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이성비판)

김상현 / 아이세움 / 232쪽

(2018. 7. 28.)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 칸트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신. 영혼, 우주)에 관해 “해결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 이성의 운명이다.” 라는 답을 내놓는다. 가령 우주에 시작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시작이 있다'도 '시작이 없다'도 정답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인 한 그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렇게 특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신이 되려고 또는 절대 진리를 획득하려고 애쓴다. 과연 그런 일이 기능할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현재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신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존재자보다 열등하고 불완전하디는 것 또는 인간은 아직 절대 진리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인간이 신과 같이 될 것인지, 절대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진리를 발견하고 주장하려고 한다. 과연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확신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유한성은 어떤 이유나 조건 때문인가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이 책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칸트의『순수 이성 비판』을 다루었다. 학자들마다 칸트의 철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순수 이성 비판』 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이성의 운명에 대한 해명'을 다룬 책이라는 정답 아닌 정답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순수 이성 비판』 안에 서술된 '초월적 감성학' , '초월적 분석론' , '초월적 변증론' 등에 각각 '감성의 운명' , '지성의 운명' , '이성의 운명'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감성, 지성, 이성의 운명은 결국 칸트가 이전 형이상학을 새롭게 비판하였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여왕)의 운명' 이라고 해석하였다.

(P.8)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순수 이성 비판』을 대학 3학년 때 처음 읽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 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여돼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신경질이 났다. 도대체 책을 읽고 이해가 안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독한 자만심이 나의 내면에 똬리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을 도서관에서 살았다. 결국 '주석가' 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해설서를 읽고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인식' 이란 형이상학적 주제를 의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형이상학은 통상 아래의 같이 분류된다.

일반 형이상학: 존재론

특수 형이상학: 우주론, 영혼론, 신론

존재론은 존재 일반의 원리와 속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우주론은 예를 들어 우주에 시초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룬다. 영혼론은 영혼이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 신론은 신은 존재하는가리는 물음에서 시작하는 제반 물음을 따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 있고, 어떻게 또는 왜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에 대해 '본성적으로'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궁금증은 답을 얻는 순간 해소된다. 그런데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답을 얻을 수 없다면, 애초에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회피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헛짓만 한 셈이 아닌가?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회피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밤새도록 신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임을 칸트는 책의 첫머리에서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P.18)​

'비판'이라는 말의 유래를 염두에 두고 칸트는 '재판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판소는 '순수 이성'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므로 '순수 이성 비판'이란 일단 '순수 이성의 한계를 설정' 하는 작업 이다. 즉 순수 이성이 어디까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어디부터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는지를 확정하는 사변적(思辨的)작업을 수행하는 재판소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칸트가 내린 판결의 결과는 이렇다. 순수 이성은 형이상학이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경험을 넘어서 있는(초월적 또는 초험적) 영역들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경험의 세계에 관한 한 순수 이성은 옳은 판단을 내릴수 있다.

​ 그렇다면 왜 그냥 '이상 이라 하지 않고, '순수 이성' 이라고 하였을까? 이성이란 일반적으로 사유 능력을 말하는데, 순수하다는 것은 '경험의 때가 묻지 않았음'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수 이성이란 아직 세계에 대한 사유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의 이성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아직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완전한 신제품으로서의 컴퓨터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pc의 업그레이드는 본래의 새 pc의 기본 사양에 의해 그 한계가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유 능력도 후천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사양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순수 이성 비판』은 본래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에 어떠한 한계가 있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P.22)​

인간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법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기 위해 자신을 일단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초월한 상태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초월 활동과 반성 활동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비판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후대인은 물론 그 자신도 '비판 철학' , '초월 철학'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셸링이나 헤겔과 같은 칸트 직후의 철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반성 철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순수 이성 비판』은 이성이 이성 자신을 스스로 비판한 결과물을 집대성 한 책이다.

(P.23)​

인간이 대상 세계에 대해 어떠어떠한 지식을 가진다고 할 때 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근본 원리와 규칙, 한계 등을 다루는 철학을 '인식론'이라 하고. 존재 자체와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들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존재론' 이라 한다.『순수 이성 비판』은 이성이 대상을 인식하는 근본 한계와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에 관한 책으로 분류된다. 나아가 인식의 원리에 따라 존재가 다르게 이해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존재론' 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런 비판의 길을 찾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선대 철학자들의 성과를 넘나들면서, 규칙적인 산책을 하면서, 그는 많은 시간을 신음하면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존재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근원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뼈를 깎는 성찰이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결론이다. 왜냐하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 힌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백을 감내한 인간은 이제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성괴를 내세운다.

