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독하다. 현대인은 누구나 실존주의의 세례를 받는다. 실존주의뿐이 아니다. 모든 관념들이 현대인들과 함께한다. 샤르트르의 이 소설에서 나온 존재에 대한 관념은 이제 더 이상은 새롭지 않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이다. (다들 적당한 변주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도전이고 의식에 대한 혁명이었을 것이므로. 이제 어느 정도 적당히 고상해진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잡문을 통해, 블로그를 통해, 실존주의를 읊조린다. 그리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연명하는 삶을 좀 더 세련되게 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비슷하니까.

존재의 우연성, 시간의 막막함에 대한 이 서술들은 그러나 정말 뛰어나다. 계몽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 철학의 뒷언저리에서 나는 책장을 넘긴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 그것이 나에게 포섭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익숙한 것으로 대상을 포장한다. 이것은 애정일 수 있으며, 또한 관계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 대상을 묶어두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름을 붙이고 그 대상의 특징들을 제거해나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분류하려드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의 각 존재에 대한 관념, 존재를 여분으로 취급하는 관념은 오히려 아름답다(?). 물론 어느날 문득 괴물이 된 자연이라든가, 나무 뿌리의 폭력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미 낯익은 이미지이고 생각이지만, 모든 것을 여분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고 어려워하며 대해야 하고 그럴수밖에 없으며-사실 우리는 결코 대상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없다, 물건, 사람 등등, 다만 아는 체 하길 좋아한다- 어쩌면 이 태도만이 권력이라는 속성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허무주의자인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굳이 말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게 아니다. 나는 단지 질문과 반성이 많은 인간일 뿐이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니까, 허무주의 같은 그런 괴상하고 어이없는 관념들 속으로 한 인간을 집어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조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비웃기 위한 태도들.










p.66

나는 미래를 ‘본다’―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노파는 약간 절름거리면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멀어진다. 그 노파는 선다. 목도리에서 삐쭉 솟은 흰 머리칼을 잡아당긴다. 노파는 걷는다. 그 노파는 저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노파의 동작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노파는 쓸쓸한 거리를 전진한다. 커다란 남자 신발을 옮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파는 길모퉁이에 가까이 간다. 그 노파는 이미 검고 작은 헝겊 뭉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다. 조금 전에는 노파는 거기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퇴색하고 케케묵은 새로운 것이어서 절대로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없다. 노파는 길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돈다―영원의 시간 속을.




p.80

내 생각은 이렇다. 가장 평범한 사건이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한 인간,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또 그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p.81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이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소계(小計)를 낸다. 이를테면 나는 3년 간 여행을 했다. 부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말도 역시 없다. 여편네와 자식과 도시를 한꺼번에 떠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슷하다. 상하이도, 모스크바도, 알제리도, 2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같다. 때때로―드문 일이지만―사람은 결말을 짓는다. 어떤 여자에게 붙어먹다가 더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갯불과 같은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한다.




p.112

그 모험의 감정은 확실히 사건으로부터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증명됐다. 모험이란 차라리 순간순간이 서로 얽히는 그 방법에서 생긴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즉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즉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인도됨,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그런 식으로 인도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매 순간이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건에서 이 특징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관련된 것을 내용에 연관시켜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사람은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가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는 것 같고, 또 그 여자와 더불어 자기도 늙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모험의 감정이다.




128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182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이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은퇴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휴가 상태, 비활동 상태였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 스스로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서 명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無)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아무것도 없다’.




210 

각자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개인적이고 보잘것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223

나는 타협하려는 거짓 노력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결국 그는 나에게 조그마한 일, 즉 칭호를 받아들여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독서광은 우쭐할 것이다. 독서광은 곧 뒤따라와서 내 앞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은 모든 인간의 태도에 한꺼번에 융합되기 때문이다. 만약 정면에서 그것과 충돌한다면, 우리는 그 계략에 빠져버리고 만다. 휴머니즘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먹고 산다. 완고하고 시야가 좁은 사람들, 강도들은 휴머니즘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진다. 휴머니즘은 모든 폭력이나 과격 행위를 소화해서 그것으로 희고 거품이 나는 임파액을 만든다. 휴머니즘은 반주지주의, 마네스 교(敎), 신비주의, 염세주의, 또는 무정부주의나 자기본위주의 모두를 소화했다. 그것들은 휴머니즘에 있어서만 정당성이 증명될 수 있는 단계이며 불안전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미장트로프(인간을 싫어하는 사람, 몰리에르 희곡 중의 인물)도 인간이다. 따라서 휴머니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장트로프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미장트로프이다. 그는 자기의 증오를 조합할 수 있으며, 후에 인간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우선 인간을 증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사람이 나를 적분(積分)하는 것도, 나의붉은 피가 이 임파액의 짐승을 기름지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반휴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하는 어리석은 짓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그뿐이다.

