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책 표지의 그림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욕조 안에서(반신욕중이었나?-이건 우리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답장을 쓰다가 살해당한 쟈코뱅의 마라. 그는 프랑스혁명 당시의 혁명가였다. 그런데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처음에는 자살한 그림이라고 생각했었다. 작은 슬라이드를 통한 그림이었기에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욕조하면 흔히 생각나는 것은 살해보다는 동맥자살아닌가.

그런의미에서인지 나는 이 표지의 그림이 잘 선택되었다 생각한다(물론, 1장의 제목이 마라의 죽임이기는 하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그림은 세가지이다. 하나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또 다른 하나는 클림트의 [유디트], 마지막 하나는 들라크루와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이 세가지의 그림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끌고 나아간다.

작중 화자에 속하는 '나'는 자살도우미이다. 현실에선 가능할것같이 않은 이야기이므로 이소설은 판타지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처음에 읽어가면서 나는 '나'가 살인청부업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알고보니 '나'는 자살도우미였다. '나'는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고 그들을 도와준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여행을 떠난다. '나'는 자살도우미이기도 하며 또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나'는 고객들의 이야기를 소설화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여기엔 그의 많은 고객들 중에 두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여자는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은 세연, 또 다른 한 여자는 전위예술가인 '미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여자에 연결된 한남자 'C'이다. 한 남자에게 연결된 두 여자이지만 그 두여자다 자살을 선택하고 자살도우미인 '나'의 도움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한여자는 가스를 통해 또다른 한여자는 동맥을 끊어버린다.

1장은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을 통해 이야기 하는데... 그 장면과 마지막에서 '미미'의 자살 장면이 오버랩된다.(나만 그런것일수도 있다.) 자살은 죄악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있는 나(어린시절 세뇌되다 싶이한)인데도 제목에서 거부감이 아닌 묘한 끌림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고싶다'라는 생각을 여러번 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아니라면 할말은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은, 혹은 못한 것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일것이다. 이러한 때에 그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꽤 매력적이지 않을까? 내가 너무너무 힘들고 아파서 사람을 미워하면서 그사람를 죽이기보다 나를 죽이고 싶었을때 (이렇게 쓰고보니 꼭 실연이야기 같지만 그것은 아니고 사회생활을 처음하면서 겪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이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편안히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것은(그것이 최악의 죄라고 하실지라도.) 그만큼이나 매력적이라는 것이 되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무거운 어떤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니 말이다.

마라의 죽음에서 죽은 마라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것도, 어쩌면 해방감에 젖은 것도, 그것들이 섞인 것도 그모든 것이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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