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고 미래에 지금 당장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단지 무수하게 분할되는 끝없이 분할되는 순간이 있을 뿐이며 그 순간과 순간 사이의 접면을 분할하는 미시적 한계. 그 순간 미시는 무수한 숫자로 환원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힘을 휘두른다. 순간만이 영원에 닿아있다는 것. 기억은 나라는 것을 관통하는 어떤 상이지만, 이 기억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머릿속을 영화로 만들 수도 없고, 혹 그런 시도를 한다면 점점 빠져나가는 것들이 많아지고 만다.




이론에 따라 헐겁게 얘기하자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힘을 받아 팽창한다면 각각의 은하(?)는 점점 서로간에 중력이 작용해 가까워지며 빈공간이 커지고 언젠가 남는 것은 어둠 혹은 허공밖에 없게 된다고 한다.







불확정성을 통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코펜하겐>에 대하여




코펜하겐은 인과율이 적용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립되는 지점인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과의 허울, 기억의 허울에 대해 두 저명한 과학자의 이론-불확실성의 원리, 상보성의 원리 등-을 직접 도입하며 과학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한다.




보어: 이건 물리학이에요.

마그렛: 정치이기도 해요.




과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에 대해 희곡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는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알게 될 때는 미끄러지고 있는 물체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위치를 알게 되는 순간 속도는 이미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도입한 어떤 힘을 받아 변했으며 따라서 명확한 속도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록한 흔적은 두 힘이 충돌하는 순간의 기록일 뿐이지 순수한 전자의 기록은 아니므로. 그러나 이동하는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록 장치가 필요하므로 결국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확률일 뿐이다. 결국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것을 규명하고 정의하려는 순간 그 힘에 의해 그 순간에서 미끄러져 나간 기록을 얻게 된다.




보어: 아인슈타인에서 시작되지. 과학에서의 모든 논의가 의존하는 바로 그 측정이란 게, 냉철한 보편성으로 이뤄지는 비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걸 보였어. 측정도 인간의 행동인 거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관점에 따라 수행되는 특정한 인간의 행동, 그리고는 20세기 중반의 그 3년 동안 우리는 명확하게 규정 가능한 세계가 없다는 걸 발견하지. 여기 코펜하겐에서. 세계는 근사의 연결로만 존재한다는 걸 밝힌거야. 보편적인 인간의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는 거지. 세계 안에서, 특정한 인간과 세계의 주관적인 관계로만 관찰할 수 있다고. 세계는 인간의 머리 속에 잠시 머무는 사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경우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다. 인간이 어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있을 때는 결코 자신이 지금 몇 시간을 지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기억을 통해 그 순간을 되돌릴 때만 그 순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란 불순물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이미 주관적으로 굴곡이 진 통로를 통해 나온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그: 우리는 구멍 두 개가 아니라 구멍 스물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해야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지나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는 것 뿐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와 직접 연결된다. 나는 누구든 무엇이든 내 두 눈으로 보고 그 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라는 상은 거울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이미 한 번 걸러졌을 때만 볼 수 있다. 누구나 평등하게, 죽을 때까지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다. 누구나 세계의 중심축으로 서있지만, 절대 자신만을 볼 수 없는 채로.




하이젠베르그: 세상 20억명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내가 볼 수 없도록 항상 감춰진 단 한 사람입니다.




마그렛: 하지만 그 한 명의 영혼이 세계의 황제였어요. 우리 하나하나하고 똑같았지요.




보어: 무엇에든 손이 닿기도 전에, 삶은 끝이 납니다.

하이젠베르그: 우리가 누군지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보기도 전에, 우린 죽고 먼지가 되어 쌓입니다.




희곡의 진행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죽은 뒤까지도 하이젠베르그가 보어를 찾아간 일에 대해 대화하고 대화 속에서 그 상황을 되돌려보지만 그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확률적인 몇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지만 확실하고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과학자 하이젠베르그가 전시 상황에서 보어를 찾아갔을 때, 원자 에너지를 실용적으로 개발하는 연구를 할 도덕적 권리가 물리학자에게 있는지 물었을 때, 그때 하이젠베르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 순간 하이젠베르그조차 몰랐거나 몰랐던 것과 같다. 그 한 순간 존재했지만 그것이 보어에게 전달된 불완전한 형태의 언술 행위는 오해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중지시켰고, 하이젠베르그는 후일담으로 그 기억을 다시 되돌리며 자신에게 합리적인 몇몇 기억을 첨가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화를 했던 날이 9월 마지막날인지 10월인 엇갈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했던 장소에 대해서 조차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미 각자의 여과 장치에 걸러져 영영 진위를 가릴 수 없게 된 순간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인과율이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전 순간의 명확한 지점이 결코 설명되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의 선택이 어떤 원인의 결과인지 명확히 측정할 수 없다. 우린 아주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으므로 생각만 하지만, 분명 그것은 존재했다. 전달되지 않았기에 있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을 테지만. 미시의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입자들은 우리 생각하고 다르게 운동하고 마찬가지로 시각을 바꿔 거시의 세계에서 보자면 인간이라는 미시의 세계는 거시의 눈동자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운동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 그러나 그 가능성의 세계에 폭탄이 투하되면 누군가 죽고 누군가 상처입고 그 상처가 고스란히 가슴에 남는 세계. 결국 현존하는 순간만이 존재하고 현존하는 것들만이 존재하는 실존주의로 가는가? 실존은 본질에 앞서게 되는?




