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 민음사 / 448쪽

(2018. 8. 2.)

이 책을 쓰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 그 2년 동안 “요즘은 어떤 글을 쓰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매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논픽션을 쓰고 있는데요,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에 대한 거예요.” 그렇게 답하면 상대방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뭐?'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곤 했다.

“장편소설공모전들 있잖아요? 한겨레문학상이나 문학동네소설상 같은 것들요. 그거랑, 공개채용 제도 있잖습니까? 대기업 신입 사원 공채나 사법시험, 9급 공무원시험 같은 거요. 그 두 가지를 취재해서 쓰고 있어요.” 그러면 뭔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로 “아, 네”라며 넘어가는 사람이 있었고, “그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죠?” 라며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후자 앞에서 나는 머리를 한 번 더 극적여야했다.

"음, 그러니까, 그게, 문학공모전과 공채제도는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둘 다 굉장히 한국적인 제도거든요. 대규모 동시 시험을 치러서 인재를 뽑는 제도잖아요, 옛날 과거시험처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뽑는 곳은 한국 말고는 별로 없대요.” 이쯤 되면 상대는 '얘가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이 된다. 나는 땀을 흘리며 추가로 설명한다. 둘 다 아주 장점이 많은 제도이고, 안정성이 높고 공정하고, '제너럴리스트'를 뽑기에 좋지만, 단점도 있다고. 지금 한국 사회와 한국 소설이 역동성을 잃어가는 건 상당 부분 그 제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여기까지 들은 상대는 열에 아홉은 '얘가 할 말이 많은 듯한데 들어봤자 귀찮아질 거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눈빛이 된다. 나는 그때마다 '빨리 원고를 마쳐서 책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P.7)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人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몇몇은 이 시스템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그럭저럭 기능한다고 여긴다. 어쨌거나 그 시스템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팍팍하다.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패배자로 살아가는 게 나을 정도다.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운동가보다는 대학에 떨어져 고졸 학력인 사람이 눈총을 덜 산다.

(P.17)

내부 사다리가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복권이나 다름없는 공모전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유능한 인재들이 투고보디는 공모전 도전을 택하면서 업계의 내부 사다리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공모전 경쟁률은 점점 더 높아지며, 신인들은 여기에서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나는 똑같은 현상이 지금 한국의 취업 시장 곳곳에서 벌어지 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모전 '이라는 단어를 '공채'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P.63)

과거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 두고 중앙에서 실시히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고작 생원이나 진사 정도의 자격증을 얻은 이조차 그랬다. 나중에 사람들은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원과 진사가 되기 위해, 봉건 질서에서 자기 신분을 겨우 한두 칸 더 끌어올리기 위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노력했다. 입신양명, 출세라는 가치가 삶의 목표가 되었다. 자식들은 구체제의 이념과 법규를 부모보다 더 철저하게 따르고 수호했다.

사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 방향은 대부분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복고적이고 근본 주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과거제를 통해 유무형의 권력을 더 쥐게 되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은 '못 배 운 것들'이라고 간단히 정리되었다. 그렇게 성리학 엘리트들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기능성을 봉쇄했다. 사회는 점점 변화에 대응 하는 능력을 잃었다.

(P.101)

대한민국의 젊은 취업 준비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참고서를 사서, 또는 인터넷 강의로, 또는 비싼 수강료를 내고 학원에 가서 그런 문제를 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청년들이 새로운 알고리즘이나 특허를 궁리할 때 서울의 청년들은 머릿속으로 색종이를 접거나 돌리거나 오려 내는 훈련을 한다.

이런 시험들, 이런 시험에 몰두하는 사회 분위기가 우리의 창조적 역동성을 어떻게 막고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체제에 순응적이다. 면접장에서 구직자들을 보면 다 똑같은 답안을 외워 온듯해 한숨이 나온다 같은 에기들은 일리가 있는 걸까.

(P.110)

엘리트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 한곳 고 혁명적인 작품'을 알아보는 분야다. 전복적인 대로 체제를 전복하려 든다. 따라서 구체제의 엘리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저항하게 되기 쉽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명 적인 작품은 엘리트의 상상력 밖에 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엘리트들이 일반인보다 더 느리다. 왜냐하면 자기 상상력 바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은. 엘리트보 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P.137)

대중문화 시장만 혼돈계인게 아니다. 인간 활동 전체가 카오스다. 우리는 어떤 작품이, 어떤 상품이, 어떤 사상이 성공할지 모른다. 학자, 전문가, 평론가, 컨설턴트, 애널리스트들도 매한가지다. 그런데 세상은 매 순간 변한다. 새로운 위기와 낯선 도전이 찾 아온다. 어떻게 답을 구할 것인가?

