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오후의 만남 - 루이스 캐럴의 판타지 동화 <앨리스>의 세계
양윤정 지음 / 열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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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열풍 뒤에 그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는 여지없이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거대 출판사의 물량공세에 발맞춰 베스트셀러가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인기있는 드라마나 영화에 노출된 책은 여지없이 입소문을 타고 팔려나간다. 근래에 서점가 베스트셀러순위에 꾸준히 선보인 ‘앨리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나라의 앨리스)’도 여기에 힘입고 있다. ‘앨리스’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아끼는 책이 많은 이의 손에 놓인다는 소식은 기쁜 일이다.  


한국에서 ‘앨리스’를 여지껏 소비(?)했던 이들은 대부분 어린 아이였다. 동화로서 ‘앨리스’는 충분히 매력이 있지만 어른의 눈에 띄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앨리스’가 지닌 해석의 어려움에 있다. ‘앨리스’를 읽어본 독자라면 기억속에 중구난망의 줄거리가 엉켜있다. 읽었으나 읽지 않은 책으로 남아있는 책이 ‘앨리스’ 설명하는 수식어이다. 아이의 동화로서가 아니라, 어른의 동화로서 ‘앨리스’를 독해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도움이 필요하다.

앨리스를 어떻게 읽을까?


양윤정의 ‘황금빛 오후의 만남-루이스 캐럴과 동화 <앨리스>의 세계’는 이런 면에서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영문학자로서 저자는 앨리스의 문학적 가치부터 시작해서 앨리스에 나타난 판타지 동화의 특성을 분석한다. 학위논문의 성과를 출판한 관계로 이 책은 영문학, 특히 아동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에게는 상당히 지루하다. 그 중에서도 저자가 ‘앨리스’의 판타지 동화의 특성을 전래동화로서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과 아르네와 톰슨의 ‘민담의 유형’을 동원한 4장 1절이 특히 그렇다.  


일반 독자라면 2장의 루이스 캐럴의 문학적 생애와 <앨리스>의 형성과정과 4장의 2절 삶의 비평을 담은 <앨리스> 정도가 읽어볼 만한 내용인 듯하다. 이 부분은 ‘앨리스’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전달한다. 하나는 질서의 탐색으로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다. 둘, 사랑에 대한 탐색으로서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독해한다. ‘앨리스’의 의미를 전달하는 이 절은 기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저자 나름의 독특한 해석을 기대한다면 아쉬운 대목이다. 

 
저자의 머리말 독백처럼 ‘앨리스’를 어린아이의 전유물인 동화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앨리스’의 문학사적 가치를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즐거움이 있지만, 어른의 눈높이에 맞는 색다름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앨리스’는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 그 역할을 담당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

 ‘앨리스’는 모두 꿈에서 시작해 깨어나며 끝난다. 앨리스는 영원히 꿈에서 존재하는 어린아이이다. 우리는 루이스 캐럴처럼 앨리스를 영원한 7살 어린 소녀로 기억한다. 앨리스의 매력은 시들지 않은 젊음에 있다. 현실에서 청춘은 순간이지만 꿈속에서는 영원하다. 꿈에서 깨어난 앨리스는 황금빛 오후의 서늘한 미풍을 맛본다. 앨리스의 모험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꿈이기에 아름답다. 가끔 찌든 생활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나는 ‘앨리스’를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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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혹은 없어짐 - 죽음의 철학적 의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8
유호종 지음 / 책세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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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가기, 뛰어넘기, 함께하기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
는 몇 가지로 나뉜다. 하나, 죽음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이기에 피해간다. 둘, 종교에 위탁해 영생을 꿈꾼다. 셋, 죽음은 삶의 다른 얼굴이기에 응시한다. 지금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종교적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대부분 사람은 죽음을 피해간다. 삶의 끝자락에 오는 일이므로 삶을 즐기기에도 부족한 지금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사신의 얼굴이 문득 우리를 방문하면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죽음은 삶의 이면에 착 달라붙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철학에서 중심된 화두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절박한 문제가 이토록 홀대당한 이유는 죽음이란 경험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지만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이유가 죽음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가로막는다.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이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이다. 1인칭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이 산 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려면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이런 죽음은 2인칭 죽음으로 삶을 무겁게 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죽음의 기사는 3인칭 죽음에 불과하다. 우리 삶에 죽음을 고뇌할 진동을 유발하지 않기에 그렇다.