나는 남겨진 이 유일한 비판의 길에 의해서, 이전에 경험을 벗어난 이성의 사용 때문에 이성 스스로 일으켰던 모든 모순과 과오를 제거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인간 이성의 무력함을 핑계 삼아 이성의 물음들을 회피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이 자신에 대해 오해한 점을 발견한 뒤 이성이 완전히 납득할 만큼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애초에 칸트는 인간 이성이 '거부할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 , 즉 형이상학에 관한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대개의 경우 거부할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어떤 문제에 봉작했다면, 아마도 거기에서 포기할 것이다. 즉. 무력함을 핑계 삼아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고, 그 맞서는 방법으로 '비판' 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발견한 비판의 길을 통해 과연 그가 밝혀낸 인간 이성의 원리와 한계는 무엇일까?

(P.24)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묘지에 있는 칸트의 무덤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 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라는 묘지명이 새겨져 있다.

(P.45)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는 플라톤 이래로 진• 선 • 미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는 결국 자연의 객관적 법칙은 무엇인가, 실천적 • 도덕적 문제에 직면해서 인간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행위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또는 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이다. 플라톤을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 곧 모든 존재에 대한 궁극적 진리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진 • 신 • 미의 문제를 존재하는 대상들의 본질에 관한 문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 중심설에 대해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였듯이 칸트는 진리의 기준을 존재(대상) 중심에서 인식(인간)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는 것들의 진 • 선 • 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진 • 신 • 미를 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또는 진 • 선 • 미를 알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먼지 비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은 인간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 철학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P.46)​

『순수 이성 비판』,『실천 이성 비판』,『판단력 비판』은 칸트의 3대 비판서로 불리며, 이 3대 비판서를 통해 비판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칸트는 3대 비판서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희망 할 수 있는가' 라는 세 가지 물음으로 구분하였다.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 순서대로『순수 이성 비판』,『실천 이성 비판』,『판단력 비판』인 것이다. 순수 이성 비판』은 자연의 객관적 법칙이 성립하는 이유를 인간 인식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 증명한 인식론에 관한 책이며,『실천 이성 비판』은 인간 행위의 근본 법칙을 오직 선만을 행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에서 찾은 윤리학에 관한 책이다.『판단력 비판』은 미(美)와 자연에 내재한 원리가 합목적적인 조화임을 밝힘으로써 인간은 합목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추후 칸트는『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쓰는데, 혹자는 이 책까지 비판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진 • 선 • 미 • 성(聖)의 문제를 인간의 근본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명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종교 문제를 믿음(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논증적 증명)의 차원에서 해명한 것이다. 3대 비판서라고 부르든, 4대 비판서라고 부르든 칸트 철학의 핵심이 인간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이 가진 능력의 본성과 한계를 규명하려고 하였던 비판 정신에 있음은 변함이 없다.

(P.47)

'합리론'모든 지식은 이성에 의해 파악되며(이성주의), 이성은 지식을 경험으로부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본유 관념설) 근대 유럽 대륙의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합리론자들은 '원은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의 집합이다.' 나 '인간은 선을 행해야 한다.' 와 같은 지식은 원래부터 이성이 알고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이런 지식들이 경험과 학습을 통해 획득되고 익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합리론자들은 경험과 학습은 이미 이성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일깨워 주는 수단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대표적인 합리론자이며, 칸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합리론 계열의 철학자로 볼프와 바움가르텐이 있다.

(P.52)​

'경험론'인간의 모든 지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후천적으로 획득될 뿐이며, 본유 관념과 같은 선천적 지식은 없다고 주장하는 근대 영국 철학자들의 입장을 말한다. 통상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로 유명한 베이컨이 경험론의 효시로 간주되며, 로크, 버클리, 이 대표적인 경험론자로 꼽힌다. 경험론은 일반인의 상식에 부합하는 이론(이에 반해 합리론자들의 주장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을 펼침으로써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 서구 사회의 실용주의 또는 실증주의적 가치관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근대 경험주의는 홈에 이르러 '진리란 없다 는 입장 또는 '진리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는 없다'는 입장인 회의주의로 귀결된다. 경험주의가 회의주의로 귀결되는 이유는 '모든 지식의 원천이 경험에 있다' 는 그들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생각해 보자. 첫째,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존한다. 둘째, 경험은 심지어 동일한 대상에 관해 동일한 사람이 인식하는 경우일지라도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셋째, 그러므로 경험에 의존하는 지식에는 보편성이 없다. 넷째, 따라서 매 순간 다른 경험에 의존하는 경험적 지식은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편적 진리가 있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 해야만 한다. 이런 사유 과정을 통해 경험주의는 진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귀결되었고, 이후 철학자들은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P.52)

