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의 충격 - 책은 어떻게 붕괴하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사사키 도시나오 지음, 한석주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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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통계청 발표에서 우리나라 독서 인구는 62% 정도로 2009년대비 소폭 감소했다. 우리는 평균 20 정도의 책을 읽는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독서인구가 많고 연령대가 낮을수록 책을 많이 접한다. 독서란 텍스트를 읽는 일이고, 그렇다면 독서인구라 고려되는 책의 범위는 넓다. 실제로 통계청 조사에서 교양서적, 잡지류, 생활·취미·정보서적 등이 광범위하게 포진돼 있다. 책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내면을 보면 책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동네 서점의 멸종과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의 재편을 보노라면 책을 접하는 통로는 단순해져 버려 책의 위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출판 유통구조는 변할지언정 우리는 계속 텍스트를 소비하고 산다.

 

 

 책의 위기를 이야기할 우리는 거대 자본의 물결에 재편된 유통구조에 주목한다. 그래서 간혹 들려오는 대학가 서점의 몰락은 이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징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출판산업의 지형이 변했기에 벌어진 일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출퇴근길에 텍스트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읽는 사람을 목격한다. 텍스트는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텍스트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될 분명하다. 다만 지형도가 달라 낯설게 느껴진다. 사시키 도시나오의 전자책의 충격 일본의 출판현황으로부터 우리나라 출판미래를 가늠하기에 적합하다. 저자의 부제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있다. ‘책은 어떻게 붕괴되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붕괴의 대상은 종이책이지만 부활의 대상은 전자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이미지의 범람이 텍스트의 종말을 고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 오히려 젊은층의 텍스트소비는 오히려 늘어났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저자는 아이패드와 킨들이 일본에 가져온 변화를 추적하면서 이제 출판시장은 플랫폼시장으로 변했다고 선언한다. 책의 유통구조가 변했다. 이는 책의 산업구조가 변해버렸다는 의미이다. 특히 음악산업의 변화를 비유해 출판산업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은 출판산업의 미래를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일본의 출판문화를 신랄하게 꼬집는 부분은 우리 출판문화를 반성하게 한다. 지킬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환상을 출판문화라는 미명아래 지니고 있지는 않은가. 허울좋은 출판사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좀비로 남아있는 출판사가 많은 이유는 우리 출판문화가 제대로 생태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목 그대로 미래의 통찰을 보여주는 부분은 자가출판의 도래와 전자책의 생태계를 예측하는 대목이다. 다품종소량생산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책의 특성을 저자가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래 책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4가지 퍼즐조각을 내놓는다. 하나, 전자책을 읽기에 적합한 디바이스의 보급, , 책을 사서 읽기 편한 플랫폼의 출현, , 책의 접근의 평준화, , 전자책과 독자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매칭모델이다. 전자책은 이제 책의 다른 양태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출판생태계를 고민할 때이다. 번역서 마지막에 보론으로 첨가된 그렇다면, 우리의 전자책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일본의 특수성을 빼고 우리실정에 맞는 책의 미래를 고민할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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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연구
이강훈 지음 / 동문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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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앨리스’는 어떻게 연구될까?
‘앨리스’ 연구는 근래 판타지 동화의 유행에 맞춰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연구의 초점은 문학의 테두리에 한정된다. 이 소설을 소재로 우리나라에서 다른 영역에서 관심이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문학작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동화로서만 아우라를 지닌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에선 ‘앨리스’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수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홀대받는다는 사실은 이상하기 까지 하다. 대중문화에서 활발히 소비되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저주의 작품이다. ‘앨리스’는 그저 어린이가 읽고 소비하는 동화일 뿐이다. 어린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화에서 아니면 에니메이션 한 장면으로 스치듯 기억될 뿐이다.  


문학에서도 ‘앨리스’는 비주류의 신세이다. 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여전히 읽히지만 우리나라에선 문학텍스트로서 연구는 활발하지 못하다. 단행권의 형태로 ‘앨리스’ 연구서가 출판된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논문으로 발표된 연구물을 합쳐도 얼마 안 된다. 게다가 그 연구의 관점은 대체로 몇 갈래로 모아진다. 가장 큰 갈래는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앨리스’를 다룬다. ‘무의식’은 가장 큰 관심사이다. 텍스트는 항상 징후로서 읽힌다. 게다가 꿈을 소재로 다룬 동화니 ‘앨리스’만큼 매력있는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작품속에 소녀의 꿈은 뒤죽박죽이니 해석을 묘하게도 충동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모두가 한 작품을 한 가지 시선으로 재단하는 일은 이 소설의 매력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다른 관점으로 이 어린 소녀의 꿈을 해석할 수 없다니 슬픈 일이다.

