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분 책읽어주기의 힘
짐 트렐리즈 / 북라인 / 288쪽
(2014. 03. 10.)

 

 

 
(옮긴이의 글)
  어떻게 하면 아이를 똑똑하게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 짐 트렐리즈는 명쾌하게 말한다. "하루 15분씩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세요!" 그것도 아이가 뱃속에 있을때부터 열네 살이 될 때까지(아이의 듣기 수준과 읽기 수준은 열네살 무렵에나 같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수십 년간 책읽어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유가, 글 잘 쓰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이 일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우리도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지 모른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책 속에서 지혜와 정의를 배운 아이들이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되리라는 것을.
(P. 09)

 

 

  읽기는 교육의 중심에 있다. 읽기가 최우선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읽기에서 비롯된다. 수학 문제를 풀려면 복잡한 시험 문제를 읽고 이해해야 한다. 과학과 사회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읽기야말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P. 40)

 

 
  책을 읽지 않는 국가는 지식 수준이 낮다. 지식 수준이 낮은 국가는 가정과 시장과 법정과 투표소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쉽다. 그리고 이 선택들이 결국 국가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P. 40)

 

 


  읽어주기의 장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1) 책 읽는 것을 즐기게 된다. (2) 배경 지식을 늘려 준다. (3) 어휘를 늘려 준다. (4) 독서의 모범을 보여 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가 책을 즐겁게 읽는 비율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어른이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중학생쯤 되면 거의 아무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 매번의 읽어주기가 읽기의 즐거움을 선전하는 광고 방송이라고 할 때, 광고 횟수의 감소가 수요의 감소, 즉 즐거운 독서의 감소로 이어지는 셈이다.
(P. 48)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일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첫째, 아이와 책 사이에 즐거움이라는 끈이 연결된다. 둘째, 함께 책을 읽으면 부모와 아이가 같이 배운다(이중 학습). 셋째, 단어를 소리와 음절의 형태로 아이의 귀에 쏟아 붓는다.
  그 단어는 귀 안에서 듣기 어휘라는 저수지에 모인다. 단어가 그 안에 충분히 차면, 저수지는 넘치기 시작한다. 넘치는 어휘는 말하기 어휘, 읽기, 쓰기 어휘라는 세 갈래로 물고를 터 냇물이 되어 흘러간다. 듣기 어휘는 세 갈래 물줄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P. 94)

 

 
  혼자 읽을 줄 아는 아이에게도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학년이 올라가고 공부할 것이 많더라도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 빽빽한 필독 목록을 가져다주고 읽으라고 강요하거나, 독후감식의 숙제를 늘리는 식의 방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책에 대한 염증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 책에는 손도 대지 않을 학창시절독자만 양산할 따름이다.
(P. 105)

 

 
  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읽어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옷 하나를 몸집이 다른 두 아이에게 입힐 수 없듯이, 그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읽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 차이가 나는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일어 주는 것은, 읽을거리의 재미를 희석시켜 최대공약수인 다섯 살배기의 입맛에 맞추고 열 살배기의 입맛을 달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각기 다른 책을 읽어 주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부모 노릇은 시간을 절약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시간을 더 들이고 투자를 하는 거이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P. 106)

 

 
  부모가 일대일로 책을 읽어 주면 아이의 집중력과 어휘력의 신장 이외에 다른 소득도 얻게 된다. 책에서 '진지한 생각거리'를 만나면, 많은 경우 아이 자신의 '진지한 생각거리'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때 곁에 빈정대는 형제가 없으면, 아이는 부모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비밀을 함께 나누면 '결속력'이라는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진정한 힘이다.
(P. 107)

 

 
  배운 사람들 중에는 한번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식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이런 사람들은 배탈이 나더라도 한번 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은 끝까지 다 먹을 이들이다. 나는 몇 장 읽어 보고 변변치 않으면 책을 치워 버리는 편에 속한다. 어쩌다 잘못 고른 책을 아이에게 끝까지 읽어 주기 보다는, 몇 장을 먼저 읽어 본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낸시 펄은 그녀의 책 <책에의 갈망>에서 책을 읽어 주는 어른과 스스로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50세가 되기까지는 모든 책에 50페이지의 기회를 줘라. 50세가 넘으면 100에서 나이를 뺀 페이지만큼의 기회를 줘라." 그년 이것을 '50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즉 독자가 작가로부터 받아야 하는 정신적 고문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P. 162)

 

 

