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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프런티어] 역사의 희생물? 타고난 음부?

[굿데이 2002-03-05 11:25]
루크레티아 보르자

15세기 무렵의 이탈리아. 로마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연인 빈노차와의 사이에 태어난 네 자녀를 특히 사랑했다. 큰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둘째 후안, 딸 루크레치아(1480∼1519), 막내아들 호프레가 그들이다. 하지만 교황은 결혼이 금지됐던 터라 이들 자녀는 모두 서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는 고명딸 루크레치아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오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사랑의 성격이 좀 유별났다.

보르자 가문의 근친상간 소문은 루크레치아가 여성의 향기를 풍기기 시작하면서 로마 시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후대의 예술가인 빅토르 위고, 도니체티가 이를 소재로 <루크레치아 보르자>라는 희곡과 오페라를 만들 정도였다.

가족의 유난스러운 '사랑'을 받던 루크레치아는 짧은 생애 동안 모두 3번의 결혼을 하는데, 첫번째는 밀라노 왕자 조반니와 12세 때 치르게 된다. 교황은 밀라노와 연합하기 위해 딸의 정략결혼을 '진두지휘'한다. 하지만 12세의 신부 루크레치아는 남편과 동침하지 않았고, 1년 후 조반니가 성불구자라는 이유를 들어 이혼을 요구해온 교황에 의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루크레치아는 첫번째 결혼생활을 해나가는 동안에도 오빠들과 자주 밀회를 나눴다고 한다. 하여튼 첫번째 결혼이 본의 아니게 끝나자 루크레치아는 환멸을 느끼고 수녀원으로 숨어버린다.

둘째오빠 후안이 살해당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질투심에 휩싸인 큰오빠 체사레의 짓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진 그녀는 수녀원에서 심부름하던 한 소년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의지하게 됐다. 루크레치아의 배는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6세는 로마의 국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임신으로 배가 불룩해진 딸에게 처녀선서를 시키는 억지 끝에 가톨릭 법회로부터 이혼 승인을 받아낸다.

아이의 생부인 소년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된 후 로마에는 '루크레치아를 사랑하는 자,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악소문이 퍼져나갔다.

살인범으로 지목된 이는 이탈리아에 '보르자 왕국'을 세울 야망에 불타고 있는 큰오빠 체사레였다.

루크레치아의 두번째 결혼 상대자는 나폴리 왕자였다. 하지만 그 또한 어느 무더운 여름밤 괴한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루크레치아는 22세가 되던 해에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생애 마지막 결혼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에스테가(家) 알퐁소 왕자가 상대였다.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보르자 가문의 혼인정책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

페라라에서 새 결혼생활을 시작한 루크레치아는 완전히 딴 사람이 돼 시인들과 교류하는 등 정적인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로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의 사망, 그리고 큰오빠 체사레가 독살미수로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체사레가 죽자 루크레치아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를 지켜주었던 것은 3명의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와 오빠들이었기 때문이다. 루크레치아는 깊은 절망과 고독을 벗삼아 살다가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근친간의 사랑으로 살아간 그녀는 역사의 희생물이었을까, 아니면 타고난 음부였을까.

<이경민 · 자유기고가>

이런 식의 해석(?)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관의 마돈나'라는 만화에서도 작가는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체자레 보르자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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