한국은 수십 년 동안 모방과 추격이라는 전략에 기댔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 앞선 기업들이 있으니 그들이 간 길을 열심히 연구해 그걸 따라잡는 방식이었다. 이런 일은 엘리트들이, 모범생들이 잘한다.

(P.148)

세상에는 맹비난과 논란 속에 공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인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한다. 구체제 엘리트의 평가와 시험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퇴출당하지 않고 세상 한쪽에 작은 자리를 잡아 격렬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며 싸울 때, 거기에 소수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세할 때, 그걸 운동이라고 부른다. 마네에게는 모네와 드가, 세잔이 있었고, 에밀 졸라와 보들레르도 마네의 팬이었다.

그러다 가끔, 드물게 어느 순간, 정말 순식간에 시대가 확 바뀌어 버린다. 옛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바보처럼 보이고, 새 주장 은 그걸 왜 여태까지 몰랐는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당연해 보인다. 혁명이다. 그렇게 그 분야가 시대를 따라잡는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운동이 언제나 사회 한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한 모퉁이는 늘 그렇게 부글부글 끓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배경도 보잘것없는 젊은 감독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후다닥 영회를 찍고는 돈방석에 올라야 다른 가난한 천재들이 희망을 품고 영화에 도전한다. 이런 일이 꾸준히 발생하지 않는 분야는 18세기 조선처럼 시대에 뒤떨어진다.

세상에는 또라이처럼 보이는 괴짜 천재들도 있다. 나는 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어느 대기업 입사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 사람 다 대학도 제대로 마치지 않았잖은가.

사회 부적응자들과 괴짜 천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허황된 야망을 말하는 대학 중퇴자 중에서 미래의 게이츠, 잡스, 저커버그를 골라낼 좋은 테스트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이 성공하기 직전까지 저커버그가 또라이인지 천재인지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P.160)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가? 그러면 또라이, 반항아, 괴짜들이 설칠 땅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모두 공채를 없애고 또라이들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많은 후보 중에서 신인을 선발하는 공채 시스템은 공정하고 치열하다. 과거에 성공적인 제도였고, 현재도 효율적이며 믿을 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채와 별개로 또라이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무모한 모험과 실험을 더 많이 벌여야 한다. 대담한 아이디어들은 실제로 구현해 보기 전에는 괜찮은 것과 황당한 것을 구분할 길이 없다. 모험가들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 시키면 그 다음에 더 큰 회사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창안지를 영입해야 한다. 또는 모험가들이 직접 자기 회사를 키우거나. 그런 과정이 더 쉬워지고 더 많아져야 한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런 식으로만 건질 수 있다.

나는 미국에는 또라이들이 이것저것 황당한 짓거리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운동장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경제가 모방과 추격의 시대 이후 고전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P.162)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미등단 작가는 불이익을 당한다. 그 불이익의 내용은 미묘하다. '미등단 작가는 절대 안돼.'라는 팻말이 어디에 붙어 있지 는 않다. 아마 10년에 한번 나올 탁월한 작품을 쓴다면 등단 여부 와 관계 없이 주목을 받을 것이고, 문학계의 내부 사다리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면 불리한 처지에서 작가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둘째, 그런 불이익은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 없이도 발생한다. 문학 권력이라 불리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문학 담당 기자나 방송 작가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우리 출판사에서 나은 작가를 소개 해 달라. 그러지 않으면 재미없다.'라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출판사들은 수십 년간 성실하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작가 를 발굴하고. 그 작기들의 소설을 펴내고, 그 작품들의 성취를 설 명하는 비평을 쌓아 왔다. 그 작업의 진정성은 의심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문학의 어떤 가치와 영역이 그간 버텨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런 작업의 일관성과 품질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방송작가들은 '검증'이라는 단어로 설명했고, 신문기자는 '안심이 된다는 말로 표현한. 일종의 공신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권위가 되고, 그런 권위를 업은 신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 메커니즘 자체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나? 한국 사회가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 대우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흡사하지 않은가.

