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주의 모델
이병천 / 책세상 / 480쪽
(2014.10.09.)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나라 안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토록 강렬한 빛과 그림자는 세계경제 발전사에서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런 만큼 8.15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 70년의 궤적에는 흥미로운 쟁점들이 존재하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더욱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한국 경제를 보는 눈도 크게 바뀌어왔다.
근래 권위주의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 시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상황을 자기 방식으로 전유한 보수 측의 '대한민국 성공사관'이 크게 부상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민중적 민족주의 시각의 결함을 극복한 새로운 현대 한국 자본주의사론은 아직 확실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주변화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시각이 결코 진보의 시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지금은 서로 상대의 결함을 비판하는 데는 능숙하면서도 상대를 지양,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혼돈 상황이 아닌가 한다. 자만과 자학을 넘어, 자긍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때이다.
(P.23)
나는 한국 모델의 역사를 파악함에 있어, 나라 안으로는 국가와 재벌의 동맹 그리고 밖으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방식, 이 두 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8.15 이후 70년의 한국 경제 궤적에서 이 두 축에 어떤 변화, 어떤 연속과 단절이 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모델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마치 자동적인 과정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쇠퇴와 영국에 의한 최초의 산업 패권의 확립 이래 오늘날 세계의 공장 중국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 그 이행과 발전의 논리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나의 역사적 발전 모델의 성공 여부는 내부적으로 어떤 발전 규율 메카니즘이 어떻게 장착되었는지, 그리고대외적으로 세계 체제 편입 자율성을 갖지 못하는 국가는 민주주의와 양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주도할 수도 없었다. 물론 국가의 자율성이란 너무 약해도 문제지만 사회를 집어삼킬 정도로 너무 강해도 문제다. 한국 모델 또한 예외가 아니다.
(P.25)
재벌 체제에는 한국식 경제성장 모델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집약 되어 있다. 압축 추격 산업화를 달성한 돌진적 개발주의 그리고 폐쇄적인 혈연적 유대에 기반을 둔 가산제 성격을 함께 가진 재벌 체제는 한국 경제성장의 대표선수였다. 그렇지만 총수자 전제적 권한을 휘두르는 무책임하고 불투명한, 무소불위 '황제 경영' 체제와 고부채 외형 확장주의에 따른 문제점이 심각했다. 개발 연대 한국식 경제성장 모델은 박정희 모델일뿐더러 기업 체제 측면에서는 '정주영 모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재벌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을 가장 잘 대변하며 그만큼 재벌 체제의 문제점도 잘 보여준다. 1997년 위기는 외환 금융 위기임과 동시에 재벌 체제의 위기이도 했다.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재벌 체제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P.135)
나는 묻고 싶다. 왜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나라를 향해 가야 하나. 왜 국민소득이 2만 달러면 선진국인가. 2만 달러 달성이 먼저인가 선진국이 먼저인가. 또 도대체 선진국의 실체란 무엇인가. 앞서 '국민의 정부' 시기 국민이 실종되었던 데 이어, 이제 '참여정부'에서도 참여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왜 큰 숫자에 대한 집착, 물량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P.163)
승자 독식 정글자본주의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 한국이 더불어 사는 민주적 책임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한국 자본주의는 유럽과 같은 강한 노동, 그리고 보편적 복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유럽의 강한 노동, 강한 복지를 대신하는 기능적 등가물, 즉 세계 최고 수준의 기부 문화, 강한 반독점 전통, 채무자 친화적 파산법으로 구성된 열린 시장경제 트리오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의 대물림이 고착화되고 있고, 재벌의 시장 독점과 국민경제 지배력이 공고하며, 파산법은 채권자 이익 중심으로 짜여 있다. 그뿐인가. 재벌과 부자들은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미국식 신자유주의보다 더 잔인하게 다수 국민 대중을 삶의 불안과 고통에 빠트리고 있는 한국식 무책임 정글자본주의 실체이다.
(P.242)
우리 국민들은 사회 경제적 기본권이 튼튼히 보장되는 삶을 원한다. 성장과 분배, 복지, 참여가 균형을 이루며 선순환하는 건강한 사회 경제를 일구길 바란다. 숨 가쁜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사람이 먼저인 경제, 양질의 일자리와 충분한 자유 시간이 주어는 경제, 삶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길 원한다.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며 일과 삶,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이 균형 잡힌 풍요로운 삶을 희망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대한민국의 정상국가는 경제 대국-생활빈국이 아니라 생활 부국-적정 성장의 국가이다. 광복의 봄날, 강한 부자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던 김구의 소원이 오늘 우리의 희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P.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