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어른을 위한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거울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 는 한국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책이다. 그러나 ‘앨리스’를 읽고 난 반응은 투정에 가깝다. ‘앨리스’는 말장난으로 가득차 이해하기 힘들다는 푸념에서 시작하여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격을 들어 ‘앨리스’의 영어 원작을 읽어야 한다는 굳은 다짐(?)이 등장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탓에 어머니의 성화에 원전을 읽었다는 꼬마 독자의 고백부터 어린 시절 향수를 되살리려고 읽었지만 이제는 아이의 눈을 지니지 않았기에 이해 저 너머의 성이 되고 말았다는 성인독자의 고백까지 다양하다. 친숙한 ‘앨리스’라는 껍데기 뒤 진실을 찾아보면, 한국에서 ‘앨리스’는 제목만 친숙한 책일 뿐이다. 고전이란 혹자의 말처럼 의무감에 읽는 책이라는 수식어가 ‘앨리스’도 해당한다. 근래 한국에서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해 더욱 친숙해졌지만 여전히 ‘앨리스는 가깝고도 먼 친구이다.  


제목과 단편적인 이야기로 기억되는 ‘앨리스’를 아이의 책으로 치부하기에는 100여 년에 걸쳐 변주되는 ‘앨리스’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앨리스’처럼 그림도 있고 대화도 있는 책은 분명히 아이의 눈으로 볼 때 매력적이다. 게다가 어른들의 교훈 같은 따분한 잔소리는 어디에도 찾아봐도 없는 책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상에 ‘앨리스’를 집어 넣지 않더라도 오늘날 아이의 눈에도 ‘앨리스’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이의 책으로 ‘앨리스’의 매력을 가둬두기에는 ‘앨리스’의 영향이 너무 크다. ‘앨리스’의 탄생 이후 문학가, 철학자, 예술가 등이 ‘앨리스’에게서 받은 영감을 생각해보면 이 책은 어른을 위한 책이다. 마틴 카드너의 이 책은 ‘앨리스’를 잘 알고 싶은 어른을 위해 썼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이를 배제하는 책은 아니다) 수많은 각주에 질릴 수도 있지만 틈틈히 읽다보면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앨리스’에 대한 오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공작부인은 앨리스에게 모든 것에는 교훈이 있다고 충고한다. 이 말처럼 ‘앨리스’에 얽힌 무수한 상징과 해석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어쩌면 ‘앨리스’의 매력은 구름처럼 떠도는 해석이 방증한다. 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른 법이다. 마틴 가드너는 이런 해석의 과잉을 염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붙인 주석은 심리학 내지는 정신분석학류의 해석을 배제한다. ‘앨리스’는 꿈으로 이루어진 동화이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해석의 보고일 수 있다. 하지만 가드너의 걱정처럼 누구나 ‘돌팔이(?)’정신과 의사흉내 내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의 현실 세계의 또 다른 인물, 찰스 도지슨과 앨리스의 실제 모델, 앨리스 리델 사이에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가 그러하다. 그 둘 사이에 애로스 의미로서 사랑이 있었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앨리스’는 이성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상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대지에 뿌리박지 못하고 하늘위로 둥둥 떠나지지 않는다. 이성과 상상의 야누스의 얼굴로 바라볼 때 가치가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현실에선 수학자로서 성직자로서 삶을 살았지만 ‘앨리스’에선 하얀 기사로서 어린 친구를 바라보는 애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두 시선 모두 ‘앨리스’에 드러난다. ‘앨리스’를 공부하듯 읽든 재미로 읽든 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이 책은 ‘앨리스’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 각주가 붙었다. 어린 소녀의 꿈속 한바탕 여행을 즐길 독자라면 그 모험을 위한 준비에 기꺼이 동참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집어들 정도의 독자라면 마음속에 앨리스는 영원한 아이콘으로 새겨져 있다. 팬심이란 언제나 스타를 향해 열려있게 마련이다. 
 

 


의미의 놀이터
‘앨리스’는 황당무계한 유머에 불과하지 않다. 황금빛 오후에 떠난 여행을 기억하는 소녀를 위한 동화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여행에 동참한 이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어린이를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했던 어른의 노작이다. 현실에서 등장한 인물이 이야기속에 등장하고 그 시절 유행했던 무수한 시가 책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앨리스’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줄거리조차 머리에 잡히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마냥 헤매기 쉽상이다. 가드너는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아주기 위해 나침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그 장난감을 다시 찾아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세계에 푹 젖어 빠져보자.

이 책에 각주를 붙인 마틴 가드너는 지난 해 2010년 5월에 하얀토끼를 따라 하늘나라로 떠났다. 지금쯤 그가 하얀토끼를 따라잡아 앨리스의 안부를 물어볼지 모른다. 최종 주석본인 이 책은 가드너의 ‘앨리스’ 주석본 완결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더욱 소중하다. 게다가 책 말미에 앨리스를 깊이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친절하게 참고문헌을 첨가해 놓았다. 아직 국내에 ‘앨리스’를 소개하는 책은 극히 드물다. 소개하더라도 문학의 테두리에서 종종 논의될 뿐이다. 대중을 위한 다양한 ‘앨리스’읽기가 한국에서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힘들고 어렵던 시절 앨리스가 기억났다. 이상한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소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그때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앨리스’를 꺼내 든다. 소녀는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온다. 꿈을 깬 앨리스는 미풍에 자신이 꾸었던 꿈 한자락을 되뇌인다. 나 또한 힘들 때 ‘앨리스’에서 꿈을 꾸고 현실로 돌아온다. 
 

 


사족 하나
이 책의 번역본에 쏟아지는 질타는 하나이다. 번역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본이 소장할 가치가 없다거나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일까. 여기에 더해서 차라리 영역본을 보라는 조언은 이 번역에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불충분하나 그렇다고 이 책을 버리라는 조언은 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실수나 마찬가지이다. 이 번역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일반 독자가 접하는 앨리스의 번역본은 수없이 많다. 이중에서 이처럼 상세히 주석이 번역되어 나온 책은 국내에 없다. 번역의 질을 일일이 따지자면 텍스트뿐만 아니라 주석에서 지적할 수 있는 곳도 여러 군데이다. 하지만 좀 더 애정어린 눈으로 이 책을 본다면 그렇게 흠잡을 일은 아니다. 영역본을 본다고 해서 ‘앨리스’의 이해가 일취월장하지 않는다. ‘앨리스’ 영역본조차 편집자에 따라 다양한 각주가 붙은 판본이 여러 존재한다. ‘앨리스’를 사랑한다면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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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2-2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들어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wonderkid 2011-02-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맙습니다. 꾸벅. 어른이 될수록 아이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