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Metaphysik der Sitten)(1785)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4호)
김재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33쪽
(2018. 8. 14.)
인간에 대한 규명을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던 칸트는 그의 도덕철학을 통해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철학에 대한 칸트의 관심은 전 비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초의 본격적인 도덕철학에 관한 저술은 1785년에 출판된 『윤리형이상학 정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의 머리말에서 칸트가 밝히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학문, 즉 넓은 의미의 철학은 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와 관련된 윤리학이 선험적 학문으로 성립하는 한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따라서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일차적인 목표는 ‘모든 도덕성의 최성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윤리학을 선험적인 학으로서 정초하려는 칸트의 노력이 이 저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이론이성이 자연법칙의 입법자였다면 이제 실천이성을 가진 우리는 동시에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자발적인 존재이다.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한 근대의 정신이 칸트의 이러한 윤리사상을 통해 정점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칸트의 도덕철학적 사유의 여정을 추적하는 첫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P.0)
이론적인 초월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의욕과 행동의 심리적 조건들, 예컨대 볼프철학의 “일반 실천 철학”(allgemeine praktische Weltweisheit)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공통적인 원리에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의 통일을 서술해야만 하는 ‘실천이성비판’과 ‘윤리 형이상학’은 뒤의 과제로 남겨두고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칸트는 단지 ‘모든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das oberste Prinzip aller Moralität)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다음의 세 개의 절로 이루어진다. 첫째: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 둘째: 철학적 이성인식으로부터 윤리 형이상학으로의 이행. 셋째: 윤리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천 이성 비판으로의 이행.
(P.21)
‘의지’(Wille)는 객관적인 이성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간의 의지는 종종 객관적인 실천 법칙에 일치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실천 법칙은 이러한 인간에게 명령의 형태를 띠고 ‘지시명령’(Gebot)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도덕적인 명령은 가언적(hypothetisch)으로, 즉 어떤 특정한 목적에 유용한 행위를 지시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정언적(kategorisch)으로, 그러니까 무조건적(unbedingt)으로 지시명령한다. 가언 명령은 (기술적인) 숙련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윤리성의 법칙이다.
(P.23)
윤리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학문으로 성립하는 한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이어야만 한다. 이론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듯이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한다. 즉 인간 지성이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할 때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데, 특정한 대상을 다루는 물리학과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원리에 관한 학문이고자 할 때, 이로부터 자연 형이상학과 윤리 형이상학의 이념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목표는 ‘모든 도덕성의 최성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P.29)
선의지(ein guter Wille)(善意志)
‘선의지’라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이 세계 내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 조차도 유일하게 그 자체로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의지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무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어질 수 있기에 모든 기질상의 성질들과 행운의 자질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이들의 유용성이나 결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는 것이다. 칸트는 선의지라는 이러한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으로부터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P.29)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定言命令)
칸트는 의지에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두 가지 종류, 즉 가언적(hypothetisch)(假言的)인 것과 정언적(kategorisch)(定言的)인 것으로 구별한다. 가언적 명령이,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다른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다. 즉 가언 명령이 기술적인 숙련의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그 자체로 윤리성의 법칙이다. 법칙의 보편성과 이 법칙에 맞게 행위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포함하고 있는 정언 명령의 순전한 개념이 자신의 정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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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언명령 : 칸트철학에서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가리킨다
(P.30)
자유(Freiheit)
칸트에 따르면 자율성은 윤리성의 최상의 원리이며 모든 사이비 원리들의 원천인 타율성과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윤리성을 하나의 환상적인 이념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의욕의 순전한 형식을 자율로서 근저에 놓아야한다. 결국 선의지로부터 말미암은 윤리성이 실제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유의 개념이 전제되어진다면 윤리성의 원리는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분석적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으로 보인, 자기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러한 의지’라는 것은 선의지의 분석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없는 종합명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합명제는 단적으로 선한 의지와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매개해줄 수 있는 제3의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칸트는 이러한 매개개념으로 적극적 의미에서 의 자유, 즉 자율을 제시한다.
