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 박영근 / 민음사 / 420쪽
(2014.10.26.)

 

 

 

  인간들은 악덕은 용서하면서도 어떤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짓은 용서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 때문일까? 이 문제는 사회적 불공정성과 많은 연관을 지닌다. 어쩌면 진정한 겸손이나 무기력 또는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계속 참으라고 하는 게 인간 본성일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가장 허약하고 어린 부랑아조차도 얼음이 얼 때는 모든 집의 초인종을 눌러보거나, 몸을 추켜올려서 새로운 기념비 위에 자기 이름을  쓰려고 한다.
(P.26)

 


  속좁은 인간들이 지닌 가장 밈살스러운 버릇 중의 하나는 자신이 째째하니까 남들도 째째할 것이라고 억측하는 것이다.
(P.35)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약자를 항상 보호하고 싶은 자존심이 아닐까? 여기에 사랑을 합쳐보라. 즉 순순한 영혼이 쾌락의 근원에 대하여 일으키는 열렬한 감사의 뜻을 여기에 포함시켜 본다면, 우리는 수없이 정신적으로 불가 사의한 점들을 이해하게 된다.
(P.123)

 

 

  사상은 틀림없이 그것의 구성력에 비례해서 밖으로 투사된다. 그래서 박격포에서 발사되는 포탄을 유도하는 수학적 법칙과 비교될 수 있는 법칙에 의해, 이 사상은 뇌가 유도하는 곳을 엄습하게 된다. 이것의 효과는 다양하다. 사상의 탄환을 맞아 파괴되는, 심성이 부드러운 사람들이 있다. 또한 성벽에 부딪히는 탄환처럼, 다른 사람의 의지를 누그러뜨리고 약화시키는, 철벽 같은 두개골과 견실한 골격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마치 각면보의 무른 흙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포탄처럼, 다른 사람의 사상을 소멸시키는, 무기력하고 힘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P.135)

 

 

  세상만사를 궁리한 끝에 취할 길이란 두 가지밖에 없네. 어리석게 복종하든지, 아니면 반항뿐이지.
(P.143)

 

 

  어떤 종류의 남자들을 찾고 있는가를 여자들에게 물어보게. 야심가를 찾는다고 말할 걸세. 야심가란 다른 사람보다도 튼튼한 허리와 철분이 풍부한 피와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리고 여자들이란 자기가 튼튼하다고 느낄 때, 매우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법이거든. 따라서 여자들은 힘이 센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걸세. 설사 그 남자에게 꺾일 위험이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네.
(P.144)

 

 

  내가 자네한테 해줘야할 충고가 또 있다면 자네 의견이나 얘기에 너무 고집 부리지 말라는 것일세. 다른 사람들이 자네가 고집을 꺾길 바란다면 팔아버리게. 자기 견해를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란 항상 외곬에 빠진 사람이고, 자신이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바보일세. 원칙이란 결코 없네. 단지 사건들만 존재한다네. 법률이란 없네. 오로지 상황만이 있을 뿐이지. 뛰어난 사람은 사건과 상황에 순응해서 그것을 조종하는 법이야. 확고한 원칙과 법이 존재한다면, 국민들은 셔츠를 갈아입듯이 원칙과 법칙을 바꾸지는 못할 걸세. 한 개인이 국민 전체보다 더 현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네.
(P.154)

 

 

  젊은 시절에는 양심이 부당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양심의 거울을 감히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이 양심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 여기에 인생의 두 가지 국면 사이에 나타나는 모든 차이점이 깃들여 있다.
(P.160)

 

 