하이젠베르그: 주위에 갇힌 사람들을 둘러보면 사람이 타죽어가는 단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타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이럴 때 신을 여벌의 신발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에요.




하이젠베르그: 그때가지는, 이 가장 소중한 동안에는, 존재합니다. 팰리트 공원의 나무들, 하머팅겐도 비베라흐도 민델하임도. 우리 아이들도 아이들의 아이들도. 가능성일 뿐이지만, 코펜하겐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절대로 규정되거나 정의되지 않을 어느 사건이. 사물들의 중심에 있는 그 불확정성의 마지막 핵심이. 그것들을 지켜냅니다.




결국 작품은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론이 사회와 혹은 인간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동안 이야기는 몇 번이나 중첩된다. 보어가 그의 아들을 구하지 않아 죽었을 때의 과거가 대화의 형태로 중간중간 삽입되는가 하면-보어의 인간적 윤리, 보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물리학 이론들- 하이젠베르그와 보어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들이 물리학계의 중심이 되던 3년 동안 함께인 듯 했지만 실은 모든 이론을 혼자 있을 때 완성했다는 것, 하이젠베르그가 독일 패전 이후 겪었던 두 번의 상처. 거기서 보았던 눈물들. 그런 와중에 누가 진정 죽음의 선을 잡아당겼고 누가 잡아당기지 않았는지 마저 엇갈린다. 몇 번이나 역설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이미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보어의 아내인 마그렛은 두 과학자들의 대화를 좀더 쉽게 만들어주는 우리와 같은 청중이며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제 3자이다.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결국 전달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아지는 한계에 대해 떠올리도록 해준다. 그런가하면 전달이란 문제를 통해 인류가 연결됨을, 세계의 중심이 손을 맞잡게 되는 광경이 그려지기도 한다. 타인이 없으면 자신도 없는 이 세계. 이상한 일이다. 철저한 고립과 철저한 연대의 세계가 공존하는. (마치 빛처럼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건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기획 연구소였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장에서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는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했던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자조가 담긴 그의 독백이 이 희곡을 보고나자 훨씬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왔다. 그런가하면 전쟁 뒤 고통에 빠진 이들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묘사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희곡의 논리를 따라 좀 더 생각하자면,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다. 곧 미래에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장자지몽은 이런 얘기인가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결국 나의 우주의 끝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심연과 마주치게 된다. 먼 미래에, 이대로 우주가 팽창을 계속하다보면-대체 왜 우주의 팽창을 이끄는 힘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지만- 남는 것은 암흑과 허공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우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만 대체 왜 사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불확정성은 결국 허무주의와 맞닿을 수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울림이 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다와 사막을 지나

앙리 미쇼

김현, 권오룡 옮김

열음사

 

이 세계는 비합리적인 곳이다. 누군가는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그 전쟁으로 죽는다. 전쟁으로 죽은 그는 결코 전쟁을 기획한 자가 아니며 인간의 합리화하는 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짜여져 있다. 짧은 분노, 다시 어이없이 삶이 이어지고, 가끔 미칠 듯 끓어오르기도 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는 그만, 허덕일 뿐이다.

앙리 미쇼의 시집은 비관적이고, 결코 호락호락하게 인간을 예찬하거나 값싼 희망을 부르짖지 않는다. 모든 희망을 값싸다고 비하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희망은 종종 속임수이거나 사기 그도 아니면 자기 과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믿지 말자.

사실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그만, 우울해지고 만다. 인간이라는 이 동물의 비합리성이 얼마나 최악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데, 그렇다고 앙리 미쇼가 따로 어떤 명확한 그림을 그려 제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과도한 모순 어법을 사용해 명료하지 않고 옛날 언어로 번역되어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추상어들이 난무하고 이미지는 그만의 이미지인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나타남-사라짐」 같은 시는 연 사이의 단절이 극적인 채 대단히 길기까지해 더더욱 읽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 단절 사이에서 어떤 미묘한 지점이 있다. 자꾸만 인간을 농락하는 생의 미끄러짐에 대해, 그는 붓터치를 하듯 쓴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늪에 빠진 것처럼 그만 어딘가로 빠져들고 만다. 어지러운 이 세계가 뱅글뱅글 주변에서 돌고, 또한 나조차 돌아, 그만…….

