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 박철 / 시공사 / 732쪽
(2014. 02. 23.)


 

 

  자네 책은 기사담을 공격하는 책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고, 성 바실리우스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키케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일세. 또한 세밀한 사실이나 점성술에 의한 관상 같은 것도 자네의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고, 그책은 기하학적 측정과도 아무 연관이 없으며, 말재간으로 논박할 수 있는 논쟁과도 아무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한데 섞어서 설교를 하려는 책도 아닐세. 그따위 설교는 일종의 색동 누더기 옷으로서, 기독교의 지성이 그런 옷을 입어선 안되지. 자네의 책에선 단지 자연을 잘 모방하면 그만이야. 모방이 완전할수록 자네의 책은 훌륭해질걸세. 그리고 자네의 책은 기사담들이 이 세상과 대중 사이에서 떨치고 있는 세력과 권위를 부서버리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자네는 철학자들로부터 문구들을 빌려오고, 성서에서 교훈을 따오고, 시인들에게서 이야기를 베껴오고. 웅변가들에게서 웅변을 얻어오고, 성자들에게서 기적들을 빌려올 까닭이 없네. 자네는 그저 명백한 문장을 써서 되도록 자네의 능력이 닿는데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고, 혼동이나 애매한 것이 없이 자네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면 되는 걸세. 또한 유의할 것은 자네의 이야기를 읽고 우울한 사람도 경멸하지 않게 꾸미고, 현명한 사람도 칭찬을 금하지 않게 꾸미게, 한마디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싫어하지만,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좋아하는 그 허무맹랑한 기사담을 전도시키는 데 자네의 목표를 굳게 정하란 말일세. 그 일만 성공한다면, 그건 결코 하찮은 일에 성공한 것이 아닐 테니 말이야.
(p .15)

 

 

  결국 그는 책을 읽는 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몇 날 밤을 한숨도 안 자고 말똥말똥한 상태로 지새곤 하는 반면 낮에는 완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책만 읽다 보니 머릿속이 책에서 읽은 마법 같은 이야기들, 즉 고통과 전투, 도전, 상처, 사랑의 밀어들과 연애, 가능치도 않은 갖가지 일들로 가득 차버린 것이었다. 그는 책에서 읽은 몽환적인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p .40)

 

 

  사실상 그는 이미 이성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미치광이도 생각지 않았던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편력기사가 되어 무기를 들고 말등에 올라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속 편력기사의 모험들을 직접 실천에 옮겨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길이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가련한 양반은 자기의 무훈에 힘입어 적어도 트라피소나 왕국이 이미 자기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듯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보니 그 속에서 별난 욕심도 생겨났고,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걸 실천에 옮기겠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p .41)

 

 

  그는 장장 나흘 동안이나 그 말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했다. (그의 혼잣말에 /다르면) 자기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기사의 말이라면 그 역시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골 귀족은 편력기사의 말이 되기 전에 이 말이 누구의 말이었는지를 밝히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모시는 주인의 신분이 바뀌면 말의 이름도 바뀌는 법이며, 이제부터 맡게 딜 새로운 명령과 새로운 임무에 알맞은 이름을 지으면 점차 유명해지고 명성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이름들을 지었다가는 버리고, 다시 만들었다가는 버린 끝에 마침내 로시난테라고 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고귀하고 듣기에도 좋았으며, 한때 바싹 야위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말에게 마음에 꼭 드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자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도 짓고 싶었다. 그래서 여드레를 고민한 끝에 돈키호테라 부르기로 했다. 사실은 이 점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작가들이 그의 이름이 케사다가 아니라 키하다가 맞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어쨌든 훌륭한 아마디스는 단순히 아마디스라고 불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조국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덧붙여 아마디스 데 가울라라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돈키호테도 훌륭한 기사처럼 그의 이름에 고향의 이름을 덧붙여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문과 고향 마을을 만방에 알리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그런 이름을 갖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p .42)