죽음의 철학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확실한 사건이 바로 죽음이다. 이 두 질문을 화두로 유호종의 “떠남 혹은 없어짐-죽음의 철학적 의미”는 죽음을 철학적으로 반성한다. 저자가 죽음을 바라보는 갈래는 세 가지이다. 죽음 이후를 묻는 인식적 질문, 죽음은 나쁜 일인지를 묻는 정서적 질문, 뇌사와 죽음의 시점을 묻는 실천적 질문이다. 저자가 다루는 철학적 반성의 세 갈래는 하나하나가 쉽지 않다. 짧은 지면에 죽음에 제기될 수 있는 철학적 논의를 담으려 한다. 차라리 한정된 주제에 저자가 자신의 논의를 집중했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저자는 죽음을 유명한 철학자의 입을 빌려 전달하지 않는다. 앞서 거론한 세 질문에 자신이 고민한 답을 내놓는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앞선 두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은 고민해볼 거리를 던진다. 첫째로, 내가 죽은 뒤 나는 사라지는가라는 인식적 질문에 답한다. 죽음이 가져오는 의식소멸이 반드시 나의 존재가 무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이끌지 못한다. 칸트의 도식을 빌러 경험적 참은 절대적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인식의 한계로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로, 나의 죽음이 반드시 나쁜가라는 정서적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이 나쁘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비교가치 또는 내재가치를 따져야 하는데 어느 비교도 죽음이 나쁘다라는 결론을 이끌 수 없다.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규정하기 보다 소극적으로 결론내린다. 이 정도의 결론에 만족할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죽음이 끝이 아닐뿐더러 나쁘지 않다는 희망을 이 책은 내비친다. 이 얼마나 희소식인가? 하지만 저자의 논증은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첫째, 인간 인식의 한계를 들어 죽음너머가 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내가 보기에 여전히 인간의 죽음 뒤에는 무가 올 가능성이 크다.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더 확실한 지식을 포기하는 게 합당할까? 둘째, 죽음의 가치판단이 힘들기에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은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선택한 삶의 양태에 따라 죽음의 가치는 달라진다. 우리의 선택하는 삶에 따라 죽음의 가치는 달라지는 문제이다.

죽음의 기술(ars moriendi)
죽음에 대한 탐구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좋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
로 탈바꿈한다. 중세 서양에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리 연습했다던 죽음의 기술이란 별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죽지 못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매일 아침 기도하는 일이었다. 죽음 이후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밝은 태양아래 사는 이에게 삶은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죽음의 그림자에 떨기 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좋은 삶을 살자. 이를 위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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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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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부재의 파국
 페터 한트케- ‘관객모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작가의 전부이다. ‘불안’이란 키워드에 사로잡혀 읽게 된 그의 작품은 낯설다. ‘문학은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다’라는 말처럼 이 책은 언어자체를 물고 늘어진다.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가 벌이는 사건은 여기서 대수롭지 않다. 작가는 언어가 가리키는 사건에 관심이 없다. 오직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주인공의 언어가 그 중심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 책은 읽기가 상당히 거북하다. 처음부터 말은 삐걱거리고 주변인물과 제대로 된 대화는 없다. 친숙한 소설의 문법을 탈피하는 소설에서 대화의 양태를 주목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대화를 나누지 못하니 요제프 블로흐가 벌이는 의미잔치란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일뿐이다. 언제나 그의 말은 의미의 과잉으로 넘쳐난다. 대화를 하고 있으나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 모순. 
 

