 오성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연법칙에서부터 벗어난 의지의 자율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율과 함께 도덕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P.124)

정언명령은 선험적 종합명제를 표상한다. 정언명령은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가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의지위에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험적 종합명제로서의 실천명제의 가능성은 자연에 대한 선험적 종합명제의 가능성에 유추하여 이해될 수 있다. 즉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이 의거하는 선험적 종합명제들은, 감성세계에대한 직관들에, 그 자체로는 법칙적 형식 일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지성의 개념이 덧붙여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감성의 직관들이 지성의 개념에 일치하도록 지성이 직관들을 종합함으로써 선험적 종합명제는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감성적 욕구에 의해 촉발되는 감성세계속의 의지가 오성세계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유로운 의지가 덧붙여짐으로써 실천적 명제는 선험적 종합명제로서 가능하게 된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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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 민음사 / 448쪽

(2018. 8. 2.)

이 책을 쓰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 그 2년 동안 “요즘은 어떤 글을 쓰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매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논픽션을 쓰고 있는데요,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에 대한 거예요.” 그렇게 답하면 상대방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뭐?'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곤 했다.

“장편소설공모전들 있잖아요? 한겨레문학상이나 문학동네소설상 같은 것들요. 그거랑, 공개채용 제도 있잖습니까? 대기업 신입 사원 공채나 사법시험, 9급 공무원시험 같은 거요. 그 두 가지를 취재해서 쓰고 있어요.” 그러면 뭔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로 “아, 네”라며 넘어가는 사람이 있었고, “그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죠?” 라며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후자 앞에서 나는 머리를 한 번 더 극적여야했다.

"음, 그러니까, 그게,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는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둘 다 굉장히 한국적인 제도거든요. 대규모 동시 시험을 치러서 인재를 뽑는 제도잖아요, 옛날 과거시험처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뽑는 곳은 한국 말고는 별로 없대요.” 이쯤 되면 상대는 '얘가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이 된다. 나는 땀을 흘리며 추가로 설명한다. 둘 다 아주 장점이 많은 제도이고, 안정성이 높고 공정하고, '제너럴리스트'를 뽑기에 좋지만, 단점도 있다고. 지금 한국 사회와 한국 소설이 역동성을 잃어가는 건 상당 부분 그 제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여기까지 들은 상대는 열에 아홉은 '얘가 할 말이 많은 듯한데 들어봤자 귀찮아질 거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눈빛이 된다. 나는 그때마다 '빨리 원고를 마쳐서 책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P.7)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人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몇몇은 이 시스템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그럭저럭 기능한다고 여긴다. 어쨌거나 그 시스템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팍팍하다.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패배자로 살아가는 게 나을 정도다.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운동가보다는 대학에 떨어져 고졸 학력인 사람이 눈총을 덜 산다.

(P.17)

내부 사다리가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복권이나 다름없는 공모전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유능한 인재들이 투고보디는 공모전 도전을 택하면서 업계의 내부 사다리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공모전 경쟁률은 점점 더 높아지며, 신인들은 여기에서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나는 똑같은 현상이 지금 한국의 취업 시장 곳곳에서 벌어지 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모전 '이라는 단어를 '공채'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P.63)

과거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 두고 중앙에서 실시히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고작 생원이나 진사 정도의 자격증을 얻은 이조차 그랬다. 나중에 사람들은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원과 진사가 되기 위해, 봉건 질서에서 자기 신분을 겨우 한두 칸 더 끌어올리기 위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노력했다. 입신양명, 출세라는 가치가 삶의 목표가 되었다. 자식들은 구체제의 이념과 법규를 부모보다 더 철저하게 따르고 수호했다.

사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 방향은 대부분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복고적이고 근본 주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과거제를 통해 유무형의 권력을 더 쥐게 되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은 '못 배 운 것들'이라고 간단히 정리되었다. 그렇게 성리학 엘리트들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기능성을 봉쇄했다. 사회는 점점 변화에 대응 하는 능력을 잃었다.

(P.101)

대한민국의 젊은 취업 준비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참고서를 사서, 또는 인터넷 강의로, 또는 비싼 수강료를 내고 학원에 가서 그런 문제를 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청년들이 새로운 알고리즘이나 특허를 궁리할 때 서울의 청년들은 머릿속으로 색종이를 접거나 돌리거나 오려 내는 훈련을 한다.

이런 시험들, 이런 시험에 몰두하는 사회 분위기가 우리의 창조적 역동성을 어떻게 막고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체제에 순응적이다. 면접장에서 구직자들을 보면 다 똑같은 답안을 외워 온듯해 한숨이 나온다 같은 에기들은 일리가 있는 걸까.

(P.110)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 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 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P.137)

대중문화 시장만 혼돈계인게 아니다. 인간 활동 전체가 카오스다. 우리는 어떤 작품이, 어떤 상품이, 어떤 사상이 성공할지 모른다. 학자, 전문가, 평론가, 컨설턴트, 애널리스트들도 매한가지다. 그런데 세상은 매 순간 변한다. 새로운 위기와 낯선 도전이 찾 아온다. 어떻게 답을 구할 것인가?

한국은 수십 년 동안 모방과 추격이라는 전략에 기댔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 앞선 기업들이 있으니 그들이 간 길을 열심히 연구해 그걸 따라잡는 방식이었다. 이런 일은 엘리트들이, 모범생들이 잘한다.

(P.148)

세상에는 맹비난과 논란 속에 공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인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한다. 구체제 엘리트의 평가와 시험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퇴출당하지 않고 세상 한쪽에 작은 자리를 잡아 격렬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며 싸울 때, 거기에 소수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세할 때, 그걸 운동이라고 부른다. 마네에게는 모네와 드가, 세잔이 있었고, 에밀 졸라와 보들레르도 마네의 팬이었다.

