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핀, 가서 호빗족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거라" 간달프는 피핀을 미나스티리스의 꼭대기 층으로 던지다시피 밀어 올린다. 이윽고 피핀은 감시병의 눈을 피해 봉화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곤도르의 성에서 타오른 불꽃은 산마루 봉수대들의 릴레이를 거쳐 마침내 로한 땅에 이르고, 로한의 왕 세오덴은 기마병을 진격시킨다. 영화사상 최고의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 반지의 제왕 3편의 펠렌노르 전투신은 이렇게 봉수대의 불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돌발퀴즈. 봉화는 아날로그일까, 디지털일까? 정답은... 디지털이다. 옛날 것이 아날로그이고 요즘 것이 디지털인 것은 아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실제'를 재현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말한다. 아날로그는 실제를 그것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표현한다. LP판이 선율의 높낮이를 홈의 높낮이로 재현하는 식이다. 디지털은 실제를 '0과 1'을 통해 표현한다. 여기서 0과 1은 없음과 있음, 양자택일을 의미한다. 봉화에 불을 붙이는 것(1)은 적군이 침임했다는 급박함을, 불이 붙지 않은 상태(0)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를 표현한다.
바야흐로 디지털 전성시대다. 삼성전자, 소니, 마이크로소프트는 디지털 컨버전스가 미래 성장전략이라 말하고 있고, 디지털은 좋은 것, 빠른 것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MP3도 디지털이고, 인터넷도 디지털이다. 게임도 디지털이고 가상현실도 디지털이다.
허나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 디지털이 가져온 폐해도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디지털 때문에 불법복제 문제로 시끄럽고, 디지털 때문에 인터넷 폐인이 생겨나고, 디지털 때문에 성매매와 자살이 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디지털에 대한 대항(혹은 반항)으로 아날로그적인 방식, 아날로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LP판 사사모, 타자기 사사모, 삐삐 사사모, 편지 사사모 등이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아날로그, 혹은 아날로그적인 삶인 것일까? 손으로 연애편지를 쓰고, 인터넷을 멀리하고, 휴대폰을 꺼두고, 오프라인 모임을 많이 갖는 것은 그저 비문명적, 반(反)기기적인 삶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반대개념이 아니다. 현실 재현이라는 목적을 공유하되, 단지 서로 취하는 길이 다를 뿐이다. 도식화해 말한다면 아날로그는 인간의 힘을, 디지털은 기계의 힘을 보다 중요시 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비문명적, 반기기적인 것이 아날로그와 등치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다.
0과 1로 표현되는 디지털은 복제가 용이하다. 현실 재현방식이 심플하기 때문이다. 복제가 용이하기 때문에 네트워크 속도만 빠르다면 동일한 것이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이 말은 반대로 디지털이 창조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지만, 하이퍼링크에 의해 한 웹페이지는 다른 웹페이지를 연결할 뿐, 새롭게 창조되는 정보란 그닥 많지 않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행하는 펌질을 생각해 보라. 정보를 만든 사람은 한명이지만 그걸 나르는 사람은 수만 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보는 겨우 하나가 늘어날 뿐이다.
반면 아날로그는 복제가 쉽지 않다. 사람과 컴퓨터가 원을 그리는 방식은 다르다. 원을 그리라면 사람은 당연히 원을 그린다. 하지만 컴퓨터는 반지름을 한 변으로 하고 밑변이 0에 수렴하는 이등변 삼각형을 여러 개 붙여서 원을 그린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원이 아니지만 원처럼 보이고, 더욱이 사람이 그린 원에 비하면 정말 원같이 보인다. 도형으로서의 원을 누가 더 엄밀히 그려내느냐의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사람은 컴퓨터만 못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컴퓨터만 못하다 속단할 수 없다. 자신의 손을 통해 형태적으로 완벽히 둥근 원을 그려내기 위해 지웠다 그렸다를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 이 과정 속에 아날로그의 은총이 숨어 있다. 백 사람이 원을 그리면 백 사람이 모두 자신만의 원, 창조적인 원을 그려낸다는 사실, 여기에 아날로그의 소중함이 배태되어 있다.
아날로그적인 삶이 단지 디지털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인터넷 속도의 향상에 따라 우리네 삶도 정신없이 돌아가니 이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간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패스트 푸드에 대신해 슬로우 푸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슬로우 푸드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의 목적이 음식을 천천히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맛있게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맛도 없는 음식, 시간만 들인들 무엇 하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경험, 정성, 그리고 창조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그냥 적당히 맛있는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이 낫다.
음악적인 귀가 뚫린 사람들은 CD로 음악을 들을 때 두통을 느낀다고 한다. 곡선으로 음을 표현되는 LP판의 선율과는 달리 단절적인 계단 형태의 선으로 음을 재생하는 CD가 신경을 거슬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필자 같은 사람에게야 CD의 디지털 음이 LP판의 아날로그 음 보다는 훨씬 맑고 깨끗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CD를 듣고 두통을 느낄 수 있기 까지는 음악에 대한 열의와 사랑을 가지고, 청각신경에 대한 혹독한 훈련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디지털적인 삶은 어찌 보면 주어진 것을 편히 누리려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다. 그것에 염증이 난다면 도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의당 '자유를 향한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손쉽게 아이를 꺼내는 제왕절개가 디지털적이라면, 태아가 산도를 비집고 나오는 힘겨운 여정은 아날로그적이다. 도전하는 삶, 노력하는 삶, 창조적인 삶을 위한 자신과의 투쟁, 그것이 아날로그적인 삶이다. 아날로그, 이거 만만치 않은 놈이다.
*** 이 글은 경희대 학보에 기고한 것을 수정한 것인데, 원고량의 제한 때문에 누락한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학보란게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이곳에도 같이 올립니다.
---------------------- 박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