  내 인생, 바로 내 인생은 내 두 딸에게 달려 있소. 그애들이 행복하다면, 내 새끼들이우아하게 옷을 입는다면, 그애들이 융단 위를 걸어다니기만 한다면,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내가 누운 곳이 어디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애들이 따뜻하면 나는 춥지 않소. 그애들이 웃으면 나는 결코 슬프지 않소. 그애들이 슬퍼할 때에만 나는 슬프다오. 당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당신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저애는 내가 낳았지!>라고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어린 것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요. 그애들은 당신 피에서 피어난 가냘픈 꽃들이오. 어린애들 피부에 당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애들이 움직일 때 당신도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될 것이오. 그애들 목소리가 도처에서 내게 들려오는 것 같소. 그애들 눈초리가 슬퍼 보이면, 내 피가 얼어붙는 것 같소. 그애들 눈초리가 슬퍼 보이면, 내 피가 얼어붙는 것 같소. 앞으로 당신도 당신 행복보다 자식들 행복에 대해 더 즐거워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소. 몸의 도처에서 기쁨을 내뿜는 내적인 움직임 말이오. 결국 나는 세 배의 삶을 사는 거요.
(P.181)

 

 

  명백한 죄는 가정 환경에서 비롯한 성격 차이와 다양한 이해 관계 및 처지 때문에 모습을 수없이 바꾸면서 용서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형식상 요지부동한 사회 규범은 흔히 이런 경우에 유죄를 선언하는 법이다.
(P.350)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 두 손을 펴서 침대 양쪽에 있는 두 학생의 머리에 부딪히자 두 사람 머리털을 억세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 내 천사들아!>하고 힘없이 부르짖었다. 이것이 언어의 날개를 타고 날아간 영혼이 중얼거린 두 마디 말이자 강한 속삭임이었다.
  "불쌍한 노인이지"
  실비가 말했다. 그녀는 거짓말 중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무의식적인 거짓말이 마지막으로 격앙시킨 최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이 절규에 감격했다.
  이 아버지의 마지막 탄식은 기쁨의 탄식임에 틀림없다. 이 탄식은 그의 일생 전부를 표현했다.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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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 이순희 / 부키 / 384쪽
(2014.10.16.)

 

 


  오늘날 부자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가난한 나라의 시장을 장악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나쁜 사마리아인처럼 공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에는 아예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개발도상국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때문에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개발 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권장하는 것이 역사적 위선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P.34)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품은 의도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가난한 날들에 해를 끼친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느냐에 있다. 과연 이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설파하는 대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해 역사와 현대 세계의 분석, 미래에 대한 예측과 변화를 위한 제안 등을 통해 몇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P.36)

 

 

  자유 무역은 대개 약소국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으며, 선택권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의 대부분은 짧은 예외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 무역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성공한 경제들은 거의 모두 세계 경제로의 무조건적인 통합 과정이 아닌,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통합과정을 거쳐 정책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당했던 (식민 지배와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된) 첫 번째 세계화 시기나 정책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었던 지난 사반세기보다 상당한 정책 자율성을 가지고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던 '형편없었던 옛날'인 그 시절에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P.67)

 

 

  한마디로 자유 무역의 옹호국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경우 세계를 지배하는 산업 강국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 무역 경제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부자 나라들 가운데서도 가장 심하게 보호 무역을 실시했던 나라였다.
  물론 관세는 어떤 나라가 유치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단적으로 해밀턴이 처음 내놓은 권고 사항에는 특허와 품질 기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공공투자 등 유치 산업을 장려할 수 있는 11개 유형의 수단이 들어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관세를 가장 공격적으로 사용한 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 종종 관세 정책 대신 다른 여러 가지 정책 개입 수단 - 가령 국영 기업, 보조금, 또는 수출 시장 지원 등 - 을 보다 강력하게 사용하곤 했다.
  오늘날의 부자 나라 정부들은 (영국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업화 초기에 국영 기업을 설립하였다.
(P.94)

 

 