그러다 가끔, 드물게 어느 순간, 정말 순식간에 시대가 확 바뀌어 버린다. 옛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바보처럼 보이고, 새 주장 은 그걸 왜 여태까지 몰랐는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당연해 보인다. 혁명이다. 그렇게 그 분야가 시대를 따라잡는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운동이 언제나 사회 한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한 모퉁이는 늘 그렇게 부글부글 끓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배경도 보잘것없는 젊은 감독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후다닥 영회를 찍고는 돈방석에 올라야 다른 가난한 천재들이 희망을 품고 영화에 도전한다. 이런 일이 꾸준히 발생하지 않는 분야는 18세기 조선처럼 시대에 뒤떨어진다.

세상에는 또라이처럼 보이는 괴짜 천재들도 있다. 나는 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어느 대기업 입사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 사람 다 대학도 제대로 마치지 않았잖은가.

사회 부적응자들과 괴짜 천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허황된 야망을 말하는 대학 중퇴자 중에서 미래의 게이츠, 잡스, 저커버그를 골라낼 좋은 테스트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이 성공하기 직전까지 저커버그가 또라이인지 천재인지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P.160)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가? 그러면 또라이, 반항아, 괴짜들이 설칠 땅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모두 공채를 없애고 또라이들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많은 후보 중에서 신인을 선발하는 공채 시스템은 공정하고 치열하다. 과거에 성공적인 제도였고, 현재도 효율적이며 믿을 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채와 별개로 또라이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무모한 모험과 실험을 더 많이 벌여야 한다. 대담한 아이디어들은 실제로 구현해 보기 전에는 괜찮은 것과 황당한 것을 구분할 길이 없다. 모험가들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 시키면 그 다음에 더 큰 회사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창안지를 영입해야 한다. 또는 모험가들이 직접 자기 회사를 키우거나. 그런 과정이 더 쉬워지고 더 많아져야 한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런 식으로만 건질 수 있다.

나는 미국에는 또라이들이 이것저것 황당한 짓거리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운동장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경제가 모방과 추격의 시대 이후 고전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P.162)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미등단 작가는 불이익을 당한다. 그 불이익의 내용은 미묘하다. '미등단 작가는 절대 안돼.'라는 팻말이 어디에 붙어 있지 는 않다. 아마 10년에 한번 나올 탁월한 작품을 쓴다면 등단 여부 와 관계 없이 주목을 받을 것이고, 문학계의 내부 사다리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면 불리한 처지에서 작가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둘째, 그런 불이익은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 없이도 발생한다. 문학 권력이라 불리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문학 담당 기자나 방송 작가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우리 출판사에서 나은 작가를 소개 해 달라. 그러지 않으면 재미없다.'라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출판사들은 수십 년간 성실하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작가 를 발굴하고. 그 작기들의 소설을 펴내고, 그 작품들의 성취를 설 명하는 비평을 쌓아 왔다. 그 작업의 진정성은 의심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문학의 어떤 가치와 영역이 그간 버텨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런 작업의 일관성과 품질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방송작가들은 '검증'이라는 단어로 설명했고, 신문기자는 '안심이 된다는 말로 표현한. 일종의 공신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권위가 되고, 그런 권위를 업은 신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 메커니즘 자체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나? 한국 사회가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 대우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흡사하지 않은가.

'비명문대 출신은 절대 안돼.'라는 팻말을 노골적으로 입구에 써 붙인 조직은 없다. 비명문대 출신도 능력과 실적이 굉장히 출중 하면 인정을 받는다.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승진하고, 조직의 장이 될 수 있다. 10년에 한번 나을까 말까 한 걸출한 인재라면. 그러나 그렇게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지 못하는 한 비명문대 출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미묘한 배제를 당한다. 그들은 종종 명문대 출신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합을 시작하지 못하며, 핸디캡을 져야 한다.

누군가의 악의가 없어도 그런 학벌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관문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부문에서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은 대학 나온 지원자가 조금 더 낫겠지.'라는 정도로만 생각해도 배제가 일어난다. '좋은 대학을 졸업 했다는 말은 종종 '지원자가 검증됐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외적으로 비명문대 출신을 발탁했을 때 인사권자는 '내가 맞게 판단한 걸까.'라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는 많은 이들이 명문대 졸업생 수준의 '일관성과 품질'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는 수십 년간 꾸준히 학업 능력이 뛰어난 입학생들을 받았고, 그 학생들은 대체로 비명문대 학생들보다 유리한 여건에서 잘 배웠다. 그들 중 상당수가 실력이 뛰어난 졸업생이 되어 사회로 나갔다. 이 역시 의심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명문대 졸업장은 일종의 품질 인증 마크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어떤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우리는 채용이나 승진에서 절대 학벌 차별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데, 아마 정말 그런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직이 몇 있다고 해서 비명문대 출신이 사회에서 당하는 배제와 불이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 둔다.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가 없어도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현재 아무도 악의가 없다. 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시험을 합격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넘어선 우월 의식을 를림없이 품고 있다. 과거에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미자격자, 무면허자로 몰아 배제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런 흉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싹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이런 구조에서 배제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기리라는 이야기다.

(P.284)

나는 그런 신비로운 권위들이 한국 사회 또한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문학 권력은 그런 신비로운 권위 중 하나다. 학벌도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신분도 그렇다. 그 신비로운 권위를 누리는 사람은 별 근거도 없는 우월감에 빠진다. 그 권위가 없는 사람은 그만큼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넘도록 부끄러워하며 살기도 한다. 중소기업에 취직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인생의 패배자라 여기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그 신비로운 권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려면 젊었을 때 공부 해라. '라고 부모가 자식들을 닦달하는 이유도 이거다. 그 신비로운 권위가 있으면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예비 배우자 집안에서 인정받는 정도까지 달라진다.