 

 

  "주인님, 물러난다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며, 위험이 희망보다 앞설때는 기다린다는 것 또한 분별이 아닌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발길을 멈출 줄 알고, 하루 사이에 모든 모험을 다 치러내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로 현자가 행할 바입니다. 제가 비록 거칠고 천한 놈이지만, 자기 조절 면에선 이미 나름대로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저의 충고를 받아들이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마시고, 타실 수만 있다면 로시난테에 올라타십시오. 타실 수 없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저의 통찰력을 발휘해본 결과 지금은 날랜 손보다는 빠른 발이 더욱 필요합니다."
(p. 282)

 

 

  젊은이들의 사랑이란 사랑이라기보다는 욕망이기 쉽지요. 욕망의 궁극적인 목표는 쾌락이기 때문에 일단 쾌락이 달성되고 나면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등을 돌리고 맙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자연 현상에 의해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한계가 없는 법.

(p. 305)

 

 

  한 화가가 자신의 예술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원본 그림을 모사하게 마련이다. 이 법칙은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직종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신중하고 참을성이 있다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율리시즈를 본받아야 하고, 또 그럴 것이다. 호머는 율리시즈의 사람됨과 모험을 통해 우리에게 그가 지닌 신중함과 참을성에 대핸 생생한 초상을 그려낸 바 있으며, 베르길리우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인간성을 통하여 자비로운 자의 용기와 용감하고 사려 깊은 장수의 기민함을 보여주었다. 다만 율리시즈와 아이네아스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그들의 미덕을 모범으로 남기고자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그려내거나 묘사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마디스야말로 용감하고 사랑에 빠진 기사들의 북극성이며 금성이고 태양이었으니, 사랑과 시사도의 기치하에 편력을 떠난 우리 모두는 그를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일이 이러한즉 산초야, 나는 아마디스를 가장 비슷하게 따라하는 편력기사가 기사도를 가장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 314)

 

 

  마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제가 듣기에 사랑은 어떤 때는 날아가고, 어떤 때는 걸어가고, 어떤 이에겐 달려가고, 어떤 이에게는 천천히 간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미지근해지면 반대쪽에서는 불을 태우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입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주고, 같은 장소에서도 한 곳에선 갈망의 달리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한 속에선 끝내고 완결하는 것도 있고, 아침에 요새를 포위하면 밤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p. 314)

 

 

  만물을 변화시키고 사그라뜨리는데 있어서 시간은 사람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지요.
(p.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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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돈키호테』는 죽음의 문턱에서 제정신을 찾은 한 광인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하나의 문학적 풍자인가?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원제 『제치있는 시골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머리말에, 당시 유행하던 통속적인 기사소설을 응징하기 위햐여 이 소설을 쓰게되었다고 말한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은 반종교개혁운동과 합스부르크 절대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기사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돈키호테의 광기를 이용하는 교묘하게 당시 사회를 비판하면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감명을 받은 세르반테스는 종교의 자유, 남녀간 사랑의 자유, 세습제도 폐지, 정의로눈 재판 등을 꿈꾸었으며, 이들 달성하기 위해 돈키호테는 끊임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p. 718)

 

 

  『돈키호테』가 오늘날까지도 최고이 소설로 손꼽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꾸는 꿈이 물거품으로 끝날지언정 한순간이라고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돈키호테』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꿈과 이상을 위하여 모험을 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산초 판사와 같은 현실주의적 사고도 존재한다. 꿈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바로 우리의 양면적 모스이자 실존인 것이다.
(p. 723)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가치는 그의 작품을 유머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은 심각하거나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비판하지 않고, 당시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귀족들의 형태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그들을 풍자하고 조소를 보냄으로써 문학적 진가를 발휘한 데 있다. 여러 가지 특성에서 『돈키호테』는 당신의 어떤 문학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기교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는 그 시대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집결하여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개방식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유럽의 현대소설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p.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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