'비명문대 출신은 절대 안돼.'라는 팻말을 노골적으로 입구에 써 붙인 조직은 없다. 비명문대 출신도 능력과 실적이 굉장히 출중 하면 인정을 받는다.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승진하고, 조직의 장이 될 수 있다. 10년에 한번 나을까 말까 한 걸출한 인재라면. 그러나 그렇게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지 못하는 한 비명문대 출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미묘한 배제를 당한다. 그들은 종종 명문대 출신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합을 시작하지 못하며, 핸디캡을 져야 한다.

누군가의 악의가 없어도 그런 학벌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관문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부문에서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은 대학 나온 지원자가 조금 더 낫겠지.'라는 정도로만 생각해도 배제가 일어난다. '좋은 대학을 졸업 했다는 말은 종종 '지원자가 검증됐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외적으로 비명문대 출신을 발탁했을 때 인사권자는 '내가 맞게 판단한 걸까.'라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는 많은 이들이 명문대 졸업생 수준의 '일관성과 품질'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는 수십 년간 꾸준히 학업 능력이 뛰어난 입학생들을 받았고, 그 학생들은 대체로 비명문대 학생들보다 유리한 여건에서 잘 배웠다. 그들 중 상당수가 실력이 뛰어난 졸업생이 되어 사회로 나갔다. 이 역시 의심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명문대 졸업장은 일종의 품질 인증 마크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어떤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우리는 채용이나 승진에서 절대 학벌 차별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데, 아마 정말 그런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직이 몇 있다고 해서 비명문대 출신이 사회에서 당하는 배제와 불이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 둔다.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가 없어도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현재 아무도 악의가 없다. 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시험을 합격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넘어선 우월 의식을 를림없이 품고 있다. 과거에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미자격자, 무면허자로 몰아 배제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런 흉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싹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이런 구조에서 배제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기리라는 이야기다.

(P.284)

나는 그런 신비로운 권위들이 한국 사회 또한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문학 권력은 그런 신비로운 권위 중 하나다. 학벌도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신분도 그렇다. 그 신비로운 권위를 누리는 사람은 별 근거도 없는 우월감에 빠진다. 그 권위가 없는 사람은 그만큼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넘도록 부끄러워하며 살기도 한다. 중소기업에 취직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인생의 패배자라 여기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그 신비로운 권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려면 젊었을 때 공부 해라. '라고 부모가 자식들을 닦달하는 이유도 이거다. 그 신비로운 권위가 있으면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예비 배우자 집안에서 인정받는 정도까지 달라진다.

대체로 어떤 시험을 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신비로운 권위를 얻는다. 그 집단은 주류 문단일 수도 있고, 명문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일 수도 있다. 시험에 합격해서 그 단체에 들어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들어가고 나면 쉽게 퇴출되지 않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 단체 구성원이 되는 입시에 통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

이 신비로운 권위를 '간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P.289)

나는 이 책에서 장편소설공모전을 공채 제도와 비교했다. 두 제도는 모두 독특한 한국적 인재 채용 방식이다. 거액이 걸린 장편 소설공모전을 이렇게 많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나라는 달리 들어 본 적이 없다. 정부나 기업, 공공기관이 대규모 동시 시험을 통해 신입 사원을 뽑는 나라도 드물다.

두 제도는 장점이 많다. 우선 공정하다. 이때의 공정함은 기계적, 획일적인 공평과 중립을 말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지원자 이름을 가린 채 평가받는다. 본심에서는 같은 심사위원이 최종 후보지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서 당선자 또는 합격자를 고른다.

신뢰성도 높다. 주최 측은 이 제도를 통해 대체로 우수한 인재를 필요한 수만큼 뽑을 수 있다. 올해도, 내년도, 내후년도 그럴 수 있으니까 장기적인 인력 수급 계획을 세우는 데 유리하다. 지원자 들도 자신이 어떤 방식의 시험을 언제 어떻게 치르고 합격 발표는 언제쯤 날지 가늠할 수 있다. 내년이나 내후년에도 시험은 비슷하게 계속될 테니 몇 년 뒤를 내다보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 두 제도는 이런 식으로 업계의 안정적인 발전에 기여한다.