대체로 어떤 시험을 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신비로운 권위를 얻는다. 그 집단은 주류 문단일 수도 있고, 명문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일 수도 있다. 시험에 합격해서 그 단체에 들어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들어가고 나면 쉽게 퇴출되지 않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 단체 구성원이 되는 입시에 통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

이 신비로운 권위를 '간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P.289)

나는 이 책에서 장편소설공모전을 공채 제도와 비교했다. 두 제도는 모두 독특한 한국적 인재 채용 방식이다. 거액이 걸린 장편 소설공모전을 이렇게 많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나라는 달리 들어 본 적이 없다. 정부나 기업, 공공기관이 대규모 동시 시험을 통해 신입 사원을 뽑는 나라도 드물다.

두 제도는 장점이 많다. 우선 공정하다. 이때의 공정함은 기계적, 획일적인 공평과 중립을 말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지원자 이름을 가린 채 평가받는다. 본심에서는 같은 심사위원이 최종 후보지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서 당선자 또는 합격자를 고른다.

신뢰성도 높다. 주최 측은 이 제도를 통해 대체로 우수한 인재를 필요한 수만큼 뽑을 수 있다. 올해도, 내년도, 내후년도 그럴 수 있으니까 장기적인 인력 수급 계획을 세우는 데 유리하다. 지원자 들도 자신이 어떤 방식의 시험을 언제 어떻게 치르고 합격 발표는 언제쯤 날지 가늠할 수 있다. 내년이나 내후년에도 시험은 비슷하게 계속될 테니 몇 년 뒤를 내다보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 두 제도는 이런 식으로 업계의 안정적인 발전에 기여한다.

출판사와 작가 지망생, 기업과 취업 준비생은 구체적인 계약 없이도 신뢰 관계를 쌓는다. 이러한 상호 신뢰는 거의 공적인 것으로, 한국을 지 행하는 큰 기등이자 일종의 사회 계약이다. '능력주의에 입각한 공개 선발 제도와 그에 대한 승부이라는 신화 덕분에 한국 사회의 각종 연고주의와 당파성이 그나마 옅어진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래서 '사기업에서는 누구를 어떻게 뽑든지 기업 권한이다.'라는 말은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알수 없지만, 이렇게 당선 또는 합격된 사람들은 자신을 선발한 제도의 공정함과 효용성을 더욱 굳게 믿게 된다. 그들 입장에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르는 정당한 보상을 경험한 셈이다. 속으로는 '몇 가지 흠결이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장점이 더 많은 제도잖아?'라고 여기게 된다. 밖에서 보면 꼭 시스템에 진심으로 '충성 '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자기가 속한 집단과 그 집단을 떠받치는 제도에 대한 평가가 외부와 달라진다.

​(P.423)

어느 순간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을 전부 자신보다 못하다고 얕보게 되기 쉽다. 여기서부터는 단점이다. 그렇게 우월감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집단이 생겨난다. 그런 집단이 여러 가지 기회와 자원까지 배타적으로 누린다면 누가 봐도 새로운 귀족 계급이다. 실제로 이들의 말과 행동, 내부 규칙과 문화는 옛 귀족 들을 닮아 간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같은 식으로 귀족 안에서도 등급이 있었듯이, 시험으로 선발된 이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곤 한다.

자기 인식이 외부와 멀어지는 만큼 내부 결속력은 강해진다. 그런 결속력은 이 엘리트 계층 내부의 경쟁을 저해한다. 이곳에 들어올 때 적용된 능력주의는, 그 안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종종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기수 문화'다. 매해 시험을 통해 등용 된 이들이라 누가 선배이고 누가 후배인지가 명확하다. 선배와 후배는 자질은 비슷하지만 선배가 경험이 더 많으므로 이끌거나 지도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합의를 다들 대체로 따른다.

그러나 가정이 잘못됐다. 애초에 선발 시험이 완벽하지 않았으므로 무능력한 사람도 더러 뽑히고, 당선되거나 합격할 때에는 유능했지만 이후에 노력을 하지 않아 평범해진 사람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현재 기준으로는 유능하다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부 경쟁이 없기에 이런 이들이 도태되지 않고 성안에 계속 머문다. 심지어 자신보다 유능한 후배들을 이끌고 지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조직 또는 업계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경쟁을 할 이유가 없으니 다들 게을러지고, 거기에 무능한 선배들이 발목을 잡고. 그런 선배를 보며 더 의욕을 잃는다. 무능한 선배들은, 자기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유능한 후배를 건방지다며 깔아 뭉개기도 한다. 그런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자를 찾거나 끼리끼리 뭉쳐야 한다. 실력이 아니라 인맥을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지며 파벌이 생긴다.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엘리트를 모아 놓기는 했으나 외국의 같은 직업군에 비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외부 세상이 어떻게 변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험의 분별력과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시험으로 자신들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423)

몇몇 사람들은 인재 선발 제도를 확 갈아엎어서 그런 사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모전을 없애거나 시험 대신 전문대학 원을 거치는 제도로 바꾸거나 국립대를 모두 통합하거나 하는 식의 출입구를 동문에서 서문으로 바꾼다 한들, 또는 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복잡하게 추가한다 한들 성벽을 둘러싼 차별은 달라지지 않는다. 간판을 다 없앤다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표식을 찾아낼 것이다. 성이 높이 서 있고 성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한. 새로운 간판 후보는 무궁무진하다.

(P.427)​

정보 확대는 적은 비용으로 큰 파급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그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평가와 선택을 맡긴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기도 하다. 정보 공개에 반발하는 세력 은 있겠지만, 그에 따른 논란이 예컨대 사회 안전망 구축에 필요한 증세 논쟁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정보 확대의 여파는 한 업계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곳곳이 보다 투명해지면 자연히 그만큼 사회가 정의로워질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도 두터워진다. 한국사회의 논의 수준도 한 단계 높아지지 않을까 한다. 쓸 만한 데이터가 부족하다 보니 어떤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찬반 양편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을 전시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식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흔하다.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방식은 이제부터 연구해야 한다. 당장 어떤 묘책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문제를 무척 낙관적으로 본다. 우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운영하고 가공하는 일이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고 쉬워졌다. 그리고 이 작업은 한번 임계점을 넘으면 그 뒤로는 거의 비가역적일 것이다. 의미 있는 기록과 분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런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생길수록 정보 공개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진다.