 소통부재는 소설 전체를 가로지르는 문제이다. 마지막에 패털티킥을 앞둔 골키퍼를 등장시키는 장면은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관중들의 환호성도 선수의 외침도 이 골키퍼를 구원할 수 없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저야 하는 골키퍼처럼 주인공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혼자이다.

 불안은 지속된다, 하지만...
 대화할 수 없기에 혼자이다. 요제프 블로흐는 과거 타인과 맺은 기억은 있지만 현재는 없다. 그에게 불안이란 피할 수 없다. 불안이란 절박한 주인공의 상황을 규정짓는다. 하지만 그 불안에서 벗어날 해법을 알지 못한다. 이 불안이 절망적인 이유는 주인공을 옥죄는 기분에서 벗어날 구원의 손길이 없어서이다. 
 

 작가가 벌이고 있는 말잔치는 소통부재의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요제프 블로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말하고 있지만 듣는 이가 없는 시대. 작가가 보여주는 문제에 작가는 에둘러 해법을 말한다. 그 방법이란 소통의 복원이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관계회복. 결국 인간이란 사이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법이다. 대화의 복원은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패터 한트게의 소설은 독특하다. 언어를 말하지만 존재를 말한다. 보통의 소설은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인물, 사건, 배경이 어우러져 사건을 만들고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한트케는 언어자체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언어는 존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에게 문학이란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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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 이학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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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라는 유령이 주변을 떠돈다
불안은 우리시대의 키워드이다. 삶의 낙관 대신 절망이 앞을 가린다. 내일이 없다는 믿음에 달라붙어 이 유령은 우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한국사회도 보이지 않는 이 불청객에 자유롭지 못하다. 작년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정의’라는 화두도 그 배경에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미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부조리의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는 우리시대 자화상의 현재와 해법을 제시한다. 짧은 분량(150쪽)에 담긴 저자의 통찰은 대단하다. 발간된 지 이미 10여년이 넘은 책이지만, 일반 독자에게 현대사회의 지평을 조망하는데 나치반 역할을 한다. 이 책의 모태가 캐나다방송(CBS)의 강연이기에 일반 독자가 읽고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사회
찰스 테일러가 이 책에서 진단하는 현대사회 병폐의 원인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왜곡된 ‘자기실현성(authenticity)’ 이다. 둘째, 도구적 이성이다. 셋째, 앞선 자유의 상실이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첫째로 언급한 자기실현성의 이상의 왜곡을 바로잡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자기실현성’이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는 주장이다. 근대사회에서 개인주의의 확산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실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 결과 타인과 관계는 소홀해지고 공동체의 관심사는 멀어진다. 테일러는 ‘자기실현성’이라는 이상이 폐쇄적인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넓은 지평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동의 전선을 가지자
조각조각 나눠져 쇠우리(iron cage)에 갇힌 자포자기론 결코 현대사회의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공동체의 이상을 위한 투쟁만이 파편화를 막을 수 있다. 투쟁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특정한 이익을 따르는 집단이나 이념에 사로잡힌 집단이 아니다. 삶의 지평을 폭넓게 공유하는 공동체가 투쟁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다. 과거에 신이나 이념이 담당하던 삶의 지평은 사라졌다. 저자는 도덕적 이상에 기대 공동의 전선에 참여하라고 독려한다. 테일러는 성공한 공동전선 사례를 들어 공동의 싸움이 진행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친다. 그러나 이 투쟁은 끝나지 않는 영원한 전쟁이다. 투쟁은 계속된다(la lotta continu)!.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찰스 테일러는 새로운 의미를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려 노력한다. 도덕적 이상이든 삶의 지평이든지 의미를 어떻게 부르든 그의 해법에는 목적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는 어떻게 의미가 정해지는지 해명은 없다.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사회라면 동의할 만한 이상이 있다! 이것이 저자의 해법이 출발하는 출발선이다. 그 이상이란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시대의 산물인가? 찰스 테일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듯 하다. 그의 말처럼 인간이란 정체성은 대화를 통해 형성되고 결국 우리의 이상도 계속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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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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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보면 이빨을 드러내며 싱긋 웃는 체셔 고양이가 등장한다. 채셔 고양이는 앨리스를 포함해 모두가 미쳤다고 말한다. 앨리스가 미치지 않았다면 이상한 나라에 오지 않았을 거라는 묘한 답변을 남기며 이 고양이는 사라져 버린다. 김태형의 ‘불안증폭사회-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는 ‘미친’ 한국사회의 모습을 비춰준다. 저자의 역할은 체셔 고양이처럼 이 미친 세상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는 일이다. 앨리스야 미친(?) 이상한 나라에서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벗어났다고 하지만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 한국이란 현실은 꿈을 꿀 수도 깰 수도 없는 곳으로 불안이란 보이지 않는 분위기로 우리를 옥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_채셔고양이