출판사와 작가 지망생, 기업과 취업 준비생은 구체적인 계약 없이도 신뢰 관계를 쌓는다. 이러한 상호 신뢰는 거의 공적인 것으로, 한국을 지 행하는 큰 기등이자 일종의 사회 계약이다. '능력주의에 입각한 공개 선발 제도와 그에 대한 승부이라는 신화 덕분에 한국 사회의 각종 연고주의와 당파성이 그나마 옅어진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래서 '사기업에서는 누구를 어떻게 뽑든지 기업 권한이다.'라는 말은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알수 없지만, 이렇게 당선 또는 합격된 사람들은 자신을 선발한 제도의 공정함과 효용성을 더욱 굳게 믿게 된다. 그들 입장에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르는 정당한 보상을 경험한 셈이다. 속으로는 '몇 가지 흠결이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장점이 더 많은 제도잖아?'라고 여기게 된다. 밖에서 보면 꼭 시스템에 진심으로 '충성 '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자기가 속한 집단과 그 집단을 떠받치는 제도에 대한 평가가 외부와 달라진다.

​(P.423)

어느 순간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을 전부 자신보다 못하다고 얕보게 되기 쉽다. 여기서부터는 단점이다. 그렇게 우월감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집단이 생겨난다. 그런 집단이 여러 가지 기회와 자원까지 배타적으로 누린다면 누가 봐도 새로운 귀족 계급이다. 실제로 이들의 말과 행동, 내부 규칙과 문화는 옛 귀족 들을 닮아 간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같은 식으로 귀족 안에서도 등급이 있었듯이, 시험으로 선발된 이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곤 한다.

자기 인식이 외부와 멀어지는 만큼 내부 결속력은 강해진다. 그런 결속력은 이 엘리트 계층 내부의 경쟁을 저해한다. 이곳에 들어올 때 적용된 능력주의는, 그 안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종종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기수 문화'다. 매해 시험을 통해 등용 된 이들이라 누가 선배이고 누가 후배인지가 명확하다. 선배와 후배는 자질은 비슷하지만 선배가 경험이 더 많으므로 이끌거나 지도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합의를 다들 대체로 따른다.

그러나 가정이 잘못됐다. 애초에 선발 시험이 완벽하지 않았으므로 무능력한 사람도 더러 뽑히고, 당선되거나 합격할 때에는 유능했지만 이후에 노력을 하지 않아 평범해진 사람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현재 기준으로는 유능하다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부 경쟁이 없기에 이런 이들이 도태되지 않고 성안에 계속 머문다. 심지어 자신보다 유능한 후배들을 이끌고 지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조직 또는 업계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경쟁을 할 이유가 없으니 다들 게을러지고, 거기에 무능한 선배들이 발목을 잡고. 그런 선배를 보며 더 의욕을 잃는다. 무능한 선배들은, 자기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유능한 후배를 건방지다며 깔아 뭉개기도 한다. 그런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자를 찾거나 끼리끼리 뭉쳐야 한다. 실력이 아니라 인맥을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지며 파벌이 생긴다.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엘리트를 모아 놓기는 했으나 외국의 같은 직업군에 비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외부 세상이 어떻게 변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험의 분별력과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시험으로 자신들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423)

몇몇 사람들은 인재 선발 제도를 확 갈아엎어서 그런 사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모전을 없애거나 시험 대신 전문대학 원을 거치는 제도로 바꾸거나 국립대를 모두 통합하거나 하는 식의 출입구를 동문에서 서문으로 바꾼다 한들, 또는 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복잡하게 추가한다 한들 성벽을 둘러싼 차별은 달라지지 않는다. 간판을 다 없앤다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표식을 찾아낼 것이다. 성이 높이 서 있고 성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한. 새로운 간판 후보는 무궁무진하다.

(P.427)​

정보 확대는 적은 비용으로 큰 파급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그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평가와 선택을 맡긴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기도 하다. 정보 공개에 반발하는 세력 은 있겠지만, 그에 따른 논란이 예컨대 사회 안전망 구축에 필요한 증세 논쟁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정보 확대의 여파는 한 업계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곳곳이 보다 투명해지면 자연히 그만큼 사회가 정의로워질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도 두터워진다. 한국사회의 논의 수준도 한 단계 높아지지 않을까 한다. 쓸 만한 데이터가 부족하다 보니 어떤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찬반 양편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을 전시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식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흔하다.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방식은 이제부터 연구해야 한다. 당장 어떤 묘책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문제를 무척 낙관적으로 본다. 우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운영하고 가공하는 일이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고 쉬워졌다. 그리고 이 작업은 한번 임계점을 넘으면 그 뒤로는 거의 비가역적일 것이다. 의미 있는 기록과 분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런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생길수록 정보 공개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진다.

어떤 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정보를 쌓고 의미 있게 엮고 공유하고 활용하는 일이 하나의 공동체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한국 사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기회도, 방법도 있다고 믿는다.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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