(P.30)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머리말(Vorrede)에서 먼저 전통적인 학문의 분류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칸트는 순수 도덕철학으로서의 ‘윤리 형이상학’을 실천적 인간학이나 도덕적 심리학으로부터 엄격하게 구별해낸다. 이론적 초월철학이 순수 사유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 형이상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순수 실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노리는 바도 바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놓는 작업으로서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목표는 ‘모든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를 찾아내어 이를 확정하는 것이다.
(P.41)
모든 이성 인식을 ‘질료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먼저 ‘논리학’은 구체적인 객관들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을 다루는 형식적 철학이라는 점에서 후자에 속한다. 반면에 전자에 해당하는 구체적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따라야할 법칙에 관해 다루는 질료적 철학은 이들이 다루는 법칙의 종류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눠진다. 즉 다루어지는 법칙이 자연의 법칙이냐 자유의 법칙이냐에 따라 질료적 철학은 자연이론과 윤리이론으로 나눠진다. 물리학이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윤리학은 바로 자유의 법칙을 다루는 윤리이론에 해당한다.
(P.42)
논리학은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만을 다루고 그법칙을 경험으로부터 취해 올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경험적인 부분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현상과 인간의 의지를 그 대상으로 하는 물리학과 윤리학은 각각 경험적인 부분을 가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물리학은 경험의 대상인 자연에게 법칙을 부여해야하고 윤리학은 인간의 의지가 자연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그 의지에 법칙들을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논리학을 제외한 질료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경험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자신의 이론을 전적으로 선험적 원리로부터 구성해 내는 경우에는 ‘순수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 또한 순수 철학이 순전히 형식적인 것일 때는 논리학이라 칭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 지성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할 때는 ‘형이상학’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들을 다루는 물리학과 윤리학은 그것이 선험적 원리에 관한 학문이고자 할 때, 이로부터 형이상학의 이념, 즉 자연 형이상학과 윤리 형이상학의 이념이 생겨나게 된다.
칸트는 모든 산업의 분야가 분업에 의해 발전했듯이 철학의 경우에도 이것(분업)이 요구되어짐을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윤리학의 경우에도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이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물리학이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가지듯이 윤리학도 양자를 가지게 되는데 윤리학에서는 ‘실천적 인간학’(praktische Anthrophologie)이 전자(경험적인 부분)에 해당한다면 후자(이성적인 부분)는 ‘도덕학’(Moral)이라 부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학문은 그 본성상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잘 구별하여 경험적인 것 앞에 이성적인 것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험적인 물리학 앞에 자연 형이상학이 요청되어진다면 윤리학의 경험적 부분인 실천적 인간학 앞에는 윤리 형이상학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성적 부분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그 자신이 얼마만큼의 일을 수행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원천으로부터 선험적인 원리를 찾아내는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모든 경험적인 것을 배제해야만 한다. 이것이 윤리학에서 분업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P.44)
칸트는 윤리 형이상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두 가지를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① 우선 윤리 형이상학은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사변적인 동인에서 볼 때 필수불가결이다. ② 다른 한편으로 윤리 형이상학은 최상의 규범을 제공해줌으로써 인간의 행위가 부패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만약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의 원천은 심리적 동인이 아닌 순수 철학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순수 원리들을 경험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혼동하는 것은 철학에 속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이 분리된 학문으로 진술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이성인식과 구별된다면 도덕철학은 더더욱 그러해야만 한다. 따라서 도덕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순수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하고 이런 점에서 윤리 형이상학은 필수불가결이라고 할 수 있다.