어떤 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정보를 쌓고 의미 있게 엮고 공유하고 활용하는 일이 하나의 공동체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한국 사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기회도, 방법도 있다고 믿는다.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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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이성비판)

김상현 / 아이세움 / 232쪽

(2018. 7. 28.)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 칸트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신. 영혼, 우주)에 관해 “해결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 이성의 운명이다.” 라는 답을 내놓는다. 가령 우주에 시작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시작이 있다'도 '시작이 없다'도 정답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인 한 그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렇게 특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신이 되려고 또는 절대 진리를 획득하려고 애쓴다. 과연 그런 일이 기능할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현재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신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존재자보다 열등하고 불완전하디는 것 또는 인간은 아직 절대 진리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인간이 신과 같이 될 것인지, 절대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진리를 발견하고 주장하려고 한다. 과연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확신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유한성은 어떤 이유나 조건 때문인가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이 책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칸트의『순수 이성 비판』을 다루었다. 학자들마다 칸트의 철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순수 이성 비판』 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이성의 운명에 대한 해명'을 다룬 책이라는 정답 아닌 정답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순수 이성 비판』 안에 서술된 '초월적 감성학' , '초월적 분석론' , '초월적 변증론' 등에 각각 '감성의 운명' , '지성의 운명' , '이성의 운명'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감성, 지성, 이성의 운명은 결국 칸트가 이전 형이상학을 새롭게 비판하였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여왕)의 운명' 이라고 해석하였다.

(P.8)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순수 이성 비판』을 대학 3학년 때 처음 읽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 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여돼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신경질이 났다. 도대체 책을 읽고 이해가 안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독한 자만심이 나의 내면에 똬리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을 도서관에서 살았다. 결국 '주석가' 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해설서를 읽고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인식' 이란 형이상학적 주제를 의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형이상학은 통상 아래의 같이 분류된다.

일반 형이상학: 존재론

특수 형이상학: 우주론, 영혼론, 신론

존재론은 존재 일반의 원리와 속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우주론은 예를 들어 우주에 시초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룬다. 영혼론은 영혼이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 신론은 신은 존재하는가리는 물음에서 시작하는 제반 물음을 따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 있고, 어떻게 또는 왜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에 대해 '본성적으로'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궁금증은 답을 얻는 순간 해소된다. 그런데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애초에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회피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헛짓만 한 셈이 아닌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회피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밤새도록 신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임을 칸트는 책의 첫머리에서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P.18)​

'비판'이라는 말의 유래를 염두에 두고 칸트는 '재판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판소는 '순수 이성'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므로 '순수 이성 비판'이란 일단 '순수 이성의 한계를 설정' 하는 작업 이다. 즉 순수 이성이 어디까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어디부터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는지를 확정하는 사변적(思辨的)작업을 수행하는 재판소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칸트가 내린 판결의 결과는 이렇다. 순수 이성은 형이상학이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경험을 넘어서 있는(초월적 또는 초험적) 영역들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경험의 세계에 관한 한 순수 이성은 옳은 판단을 내릴수 있다.

​ 그렇다면 왜 그냥 '이상 이라 하지 않고, '순수 이성' 이라고 하였을까? 이성이란 일반적으로 사유 능력을 말하는데, 순수하다는 것은 '경험의 때가 묻지 않았음'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수 이성이란 아직 세계에 대한 사유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의 이성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아직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완전한 신제품으로서의 컴퓨터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pc의 업그레이드는 본래의 새 pc의 기본 사양에 의해 그 한계가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유 능력도 후천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사양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순수 이성 비판』은 본래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에 어떠한 한계가 있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P.22)​

인간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법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기 위해 자신을 일단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초월한 상태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초월 활동과 반성 활동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비판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후대인은 물론 그 자신도 '비판 철학' , '초월 철학'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셸링이나 헤겔과 같은 칸트 직후의 철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반성 철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순수 이성 비판』은 이성이 이성 자신을 스스로 비판한 결과물을 집대성 한 책이다.

(P.23)​

인간이 대상 세계에 대해 어떠어떠한 지식을 가진다고 할 때 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근본 원리와 규칙, 한계 등을 다루는 철학을 '인식론'이라 하고. 존재 자체와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들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존재론' 이라 한다.『순수 이성 비판』은 이성이 대상을 인식하는 근본 한계와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에 관한 책으로 분류된다. 나아가 인식의 원리에 따라 존재가 다르게 이해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존재론' 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런 비판의 길을 찾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선대 철학자들의 성과를 넘나들면서, 규칙적인 산책을 하면서, 그는 많은 시간을 신음하면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존재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근원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뼈를 깎는 성찰이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결론이다. 왜냐하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 힌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백을 감내한 인간은 이제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성괴를 내세운다.

나는 남겨진 이 유일한 비판의 길에 의해서, 이전에 경험을 벗어난 이성의 사용 때문에 이성 스스로 일으켰던 모든 모순과 과오를 제거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 이성의 무력함을 핑계 삼아 이성의 물음들을 회피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이 자신에 대해 오해한 점을 발견한 뒤 이성이 완전히 납득할 만큼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애초에 칸트는 인간 이성이 '거부할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 , 즉 형이상학에 관한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대개의 경우 거부할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어떤 문제에 봉작했다면, 아마도 거기에서 포기할 것이다. 즉. 무력함을 핑계 삼아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고, 그 맞서는 방법으로 '비판' 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발견한 비판의 길을 통해 과연 그가 밝혀낸 인간 이성의 원리와 한계는 무엇일까?

(P.24)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묘지에 있는 칸트의 무덤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 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라는 묘지명이 새겨져 있다.