 이 책은 주변에 퍼진 ‘불안’이란 키워드로 한국사회 문제를 심리학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저자가 한국사회에 퍼진 불안증폭의 원인으로 뽑은 심리코드는 9가지이다.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 등이다. 심리코드에 맞춰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게 저자의 목적이다. 여러 키워드에 맞춰 한국사회에 퍼진 불안증폭을 분석하지만 모든 원인은 하나로 수렴된다. 그 출발은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이 가져온 사회변화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한국인에게 끼친 정신적 충격은 무한경쟁, 안전지향의 극단으로 요약된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의 충격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가 지적하듯 폭력은 한국인의 마음에 커다란 외상을 남기고 여전히 맹위를 발휘한다. ‘내일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희망을 붙들고 싶다!’는 홍보문구는 지금 우리의 소원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인에게 희망의 좌표를 제시하기에 중량감이 턱없이(?) 부족하다. 불안의 징후를 찾아 이러저러하게 열거하고 원인을 얘기하지만 거기까지이다. 3장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해법이라고 해봤자 ‘인간관계의 회복’, ‘건강한 공동체’, ‘사람이 중심되는 사회’이다. 이들은 앞서 9가지의 키워드 아래에서 저자가 되풀이하던 주장이다. 게다가 그 대안이라고 제시한 해법이 도돌이표 이야기에 불과하다. 저자의 고백처럼 ‘서둘러’ 써 그랬던 것일까? 
  

 아울러 이 책에서 사족처럼 붙어있는 에필로그는 저자의 경력, 심리학박사라는 타이틀에 비추어 볼 때 함량미달이다. 저자의 외침처럼 심리학자가 한국사회에 대한 자기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주장에 딴지를 걸고 싶지 않다. 요즘처럼 좌표를 잃고 흔들거리는 사회에 미래를 보여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는 없다. 그러나 저자가 주류 심리학 특히, 진화심리학이나 환원주의적 이론에 제기하는 반론은 직접적으로 해당 이론의 논증을 겨냥하지 않는다. 곽금주 선생이나 김정운 선생이 기고한 칼럼에 등장하는 진화심리학적 주장에 딴지를 걸 뿐이다. 칼럼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스케치를 가지고 해당 이론을 물고 늘어지는 저자가 이해되지 않는다. 기존 심리학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에필로그에 담기보다 저자가 다른 책으로부터 이를 논의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김태형의 ‘불안 증폭 사회’는 한국사회의 현재를 잘 스케치한다. 시기적절하게 ‘불안’이란 키워드를 선택했기에 독자에게 호응을 이끌었을 것이다. 나조차 프레시안에 김태형과 우석훈이 나눈 대담에 이끌려 이 책을 골랐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한국인의 마음을 심리학적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다루기 위해선 저자의 감만으로는 부족하다. 경험적인 관찰 내지 통계가 더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안을 벗어나긴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불안’이란 현상이 아니라 꿈에서 탈출하기 위한 약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제시한 알약처럼 우리를 탈출하도록 도와줄 처방말이다. 판도라 상자에 놓인 희망만 가지고 살기에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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