합리론과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종합을 보자. 칸트는 인식의 형식은 타고나지만(합리론 계승 및 경험론 비판), 인식의 내용은 후천적 경험에 의해 획득되어야만 한다(경험론 계승 및 합리론 비판)고 주장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종합하였다. 인식의 형식이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안 된다면 이를 인식 능력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기 바란다. 즉 인식 능력은 선천적이지만, 인식 내용은 경험에 의해서만 획득된디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의 주장은 흄에 의해 제기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일상적 판단, 예를 들어 '그는 잘 생겼다.'는 판단은 보편적 진리로 간주될 수도 없고, 간주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판단과 관련해서는 경험론 나아가 회의주의적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물체는 자연 상태에서라면 낙하한다.' 나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등의 판단은 사정이 다르다. 만약 이런 판단들에 대해 경험론이기 때문에 보편 타당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모든 자연 과학 법칙이 객관적 진리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분명히 알다시피 몇몇 검증 중인 자연 과학 법칙을 제외한다면, 자연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발견해 왔으며, 인간은 그 법칙들을 활용하여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칸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간의 이성 능력을 비판해 본 결과 인간은 인식의 내용을 경험으로부터 획득하지만, 인식 능력 자체는 타고 나는 것이며, 타고난 인식 능력 덕분에 보편 법칙에 대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확인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즉 '인간은 보편적 진리를 경험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만약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앞서 본 바와 같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경험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통해 확립한다'는 것이 합리론 과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종합이다.

​(P.53)

“인간에게는 감각적 직관만이 기능하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감각 자료일 뿐이며. 또한 감각 작용은 생각하는 작용이 아님을 의미한다. 감각은 그냥 감각일 뿐이며. 감각을 통해 얻은 자료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성' 이라고 부르고. 감성이 수용한 자료를 토대로 판단하는 능력을 '지성' 이라고 부른다. 감성은 직관 능력이다. 즉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자료를 얻는 능력이다.

통상 경험을 통해 획득된 대상에 대한 감각을 경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만약 감각을 통해 확인되기는 하지만 대상에 대한 감각이 아닌 그런 감각이 있다면. 이를 선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오감을 통한 감각은 모두 대상에 대한 경험적 직관이지만. 경험적 직관의 배경에는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경험적 직관을 떠받치는 직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로 대표되는 시간과 공간이다.

​(P.69)

​우리가 매일 접하는 TV나 핸드폰의 화면을 생각해 보자. 그 화면에서 우리는 드라마도 보고 각종 정보도 접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형색색의 화소들이다. 이 화소들의 조합을 사람이나 문자로 판단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사실 화소들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화소는 장면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경험 이전의 조건인 것이다. 칸트는 이와 유사하게 시간과 공간이 우리 감각의 선험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장면을 보기 위해서 화소를 전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시간과 공간은 인간 감성의 타고난 조건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은 경험적 직관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 감각을 기능하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은 경험 이전에 갖추어진 인간 감성의 타고난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P.70)

정리하자면. 경험 세계에 대한 지식(종합 판단)이면서 그것이 단지 개연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성(필연성/선험성)을 가져야만 진리에 대한 회의론적 관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은 흄에 의해 회의론이 제기된 이래, 아니 고대 회의론이 시작된 이래 모든 철학과 학문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과제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출발을 칸트는 시공이 선험적 직관이라는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 종합 판단' 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증명된다면, 회의론의 극복을 의미한다. 수학의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는 점은 아주 간단하게 확인된다. 앞서 설명했듯 이 A명제에서 주어인 '2+2+1' 에는 5가 미리 포함되어 있지 않다. 손가락을 꼽듯이 순차적으로 보탬이라는 경험에 의거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B명제에서 주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에는 '180도'라는 사실이 미리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준 공간인. 유클리드 공간에서 실제로든 상상이로든 삼각형을 그려서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학의 명제는 종합 판단이다.​

그런데 A와 B명제로 대표되는 수학의 명제들이 보편타당하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명제들이 보편타당한 이유는 선험적 직관 형식인 시간과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근원적 직관 방식이 일차원적 시간(순차적으로 보탬)과 유클리드적인 3차원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에 근거한 학문은 잘못된 계산이나 착오가 아니라면 언제나 보편타당한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P.95)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칸트의 철학은 존재를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이를 지구 중심설에서 태양 중심설로 전환한 천문학상의 변화에 빗댄 것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는 단지 비유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천동설은 신을 인정하고 신이 만물과 진리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배경에 깔고 있다. 이 생각은 앞서 여러 번 언급하였던 신적 직관(지적 직관)에 의한 세계 인식이 진리이고 이렇게 파악된 진리 체계를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지동설인간에게는 신적 직관 능력이 없고 오직 감각적 직관 능력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인간은 감각적 직관을 통해 획득한 현상에 대해서만 지성적 인식과 진리 주장이 가능하므로 감성과 지성에 대한 비판만이 진리의 체계, 즉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칸트 철학은 지동설을 대변한다. 결국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통해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비판 철학적 태도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P.98)