(P.45)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는 플라톤 이래로 진• 선 • 미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는 결국 자연의 객관적 법칙은 무엇인가, 실천적 • 도덕적 문제에 직면해서 인간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행위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또는 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이다. 플라톤을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 곧 모든 존재에 대한 궁극적 진리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진 • 신 • 미의 문제를 존재하는 대상들의 본질에 관한 문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 중심설에 대해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였듯이 칸트는 진리의 기준을 존재(대상) 중심에서 인식(인간)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는 것들의 진 • 선 • 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진 • 신 • 미를 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또는 진 • 선 • 미를 알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먼지 비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은 인간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 철학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P.46)​

『순수 이성 비판』,『실천 이성 비판』,『판단력 비판』은 칸트의 3대 비판서로 불리며, 이 3대 비판서를 통해 비판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칸트는 3대 비판서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희망 할 수 있는가' 라는 세 가지 물음으로 구분하였다.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 순서대로『순수 이성 비판』,『실천 이성 비판』,『판단력 비판』인 것이다. 순수 이성 비판』은 자연의 객관적 법칙이 성립하는 이유를 인간 인식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 증명한 인식론에 관한 책이며,『실천 이성 비판』은 인간 행위의 근본 법칙을 오직 선만을 행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에서 찾은 윤리학에 관한 책이다.『판단력 비판』은 미(美)와 자연에 내재한 원리가 합목적적인 조화임을 밝힘으로써 인간은 합목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추후 칸트는『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쓰는데, 혹자는 이 책까지 비판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진 • 선 • 미 • 성(聖)의 문제를 인간의 근본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명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종교 문제를 믿음(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논증적 증명)의 차원에서 해명한 것이다. 3대 비판서라고 부르든, 4대 비판서라고 부르든 칸트 철학의 핵심이 인간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이 가진 능력의 본성과 한계를 규명하려고 하였던 비판 정신에 있음은 변함이 없다.

(P.47)

'합리론'모든 지식은 이성에 의해 파악되며(이성주의), 이성은 지식을 경험으로부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본유 관념설) 근대 유럽 대륙의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합리론자들은 '원은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의 집합이다.' 나 '인간은 선을 행해야 한다.' 와 같은 지식은 원래부터 이성이 알고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이런 지식들이 경험과 학습을 통해 획득되고 익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합리론자들은 경험과 학습은 이미 이성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일깨워 주는 수단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대표적인 합리론자이며, 칸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합리론 계열의 철학자로 볼프와 바움가르텐이 있다.

(P.52)​

'경험론'인간의 모든 지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후천적으로 획득될 뿐이며, 본유 관념과 같은 선천적 지식은 없다고 주장하는 근대 영국 철학자들의 입장을 말한다. 통상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로 유명한 베이컨이 경험론의 효시로 간주되며, 로크, 버클리, 이 대표적인 경험론자로 꼽힌다. 경험론은 일반인의 상식에 부합하는 이론(이에 반해 합리론자들의 주장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을 펼침으로써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 서구 사회의 실용주의 또는 실증주의적 가치관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근대 경험주의는 홈에 이르러 '진리란 없다 는 입장 또는 '진리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는 없다'는 입장인 회의주의로 귀결된다. 경험주의가 회의주의로 귀결되는 이유는 '모든 지식의 원천이 경험에 있다' 는 그들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생각해 보자. 첫째,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존한다. 둘째, 경험은 심지어 동일한 대상에 관해 동일한 사람이 인식하는 경우일지라도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셋째, 그러므로 경험에 의존하는 지식에는 보편성이 없다. 넷째, 따라서 매 순간 다른 경험에 의존하는 경험적 지식은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편적 진리가 있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 해야만 한다. 이런 사유 과정을 통해 경험주의는 진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귀결되었고, 이후 철학자들은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P.52)

합리론과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종합을 보자. 칸트는 인식의 형식은 타고나지만(합리론 계승 및 경험론 비판), 인식의 내용은 후천적 경험에 의해 획득되어야만 한다(경험론 계승 및 합리론 비판)고 주장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종합하였다. 인식의 형식이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안 된다면 이를 인식 능력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기 바란다. 즉 인식 능력은 선천적이지만, 인식 내용은 경험에 의해서만 획득된디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의 주장은 흄에 의해 제기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일상적 판단, 예를 들어 '그는 잘 생겼다.'는 판단은 보편적 진리로 간주될 수도 없고, 간주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판단과 관련해서는 경험론 나아가 회의주의적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물체는 자연 상태에서라면 낙하한다.' 나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등의 판단은 사정이 다르다. 만약 이런 판단들에 대해 경험론이기 때문에 보편 타당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모든 자연 과학 법칙이 객관적 진리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분명히 알다시피 몇몇 검증 중인 자연 과학 법칙을 제외한다면, 자연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발견해 왔으며, 인간은 그 법칙들을 활용하여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칸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간의 이성 능력을 비판해 본 결과 인간은 인식의 내용을 경험으로부터 획득하지만, 인식 능력 자체는 타고 나는 것이며, 타고난 인식 능력 덕분에 보편 법칙에 대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확인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즉 '인간은 보편적 진리를 경험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만약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앞서 본 바와 같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경험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통해 확립한다'는 것이 합리론 과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종합이다.

​(P.53)

“인간에게는 감각적 직관만이 기능하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감각 자료일 뿐이며. 또한 감각 작용은 생각하는 작용이 아님을 의미한다. 감각은 그냥 감각일 뿐이며. 감각을 통해 얻은 자료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성' 이라고 부르고. 감성이 수용한 자료를 토대로 판단하는 능력을 '지성' 이라고 부른다. 감성은 직관 능력이다. 즉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자료를 얻는 능력이다.

통상 경험을 통해 획득된 대상에 대한 감각을 경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만약 감각을 통해 확인되기는 하지만 대상에 대한 감각이 아닌 그런 감각이 있다면. 이를 선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오감을 통한 감각은 모두 대상에 대한 경험적 직관이지만. 경험적 직관의 배경에는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경험적 직관을 떠받치는 직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로 대표되는 시간과 공간이다.