  공산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서 실패했다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서 국영 기업이나 공기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을 이끌어 낸다면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견해는 1990년대 초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주도했던 선도적인 민영화 프로그램 이후 널리 퍼져 나갔고, 과거 공산주의권 경제들의 '체제 저노한'이 이루어진던 1990년대에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조의 지위를 얻었다. 과거에 공산주의에 속했던 세계는 한동안 전부 '민연은 좋고, 국영은 나쁘다.'는 주문에 흘린 것 같았다. 공산주의를 멋지게 풍자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에 나오는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는 인간 배척 슬로건처럼 말이다. 이런 국 기업의 민영화 역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 방침의 주요 항목이었다.
(P.164)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국영 기업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국영 기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개념에서 비롯된다. 바로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닐 경우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물건은 최선을 대해 돌보지만,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은 함부로 다루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듯하다. 국가 소유에 대한 반대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학 ㅔ만들고 싶으면, 당사자들에게 해당 물건의 소유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P.165)

 

 

  정부가 국영 기업을 설립하는 이유는 국민들 사이에서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에게 맡겨 둘 경우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편, 수도, 교통 등의 중요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스위스에서는 외딴 산간 지역의 주소지로 편지를 보내는 비용은 제네바의 주소지로 보내는 비용보다 훨씬 높다.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이 우편 업무를 맡을 경우 이렇듯 산간 지역으로 보내는 우편 요금이 올라기게 되고, 그러면 그곳 주민들은 우편 서비스 이용 횟수를 줄이거나 아예 이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핵심적인 서비스에 대해서는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공기업을 세워 그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P.177)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간 인력 흐름의 증대는 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공무원들은 돈벌이가 좋은 민간 부문 취업이 가능해지면 장래의 고용주들의 편의를 봐 주려고 규칙을 악용하거나 위반할 수 있다. 이들은 당장 손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도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데, 돈을 주고받는 일이 없으면 위법 행위가 아니고 (따라서 부정부패가 아니고) 심해야 판단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는 데 그칠 뿐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보상은 미래에 발생하는데, 그 보상은 최초의 결정으로 이익을 본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기업에 우호적인' 사람, 좀 더 듣기 좋은 말로 '개혁적 인사'라는 명성을 쌓았기 때문에 나중에 민간 법률 회사나 로비 단체, 혹은 국제기구의 돈벌이가 되는 일자리로 옮겨 갈 수 있다.
(P.261)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시장과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전자는 개개인이 가진 돈에 관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한 비중을 둔다. 후자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큰 비중을 둔다. 따라서 민주적인 결정은 대개 시장의 논리를 뒤엎는다.
  민주주의와 시장은 둘 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다. 그러나 양자는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우리는 양자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과 달리)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그리고 경제 발전 사이에 효과적인 순환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265)

 

 

  정말로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정책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데올로그들이다. 앞서 언급했듯 독선주의가 이기주의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희망은 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자신의주장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난을 받자,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대꾸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부가 아니라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이 케인즈와 비슷하다. 이들도 현실 세계에서 새로운 주장에 부닥치고, 변화하는 현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주장과 현실의 변화가 예전의 확신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경우, 이들도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생각을 바꿔 왔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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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
가토 슈이치 / 이규원 / 사월의 책 / 208쪽
(2014.10.09.)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까.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수 있는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통하는 기준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때와 장소, 남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떻게 사람을 매혹시킬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프러포즈에는 예로부터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반론이 성립할 수 없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반론이 가능하다. '독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이쪽의 접근법도 달라져야 할 것이고, 이쪽의 소망에 맞게 수단도 궁리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P.8)

 

 

  이 책은 말하자면 내가 책과 함께할 때 취해 온 이런저런 방법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한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논지가 명확한 글일 테고, 논지가 명확한 글이란 옛사람들도 말했듯이 '숙고'의 결과일 것이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
(P.9)

 

 