(P.46)
칸트는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책의 제목을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라 이름 붙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정초’(Grundlegung)라는 말이 ‘기초를 놓음’을 뜻하듯이 이 저서의 목적은 결국 장차 저술할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이러한 예비적 작업은 ‘순수 실천 이성 비판’에 다름 아니다. 마치 순수 사변 이성의 비판이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이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 이성 비판’이라는 표현 대신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칸트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이성이 순전히 이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항상 변증적이 된다는 문제점으로인해 순수 사변 이성 비판이 반드시 필요한 반면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은 순수 사변 이성과 같이 그렇게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천 이성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동의 원리에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의 통일이 서술되어 야만 한다. 비록 이론과 실천의 영역이라는 적용에서의 구별은 있을 지라도 오직 하나의 동일한 이성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윤리 형이상학은 사실 매우 대중적이고 평범한 지성이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기에 윤리 형이상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은 순수 실천 이성 비판과 분리시키는 것이 오히려 유용하다.
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이 책에서의 윤리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적 작업을 칸트는 ‘순수 실천 이성 비판’이 아닌 ‘윤리 형이상학 정초’라 부르고 있다.
(P.48)
칸트는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책의 목적과 탐구 방법에 대해 밝히고 있다. 다른 모든 윤리적 연구들과는 구별되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만의 고유한 과업은 ‘도덕성의 최상의 원리’(das oberste Prinzipder Moralität)를 탐색(Aufsuchung)하고 확립(Festsetzung)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 책에서 취한 방법은, 우선 보통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는 데에 이르는 분석적인 길을 취하고, 다음으로 다시 거꾸로 이 원리의 검토 및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출발하여 그 원리가 사용되고 있는 보통의 인식에 이르는 종합적인 길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탐구방법에 의거해서 칸트는 이 책의 목차에 해당하는 세 개의 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제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 제2절: 대중적 도덕철학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 이행. 제3절: 윤리 형이상학에서 실천 이성 비판으로의 마지막 발걸음.
(P.50)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첫 번째 절(Abschnitt)은 ‘선의지’(einguter Wille)에 대한 칸트의 유명한 정의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선의지’라는 것은 이 세계 내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 조차도 유일하게 그 자체로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의지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무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어질 수 있기에 모든 기질상의 성질들과 행운의 자질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이들의 유용성이나 결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는 것이다.
(P.52)
칸트에 따르면 선의지는 그것의 선함의 이유를 다는 것에서 부터는 찾을 수는 온전한 가치이다. 즉 선의지는 선한 의지가 생기게 되는 다른 동기에 의해서나 혹은 선의지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함을 의욕하는 것만으로 인해,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따라서 선의지는 그로 인해 생겨나는 어떠한 경향성보다, 아니 모든 경향성들 전체를 위해 이루어 낼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
(P.55)
선의지의 의미를 ‘의무’라는 개념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칸트는 먼저 ‘의무로부터’(aus Pflicht)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만약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는 어떤 경우인가라고 묻는다면 칸트는 단지‘의무로부터’ 생겨났을 경우라고 답한다. ‘의무에 맞는’(pflichtmäßig) 행위가 모두 도덕적 가치의 영역에 들어갈 수는 없다. 만약 어떤 행위가 ‘의무에 맞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이를 행하는 주체가 그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경향성’(unmittelbare Neigung)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경우는 단지 사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지 결코 도덕적인 의무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에게 있어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의무에 맞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의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듯이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단순히 ‘의무에 맞는’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칸트는 단지 ‘의무로부터’의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P.62)
마음의 경향성(Neigung)으로부터 말미암은 인간의 행위는 칸트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 이를 칸트는 동정심(Symphathie)과 의무의 관계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가장 선한 마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관대함이나, 자비, 인간애와 같은 동정심도 그것이 ‘의무로부터’(aus Pflicht) 시작된 행위가 아니라면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단호한 생각이다.
아무리 공익적인 행위라도 의무로부터가 아닌 공명심이라는 경향성으로 말미암았다면 도덕적일 수 없듯이, 동정심으로부터 말미암은 선한 행위도 의무로부터가 아니라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박애주의자가 자신의 불행과 슬픔으로 사람들에 대한 모든 동정심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타인을 위한 자신의 가능한 자선을 행할마음의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aus Pflicht) 자선을 행한다면, 그때 비로소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칸트는 말한다.
