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임마누엘 칸트 / 이원봉 / 책세상 / 206쪽

(2018. 8. 16.)

오늘날 우리는 인간 복제, 안락사, 낙태, 동물의 권리, 사형 제도, 테러리즘, 동성에 등 수많은 도덕적 문제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인간이라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살든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피할 수 없고, 현대 사회라고 해서 그 요구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인간 외에는 그 무엇도 절대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도덕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보다, 오히려 도대체 도덕성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가 더 쉬운 것, 그토록 치열한 논쟁을 거쳐도 '도덕의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고,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도덕성은 문화에 따라, 계급에 따라. 집단에 따라, 개인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애당초 도덕성이 있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오만과 허영에서 비롯한 '망상'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덕성은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정작 지신은 죽어간 젊은 청년의 이야기에서, 아무런 대가도 비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삶에서, 극심한 장해를 딛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모진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에서,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우리는 매일매일 도덕성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P.7)

수많은 도덕 철학자들의 논쟁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매일매 일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존경심을 표하는 이 '도덕성' 이야말로 칸트가 도덕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바로 그것이다. 도덕성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을 뛰어넘는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일상적이고 평범한 '도덕 의식' 만 있으면 된다. 칸트는 만약 이 세상에 '도덕성' 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도덕성일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도덕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도덕적' 이라고 평가하고 그 가치를 존경할 때, 거기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존경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도덕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성의 근거'가 어떻게 인간을 움직여 '도덕적 행위' 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는 평범한 도덕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확실한 기초를 확인함으로써 다시는 섣부른 회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 이것이 칸트의《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Gmnd1egungzurMetapbikderSitten》가 노리고 있는 전부다.

(P.8)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칸트의 주저인《순수 이성 비판Kritikderreinen vernunft》(1781)이 출판된 지 4년 뒤 인 1785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오랜 침묵 끝에《도덕 형이 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를 통해 자신의 도덕 철학을 완결된 저서의 형태로 내놓았고, 그 뒤로 《실천 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과《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1797)이 발표됨으로써 그의 도덕 철학의 전 체계가 왼성되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칸트의 저작들에 비해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으며, 특히 제1장과 제2장은 칸트의 이론 철학에 대한 예비 지식 없이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히는 '도덕성'을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적인 사상이 빠짐 없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점 때문에《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는 칸트의 도덕 철학을 이해히는 데 그야말로 기초가 되어왔다. 모든 위대한 사상이 그렇듯, 칸트의 도덕 철학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도덕적 문제' 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칸트의 도덕 철학을 비판하거나 수용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 이것만으로도 오늘의 우리가《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를 읽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P.10)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가지 학문, 즉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분류는 주제의 본성에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더 개선할 점은 없고 다만 분류의 원칙만 덧붙이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분류를 확실하게 완성하고,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하위 분류를 올바르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의 모든 인식은 내용적이어서 어떤 한 객체에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형식적이어서 객체를 가리지 않고 지성과 이성 그 자체의 형식, 그리고 사유 일반überhaupt의 보편적 규칙에만 몰두하거나 한다. 형식적인 철학은 논리학으로 불리지만, 내용적인 철학은 특정한 대상과 그 대상이 따르는 법칙에 관련되고,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이 자연의 법칙이거나 아니면 자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 관한 학문은 자연학이고, 자유의 법칙에 관한 학문은 윤리학이다. 앞의 것을 자연론, 뒤의 것을 도덕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논리학경험적인 부분,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사유의 법칙이 경험에서 경험에서 가져온 근거에 의지하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그런 경험적인 부분이 있다면, 지성이나 이성을 위한 규준, 모든 사유에 적용되고 증명되어야 하는 규준인 논리학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연 철학이나 도덕 철학모두 경험적인 부분을 가질 수 있다. 자연 철학은 경험의 대상인 자연에게 법칙을 정해주어야 하고. 도덕 철학은 본성에 영향을 받는 한에서 인간 의지에게 법칙을 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법칙은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이 발생하는 법칙이고, 뒤의 법칙은 종종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고려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이 발생해야만 하는 법칙이다.