정신분석학의 굴레
이강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연구>도 큰 줄기는 정신분석학의 테두리에서 ‘앨리스’를 다룬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개념은 프로이드의 ‘친숙함과 낯섦 속에 두려움(uncanny)’이다. 그 개념을 가지고 작품을 해석하려는 동기는 하나이다. 이상한 나라는 어린이의 의식과 언어로 가득 채워진 장소라는 전제이다. 아이의 눈에 이상한 나라는 신비한 마술의 힘이 바로 나타나는 공간이다. 꿈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 현실과 꿈, 현실의 언어와 애니미즘 언어의 경계에서 소녀는 모험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앨리스는 현실을 지배하는 어른의 의식과 꿈을 떠도는 아이의 인식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까지 매력을 행사하고 환영받는 드문 작품이 된다. 이게 ‘앨리스’의 매력의 원천이다.  


무의식의 심연뿐만 아니라 그 연장선상으로 이 연구서에선 ‘앨리스’가 지닌 무의미의 바탕을 초점을 갖고 연구한다. 무의미의 발생은 기표가 과잉되고 기의가 고정되지 않아 발생한다. 기표는 기의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으니 해석은 열려있다. 언어표현이 지닌 뜻이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 논리학과 같은 인공언어에 비해 일상언어는 애매성과 모호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기에 문학이 추구하는 진실은 고정된 해석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해석의 다양성이야말로 문학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작품은 열린 해석의 영역에 놓여있다. 다만 ‘앨리스’는 무의식을 반영한 독특한 소설이기에 그 정도가 과잉에 이른다. 이 동화의 ‘상호텍스트성’도 그 연장선에 있다. 계속해서 고쳐쓰기가 이루어지고 현실과 성호관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가치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판타지 언어의 문학적 효용성’ 그리고 ‘동화와 놀이’ 등도 마찬가지로 분석되고 연구된다. 이 연구서에 실린 ‘문학과 영화의 연계성’과 ‘동화 번역의 실제적 문제’ 그리고 ‘비평과 창작으로서의 패러디’을 제외하면 모든 논문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나 같은 일반 독자가 보기에 이 연구서는 지루하다. 특히 저자 스스로 고백하듯이 2장과 3장은 자기표절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에서 본래 논문이 실린 출처가 생략되어 있다. 한 권의 책으로 기획되지 않았다면 본래 논문이 들어있는 저널을 명시해야 하지 않나 쉽다. 저자의 ‘앨리스’의 작품관심의 변화가 궁금하기도 하고 본래 발표된 출처를 기록해야 온전한 연구서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연구서는 종래 ‘앨리스’에 관해 연구물을 성과를 묶어 드물게 내놓은 유일한(?) 책인 듯 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앨리스’에 보다 깊은 이해를 도모하고 싶은 독자에게 유용하다. 특히 다양한 번역서를 평가해놓은 ‘동화 번역의 실제적 문제’는 우리나라 동화번역의 문제점과 개선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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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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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거울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 는 한국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책이다. 그러나 ‘앨리스’를 읽고 난 반응은 투정에 가깝다. ‘앨리스’는 말장난으로 가득차 이해하기 힘들다는 푸념에서 시작하여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격을 들어 ‘앨리스’의 영어 원작을 읽어야 한다는 굳은 다짐(?)이 등장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탓에 어머니의 성화에 원전을 읽었다는 꼬마 독자의 고백부터 어린 시절 향수를 되살리려고 읽었지만 이제는 아이의 눈을 지니지 않았기에 이해 저 너머의 성이 되고 말았다는 성인독자의 고백까지 다양하다. 친숙한 ‘앨리스’라는 껍데기 뒤 진실을 찾아보면, 한국에서 ‘앨리스’는 제목만 친숙한 책일 뿐이다. 고전이란 혹자의 말처럼 의무감에 읽는 책이라는 수식어가 ‘앨리스’도 해당한다. 근래 한국에서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해 더욱 친숙해졌지만 여전히 ‘앨리스는 가깝고도 먼 친구이다.  