(P.64)
의무에 관한 두 번째 명제를 칸트는 이렇게 정식화한다.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하게 되는 준칙(Maxim)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행위의 대상의 현실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욕구능력의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Prinzip des Wollens)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도덕적 가치가, 기대하는 행위들의 작용결과와 관계된 의지 속에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의지의 원리’(Prinzip des Willens)에만 있을 수 있는데, 이 ‘의지의 원리’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 결과할 수 있는 목적들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이 의지로부터 모든 내용의 원칙이 제거되고,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면, 의지는 ‘의욕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의무의 두 번째 명제이다.
(P.66)
칸트는 의지에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두 가지 종류, 즉 가언적(hypothetisch)인 것과 정언적(kategorisch)인 것으로 구별한다. 가언적 명령을 칸트는,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에 반해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으로 구별한다. 즉, 가언 명령이 기술적인 숙련의 규칙이거나 실용적인 영리함의 충고라면, 정언 명령은 윤리성의 법칙이다.
(P.77)
칸트는 먼저 실천 법칙으로서의 명령이 요구하는 행위가 수단으로서 선한 것이냐 아니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냐에 따라 가언적 명령과 정언적 명령을 구별한다. 실천 법칙을 표현하는 모든 명령은 칸트에 따르면 의지의 원리에 따라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공식들이다. 그러나 이 명령이 요구하는 행위가 단지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서, 즉 수단으로서 선할 때, 그 명령은 가언적이다. 반면에 행위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된다면,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된다면, 그 명령은 정언적이다.
(P.78)
(첫번째 정식)
칸트에 따르면 정언 명령은 하나의 유일한 명령법으로 다가온다. 그 내용은 우리가 준칙에 따라 행위하되, 주관적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를 칸트는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정식화 시키고 있다.
(P.89)
(두번째 정식)
칸트는 의무의 보편적 명령이 말하는 바는 주관적인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의해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과 같이 행위하라는 것이다. 정언 명령의 두 번째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의무의 보편적 명령을 칸트는 따라서 이렇게 정식화 한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이러한 두 번째 정식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 ‘완전한 의무’, ‘불완전한 의무’라는 네 가지 경우에 나누어서 설명한다. 이를 통해 칸트는, ‘사람들은 우리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평가의 규준(Kanon)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P.90)
(세번째 정식)
모든 인간 행위의 주관적 원리이자 동시에 객관적 원리인, 최상의 실천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칸트는 이로부터 도출된 실천 명령을 정식화한다. 즉,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 바로 최상의 실천 원리로부터 도출된 정언 명령이다.
(P.101)
자유로부터 자율을 도출하고 이로부터 다시 도덕법칙을 도출하는 순환 논증의 형식은 제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칸트의 논증은, 자유의 이념을 도덕법칙의 성립을 위한 근거로 전제하고, 이 도덕법칙을 다시 자유로부터 추론해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을 자유롭다고 할 때에는 자신을 예지계에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만약 의무 아래에 있다고 할 때에도 이는 자신을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오성세계에도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적 존재자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로운 것을 의식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가 오성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연법칙에서부터 벗어난 의지의 자율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율과 함께 도덕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P.124)
정언명령은 선험적 종합명제를 표상한다. 정언명령은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가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의지위에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험적 종합명제로서의 실천명제의 가능성은 자연에 대한 선험적 종합명제의 가능성에 유추하여 이해될 수 있다. 즉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이 의거하는 선험적 종합명제들은, 감성세계에대한 직관들에, 그 자체로는 법칙적 형식 일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지성의 개념이 덧붙여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감성의 직관들이 지성의 개념에 일치하도록 지성이 직관들을 종합함으로써 선험적 종합명제는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감성적 욕구에 의해 촉발되는 감성세계속의 의지가 오성세계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유로운 의지가 덧붙여짐으로써 실천적 명제는 선험적 종합명제로서 가능하게 된다.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