  매끈매끈 부드럽게 누구에게나 편리한 비누는 있을 수 있지만, 둥글둥글 원만하고 누구에게나 편리한 사싱이라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비누와 사상의차이점이다.
(P.58)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은 중요하다. 첫째, 그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책 중에서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을 발굴하는 수고를 크게 덜 수 있다. <겐지 이야기>에 시간을 많이 썼다면 그렇게 시간을 쓰는 동안에는 이번 달 신간 소설 중에 뭐가 재미있을까 하고 초조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 소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나면 다른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 나갈 때 속도가 한결 빨라진다.
  그러나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책만 천천히 읽고 다른 책들에는 곁눈도 주지 않고 유유히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책을 읽을 필요를 느껴서 독서를 시작했다면 그 책들은 십중 팔구 빨리 읽어야 할 책일 것이다. 그리고 책을 빨리 읽기 위한 궁리는 단순히 한 권의 책을 미리 천천히 읽어 둔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P.64)

 

 

  '날림 읽기'는 어떨까? 물론 이것도 엄연히 독서법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목차를 읽는다. 그리고 서론과 결론을 주의 깊게 읽어서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중간 부분은 날림 읽기로 지나간다. 그러다가 특별히 재미있을 것 같은 장이 있으면 그곳만 꼼꼼히 읽는다. 가령 500쪽짜리 책 두세 권을 '이번 주말까지 읽고 서평을 써주시오.'라는 의로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라도 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무책임한 서평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책에 따라서는 그런 방법으로 충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P.76)

 

 

  책을 많이 읽으려면 한 권을 마치고 다음 책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이 좋다. 아니, 이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혼란스럽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사람은 인기 작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일본의 인기 작가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정도가 아니라 동시에 쓰기까지 한다. 전혀 다른 책들을 한 사람의 저자가 동시에 쓸 수는 없지만, 한 명의 독자가 동시에 읽을 수는 있다. 동시에 읽는 책이 서로 많이 다른 책일수록 읽는 사람의 흥미는 계속 신선하게 유지될 것이다. 제한된 날짜, 가령 한 달 안에 많은 페이지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런 독서법이 필요하다.
(P.84)

 

 

  한 번에 끝까지 읽어 내느 것이 어려운 책이라면 하루에 조금씩 읽을 궁리가 필요하다. 꼭 화장실이 아니라도 좋다. 가령 아침 먹기 전 30분도 괜찮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체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매일 30분씩 적당한 책을 잡는 사람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조금 더 빨리 마칠 수 있는 책을 몇 권 함께 읽어 나가면 된다.
(P.86)

 

 

  세상에는 어려운 책이 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책을 읽고, 읽는 책을 늘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이는 간단하지만 아마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자신이 알 수 없는 책은 일체 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늘 책을 읽을 수 있고, 읽는 책들을 늘 이해할 수 있다. 페이지를 조금 넘겨보거나 조금 읽어 보고 아무래도 모르겠다 싶은 책은 읽지 않기로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 책 한 권을 모르는 것이 당신 잘못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책의 잘못도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해 두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만 충분히 이해해 두면 공연한 노력, 공연한 허영심, 또는 공연한 열듬감을 줄이고 시간 낭비를 없앨 수 있다.
(P.168)

 

 

  책을 이해하고 못하고 하는 이유가 늘 책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독자 쪽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러셀을 읽고도 '어렵네, 잘 모르겠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문답을 읽고도 쉽게 이해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책을 읽고, 아니 꼭 어려운 책이 아니라도 책을 잘 읽고 잘 이해하기 위한 궁리는 독자들도 해야 한다. 그 독자 측의 조건은 첫째는 언어, 둘째는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장을 이용한 표현은 저자의 어떤 경험을 언어의 조합으로 번역하여 남에게 전하고자 하는 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독자 측에서 보자면 언어의 조합, 즉 문장을 통해 저자의 경험을 아는 것이다.
  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 뿐 아니라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많든 적든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알고 있지 않다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에 언어 혹은 상징이 있고, 다른 한편에 경험 혹은 상징되는 것이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떠받치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P.176)

 

 