(읽어주기 습관 들이기)
-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책을 읽어 주자.
-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틈틈이 읽어 주자.
- 듣는 능력은 습득되는 것이다. 꾸준히 가르치면 조금씩 나아진다.
(P. 166)

 

 

  모니터를 통해 읽고 이해하는 것은 책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화면 독서가 25퍼센트나 느린 까닭은 책의 해상도인 600dpi에 훨씬 못 미치는 72dpi의 해상도로 글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컴퓨터 환면이 책에 비해 여덟 배나 불명확한 것이다. 대학생들을 조사한 비교 연구에서도, 화면의 글을 읽는 것은 인쇄물을 읽는 것에 비해 이해 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학생도 화면을 통해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웹의 자료를 인쇄해서 읽는다고 했다. 정보기술계의 권위자인 빌 게이츠는 말했다. "모니터로 읽는 것은 종이로 읽는 것보다 그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나는 4, 5쪽이 넘어가면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며 밑줄을 치고 메모하는 것을 좋아한다."
(P.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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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이윤기 / 웅진지식하우스 / 335쪽
(2014. 03. 06.)

 

 

 

  '벽은 누구에게나 한계로 존재합니다. 이 벽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사람들에게는 벽을 뚫는, 한계를 극복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p. 51)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나비가 바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수심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는 제 몸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하늘을 더 잘 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올라가고 있는지 모를 때 어쩌면 가장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
(p. 73)

 

 

  나는, 사람은 어디로 올라가는 줄 모르고 그저 꾸물꾸물 올라갈 때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다, 라고 한 올리버 크롬웰의 말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오르기를 좋아한다. 나에게, 전날과 똑같은 날은 없다.
(p. 79)

 

 

  나는 외국을 향해 3,40대의 등 떠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p. 94)

 

 

  '메덴 아간Meden Agan', 고대 그리스의 현자 솔론이 남긴 말이다. 이 간결한 말을 영어로 풀어내면, 간결하지 못하게도 '만사에 지나침이 없게 하라'가 된다. 뜻이 통하기는 한다. 그러나 번역가는 여기에서 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지 못하다'라는 뜻을 지닌, '과유불급'이라는 잘 익은 우리말이 그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p. 102)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명쾌하게 대답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비결을 공개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결이란 없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비결요? 비결을 묻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비결이지요."
  회화의 첩경, 공부의 첩경이 있기는 있겠지. 하지만 시간 낭비가 될까봐 두렵다. 자기 발로 걷는 자가 가장 확실히 걷는다. 약삭빠르게 찾아낸 지름길은 종종 먼 걸이 되는 수가 있다.
(p. 116)

 

  나는 나의 미학적 감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끝, 끝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문학을 '좋은 대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른 물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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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 박철 / 시공사 / 732쪽
(2014. 02. 23.)


 

 

  자네 책은 기사담을 공격하는 책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고, 성 바실리우스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키케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일세. 또한 세밀한 사실이나 점성술에 의한 관상 같은 것도 자네의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고, 그책은 기하학적 측정과도 아무 연관이 없으며, 말재간으로 논박할 수 있는 논쟁과도 아무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한데 섞어서 설교를 하려는 책도 아닐세. 그따위 설교는 일종의 색동 누더기 옷으로서, 기독교의 지성이 그런 옷을 입어선 안되지. 자네의 책에선 단지 자연을 잘 모방하면 그만이야. 모방이 완전할수록 자네의 책은 훌륭해질걸세. 그리고 자네의 책은 기사담들이 이 세상과 대중 사이에서 떨치고 있는 세력과 권위를 부서버리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자네는 철학자들로부터 문구들을 빌려오고, 성서에서 교훈을 따오고, 시인들에게서 이야기를 베껴오고. 웅변가들에게서 웅변을 얻어오고, 성자들에게서 기적들을 빌려올 까닭이 없네. 자네는 그저 명백한 문장을 써서 되도록 자네의 능력이 닿는데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고, 혼동이나 애매한 것이 없이 자네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면 되는 걸세. 또한 유의할 것은 자네의 이야기를 읽고 우울한 사람도 경멸하지 않게 꾸미고, 현명한 사람도 칭찬을 금하지 않게 꾸미게, 한마디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싫어하지만,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좋아하는 그 허무맹랑한 기사담을 전도시키는 데 자네의 목표를 굳게 정하란 말일세. 그 일만 성공한다면, 그건 결코 하찮은 일에 성공한 것이 아닐 테니 말이야.
(p .15)

 

 