​ 경험이라는 근거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철학은 경험적인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고, 반면에 오직 선험적a prion 원칙 들로만 가르침을 제시히는 모든 철학은 순수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순수한 철학이 단지 형식적이기만 하다면 논리학이라고 한다. 반면에 지성Verstand의 특정한 대상들에 한정된다면 형이상학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자연 형이상학도덕 형이상학이라는 두 가지 형이상학 개념이 생겨난다. 자연학은 경험적인 부분도 갖지만, 이성적인 부분 또한 갖는다. 윤리학도 마찬가지일 텐데, 윤리학에서는 특히 경험적인 부분을 실천적 인간학이라고 하고, 이성적인 부분을 원래의 도덕Moral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5)

훗날 도덕 형이상학을 내놓기에 앞서. 나는 이 '기초 놓기'를 먼저 내놓는다 이미 출간된《순수 사변이성의 비판Kitik der spekulativen vemunfi〔순수 이성비판〕》이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 놓기' 인 것처럼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은 바로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 놓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은 순수 사변이성의 비판만큼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인간 이성을 이론적으로 순수하게 사용할 때는 매우 변증적이지만. 도덕적인 것에서는 아주 평범한 지성이라 해도 쉽게 정확하고 충분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나는 순수 실천이성의 비판이 완성될 경우. 그것이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 공통의 원칙 안에서 하나 임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결국은 적용될 때만 구별될 뿐인, 동일한 하나의 이성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그렇게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데, 그렇게 하려면 전혀 다른 방식을 고려해야 하고 독지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수 실천이성 비판이라고 이름 짓는 대신에,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라는 이름을 쓴다.

(P.21)

(온전한 가치로서의 선의지)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성취나 목적과 상관없이〕그 자체로 볼 때, 어떤 한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나아가 모든 경향성을 합한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행복해지기 위해〕그 선한 의지가 실행하는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존경받아야 한다. 운명이 특별히 미워했기 때문이든 자연이 계모처럼 인색하게 차려주었기 때문이든,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도저히 끝까지 성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성 되지 않고 선한 의지만이(물론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닿는 한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서)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보석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빛날 것이다

(P.28)​

(선의지 원리)

의지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선하다고 불리기 위해서, 그 법칙을 표상하는 것이 거기에서 기대된 작용을 고려하지 않고도 의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법칙이란 도대체 어떤 종류일 수 있는가? 내가 어떤 법칙을 따르면서 의지에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충동을 의지에서 제거했기 때문에, 행위라는 것 전부가 보편적으로 '법칙에 맞는다'는 것만 남았는데. 이것 만이 의지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준칙이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 또한 바랄 수 있도록 오직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순히 '법칙에 맞음' 이라는 것 전부는([구체적으로〕어떤 행위들을 규정하는 어떤 법칙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의지의 원칙이 되는 바로 그것이며. 의무가 결코 공허한 망상과 변덕스러운 개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의지에게 원칙이 되어야만 하는 바로 그것이다. 평범한 인간 이성 역시 실천적인 판단을 할 때는 이 원칙에 철저히 따르며. 언제나 앞서 말한 원칙을 염두에 둔다.

(P.39)

나의 '하려고 함' 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자상하게 알려주는 통찰력이 전 혀 필요치 않다. 세상살이에 능숙하지 못하고, 살아 가면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물을 뿐이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너 또한 바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준칙을 내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너나 다른 사림에게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원칙으로서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주기'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은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주기' 에 직접적인 존경심을 가지라고 나에게 강요한다. 나는 아직도 그 존경심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는(이것을 철학자가 연구했으면 한다) 통찰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잘 알고 있다. 경향성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그런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의무란 바로 '실천적인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때문에 내가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자, 또한 모든 가치를 능가히는 가치를 지닌. 그 자체로 선한 의지가 따라야 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동인 〔경향성〕에 우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P.42)