칸트는 사고(지성)의 조건과 규칙을 다루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하되, 이를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구분을 통해 순수한 형식적 진리는 일반 논리학으로도 충분하지만. 내용적 진리(외부 세계에 대한 진리)는 일반 논리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성의 조건을 분석한 초월적 논리학이 필요하다고 천명한다. 초월적 논리학은 다시 초월적 분석론초월적 변증론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지성의 조건을 분석하여 진리 인식이 현상계에 국한됨을 증명하는 부분이고. 후자는 현상계를 벗어나 사고 규칙을 적용할 때 생기는 가상들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논리학┌ 일반 논리학

        └ 초월 논리학 ┌ 분석론(진리의 논리학)

                            └ 변증론(가상의 논리학) ​

(P.108)

자연 과학으로 대표되는 경험 대상에 대한 진리 주장을 위해서는 일반 논리학만으로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명제들은 종합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총각은 미혼 남자이다.' 라는 분석 명제와 달리 '모든 물체는 낙히한다.' 와 같은 종합 명제는 술어의 내용이 주어에 포함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종합 명제들의 객관적 타당성과 필연성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반 논리학 이외의 다른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초월적 논리학이다.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기능한가?' 라는 물음 역시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답변을 제시할수 있다.

통상 진리란 '인식과 그 대상과의 일치'에서 성립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컵을 보고 '컵' 이라고 인식하였다면 이는 참된 인식이 사물 자체로서의 컵인지 현상으로서의 컵인지가 문제가 된다. 칸트에 의하면 이 컵은 현상으로서의 컵일 뿐 사물 자체로서의 컵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 감성에 의해 컵에 대한 정보가 수용될 때, 이미 감성의 조건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보고 판단한 그 컵이 사물 자체로서의 컵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현상에만 적용해야 할 판단​과 인식을 사물 자체에 적용히여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때. 가상(schein. illusion)이 등장한다. 이 경우 가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인간 인식에 있어서 “실로 본성적이고 불가피한 착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피한 착각에 대해 폭로하는 것이 초월적 변증론의 과제이다. 다시 말해 지성의 범주를 내재적 원칙으로만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험적 원칙으로 사용함으로써 각종 이념이 발생하는데, 이것들이 실은 가상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형이상학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변증론의 내용이다.

(P.112)​

변증이란 그리스어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레게인legein을 통하여dia'라는 뜻이다. 레게인은 '말하다' 는 의미의 동사인데. 이 동사에서 전성된 명사가 바로 '이성', '말'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이다. 그러므로 '변증' 이란 '말 또는 이성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는 과정' 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변증법이라고 표현하는데, 진리 탐구의 방법론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변증을 진리 탐구의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가 칸트다. 칸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가상(거짓)의 논리학을 설명하는 부분에 'dialectic'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를 '변증법'이 아닌 '변증론' 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진리 탐구의 방법론이라는 의미로 오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 변증을 진리 탐구의 방법론으로 생각한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보면 대개 플라톤 입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로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게 함으로써 말, 이성을 통하여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가르쳐 준다. 이런 이유로 변증은 일종의 대화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서열을 통해 최고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과정 또한 변중이라고 불렀다. 이데아란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개와 사람이 있다면, 개의 이데아와 사람의 이데아는 서로 다르다. 즉. 양자의 본질은 다르다. 하지만 개와 사람은 모두 동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이데아 <동물로서의 본질>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소나무와 같은 식물이 있다면 개, 사람, 소나무는 서로 다른 이데아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생명이라는 공통의 이데아를 공유하고 있다. 이와 같 이 공유하고 있는 이데아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공통된 최고의 이데아를 공유하고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대표적인 형이상학 체계이다. 그런데 이데아 자체가 과연 있는가에 의문을 던지는 반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데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개념적 가상에 불과하다. 칸트가 가상의 논리학을 가리켜 변증이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 영혼, 우주 등은 플라톤 이래 정립된 형이상학의 근본 주제들이며, 칸트 이전의 플라톤 계승자들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 바로 선의 상징인 신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칸트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인간은 진리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보았고, 플라톤이 진리의 논리학으로 생각하였던 변증은 사실은 가상의 논리학이라고 비판하였다.