  결국 그는 책을 읽는 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몇 날 밤을 한숨도 안 자고 말똥말똥한 상태로 지새곤 하는 반면 낮에는 완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책만 읽다 보니 머릿속이 책에서 읽은 마법 같은 이야기들, 즉 고통과 전투, 도전, 상처, 사랑의 밀어들과 연애, 가능치도 않은 갖가지 일들로 가득 차버린 것이었다. 그는 책에서 읽은 몽환적인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p .40)

 

 

  사실상 그는 이미 이성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미치광이도 생각지 않았던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편력기사가 되어 무기를 들고 말등에 올라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속 편력기사의 모험들을 직접 실천에 옮겨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길이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가련한 양반은 자기의 무훈에 힘입어 적어도 트라피소나 왕국이 이미 자기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듯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보니 그 속에서 별난 욕심도 생겨났고,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걸 실천에 옮기겠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p .41)

 

 

  그는 장장 나흘 동안이나 그 말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했다. (그의 혼잣말에 /다르면) 자기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기사의 말이라면 그 역시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골 귀족은 편력기사의 말이 되기 전에 이 말이 누구의 말이었는지를 밝히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모시는 주인의 신분이 바뀌면 말의 이름도 바뀌는 법이며, 이제부터 맡게 딜 새로운 명령과 새로운 임무에 알맞은 이름을 지으면 점차 유명해지고 명성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이름들을 지었다가는 버리고, 다시 만들었다가는 버린 끝에 마침내 로시난테라고 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고귀하고 듣기에도 좋았으며, 한때 바싹 야위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말에게 마음에 꼭 드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자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도 짓고 싶었다. 그래서 여드레를 고민한 끝에 돈키호테라 부르기로 했다. 사실은 이 점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작가들이 그의 이름이 케사다가 아니라 키하다가 맞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어쨌든 훌륭한 아마디스는 단순히 아마디스라고 불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조국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덧붙여 아마디스 데 가울라라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돈키호테도 훌륭한 기사처럼 그의 이름에 고향의 이름을 덧붙여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문과 고향 마을을 만방에 알리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그런 이름을 갖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p .42)

 

 

  "주인님, 물러난다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며, 위험이 희망보다 앞설때는 기다린다는 것 또한 분별이 아닌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발길을 멈출 줄 알고, 하루 사이에 모든 모험을 다 치러내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로 현자가 행할 바입니다. 제가 비록 거칠고 천한 놈이지만, 자기 조절 면에선 이미 나름대로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저의 충고를 받아들이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마시고, 타실 수만 있다면 로시난테에 올라타십시오. 타실 수 없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저의 통찰력을 발휘해본 결과 지금은 날랜 손보다는 빠른 발이 더욱 필요합니다."
(p. 282)

 

 

  젊은이들의 사랑이란 사랑이라기보다는 욕망이기 쉽지요. 욕망의 궁극적인 목표는 쾌락이기 때문에 일단 쾌락이 달성되고 나면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등을 돌리고 맙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자연 현상에 의해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한계가 없는 법.

(p. 305)

 

 

  한 화가가 자신의 예술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원본 그림을 모사하게 마련이다. 이 법칙은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직종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신중하고 참을성이 있다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율리시즈를 본받아야 하고, 또 그럴 것이다. 호머는 율리시즈의 사람됨과 모험을 통해 우리에게 그가 지닌 신중함과 참을성에 대핸 생생한 초상을 그려낸 바 있으며, 베르길리우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인간성을 통하여 자비로운 자의 용기와 용감하고 사려 깊은 장수의 기민함을 보여주었다. 다만 율리시즈와 아이네아스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그들의 미덕을 모범으로 남기고자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그려내거나 묘사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마디스야말로 용감하고 사랑에 빠진 기사들의 북극성이며 금성이고 태양이었으니, 사랑과 시사도의 기치하에 편력을 떠난 우리 모두는 그를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일이 이러한즉 산초야, 나는 아마디스를 가장 비슷하게 따라하는 편력기사가 기사도를 가장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 314)

 

 

  마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제가 듣기에 사랑은 어떤 때는 날아가고, 어떤 때는 걸어가고, 어떤 이에겐 달려가고, 어떤 이에게는 천천히 간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미지근해지면 반대쪽에서는 불을 태우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입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주고, 같은 장소에서도 한 곳에선 갈망의 달리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한 속에선 끝내고 완결하는 것도 있고, 아침에 요새를 포위하면 밤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p. 314)

 

 

