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김욱동 / 민음사 / 204쪽
(2018. 7. 23.)
“그리고 가장 훌륭한 어부는 할아버지이시고요."
“아니다. 난 나보다 뛰어난 어부를 알고 있어."
“케바. 고기를 잘 잡는 어부는 많이 있고, 또 아주 뛰어난 어부도 더러 있죠. 하지만 할아버지에 비길 만한 사람은 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고맙구나. 넌 나를 기쁘게 해 주는구나. 너무 큰 고기가 걸려서 우리 생각이 틀리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할아버지 말씀대로 전처럼 여전히 힘이 세시다면, 그렇게 대단한 고기가 어디 있겠어요.”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요령을 많이 알고 있는 데다 배짱도 있지.” 노인이 말했다. “내일 아침 기운이 나도록 이제 그만 주무시도록 하세요. 전 가져온 그릇을 '테라스'에 돌려주겠어요.”
“그럼 잘 가거라. 내일 아침에 깨우러 가마.”
“할아버지는 제게 자명종 같아요.” 소년이 말했다.
“내 나이가 자명종인 거지. 한데 늙은이는 왜 그렇게 일찍 잠에서 깨는 걸까? 하루를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일까?” 노인이 대꾸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나이 어린 애들은 늦도록 곤하게 잠을 잔다는 것뿐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시간에 늦지 않도록 깨워 줄게.” 노인이 말했다.
(P.25)
노인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소년이었을 시절에 본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꾸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긴 해변과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해안선, 그리고 드높은 우뚝 솟은 커다란 갈색 산들이 꿈에 나타났다. 요즈음 들어 그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이 해안가를 따라 살았고, 꿈속에서 파도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파도를 해치며 다가오는 원주민의 배들을 보았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갑판의 타르 냄새와 뱃밥 냄새를 코끝으로 맡았으며, 아침이면 육지 미풍이 싣고 오는 아프리카 대륙의 냄새를 맡았다.
여느 때 같으면 노인은 뭍에서 불어오는 미풍 냄새를 맡으면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고 소년을 깨우러 갔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뭍에서 불어오는 미풍 냄새가 너무 일찍 풍겨 왔고,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도 너무 이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계속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섬들의 하안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더니 카나리아 군단의 여러 항구와 정박지가 나타났다.
노인의 꿈에는 이제 폭풍우도, 여자도, 큰 사건도, 큰 고기도, 싸움도, 혐겨루기도, 그리고 죽은 아내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여러 지역과 해안에 나타나는 사자들 꿈만 꿀 뿐이었다. 사자들은 황혼 속에서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뛰어놀았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 이 사자들을 사랑했다. 그는 한 번도 소년의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문득 눈이 뜨이자 열린 창으로 달을 바라보고는 말아 놓은 바지를 풀어 입었다. 판잣집 밖에서 소변을 본 뒤 소년을 깨우려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새벽 한기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몸을 떨다 보면 조금씩 몸이 따뜻해지고 곧 바다에서 노를 젓게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P.26)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P.34)
노인은 자신의 낚시에 걸린 큰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별나게 구는 놈은 머리털 나고 지금이 처음이지 뭐야. 날뛰지 않는 것을 보니 여간 똑똑한 놈이 아닌걸. 이놈이 날뛰거나 마구 요동치는 날에는 꼼짝없이 내가 끝장나고 말 텐데. 하지만 아마 전에도 여러 번 낚시에 걸린 경험이 있어 이럴 때는 지금처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자신의 상대가 오직 한 사람뿐이며 게다가 나이 든 늙은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야. 아무튼 굉장한 놈이야. 고기 살이 좋다면 시장에서 값이 많이 나가겠지. 미끼를 먹는 것도, 낚싯줄을 끌고 가는 것도 꼭 사내답게 하는군. 싸울 때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단 말이야. 저놈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필사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P.49)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북쪽에서 조각배를 향해 날아 왔다. 휘파람새는 수면 가까이 아주 나지막하게 날고 있었다. 노인은 새가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는 배의 고물에 가서 지친 날개를 쉬었다. 그러고 나서 노인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이번에는 좀 더 편안한 낚싯줄 위에 가서 앉았다.
“너 몇 살이냐? 이번 여행이 첫 나들이인 거야?” 노인이 새에게 물었다.
노인이 말을 걸자 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새는 너무 기긴 맥진한 상태여서 제대로 낚싯줄을 살펴볼 겨를도 없어 보였다. 가냘픈 발가락으로 낚싯줄을 꽉 움켜잡고 있는 동안 아래 위로 흔들거렸다.
"줄은 튼튼해. 아주 단단하다고. 간밤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그렇게 지쳐서야 되겠니.” 노인이 새에게 말했다. “새들은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새들을 노리고 바다까지 날아오는 매들이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해 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머지않아 매들에 대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실것 푹 쉬어라, 작은 새야. 그러곤 뭍으로 날아가 인간이나 다른 새나 고기처럼 네 행운을 잡으려무나.” 그가 말했다.
밤 동안에 등이 뻣뻣했고 지금은 심한 통증까지 있었는데, 새에게 말을 걸고 나니 노인은 힘이 솟았다.
(P.55)
조금 전에 고기가 왜 뛰어올랐을까,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솟아오른 것 같아. 어쨌든 그 덕분에 얼마나 큰 놈인지 알게 되었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그놈한테 보여 주고 싶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놈은 쥐가 난 손도 보게 되겠지. 녀석에게 내가 실제보다 힘이 센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지. 어쨌든 그렇게 될 테니까. 저 고기 놈이 되어 보고 싶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직 내 의지, 내 지혜에 맞 모든 걸 갖고 싸우고 있는 저놈 말이야.
(P.65)
“하기야 저 고기도 내 친구이긴 하지.”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런 고기는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저놈을 죽여야만 해. 하지만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 뭐야.”
날마다 사람이 달을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아마 달은 달아나 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인간이 날마다 해를 죽이려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 우리는 운 좋게 태어난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인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큰 고기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록 연민의 정을 느낄 지라도 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저놈을 잡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저 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냐. 그럴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한 거동. 저런 위엄을 보면 저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어.
난 이런 일들에 대해선 잘 몰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바닷가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해.
(P.76)
좋은 일이 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P.104)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P106.)
“이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가서 잡기로 해요."
“그건 안돼. 내겐 운이 없어. 운이 다했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운은 제가 갖고 가면 되잖아요." 소년이 대꾸했다.
“네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상관없어요. 어제도 두 마리나 잡았는걸요. 하지만 전 아직도 배울 게 많으니까, 이제부턴 할아버지와 함께 나갈래요.”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