(P.115)

범주론사고의 조건, 곧 인식의 조건을 밝힌 것이므로 인식론이다. 동시에 대상이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 곧 존재의 조건을 밝힌 것이므로 존재론이기도 하다. 이를 주관과 객관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결국 객관은 주관에 의해서만 객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도식이 생겨난다.

X(사물 자체) ①→ 객관(대상, 현상) ②→ 주관(사고)

위 도식에서 ①로 가는 인과 관계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사물 자체와 현상이 동일한지 유사한지 전혀 다른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사물 자체를 상정해야만 현상이라는 것도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관계를 인과 관계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왜나하면 인과 관계는 지성의 범주로서 현상에만 타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요청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즉 사물 자체를 요청해야만 주관과 객관, 현상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 이후 피히테. 셸링. 헤겔은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는 과임 주장이라고 평가한다. 단지 ②로 표시되는 관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칸트도 주장한 바와 같이 객관은 결국 주관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객관을 존립시키기 위해 존재 여부도 알 수 없고. 작용 여부도 알 수 없는 기괴한 것(사물 자체)을 상정하는 일은 진리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보았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사물 자체는 필요 없고, 오직 주관에 의해서만 객관이 존립한다는주관의 형이상학이다. 결과적으로 주관이 절대화된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관렴론은 초월적(비판적) 관념론이라 부르고, 헤겔의 관념론을 절대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P.127)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있어서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질서와 규칙성을 자연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것들은 자연 중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연의 통일은 현상들을 연결하는 필연적인 통일 즉 선험적으로 확실한 통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법칙은 선험적으로 지성 자신에서 생기고, 경험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니라 (지성이) 현상들에 합법칙성을 줌으로써 바로 경험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지성은 현상들을 비교해서 귀납적으로 규칙을 작성하는 능력이 아니다. 지성 자신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다. 다시 말하면 지성이 없고서는, 어디서든지 자연은 없다.

'지성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 라는 천명은 칸트의 관념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임과 동시에, 자연법칙의 근거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있음을 명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 중 하나는 자연 자체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그 법칙을 발견하고, 그렇게 발견한 법칙을 설명하는 체계가 과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성이 자연의 입법자' 라는 칸트의 주장은 이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간은 감성과 지성의 선험적 조건에 따라 자연이 그러한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 할 뿐이며, 그렇게 인식한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법칙이고 과학이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나아가 자연이 일관된 법칙하에 존재 한다고 인식하는 것 역시 사실은 통각의 통일에 근거해야만 가능한 일임을 칸트는 밝히고 있다.

(P.138)

자기 자신이 지신을 의식하는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인식하는 자기 인식과는 다르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 한 나라는 것만을 의식한다. 하지만 인식하려면, 적어도 칸트에게 있어서는 직관과 개념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나의 직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만약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듯이 나를 본다면, 그 나는 현상으로서의 나일 뿐 나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나는 경험 대상으로서의 나일 뿐이다. 칸트는 이러한 경험 대상으로서의 나를 경험적 자아(또는 경험적 통각)라고 부르고, 그 어떤 경우에도 경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 자신을 초월적 자아(또는 초월적 통각)라고 불 렀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이후 여러 현대 철학자들에게 근대적 주체를 상징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초월적 통각은 모든 이성 사용의 최후 근거이자 모든 현상(대상)의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 칸트의 시대에 계몽주의가 완성되고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이성적 주체 또는 이성적 주체의 전범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즉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언명을 통해 근대를 열었다면, 칸트는 "초월적 통각의 통일이 모든 인식과 자연의 근원"이라고 함으로써 근대를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이 존재에 선행 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과 자아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칸트의 사상은 모든 존재가 정신에 의존한다는 관념론의 정수를 보여 준 것이다.

(P.142)

칸트는 형이상학의 원천이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성 능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선행되이야 한다고 보았다. 비판의 길과 감성과 지성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12개의 범주라는 선험적 인식 조건이 있다는 사실 을 알았다. 그러므로 존재론을 다루는 일반 형이상학은 존재를 가 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감성(초월적 감성론)과 지성(초월적 분석론)에 대한 성찰로 바뀌어야 정당하다. 또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검토한 결과, 특수 형이상학의 주제들인 영혼, 우주, 신에 관해서는 인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영혼론은 오류 추리임이, 우주론은 이율배반임이, 그리고 신학은 이상ideal 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진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이며 형이상학에 관한 한 가장 올바른 대답이라고 천명 한다.

(P.2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