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 이순희 / 부키 / 384쪽
(2014.10.16.)

 

 


  오늘날 부자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가난한 나라의 시장을 장악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나쁜 사마리아인처럼 공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에는 아예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개발도상국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때문에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개발 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권장하는 것이 역사적 위선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P.34)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품은 의도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가난한 날들에 해를 끼친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느냐에 있다. 과연 이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설파하는 대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해 역사와 현대 세계의 분석, 미래에 대한 예측과 변화를 위한 제안 등을 통해 몇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P.36)

 

 

  자유 무역은 대개 약소국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으며, 선택권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의 대부분은 짧은 예외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 무역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성공한 경제들은 거의 모두 세계 경제로의 무조건적인 통합 과정이 아닌,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통합과정을 거쳐 정책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당했던 (식민 지배와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된) 첫 번째 세계화 시기나 정책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었던 지난 사반세기보다 상당한 정책 자율성을 가지고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던 '형편없었던 옛날'인 그 시절에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P.67)

 

 

  한마디로 자유 무역의 옹호국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경우 세계를 지배하는 산업 강국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 무역 경제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부자 나라들 가운데서도 가장 심하게 보호 무역을 실시했던 나라였다.
  물론 관세는 어떤 나라가 유치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단적으로 해밀턴이 처음 내놓은 권고 사항에는 특허와 품질 기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공공투자 등 유치 산업을 장려할 수 있는 11개 유형의 수단이 들어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관세를 가장 공격적으로 사용한 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 종종 관세 정책 대신 다른 여러 가지 정책 개입 수단 - 가령 국영 기업, 보조금, 또는 수출 시장 지원 등 - 을 보다 강력하게 사용하곤 했다.
  오늘날의 부자 나라 정부들은 (영국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업화 초기에 국영 기업을 설립하였다.
(P.94)

 

 

  공산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서 실패했다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서 국영 기업이나 공기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을 이끌어 낸다면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견해는 1990년대 초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주도했던 선도적인 민영화 프로그램 이후 널리 퍼져 나갔고, 과거 공산주의권 경제들의 '체제 저노한'이 이루어진던 1990년대에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조의 지위를 얻었다. 과거에 공산주의에 속했던 세계는 한동안 전부 '민연은 좋고, 국영은 나쁘다.'는 주문에 흘린 것 같았다. 공산주의를 멋지게 풍자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에 나오는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는 인간 배척 슬로건처럼 말이다. 이런 국 기업의 민영화 역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 방침의 주요 항목이었다.
(P.164)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국영 기업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국영 기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개념에서 비롯된다. 바로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닐 경우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물건은 최선을 대해 돌보지만,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은 함부로 다루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듯하다. 국가 소유에 대한 반대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학 ㅔ만들고 싶으면, 당사자들에게 해당 물건의 소유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P.165)

 

 

  정부가 국영 기업을 설립하는 이유는 국민들 사이에서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에게 맡겨 둘 경우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편, 수도, 교통 등의 중요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스위스에서는 외딴 산간 지역의 주소지로 편지를 보내는 비용은 제네바의 주소지로 보내는 비용보다 훨씬 높다.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이 우편 업무를 맡을 경우 이렇듯 산간 지역으로 보내는 우편 요금이 올라기게 되고, 그러면 그곳 주민들은 우편 서비스 이용 횟수를 줄이거나 아예 이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핵심적인 서비스에 대해서는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공기업을 세워 그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P.177)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간 인력 흐름의 증대는 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공무원들은 돈벌이가 좋은 민간 부문 취업이 가능해지면 장래의 고용주들의 편의를 봐 주려고 규칙을 악용하거나 위반할 수 있다. 이들은 당장 손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도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데, 돈을 주고받는 일이 없으면 위법 행위가 아니고 (따라서 부정부패가 아니고) 심해야 판단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는 데 그칠 뿐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보상은 미래에 발생하는데, 그 보상은 최초의 결정으로 이익을 본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기업에 우호적인' 사람, 좀 더 듣기 좋은 말로 '개혁적 인사'라는 명성을 쌓았기 때문에 나중에 민간 법률 회사나 로비 단체, 혹은 국제기구의 돈벌이가 되는 일자리로 옮겨 갈 수 있다.
(P.261)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시장과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전자는 개개인이 가진 돈에 관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한 비중을 둔다. 후자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큰 비중을 둔다. 따라서 민주적인 결정은 대개 시장의 논리를 뒤엎는다.
  민주주의와 시장은 둘 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다. 그러나 양자는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우리는 양자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과 달리)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그리고 경제 발전 사이에 효과적인 순환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265)

 

 

  정말로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정책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데올로그들이다. 앞서 언급했듯 독선주의가 이기주의보다 더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희망은 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자신의주장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난을 받자,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대꾸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부가 아니라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이 케인즈와 비슷하다. 이들도 현실 세계에서 새로운 주장에 부닥치고, 변화하는 현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주장과 현실의 변화가 예전의 확신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경우, 이들도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생각을 바꿔 왔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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