제목과 단편적인 이야기로 기억되는 ‘앨리스’를 아이의 책으로 치부하기에는 100여 년에 걸쳐 변주되는 ‘앨리스’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앨리스’처럼 그림도 있고 대화도 있는 책은 분명히 아이의 눈으로 볼 때 매력적이다. 게다가 어른들의 교훈 같은 따분한 잔소리는 어디에도 찾아봐도 없는 책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상에 ‘앨리스’를 집어 넣지 않더라도 오늘날 아이의 눈에도 ‘앨리스’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이의 책으로 ‘앨리스’의 매력을 가둬두기에는 ‘앨리스’의 영향이 너무 크다. ‘앨리스’의 탄생 이후 문학가, 철학자, 예술가 등이 ‘앨리스’에게서 받은 영감을 생각해보면 이 책은 어른을 위한 책이다. 마틴 카드너의 이 책은 ‘앨리스’를 잘 알고 싶은 어른을 위해 썼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이를 배제하는 책은 아니다) 수많은 각주에 질릴 수도 있지만 틈틈히 읽다보면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앨리스’에 대한 오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공작부인은 앨리스에게 모든 것에는 교훈이 있다고 충고한다. 이 말처럼 ‘앨리스’에 얽힌 무수한 상징과 해석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어쩌면 ‘앨리스’의 매력은 구름처럼 떠도는 해석이 방증한다. 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른 법이다. 마틴 가드너는 이런 해석의 과잉을 염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붙인 주석은 심리학 내지는 정신분석학류의 해석을 배제한다. ‘앨리스’는 꿈으로 이루어진 동화이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해석의 보고일 수 있다. 하지만 가드너의 걱정처럼 누구나 ‘돌팔이(?)’정신과 의사흉내 내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의 현실 세계의 또 다른 인물, 찰스 도지슨과 앨리스의 실제 모델, 앨리스 리델 사이에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가 그러하다. 그 둘 사이에 애로스 의미로서 사랑이 있었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앨리스’는 이성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상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대지에 뿌리박지 못하고 하늘위로 둥둥 떠나지지 않는다. 이성과 상상의 야누스의 얼굴로 바라볼 때 가치가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현실에선 수학자로서 성직자로서 삶을 살았지만 ‘앨리스’에선 하얀 기사로서 어린 친구를 바라보는 애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두 시선 모두 ‘앨리스’에 드러난다. ‘앨리스’를 공부하듯 읽든 재미로 읽든 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이 책은 ‘앨리스’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 각주가 붙었다. 어린 소녀의 꿈속 한바탕 여행을 즐길 독자라면 그 모험을 위한 준비에 기꺼이 동참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집어들 정도의 독자라면 마음속에 앨리스는 영원한 아이콘으로 새겨져 있다. 팬심이란 언제나 스타를 향해 열려있게 마련이다. 
 

 


의미의 놀이터
‘앨리스’는 황당무계한 유머에 불과하지 않다. 황금빛 오후에 떠난 여행을 기억하는 소녀를 위한 동화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여행에 동참한 이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어린이를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했던 어른의 노작이다. 현실에서 등장한 인물이 이야기속에 등장하고 그 시절 유행했던 무수한 시가 책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앨리스’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줄거리조차 머리에 잡히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마냥 헤매기 쉽상이다. 가드너는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아주기 위해 나침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그 장난감을 다시 찾아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세계에 푹 젖어 빠져보자.

이 책에 각주를 붙인 마틴 가드너는 지난 해 2010년 5월에 하얀토끼를 따라 하늘나라로 떠났다. 지금쯤 그가 하얀토끼를 따라잡아 앨리스의 안부를 물어볼지 모른다. 최종 주석본인 이 책은 가드너의 ‘앨리스’ 주석본 완결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더욱 소중하다. 게다가 책 말미에 앨리스를 깊이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친절하게 참고문헌을 첨가해 놓았다. 아직 국내에 ‘앨리스’를 소개하는 책은 극히 드물다. 소개하더라도 문학의 테두리에서 종종 논의될 뿐이다. 대중을 위한 다양한 ‘앨리스’읽기가 한국에서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힘들고 어렵던 시절 앨리스가 기억났다. 이상한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소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그때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앨리스’를 꺼내 든다. 소녀는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온다. 꿈을 깬 앨리스는 미풍에 자신이 꾸었던 꿈 한자락을 되뇌인다. 나 또한 힘들 때 ‘앨리스’에서 꿈을 꾸고 현실로 돌아온다. 
 