독서광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230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왜 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토론에 휩쓸려들었을까? 왜 사람들은 여기에 있나? 왜 그들은 먹나?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떠나가고 싶다. 어디든지 정말 ‘나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이다.




p.239

나는 그들처럼 “바다가 푸르‘다’, 저기, 저 높은 곳에 있는 흰 점, 그것은 갈매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 갈매기가 ‘존재하는 갈매기’라는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여기 우리들 주위에, 그리고 우리들 내부에 있다. 그것은 즉 ‘우리’이다. 존재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존재에 손을 댈 수는 없다. 내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믿었을 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옳다. 나의 머리는 비어 있었다. 혹은 꼭 한 마디가 머릿속에 있었다. ‘이다’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까?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물은 무슨 장치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도구로서 쓸모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저항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을 스쳐 갔다. 만약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와서 사물의 성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로 부가되는 공허한 형체일 뿐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달라져버린 것이다. 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대낮처럼 분명했다. 존재가 갑자기 탈을 벗은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범주에 속하는 무해한 자기의 모습을 잃었다. 그것은 사물의 반죽 그 자체이며, 그 나무의 뿌리는 존재 안에서 반죽된 것이다. 또는 차라리 뿌리며, 공원의 울타리며, 의자며, 드문 잔디밭의 잔디며,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사물의 다양성, 그것들의 개성은 하나의 외관, 하나의 칠에 불과했다. 그 칠이 녹은 것이다. 괴상하고 연한 것의 무질서한 덩어리―헐벗은, 무섭고 추잡한 나체만이 남아 있었다.




p.241

희극적…… 아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중에 희극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파극 장면과 유사하다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동하는 유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지산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 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p.242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p.247

우연성은 가장이나 지워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공원, 이 도시, 그리고 나 자신도 무상이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면 그것을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하고, 모든 것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요전 날 저녁때 역부 회관에서처럼 말이다. ‘구토’이다. 그것이 그 더러운 자식들―‘코토 베르’나 다른 곳의 그 더러운 자식들―이 그들의 권리를 휘둘러 숨기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나 가엾은 거짓인가. 아무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무상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내부에서 ‘여분’이다. 즉 부정형하고 애매하고 한심하다.




p.253

허무한 나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은 광대무변 속을 떠돌아 존재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 허무는 존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 존재였으며, 수많은 다른 존재 다음에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더러우냐, 이 얼마나 더러우냐!”




p.292

나는 도시가 두렵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나갈 수는 없다. 만약 너무 멀리까지 모험을 해서 가면 ‘식물’의 권내(圈內)에 부딪친다. ‘식물’은 도시를 향해서 수킬로미터를 땅에서 기고 있다. 그것은 기다리고 있다. 도시가 죽을 때, 식물은 도시에 침입할 것이고, 돌에 기어올라가서 그것들을 조르고, 뒤지고, 그 기다란 검은 집게로 돌을 부술 것이다. 식물은 구멍들을 틀어막을 것이고, 도처에 초록빛 발을 늘어뜨릴 것이다. 도시가 살아있는 한, 그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도시의 입구에 있는 그 거창한 머리카락 아래 혼자서 침입해서는 안 된다. 그 머리카락이 물결치도록 아마도 보는 사람이 없는 채로 덜거덕거리게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도시에 적당히 몸을 둘 줄 알고, 짐승들이 그 구멍 속에서, 유기적인 부스러기의 퇴적 뒤에서 소화를 하고 잠자는 시간을 선택할 줄 안다면, 사람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덜 무서운 광석밖에 부딪치지 않는다.