  만물을 변화시키고 사그라뜨리는데 있어서 시간은 사람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지요.
(p.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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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돈키호테』는 죽음의 문턱에서 제정신을 찾은 한 광인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하나의 문학적 풍자인가?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원제 『제치있는 시골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머리말에, 당시 유행하던 통속적인 기사소설을 응징하기 위햐여 이 소설을 쓰게되었다고 말한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은 반종교개혁운동과 합스부르크 절대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기사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돈키호테의 광기를 이용하는 교묘하게 당시 사회를 비판하면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감명을 받은 세르반테스는 종교의 자유, 남녀간 사랑의 자유, 세습제도 폐지, 정의로눈 재판 등을 꿈꾸었으며, 이들 달성하기 위해 돈키호테는 끊임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p. 718)

 

 

  『돈키호테』가 오늘날까지도 최고이 소설로 손꼽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꾸는 꿈이 물거품으로 끝날지언정 한순간이라고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돈키호테』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꿈과 이상을 위하여 모험을 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산초 판사와 같은 현실주의적 사고도 존재한다. 꿈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바로 우리의 양면적 모스이자 실존인 것이다.
(p. 723)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가치는 그의 작품을 유머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은 심각하거나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비판하지 않고, 당시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귀족들의 형태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그들을 풍자하고 조소를 보냄으로써 문학적 진가를 발휘한 데 있다. 여러 가지 특성에서 『돈키호테』는 당신의 어떤 문학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기교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는 그 시대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집결하여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개방식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유럽의 현대소설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p.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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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니콜로마키아벨리 저 / 강정인,김경희 공역 / 까치 / 267쪽
(2014. 2. 11.)

 

 

 

  군주의 총애를 구하는 이들은 그들이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나 군주가 가장 기뻐할 것을 가지고 군주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군주는 말, 무기, 금박의 천, 보석 그리고 군주의 위엄에 적합한 장신구들을 종종 선물로 받곤 합니다. 저 또핝 전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었지만, 제가 가진 것 중에서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과 고대사에 대한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배운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러한 것들을 오랫동안 성심껏 성찰한 결과를 한 권의 작은 책자로 만들어 전하께 바치려고 합니다.
(p. 11)

 

 

  역사상 알려진 모든 군주국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의 방법으로 통치되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

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 명의 군주가 그의 가신들, 곧 그의 은덕과 선임에 의해서 국정을 보좌하는 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가 제호들과 더불어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후들은 군주의 은덕이 아니라 오래 귀족 가문의 세습적인 권리를 통해서 그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한 제후는 자신의 영토와 신민들을 영유하고 있으며, 신민들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충성합니다. 군주와 가신에 의해서 통치되는 국가에서 군주는 보다 큰 권위를 누리는데, 이는 전체 영토에 걸쳐서 군주 이외에는 주인으로 인정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들이 단지 군주의 신하이거나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군주에게만 특별한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p. 33)

 

 

  자신의 역량으로 군주가 된 인물들은 권력을 얻는 데에 시련을 겪지만, 일단 권력을 쥐면 쉽게 유지합니다. 국가를 얻기 위해서 겪는 시련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도입해야만 하는 새로운 제도와 통치양식에서 비롯됩니다. 새로운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하기 힘든 일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온적인 지지만 받는 이유는 잠재적 수혜자들이 한편으로 과거에 법을 일방적으로 전횡하던 적들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회의적인 속성상 자신들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혁신자를 공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는 데에 반해서, 그 지지자들은 오직 반신반의하면 행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개혁적인 군주와 미온적인 지지자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마려입니다.
(p. 43)

 

 

  유능한 개혁자들은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모든 위험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시작한 후에 다가오며, 그 위험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통해서만 극복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을 섬멸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면, 그들은 강력하고 확고하며 존중받는 성공한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됩니다.
(p. 45)

 

 

  인민들의 호의로 군주가 된 사람은 그들의 환심을 계속해서 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인민들이란 단지 억압당하지 않는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이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민들의 의사에 반해서 그리고 귀족들의 호의에 의해서 군주가 되었을 때에는 다른 부엇보다도 먼저 인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이는 당신이 그들을 보호함으로써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박해를 예상했던 사람으로 부터 은혜를 받게 되면 시혜자에게 더욱 애정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인민들은 자신들의 호의로 권력을 잡은 군주보다 이러한 군주에게 곧장 더 끌릴 것입니다.
(p. 71)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감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향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습니다.
(p. 114)

 

 