​(P.69)

​우리가 매일 접하는 TV나 핸드폰의 화면을 생각해 보자. 그 화면에서 우리는 드라마도 보고 각종 정보도 접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형색색의 화소들이다. 이 화소들의 조합을 사람이나 문자로 판단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사실 화소들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화소는 장면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경험 이전의 조건인 것이다. 칸트는 이와 유사하게 시간과 공간이 우리 감각의 선험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장면을 보기 위해서 화소를 전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시간과 공간은 인간 감성의 타고난 조건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은 경험적 직관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 감각을 기능하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은 경험 이전에 갖추어진 인간 감성의 타고난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P.70)

정리하자면. 경험 세계에 대한 지식(종합 판단)이면서 그것이 단지 개연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성(필연성/선험성)을 가져야만 진리에 대한 회의론적 관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은 흄에 의해 회의론이 제기된 이래, 아니 고대 회의론이 시작된 이래 모든 철학과 학문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과제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출발을 칸트는 시공이 선험적 직관이라는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 종합 판단' 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증명된다면, 회의론의 극복을 의미한다. 수학의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는 점은 아주 간단하게 확인된다. 앞서 설명했듯 이 A명제에서 주어인 '2+2+1' 에는 5가 미리 포함되어 있지 않다. 손가락을 꼽듯이 순차적으로 보탬이라는 경험에 의거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B명제에서 주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에는 '180도'라는 사실이 미리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준 공간인. 유클리드 공간에서 실제로든 상상이로든 삼각형을 그려서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학의 명제는 종합 판단이다.​

그런데 A와 B명제로 대표되는 수학의 명제들이 보편타당하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명제들이 보편타당한 이유는 선험적 직관 형식인 시간과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근원적 직관 방식이 일차원적 시간(순차적으로 보탬)과 유클리드적인 3차원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에 근거한 학문은 잘못된 계산이나 착오가 아니라면 언제나 보편타당한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P.95)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칸트의 철학은 존재를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이를 지구 중심설에서 태양 중심설로 전환한 천문학상의 변화에 빗댄 것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는 단지 비유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천동설은 신을 인정하고 신이 만물과 진리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배경에 깔고 있다. 이 생각은 앞서 여러 번 언급하였던 신적 직관(지적 직관)에 의한 세계 인식이 진리이고 이렇게 파악된 진리 체계를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지동설인간에게는 신적 직관 능력이 없고 오직 감각적 직관 능력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인간은 감각적 직관을 통해 획득한 현상에 대해서만 지성적 인식과 진리 주장이 가능하므로 감성과 지성에 대한 비판만이 진리의 체계, 즉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칸트 철학은 지동설을 대변한다. 결국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통해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비판 철학적 태도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P.98)

칸트는 사고(지성)의 조건과 규칙을 다루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하되, 이를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구분을 통해 순수한 형식적 진리는 일반 논리학으로도 충분하지만. 내용적 진리(외부 세계에 대한 진리)는 일반 논리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성의 조건을 분석한 초월적 논리학이 필요하다고 천명한다. 초월적 논리학은 다시 초월적 분석론초월적 변증론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지성의 조건을 분석하여 진리 인식이 현상계에 국한됨을 증명하는 부분이고. 후자는 현상계를 벗어나 사고 규칙을 적용할 때 생기는 가상들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논리학┌ 일반 논리학

        └ 초월 논리학 ┌ 분석론(진리의 논리학)

                            └ 변증론(가상의 논리학) ​

(P.108)

자연 과학으로 대표되는 경험 대상에 대한 진리 주장을 위해서는 일반 논리학만으로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명제들은 종합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총각은 미혼 남자이다.' 라는 분석 명제와 달리 '모든 물체는 낙히한다.' 와 같은 종합 명제는 술어의 내용이 주어에 포함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종합 명제들의 객관적 타당성과 필연성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반 논리학 이외의 다른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초월적 논리학이다.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기능한가?' 라는 물음 역시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답변을 제시할수 있다.

통상 진리란 '인식과 그 대상과의 일치'에서 성립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컵을 보고 '컵' 이라고 인식하였다면 이는 참된 인식이 사물 자체로서의 컵인지 현상으로서의 컵인지가 문제가 된다. 칸트에 의하면 이 컵은 현상으로서의 컵일 뿐 사물 자체로서의 컵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 감성에 의해 컵에 대한 정보가 수용될 때, 이미 감성의 조건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보고 판단한 그 컵이 사물 자체로서의 컵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현상에만 적용해야 할 판단​과 인식을 사물 자체에 적용히여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때. 가상(schein. illusion)이 등장한다. 이 경우 가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인간 인식에 있어서 “실로 본성적이고 불가피한 착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피한 착각에 대해 폭로하는 것이 초월적 변증론의 과제이다. 다시 말해 지성의 범주를 내재적 원칙으로만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험적 원칙으로 사용함으로써 각종 이념이 발생하는데, 이것들이 실은 가상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형이상학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변증론의 내용이다.

(P.112)​

변증이란 그리스어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레게인legein을 통하여dia'라는 뜻이다. 레게인은 '말하다' 는 의미의 동사인데. 이 동사에서 전성된 명사가 바로 '이성', '말'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이다. 그러므로 '변증' 이란 '말 또는 이성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는 과정' 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변증법이라고 표현하는데, 진리 탐구의 방법론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변증을 진리 탐구의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칸트다. 칸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가상(거짓)의 논리학을 설명하는 부분에 'dialectic'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를 '변증법'이 아닌 '변증론' 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진리 탐구의 방법론이라는 의미로 오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 변증을 진리 탐구의 방법론으로 생각한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보면 대개 플라톤 입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로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게 함으로써 말, 이성을 통하여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가르쳐 준다. 이런 이유로 변증은 일종의 대화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서열을 통해 최고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과정 또한 변중이라고 불렀다. 이데아란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개와 사람이 있다면, 개의 이데아와 사람의 이데아는 서로 다르다. 즉. 양자의 본질은 다르다. 하지만 개와 사람은 모두 동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이데아 <동물로서의 본질>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소나무와 같은 식물이 있다면 개, 사람, 소나무는 서로 다른 이데아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생명이라는 공통의 이데아를 공유하고 있다. 이와 같 이 공유하고 있는 이데아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공통된 최고의 이데아를 공유하고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대표적인 형이상학 체계이다. 그런데 이데아 자체가 과연 있는가에 의문을 던지는 반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데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개념적 가상에 불과하다. 칸트가 가상의 논리학을 가리켜 변증이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 영혼, 우주 등은 플라톤 이래 정립된 형이상학의 근본 주제들이며, 칸트 이전의 플라톤 계승자들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 바로 선의 상징인 신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칸트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인간은 진리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보았고, 플라톤이 진리의 논리학으로 생각하였던 변증은 사실은 가상의 논리학이라고 비판하였다.