 


사족 하나
이 책의 번역본에 쏟아지는 질타는 하나이다. 번역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본이 소장할 가치가 없다거나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일까. 여기에 더해서 차라리 영역본을 보라는 조언은 이 번역에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불충분하나 그렇다고 이 책을 버리라는 조언은 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실수나 마찬가지이다. 이 번역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일반 독자가 접하는 앨리스의 번역본은 수없이 많다. 이중에서 이처럼 상세히 주석이 번역되어 나온 책은 국내에 없다. 번역의 질을 일일이 따지자면 텍스트뿐만 아니라 주석에서 지적할 수 있는 곳도 여러 군데이다. 하지만 좀 더 애정어린 눈으로 이 책을 본다면 그렇게 흠잡을 일은 아니다. 영역본을 본다고 해서 ‘앨리스’의 이해가 일취월장하지 않는다. ‘앨리스’ 영역본조차 편집자에 따라 다양한 각주가 붙은 판본이 여러 존재한다. ‘앨리스’를 사랑한다면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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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2-2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들어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wonderkid 2011-0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맙습니다. 꾸벅. 어른이 될수록 아이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러셀 자서전 - 상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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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기나 자서전 등 개인적 삶에 치우친 글을 읽기를 싫어한다. 자신의 삶을 대중에게 공개해 평가를 받을 만한 의미있는 인물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자서전이라고 해봤자 공병우의 '나는 내식대로 살았다'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있는 자서전 한 권을 추가해야 겠다. 바로 러셀의 자서전이다.
 

 러셀의 자서전의 의미는 이미 그의 프롤로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러셀의 인생을 지배해온 열정이었다. 자서전 전체에 걸쳐 러셀이 어떻게 이 가치를 위하여 살아왔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자기 자신의 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그의 삶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러셀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공동체의 삶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안 사람이다. 러셀의 삶에 '멋있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주저하지 않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많지만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연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러셀의 첫 번째, 두 번째 가치와 더불어 세 번째 가치가 더욱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서전 1권에서는 러셀 스스로 세 가치에 눈뜨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사랑과 지식에 눈뜨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연민에 눈뜬다. 자서전이 점차 중년기와 노년기로 들어갈수록 러셀의 삶은 정치적 삶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3권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에피소드보다는 시민불복종운동과 반전운동의 공적인 삶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1권이 자서전 2권과 3권에 비해 재미있다. 러셀과 친분있던 사람들의 속속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기 때문이다. 러셀 스스로 3권 머리말에 밝히고 있듯이 명예훼손 등을 염려해 뒤로 갈수록 다른 사람과 얽힌 사적인 이야기의 비중이 줄어든다. 그러나 공동체 삶을 위해 헌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3권이야말로 러셀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유이다. 한 인물이 살아온 여정을 보면서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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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논리학
앤서니 그레일링 지음, 이윤일 옮김 / 북코리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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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공부가 힘든 이유는 철학의 각 영역이 서로 얽혀 있어 실타래를 푸는데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 영역은 다른 영역의 이해가 부분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 내공을 키우는데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그랠링의 책은 철학적 논리학의 영역에서 이 실타래를 푸는데 더할나이 없이 좋은 책이다. 명제, 분석성, 필연성, 선험성, 존재, 전제, 기술, 진리, 의미, 지시, 실재론, 반실재론 등의 철학적 주제를 저자의 내공을 담아 충실히 전달하는 책은 드문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첫 발판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각 장은 그 장의 주제로 한권의 입문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전체 9장에서 8장 까지 각 주제를 자신의 관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공정하게 논의의 배경을 전달한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개진한다. 적어도 관심있는 주제를 펼치고 해당 주제의 숲 조망을 얻는데 좋은 안내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의 완전한 초보자를 위한 책은 아니다. 적어도 이 영역에 약간의 지식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독자만을 위한 책이다. 각 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그 하나로도 상당한 논의거리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독파하기에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각 장의 처음 절에서는 쉬운 주제를 배치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초보자에게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공부방법으로서 약간의 팁을 제공한다면 색인을 이용하여 관심있는 철학자나 주제를 찾아가면서 공부를 해보는 게 좋다.(한글색인이 자세히 정리되어 해당 주제나 철학자의 견해를 종합하며 읽어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철학영역뿐만 아니라 철학적 논리학을 위한 한국어로 된 좋은 입문서가 드물기 때문에 외국어로 된 입문서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기본적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도 번역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그 핵심에 접근하기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좋은 입문서를 만나게 되어 기쁘지만 이 책도 번역상 약간의 오자, 탈자 등이 보인다. 마지막 교정에서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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