p.293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p.294

나의 온 생활은 내 뒤에 있다. 나의 생활 전체를 본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형태와 그 느린 동작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 돈을 전부 빼앗아 간 한 판의 노름이었다. 그뿐이다. 내가 엄숙하게 부빌에 들어온 지 3년이 된다. 나는 첫 판에서 졌다. 두 번째 다시 걸었으나 역시 졌다. 나는 노름에서 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이 늘 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놈은 개자식들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나무들처럼, 물탕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련다.




p.296

그들은 태연하지만, 약간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은 약간 장식을 한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그들의 태연하고 안심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뒤집힌다.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대중 소설을 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만드는 엄청난 바보 짓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시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막막막 대자연이 스며들었다. 그 자연은 도처에 그들의 집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그들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다. 조용히 하고 있고, 그네들은 속이 자연으로 충만해서 자연을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이 그들의 외부에, 그들 도시에서 50킬로미터 밖에 자연이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자연을 ‘본다’. 그 자연, 그것을 ‘본다’…… 그 복종(服從)은 게으름이고, 자연에는 법칙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습관만이 있고, 자연은 습관을 내일이라도 바꿀 수가 있다.

무슨 일이 만약 생긴다면? 자연이 만약 갑자기 발딱거리기 시작한다면? 그때 그네들은 자연이 거기에 있고, 그들의 가슴이 삐거덕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둑, 그들의 성벽(城壁), 그들의 발전소, 그들의 용광로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언제든지, 아마 당장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전조가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아버지가 산책을 하다가 바람결에 붉은 걸레가 자기에게로 날아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 걸레가 아주 가까운 데까지 왔을 때, 그는 그것이 기다가 뛰다가 하면서 질질 끌려오는, 먼지가 묻은 한 조각의 고기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를 경련적으로 내뿜으면서 개천 속에서 뒹구는, 괴로운 고기 덩어리를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뺨을 보고 물을 것이다.

“그게 뭐냐? 종기냐?”

살이 약간 부어올라서 째지고 벌어지면, 어머니는 그 틈에서 제 3의 눈, 웃고 있는 눈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은 냇물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이 골풀을 만지듯 전신에 보드라운 마찰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옷이 살아있는 물건이 된 줄 알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입 속에서 긁적거리는 그 무엇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울에 가까이 가서 입을 벌린다. 그러면 혀는 살아 있는 커다란 지네가 될 것이고, 발을 꼬고, 그의 입천장을 깎아버릴 것이다. 그는 그것을 뱉어버리려고 할 테지만 지네는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서 손으로 그것을 뜯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것들이 나타나니 그것들에게는 새 이름을 부쳐주어야 할 것이다. 돌의 눈, 삼각형의 커다란 팔, 지팡이의 자국, 거미의 지느러미…… 같은 이름을 말이다. 그리고 훈훈한 자기 방의 침대 속에서 잠들어버린 사나이는 푸르스름한 땅 위에서, 숲이 엉클어진 음경(陰莖)의 삼림 속에서 벌거벗고 깨어날 것이다.




p.317

왜냐하면 의식은 여분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희박해지고, 분산하고, 가로등에 연한 갈색의 벽 곁에서, 또는 저기 저 저녁 연기 속에서 없어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절대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는다. 의식은 자기를 망각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식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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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야 미노루는 천재구나.

요즘 자주 하는 생각들 중 하나다. 

카페에서 크레이지군단을 다시 보고 미친 듯이 좋아한 뒤로  

만화방에서 빌려본 심해어. 

어딘가 박민규스러운 구석이 있다. 아니, 박민규가 후루야 미노루스러운 건가. 

자꾸만 박민규의 핑퐁과 겹쳐졌다. 어떤 분위기 같은 거.  웃기면서 슬픈 거? 봉으로 깊숙한 곳을 찌르는 거? 주인공들이 바보 같이 착한 거?

단순히 왕따 이야기라서 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핑퐁>에 나오는 건전지 빠는 애 이야기가 심해어에 나와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심해어에 나오는 남자가 핑퐁 속으로 들어가면? 그건 좀 어색할 수도 있겠군.    

물론 후루야 미노루가 훨씬 극적이고 내밀한듯 하다가 치고 빠지고 그럼에도 만화스럽지만. 만화니까.

이전에 본 <두더지>, <시카테라> 등등이 겹쳐서 혼란스럽다. 게다가 요새 <그린힐>을 다시 봐서 더욱... 