  독서 자체에는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 있을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책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공통된 즐거움을 말하라면 지적 호기심을 거의 무제한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분야에서나 책은 수없이 많아서, 고구마 줄기를 당기듯 한 권 또 한 권 집어 들면서 얼마든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세상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 한없이 많음므로 대상을 옮겨가며 호기심의 영역을 넓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무한하다.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처럼 알 수 없는 것도 없다. 인생은 짧고 재미있는 책은 많다. 하루 한 권을 읽어도 일 년에 365권. 그러기를 수십 년 계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평생에 1만 권을 읽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 봐야 150만 권이 넘는 도쿄도립중앙도서관 장서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재미있는 책을 다 읽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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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 모델

이병천 / 책세상 / 480쪽
(2014.10.09.)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나라 안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토록 강렬한 빛과 그림자는 세계경제 발전사에서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런 만큼 8.15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 70년의 궤적에는 흥미로운 쟁점들이 존재하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더욱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한국 경제를 보는 눈도 크게 바뀌어왔다.
  근래 권위주의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 시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상황을 자기 방식으로 전유한 보수 측의 '대한민국 성공사관'이 크게 부상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민중적 민족주의 시각의 결함을 극복한 새로운 현대 한국 자본주의사론은 아직 확실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주변화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시각이 결코 진보의 시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지금은 서로 상대의 결함을 비판하는 데는 능숙하면서도 상대를 지양,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혼돈 상황이 아닌가 한다. 자만과 자학을 넘어, 자긍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때이다.
(P.23)

 

 

  나는 한국 모델의 역사를 파악함에 있어, 나라 안으로는 국가와 재벌의 동맹 그리고 밖으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방식, 이 두 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8.15 이후 70년의 한국 경제 궤적에서 이 두 축에 어떤 변화, 어떤 연속과 단절이 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모델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마치 자동적인 과정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쇠퇴와 영국에 의한 최초의 산업 패권의 확립 이래 오늘날 세계의 공장 중국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 그 이행과 발전의 논리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나의 역사적 발전 모델의 성공 여부는 내부적으로 어떤 발전 규율 메카니즘이 어떻게 장착되었는지, 그리고대외적으로 세계 체제 편입 자율성을 갖지 못하는 국가는 민주주의와 양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주도할 수도 없었다. 물론 국가의 자율성이란 너무 약해도 문제지만 사회를 집어삼킬 정도로 너무 강해도 문제다. 한국 모델 또한 예외가 아니다.
(P.25)

 

 


  재벌 체제에는 한국식 경제성장 모델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집약 되어 있다. 압축 추격 산업화를 달성한 돌진적 개발주의 그리고 폐쇄적인 혈연적 유대에 기반을 둔 가산제 성격을 함께 가진 재벌 체제는 한국 경제성장의 대표선수였다. 그렇지만 총수자 전제적 권한을 휘두르는 무책임하고 불투명한, 무소불위 '황제 경영' 체제와 고부채 외형 확장주의에 따른 문제점이 심각했다. 개발 연대 한국식 경제성장 모델은 박정희 모델일뿐더러 기업 체제 측면에서는 '정주영 모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재벌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을 가장 잘 대변하며 그만큼 재벌 체제의 문제점도 잘 보여준다. 1997년 위기는 외환 금융 위기임과 동시에 재벌 체제의 위기이도 했다.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재벌 체제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P.135)

 

 

  나는 묻고 싶다. 왜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나라를 향해 가야 하나. 왜 국민소득이 2만 달러면 선진국인가. 2만 달러 달성이 먼저인가 선진국이 먼저인가. 또 도대체 선진국의 실체란 무엇인가. 앞서 '국민의 정부' 시기 국민이 실종되었던 데 이어, 이제 '참여정부'에서도 참여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왜 큰 숫자에 대한 집착, 물량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P.163)

 

 