  군주가 한 대신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데에는 아주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더 쓰고 그의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그는 결코 좋은 대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결코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과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항상 군주에 관해서 생각해야 하고 군주의 일에만 관심을 집중해야 됩니다. 한편 군주는 대신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를 우대하고, 재부를 누리게 하며, 그를 가까이 두고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는 등 그를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군주는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오직 군주에게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이미 얻은 많은 명예와 재부로 인해서 더 많은 명예와 재부를 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자신이 맡은 많은 관직들을 잃을까 염려하여 변화를 두려워하도록 대우해야만 합니다. 만약 대신과 군주가 그러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계속 신뢰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둘 중의 어느 한 쪽은 항상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것입니다.
(p. 153)

 

 

  인간이란 너무 자기 자신과 활동에 만족하고 자기 기만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아첨이라는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아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군주는 경멸당하는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당신 자신을 아첨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듣더라도 당신이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에 대한 존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제3의 방도를 따라야 하는데, 자신의 나라에서 사려 깊은 사람들을 선임하여 그들에게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그것도 군주가 요구할 때만 허용해야지 아무 때나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군주는 그들에게 모든 일에 관해서 묻고, 주의 깊게 그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그 뒤에 자신의 방식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에 내려야 합니다. 나아가서 군주는 그의 조언자들이 말이 솔직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의 말이 잘 받아들여진다고 믿게끔 처신해야 합니다. 군주는 그가 선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그의 목표를 확고학 추구하며, 그가 내린 결정에 관해서 동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처신하지 않는 군주는 아첨꾼들 사이에서 몰락하거나 아니면 그에게 주어지는 상반된 조언 때문에 결정을 자주 바꾸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p. 155)

 

 

  「군주론」을 통해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의 일반적 특색을 다음과 같은 주제영역을 설정하여 간략하게 개관하겠다. 곧 현실주의적 정치사상과 이익 정치의 태동, 정치의 독자성과 자율성, 정치와 윤리의 관계, 정치에서의 외양과 본질의 문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정치 형이상학이 그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대표적인 현실주의 사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군주론」에서 군주에게 권력의 획득, 유지, 확대에 필요한 조언을 제시하기에 앞서 마키아벨리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과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에 대한 유명한 구분을 하고 있다. 이 구분에는 이전의 도덕철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이 이제껏 전적으로 가상의 공화국이나 군주국에 관해서만 논의했을 뿐이고 군주가 실제로 활동해야 하는 현실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런 아무런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현실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의 필요성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역설은 홉스에 이르러 비로소 '군주에게서 개인으로', '국가의 본성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확대돠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국가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론이 인간이 본성'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국가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론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감지했을 것이고, 인간본성에 대한 그의 언급이 예리한 통찰력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체계화되지 못한 채 그의 저작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인간본성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통찰은 홉스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p. 237)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윤리관은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cs as a Vocation)"에서 구분한 '확신의 윤리(ethics of conviction)'와 '책임의 윤리(ethics of responsibility)' 중 책임의 윤리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베버에 따르면 확신의 윤리는 인간이란 선한 존재라고 전제하고, 동기가 선하면 주어진 행위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책임의 윤리는 인간의 평균적인 악을 전제하고, 이를 감안하여 행동해야 하며, 다라서 동기의 선함보다는 결과의 선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이러한 구분은 일부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독교적 윤리관은 확신의 윤리에,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윤리관은 책임의 윤리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p. 242)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두 부류의 학자들이 서양 고전의 번역에 종사한다. 하나는 그 고전이 쓰여진 원어에 능통한 학자가 자신의 전공분야와 상관없이 번역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대학의 불문과 교수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하거나 이탈리아에서 사학을 공부한 교수가 마키에빌리의 「군주론」을 번역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전공분야의 학자가 전의 원어에는 능통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전공지식에 근거하여 영어, 독일어, 일어 번역된 서양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옮긴 이와 같이 서양 정치사상을 전공하는 교수가 프랑스어나 아틸리아어를 모르면서 영어본에 근거하여 「사회계약론」이나 「군주론」을 번역하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각각의 경우에 그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번역자는 원문의 '문의'에 충실할 수 있으나, 사상사 전반이나 특정한 사상가의 사상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중요한 핵심용어나 문구들을 정확하게 옮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후자의 경우 번역자는 전체적인 맥락을 제대로 포착하고 핵심적인 학술용어를 제대로 옮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원문의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더욱이 이중번역으로 인해 오력위 위험이 배가될 가능성이 있따.
(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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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외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종인 / 열린책들 / 360쪽
(2014. 1. 31.)