 

어쨌든 세상엔 이렇게 생긴 물고기들이 있다. 실은. 잘 보기 힘들지만.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만 더. 후루야 미노루는 성 행위 자체를 그리지 않는다. 이건 꼭 심해어 이야기는 아니지만, 심해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성행위라는 인류 공통의 과제이자 관심사에 다가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다. 물론 과장되어 있긴 하다. 모든 남성들은 여자의 가슴과 섹스에 미친다. 그런데 이 미쳐서 어떻게 행위하는가는 다 다르다. 그래서 자연스럽다. 나로서는. 

<크레이지군단>에서 이토킹 엄마를 공원에서 만났을 때-자기를 버린 엄마를 찾았는데 공원에서 노숙자인(?) 남자와 섹스하고 있던- 그 장면은 정말 삶과 성의 비극 그 자체다.   

(결국 캐릭터인가?) (심해어의 캐릭터 30대 남성, 혼자 살고 친구 하나 없으며 여친도 없는 경비원.) 

 

20050501 다시 

누구나 고독이란 괴물과 싸운다. 이 사실을 아직 모른다면 다행,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방문이든 두드릴 수 있는 놈이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고 어마어마한 존재. 실체가 없으므로 무엇으로든 가장이 가능하고, 없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가 하면 있다고 생각한 순간 나의 착각이었던가 싶게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늘 있는 셈이라 할 수도 있고 모두 마음의 평정심을 찾지 못한 자의 망상이나 헛되고 헛됨이라는 식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람은 이 고독이란 괴물 대신 사람을 만나려 한다. 이 만화책의 주인공 32세 토미오카도 그렇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괴물 같은 녀석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바램이 생긴다. 친구라니, 32세에 친구라니, 직장이나 애인도 아니고 친구를 바라다니, 라는 생각도 들지만 실은 지금 당신곁에 당신 친구라고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편하게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가, 혹은 그들이 고독을 없애기 위해 당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좋을 어떤 실물적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닌가, 당신과 그의 관계는 얼마나 정당하고 정직한가, 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만,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는 것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서로 일하는 분야, 관심 분야가 달라지고 매일매일을 영위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점점 대화거리라는 것이 사라지고 차라리 나의 보금자리가 더 편한 게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순간, 친구들은 다들 바이바이~(그래서 동호회 같은 게 많아지는 걸까? 뭔가 즐겁게 이야기하고 싶으니 서로 좋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해보자구?)

토미오카가 친구를 바란 다음날, 바로 그는 구렁텅이에 빠지듯 여러 사건과 연루된다. 그의 직장과 집에 1년 뒤에 미쳐 죽게 된다는 편지가 오는가 하면 그 편지의 주인공을 찾으러 갔다가 복권광 노숙자를 만나 그를 집에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노숙자는 친구가 되기엔 어딘가 미스! 결국 그의 목숨을 담보로 한 빚 300만엔을 갚아주고 만다. 하지만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란 오래된 결론을 이끌어내듯 이런 토미오카에게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옆집에 사는 하라라는 젊은 여자. 그녀가 바로 그의 인생에 구원투수이자 영원한 여신이자 처음이자 마지막 주어진 행운이었던 셈. 토미오카는 점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가 하면 자신보다 좀 더 세련되고 의지가 확고한 또 다른 은둔형 인간(같은 직업에 종사하는)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라와의 관계도 깊이를 더해간다.

인간이란 구덩이처럼 사람을 잡아끌고 만다. 그래서 관두자, 하면 어느새 나는 외톨이다. 이래저래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고 자신의 고민, 외로움을 나눠주길 바라지만 이젠 왠지 그런 일이 지친다.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군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죠, 뭐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이전에 만났던 몇 분에게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어딘가 자신의 내부에 쌓인 것들을 내 앞에서 긁어내고 있다는 기분. 하지만 그건 진짜 그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어딘가 이상하게 소모된다는 기분이 들어서 피했다. 그 뒤로 더더욱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워졌다. 그것을 피하는 나도 싫고 그렇다고 또 그런 식의 관계를 갖는 것도 싫어서 차라리 아예 다 제외시키기로 한 거다. 그런데 이건 나쁜 거다. 내가 왜 세상(사회적 관계)에 나가길 겁내 하는지 이 만화책을 보고 알았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는 미로에서 완전히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지켜서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 가끔 나 역시 내 인생에 드라마가 없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름답고 동시에 인간은 더럽고 추악하다. 바퀴벌레만도 못한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 그렇다. 결국 다들 오타쿠가 될까봐 영원한 외톨이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공부를 많이 해도 마찬가지. 파우스트를 읽진 않았지만, 만화책을 보니 파우스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나 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까? 직장을 갖는 것은 공통 화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생각들, 결국 내게도 마지막 구원투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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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09-11-0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특히 <시가테라>와 <핑퐁>이 겹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죠. 하지만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 차이랄까.. ^.^;
 