  승자 독식 정글자본주의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 한국이 더불어 사는 민주적 책임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한국 자본주의는 유럽과 같은 강한 노동, 그리고 보편적 복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유럽의 강한 노동, 강한 복지를 대신하는 기능적 등가물, 즉 세계 최고 수준의 기부 문화, 강한 반독점 전통, 채무자 친화적 파산법으로 구성된 열린 시장경제 트리오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의 대물림이 고착화되고 있고, 재벌의 시장 독점과 국민경제 지배력이 공고하며, 파산법은 채권자 이익 중심으로 짜여 있다. 그뿐인가. 재벌과 부자들은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식 신자유주의보다 더 잔인하게 다수 국민 대중을 삶의 불안과 고통에 빠트리고 있는 한국식 무책임 정글자본주의 실체이다.
(P.242)

 

 

  우리 국민들은 사회 경제적 기본권이 튼튼히 보장되는 삶을 원한다. 성장과 분배, 복지, 참여가 균형을 이루며 선순환하는 건강한 사회 경제를 일구길 바란다. 숨 가쁜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사람이 먼저인 경제, 양질의 일자리와 충분한 자유 시간이 주어는 경제, 삶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길 원한다.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며 일과 삶,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이 균형 잡힌 풍요로운 삶을 희망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대한민국의 정상국가는 경제 대국-생활빈국이 아니라 생활 부국-적정 성장의 국가이다. 광복의 봄날, 강한 부자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던 김구의 소원이 오늘 우리의 희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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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임승수 / 시대의 창 / 336쪽
(2014.10.03)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에 대해 얘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뭔지 아세요? 거꾸로 그 사람들에게 <자본론>이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확신을 가지고 쉬대에 뒤떨어졌다고 판단하는 거죠.
(P.13)

 

 

  "왜 지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눈을 들어 세상을 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저 '자본주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나요? 만약 아름다워 보인다면 굳이 <자본론>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일어나는 만은 문제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고 답답하다면, 그리고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여러분은 <자본론>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16)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노동력의 대가'라고 분명하게 구분지어 얘기합니다. 만약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빵 8개를 만든 노동자는 30,000원이 아니라 80,000원을 받아야 겠지요.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입니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빵 만드는 노동자의 하루 8시간 노동 중ㅇ서 3시간만이 자신을 위한 노동이고 나머지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밝혀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노예주나 봉건 영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에 '이윤'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은폐된 착취구조입니다.
(P.88)

 

 

  마르크스는 기계가 문제라기보다는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봤어요. 기계 자체는 생산력 발전을 통해 인류를 고통스러원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지요. 하지만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면, 즉 노동자의 '착취' 수단으로 사용하면 노동자는 오히려 기계의 부속품이 된 것처럼 옆에 붙어 단순반복적인 일을 해야 하고 밤새 일할 수 있는 기계의 페이스에 맞춰 야근에 철야근무도 불사하게 되는 거죠. 마르크스는 숙련공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것보다는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자본가'들에 대해 투쟁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P.127)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가로서의 '존재'가 자본가로서의 '의식'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죠. 자본가로서의 삶은 자본가에게 노동자를 착취하도록 강요하고 환경을 파괴하도록 강요하고 오로지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도록 강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벌한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한 '존재'의 규정 속에서 자본가의 '의식'이 형성되지요.
  물론 착한 자본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시장의 경쟁을 이기고 성공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우연히 한 명의 자본가가 '착할' 수는 있어도 자본가 계급 일반이 '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인 것죠. 그래서 저는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란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P.210)

 

 

  저도 <자본론>을 공부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면서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많았거든요. 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가난할까? 왜 이렇게 돈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갈까? 사람이 사는 사회란 원래 이렇게 돼먹은 걸까? 이런 제 마음 속의 질문들이 <자본론>을 통해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 마르크스를 천재라고 하는지, 왜 <자본란>이 필독서로 얘기되는지를 알 것 같아요.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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