(P.115)

범주론사고의 조건, 곧 인식의 조건을 밝힌 것이므로 인식론이다. 동시에 대상이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 곧 존재의 조건을 밝힌 것이므로 존재론이기도 하다. 이를 주관과 객관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결국 객관은 주관에 의해서만 객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도식이 생겨난다.

X(사물 자체) ①→ 객관(대상, 현상) ②→ 주관(사고)

위 도식에서 ①로 가는 인과 관계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사물 자체와 현상이 동일한지 유사한지 전혀 다른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사물 자체를 상정해야만 현상이라는 것도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관계를 인과 관계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왜나하면 인과 관계는 지성의 범주로서 현상에만 타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요청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즉 사물 자체를 요청해야만 주관과 객관, 현상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 이후 피히테. 셸링. 헤겔은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는 과임 주장이라고 평가한다. 단지 ②로 표시되는 관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칸트도 주장한 바와 같이 객관은 결국 주관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객관을 존립시키기 위해 존재 여부도 알 수 없고. 작용 여부도 알 수 없는 기괴한 것(사물 자체)을 상정하는 일은 진리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보았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사물 자체는 필요 없고, 오직 주관에 의해서만 객관이 존립한다는주관의 형이상학이다. 결과적으로 주관이 절대화된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관렴론은 초월적(비판적) 관념론이라 부르고, 헤겔의 관념론을 절대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P.127)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있어서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질서와 규칙성을 자연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것들은 자연 중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연의 통일은 현상들을 연결하는 필연적인 통일 즉 선험적으로 확실한 통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법칙은 선험적으로 지성 자신에서 생기고, 경험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니라 (지성이) 현상들에 합법칙성을 줌으로써 바로 경험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지성은 현상들을 비교해서 귀납적으로 규칙을 작성하는 능력이 아니다. 지성 자신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다. 다시 말하면 지성이 없고서는, 어디서든지 자연은 없다.

'지성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 라는 천명은 칸트의 관념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임과 동시에, 자연법칙의 근거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있음을 명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 중 하나는 자연 자체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그 법칙을 발견하고, 그렇게 발견한 법칙을 설명하는 체계가 과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성이 자연의 입법자' 라는 칸트의 주장은 이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간은 감성과 지성의 선험적 조건에 따라 자연이 그러한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 할 뿐이며, 그렇게 인식한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법칙이고 과학이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나아가 자연이 일관된 법칙하에 존재 한다고 인식하는 것 역시 사실은 통각의 통일에 근거해야만 가능한 일임을 칸트는 밝히고 있다.

(P.138)

자기 자신이 지신을 의식하는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인식하는 자기 인식과는 다르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 한 나라는 것만을 의식한다. 하지만 인식하려면, 적어도 칸트에게 있어서는 직관과 개념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나의 직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만약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듯이 나를 본다면, 그 나는 현상으로서의 나일 뿐 나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나는 경험 대상으로서의 나일 뿐이다. 칸트는 이러한 경험 대상으로서의 나를 경험적 자아(또는 경험적 통각)라고 부르고, 그 어떤 경우에도 경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 자신을 초월적 자아(또는 초월적 통각)라고 불 렀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이후 여러 현대 철학자들에게 근대적 주체를 상징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초월적 통각은 모든 이성 사용의 최후 근거이자 모든 현상(대상)의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 칸트의 시대에 계몽주의가 완성되고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이성적 주체 또는 이성적 주체의 전범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즉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언명을 통해 근대를 열었다면, 칸트는 "초월적 통각의 통일이 모든 인식과 자연의 근원"이라고 함으로써 근대를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이 존재에 선행 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과 자아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칸트의 사상은 모든 존재가 정신에 의존한다는 관념론의 정수를 보여 준 것이다.

(P.142)

칸트는 형이상학의 원천이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성 능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선행되이야 한다고 보았다. 비판의 길과 감성과 지성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12개의 범주라는 선험적 인식 조건이 있다는 사실 을 알았다. 그러므로 존재론을 다루는 일반 형이상학은 존재를 가 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감성(초월적 감성론)과 지성(초월적 분석론)에 대한 성찰로 바뀌어야 정당하다. 또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검토한 결과, 특수 형이상학의 주제들인 영혼, 우주, 신에 관해서는 인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영혼론은 오류 추리임이, 우주론은 이율배반임이, 그리고 신학은 이상ideal 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진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이며 형이상학에 관한 한 가장 올바른 대답이라고 천명 한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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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204쪽​

(2018. 7. 23.)

“그리고 가장 훌륭한 어부는 할아버지이시고요."

“아니다. 난 나보다 뛰어난 어부를 알고 있어."

“케바. 고기를 잘 잡는 어부는 많이 있고, 또 아주 뛰어난 어부도 더러 있죠. 하지만 할아버지에 비길 만한 사람은 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고맙구나. 넌 나를 기쁘게 해 주는구나. 너무 큰 고기가 걸려서 우리 생각이 틀리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할아버지 말씀대로 전처럼 여전히 힘이 세시다면, 그렇게 대단한 고기가 어디 있겠어요.”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요령을 많이 알고 있는 데다 배짱도 있지.” 노인이 말했다. “내일 아침 기운이 나도록 이제 그만 주무시도록 하세요. 전 가져온 그릇을 '테라스'에 돌려주겠어요.”