유년시절을 키워준 몇몇 구성품 중 하나 호텔아프리카 

꽤 오래 소장하며 몇 번이고 다시 봤을 거다.  

그러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끝에 지금은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지만...  

오랜만에 카페에 앉아 다시 보니 한장면 한장면을 넘길 때마다  

예전에 디뎠던 발자국을 그대로 다시 짚는 것처럼 확연하다.  

그림 그대로. 

원래 어릴 때부터 그림으로 기억을 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서 다른 기억력이 많이 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정도로 그 장면 장면이 눈앞에 그대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때 느꼈던 따뜻함, 신비함, 설렘 같은 것들도 더불어 컷을 따라 한 발자국 밟을 때마다 따라와서 

거의 행복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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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05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행복한 만화지요.. 저도 님이 올려주신 포스트를 보니 몇몇 장면이 떠오르네요.

kangda 2009-02-05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쿠~ 진짜 이런 만화책이 있어서 좀 더 행복해지는거죠~
 



저런 영상을 찍을 수 있다면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새를 가슴에 품었다는 남자는 죽어가는 순간 

입에서 새가 튀어나오고 

다친 아이의 엑스레이를 검사하는 장면에선 

아이의 머리를 열고 해골들이 그 속에 가득 찬 문서를 빼보는 장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그밖에 찰스 다윈의 옷차림이나 모든 영상들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아이를 남자가 자살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장면은  

처음엔 울다가 너무 신파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울었다.    

어쨌든 아이는 엄청 귀엽다.  

게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꼬마 남자애가 

"이렇게 무서운 영화 처음이야" 라고 엄마에게 말하는데 

너무 귀여워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가 무서울 수 있을까 

정말 갈 수 없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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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씨와 공드리 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변에는 가족객들이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굴고  

종종 샤르트르 씨와 공드리 씨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자그마한 아이들에게 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샤르트르 씨 곁으로 비둘기 떼가 날아왔습니다. 

"결국 저 비둘기들이 존재합니다. 그 존재는 모두 우연이지요. 휴머니스트. 웃긴 말입니다. 당신은 저 비둘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겁니까? 어떤 존재 이유, 필연, 이런 것들로 적당히 관념화된 세계. 아~물론 박물관은 관념의 천국이지요. 다들, 인간의 역사나 의의를 생각하곤 감탄하지만, 실은 자기네들의 권리를 공고히하기 위한 얄팍한 짓거지료. 존재라는 엄청난 부조리를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미칠 듯한 부조리이죠. 박물관, 박물관, 더러운 짓거리죠." 

샤르트르 씨는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샤르트르 씨는 그저 혼자, 비둘기 떼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공드리 씨는 시종일관 상상합니다. 

'박물관에서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있던 불상이 갑자기 다리를 쫙 펴고 일어나서 소녀의 볼을 만지기 위해 쫓아온다거나, 처음엔 울던 소녀가 점점 호기심에 가득 차 불상이 볼을 만지니 웃는다거나 그러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 어떤 노래가 좋을까? 그러자 다른 불상들도 어깨를 으쓱대고 자기나 토기에 무늬로 새겨져있던 꽃들이 갑자기 흩날리고 가족객들은 모두 행복해하며 그 노래에 따라 흥얼거리고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고.' 

공드리 씨는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공드리 씨는 신석기관, 구석기관, 통일신라 조각전을 재게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중얼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하루입니다. 

 

-이것은 잡채, 이것은 오늘 하루, 이것은 오늘 마신 커피가 식도를 타고돌던 시간 

이것은 구토, 이것은 나의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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