모든 도덕 개념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자리와 근원을 가지며, 가장 평범한 인간 이성이나 고도로 사변적인 인간 이성이나 이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도덕 개념은 경험적인, 그래서 단지 우연적인 인식에서 뽑아낼 수 없다. 도덕 개념은 그 근원이 이렇게 순수하기 때문에〔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인식에서 뽑아낼 수 없기 때문에〕존엄성을 갖고, 우리에게 최상의 실천적인 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경험적인 것을 덧붙임으로써 언제나 그만큼 도덕 개념의 진정한 영향력과 행위의 무한한 가치를 빼앗게 된다. 그 도덕 개념과 법칙들을 순수한 이성에서 얻어내 순수하고 잡티 없이 제시히는 것, 바로 이 실천적인 또는 순수한 이성 인식 범위 전체를, 즉 순수한 실천적인 이성의 능력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사변에만 매달리는 이론적인 의도에서도 필요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P.56)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오직 이성적인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 즉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을 갖는데 이것이 의지이다. 행위를 법칙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법칙에 따라 행위하기 위해서는〕이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의지는 바로 실천적 이성인 것이다. 이성이 의지를 불가피하게 결정한다면〔의지가 항상 이성을 따른다면〕, 그러한 존재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되며 또한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경우의〔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인〕의지는, 이성이 경향성을 떠나, 필연적으로 실천적이라고 인식하는,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인 것이다.

(P.58)

모든 명령법가언적〔조건적〕이거나 아니면 정언적〔무조건적〕으로 명령한다. 가언적 명령법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달성하려고 하는(또는 달성하고 싶다고 바랄 수 있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언적 명령법은 행위를 그 자체로서 목적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명령법일 것이다.

그 행위가 단지 다른 것에 대해 수단으로써만 선하다면 그 명령법은 가언적이다.〔반면에〕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하다고 생각되고, 띠라서 스스로 이성을 따르는 의지에 필연적인 것으로, 그 의지의 원칙으로 생각된다면 그 명령법은 정언적이다.

가언적 명령법은 그 〔명령된〕행위가, 어떠한 가능한 의도나 현실적 의도를 고려할 때 선하다는 것만을 말한다. 가능한 의도의 경우 가언적 명령법은 개연적problematisch 실천 원칙이고, 현실적 의도의 경우, 실연적assenorisch 실천 원칙이다. 정언적 명령법은 그〔명령된〕행위가 어떤 의도와도 상관없이, 즉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선언하므로 필연적apodiktisch (실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P.60)

의무를 위반할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사실은 우리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바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준칙에 반대되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기를 바란다. [의무를 위반할 때]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또 이번 한 번만) 우리의 경향성을 위해서,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그 법칙에 예외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P.76)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도덕 법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심을 발견해서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제로 도덕 법칙에 관심을 갖는데. 우리 안에 있는 그 관심의 기초가 되는 것을 '도덕적 감정' 이라 부른다. ​몇몇 사림들이 이것[도덕적 감정〕을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표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오히려 도 덕적 감정은 법칙이 의지에 주관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간주 되어야 하고, 그것의 객관적인 근거들을 주는 것은 오직 이성뿐이기 때문이다.

(P.135)

자연에 관해 이성을 사변적으로〔이론적으로〕사용하면, 세계의 어떤 최상의 원인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게 된다. 자유를 의도해서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해도 역시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에 이르지만, 다만 이성적인 존재가 이성적인 존재로서 하는 행위의 법칙만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 본질적인 원칙은, 그 필연성이 의식될 때까지 자기의 인식을 밀고나가 것이다(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성의 인식이 아니 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이성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떤 것이 지금 있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나야 하는 조건에 근거하지 않는다면〔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이성은 지금 있거나 일어나고 있는 것의 필연성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의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무엇인지 이렇게 끊임없이 물어 들어가도 이성의 만족은 언제나 멀리 미루어질 뿐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것' 을 끊임없이 찾지만, 개념으로 파악하게 하는 어떤 수단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전제와 조화를 이루는 개념을 찾아낼 수 있기만 해도 아주 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실천 법칙(그러한 것은 정언적 명령법일 수밖에 없다)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을 이성이 개념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가 도덕성의 최상 원칙을 연역한 것에 흠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인간 이성 일반이 받아야 할 비난인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어떤 조건에 의해, 즉 관심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이성을 나쁘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도덕 법칙, 즉 자유의 최상의 법칙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명령법[정언적 명령법〕이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개념을 통해서는 파악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한 수 없다는 것만은 파악한다 이것이 인간 이성의 경계선까지 원칙들을 추구하는 철학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전부이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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