 


 

  당신은 내 영혼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당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고독 속에 내던져진 대지가 온몸을 아파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봄, 그러니 부드럽게 오소서. 내 영혼 속으로 사뿐히 오소서. 내 생각은 당신이 걸어오는 그 길에 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꽃을 피우고 그리고 향기를 내뿜게 됩니다. 당신의 발길 아래서 희망의 색이 싹을 틔우며 미소 짓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당신의 숨결이 내 영혼 위로 불어오면 내 꿈들은 겨울 도안의 무기력을 떨쳐 내고 기지개를 켭니다. 내 꿈들은 놀라지도 않고 당신에게 미소 짓습니다. 당신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내 안에 깃들여 있는 새들이 눈을 뜨면서 날갯짓합니다. 당신은 미소 지으며 아주 사뿐하게 걸음을 내디딥니다. 오 여왕이여 내 영혼 속에 오소서.
(p. 13)

 

 

  무한한 석양이 내 안에서 펼쳐집니다. 내 안의 태양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붉은 수의가 바다 위로 저 자신을 질질 끌고 가더니 조각조각 찢어 버립니다. 내 가슴속의 모든 것이 무거운 정적으로 가라앉으며 저 엄청난 갈등, 엄청난 시체를 덮어 줍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서 조정의 메아리가 울려 퍼집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은 죽어 버린 하루를 조용히 슬퍼하는 밤중의 바람 소리 혹은 종소리입니다.
(p. 68)

 


  내가 보기에 플라톤의 <향연>은 헬라스 세계의 요약이다. 아무리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 파이드로스, 기타 인사들이 식탁 주위의 2인용 소팡들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장미와 제비꽃으로 엮은 화관을 둘렀다. 잘생긴 청년들이 멋진 크라테르에서계속 포도주를 따라 준다. 이야기하고 술 마시면서 천천히 장엄하게 이데아의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들은 장미와 제비곷을 머리에 두르고 철학을 논했으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전해진 디오티마의 말은 인간의 마음이 이룩한 저 신성한 높이를 보여준다. 그때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잘생긴 헬라스 청년 알키비아데스가 실내로 들어온다. 거의 검은 머리에는 담쟁이가 장식되어 있고 사랑스러운 피리 부는 소녀가 그를 안고 함께 들어온다. 포도주가 더욱 풍성하게 돌려지고 늙은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다.
(p. 99)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도 유예도 없게 되었다. 사람의 투쟁에서 버티지 못하고 땅에 쓰러진 사람은 뒤에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만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목표는 자기 이익,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했다. 그 이익이란 소위 명예, 부, 권력을 의미했ㄷ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근대의 인간은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사람들은 뭐든지 다 원했다. 이러한 자아의 신격화를 찬양하는 위대한 두 예언자가 있었는데, 철학 부문에서는 니체였고 정치 부문에서는 비스마르크였다.
  니체는 소리쳤다. 나 자신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신이 존재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슈팽은 노래했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고 그건 나다!
  고대의 단순함과 즐거움, 그리고 중세의 헌신, 황홀, 신앙을 거쳐 우리는 근대의 방종한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도덕, 헌신, 미덕, 이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
(p. 107)

 

 

  우리의 영혼은 오이디푸스를 닮았다. 지나간 시대들 내내 우리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연출해 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즐겁고 평온하여 이 세상의 주인인 듯했다. 그는 다행스럽게 아무것도 몰랐다. 이것이 1막의 오이디푸스이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저런 암시로부터 여자가 던지는 뻔뻔한 말들을 단서로그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탐문에 나서고 심각한 고뇌에 빠진다. 영혼이 회의, 탐문, 호기심, 망설임의 2막으로 들어선 것이다.
  위대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그 진실을 밝힌다. 하지만 영혼은 그 놀라운 계시에 전율하고 계속해서 의심한다. 그는 온 사방으로 조사관을 파견하고 더욱 열심히 탐문하여 진실 깊숙이 파고 들며 기만적인 희망을 물리친다. 마침내 우리는 3막에 들어선다. 우리의 영혼은 진실을 똑바로 쳐다보고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이다. 아제 더 이상 즐거움도 쾌락도 없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일단 무덤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죽기로 되어 있는 이상, 우리의 해골이 아무런 위안도 없이 땅속에 묻히기로 되어 있는 이상,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제 더 이상 즐거움도 쾌락도 없다. 너무 많은 빛은 우리의 영혼을 눈멀게 하는 것이다.
(p.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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