“그럼 잘 가거라. 내일 아침에 깨우러 가마.”

“할아버지는 제게 자명종 같아요.” 소년이 말했다.

“내 나이가 자명종인 거지. 한데 늙은이는 왜 그렇게 일찍 잠에서 깨는 걸까? 하루를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일까?” 노인이 대꾸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나이 어린 애들은 늦도록 곤하게 잠을 잔다는 것뿐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시간에 늦지 않도록 깨워 줄게.” 노인이 말했다.

(P.25)

노인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에 본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꾸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긴 해변과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해안선, 그리고 드높은 우뚝 솟은 커다란 갈색 산들이 꿈에 나타났다. 요즈음 들어 그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이 해안가를 따라 살았고, 꿈속에서 파도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파도를 해치며 다가오는 원주민의 배들을 보았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갑판의 타르 냄새와 뱃밥 냄새를 코끝으로 맡았으며, 아침이면 육지 미풍이 싣고 오는 아프리카 대륙의 냄새를 맡았다.

여느 때 같으면 노인은 뭍에서 불어오는 미풍 냄새를 맡으면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고 소년을 깨우러 갔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뭍에서 불어오는 미풍 냄새가 너무 일찍 풍겨 왔고,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도 너무 이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계속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섬들의 하안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더니 카나리아 군단의 여러 항구와 정박지가 나타났다.

노인의 꿈에는 이제 폭풍우도, 여자도, 큰 사건도, 큰 고기도, 싸움도, 혐겨루기도, 그리고 죽은 아내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여러 지역과 해안에 나타나는 사자들 꿈만 꿀 뿐이었다. 사자들은 황혼 속에서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뛰어놀았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 이 사자들을 사랑했다. 그는 한 번도 소년의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문득 눈이 뜨이자 열린 창으로 달을 바라보고는 말아 놓은 바지를 풀어 입었다. 판잣집 밖에서 소변을 본 뒤 소년을 깨우려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새벽 한기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몸을 떨다 보면 조금씩 몸이 따뜻해지고 곧 바다에서 노를 젓게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P.26)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P.34)

노인은 자신의 낚시에 걸린 큰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별나게 구는 놈은 머리털 나고 지금이 처음이지 뭐야. 날뛰지 않는 것을 보니 여간 똑똑한 놈이 아닌걸. 이놈이 날뛰거나 마구 요동치는 날에는 꼼짝없이 내가 끝장나고 말 텐데. 하지만 아마 전에도 여러 번 낚시에 걸린 경험이 있어 이럴 때는 지금처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자신의 상대가 오직 한 사람뿐이며 게다가 나이 든 늙은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야. 아무튼 굉장한 놈이야. 고기 살이 좋다면 시장에서 값이 많이 나가겠지. 미끼를 먹는 것도, 낚싯줄을 끌고 가는 것도 꼭 사내답게 하는군. 싸울 때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단 말이야. 저놈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필사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P.49)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북쪽에서 조각배를 향해 날아 왔다. 휘파람새는 수면 가까이 아주 나지막하게 날고 있었다. 노인은 새가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는 배의 고물에 가서 지친 날개를 쉬었다. 그러고 나서 노인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이번에는 좀 더 편안한 낚싯줄 위에 가서 앉았다.

“너 몇 살이냐? 이번 여행이 첫 나들이인 거야?” 노인이 새에게 물었다.

노인이 말을 걸자 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새는 너무 기긴 맥진한 상태여서 제대로 낚싯줄을 살펴볼 겨를도 없어 보였다. 가냘픈 발가락으로 낚싯줄을 꽉 움켜잡고 있는 동안 아래 위로 흔들거렸다.

"줄은 튼튼해. 아주 단단하다고. 간밤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그렇게 지쳐서야 되겠니.” 노인이 새에게 말했다. “새들은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새들을 노리고 바다까지 날아오는 매들이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해 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머지않아 매들에 대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실것 푹 쉬어라, 작은 새야. 그러곤 뭍으로 날아가 인간이나 다른 새나 고기처럼 네 행운을 잡으려무나.” 그가 말했다.

밤 동안에 등이 뻣뻣했고 지금은 심한 통증까지 있었는데, 새에게 말을 걸고 나니 노인은 힘이 솟았다.

(P.55)

조금 전에 고기가 왜 뛰어올랐을까,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솟아오른 것 같아. 어쨌든 그 덕분에 얼마나 큰 놈인지 알게 되었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그놈한테 보여 주고 싶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놈은 쥐가 난 손도 보게 되겠지. 녀석에게 내가 실제보다 힘이 센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지. 어쨌든 그렇게 될 테니까. 저 고기 놈이 되어 보고 싶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직 내 의지, 내 지혜에 맞 모든 걸 갖고 싸우고 있는 저놈 말이야.

(P.65)

“하기야 저 고기도 내 친구이긴 하지.”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런 고기는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저놈을 죽여야만 해. 하지만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뭐야.”

날마다 사람이 달을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아마 달은 달아나 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인간이 날마다 해를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우리는 운 좋게 태어난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인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큰 고기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록 연민의 정을 느낄 지라도 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저놈을 잡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저 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냐. 그럴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한 거동. 저런 위엄을 보면 저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어.

난 이런 일들에 대해선 잘 몰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바닷가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해.

(P.76)

좋은 일이 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P.104)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P106.)​

“이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가서 잡기로 해요."

“그건 안돼. 내겐 운이 없어. 운이 다했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운은 제가 갖고 가면 되잖아요." 소년이 대꾸했다.

“네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상관없어요. 어제도 두 마리나 잡았는걸요. 하지만 전 아직도 배울 게 많으니까, 이제부턴 할아버지와 함께 나갈래요.”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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