결국 무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읽은 뒤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다 잊혀진다. 몇 문장을 기억하기도 하겠지만, 정말 운이 좋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비해 그 무늬는 새겨진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태도이며 자세로 나타나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으로 우리 내부를 떠돈다. 앙리 미쇼의 무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앤서니 브라운

-권태에서 충격까지.




환상은 경계에 대해 말한다. 앤서니 브라운은 단순한 환상-인간과 동물의 자리 바꿈-을 이용해 인간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책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앤서니 브라운이 말하는 경계는 아주 단순하게는 생각하는 습관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책의 주인공이 동물-침팬치-이라는 것을 통해 그의 경고는 우선적으로 뚜렷하게 부각된다. 인간 주인공이 아닌 것. 동물과 인간에 대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세워놓은 사고의 장벽이 한꺼풀 벗겨진다.

그러나 성인인 내게는 이제 뻔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앤서니 브라운의 과정에는 권태에 대한 치밀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있다. 또한 그 묘사가 충격의 순간을 진정한 충격으로 느끼도록 한다.

『동물원』은 인간 동물원에 대해서-물론 이 과정은 몹시 독특하며 이 결론은 겨우 마지막에 이르러 나타난다-  『돼지』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불합리성,『윌리와 휴』에서는 몸체가 작은 것과 큰 것-눈에 보이는 것-과 두려움이 서로 연관 관계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대해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다루는 앤서니 브라운의 시선은 천천히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듯 하며, 그러던 와중 그의 그림은 어떤 도약의 순간을 짚는다.

 

『돼지책』에서 엄마가 ‘너희는 돼지야’ 라는 쪽지를 주고 가기 전, 그들의 하품하는 표정, 집 주변의 많은 것들이 돼지인 그림은 그 가족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권태롭고 습관적인 사고가 어떻게 그들을 잠식하고 있는가를 한 컷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림으로 쓴 시에 가깝다. 이 사고가 도약으로 진전해 나아가가 까지 얼마나 차근차근 이루어지는지, 어느 순간 사고의 비약이 일어나는지 앤서니 브라운은 알고 있다.


 

 

 

『축구 선수 윌리』에서는 뛰어넘는 과정에 품게 되는 환상의 실체를 마법과 현실이 겹쳐지도록 표현한다. 윌리라는 주인공이 낯익은 어떤 사람이 준 운동화 때문에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그가 그동안 꾸준히 그 축구화를 신고 마법에 빠진 듯 연습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을 그려내는 앤서니 브라운의 시선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 보다는 그 순간에 머무는 차분함, 그러나 순간이 겹쳐지고 있는 시간성을 그려낸다. 말하자면, 이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의 권태에 대해, 그 겹쳐진 시간이 화산 폭발을 일으키듯 폭발하는 지점을 앤서니 브라운은 집어낸다.

『달라질 거야』에서는 우리 주변 사물이 얼마나 많이 동물을 시각적으로 변용하고 있는지 그려내는데 이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인공의 시선이 결국 새로운 생명에 대한 예감이었음이 밝혀지는 환한 순간!

그림책 장수를 하고 싶게 만드는 작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719




도스토예프스키

E. H. 카

김병익, 권영빈 역

기린원

200807??~20080718
















헌책방에서 오래전에 산 책을 이제야 읽었다.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읽고 좀 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 책이 있었던 게 아마 더 큰 역할을 하긴 했을 테지만.

가난한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지금 시대의 우리나라 의사가 아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의사이다- 낭비벽 덕에 가난에 허덕이고 한 권의 소설을 출판한 뒤 정치범으로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감되고 나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에 민중에 대한 사상은 어떻게 스며들었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기인하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전기답게 생을 조망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후반부에서는 그의 유명한 작품들에 대한 비평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물론 그의 생과 기질, 그 당시의 러시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강렬함, 100년도 더 지난 그의 작품 속으로 나를 빨고 들어가는 그의 흡반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책은 어느 정도 답을 준다. 그가 인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자세, 말하자면 하나의 질문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분명 모순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그는 끊임없이 파고 드는 것이다. 마치 우물을 파내듯. 인간과 윤리 사이의 관계, 윤리와 정치 사이의 관계, 여기에 종교까지 가세되면 그의 소설은 단순히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넘어서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으며 아마 그의 소설은 영영 살아남을 것이다.-물론 누구나 문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이 질문 앞에서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 그의 문장의 밀도는 미학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완성된다.

지독하게 불성실해 돈이 필요해 선불금을 받으며 궁여지책으로 소설을 쓰고 그 돈을 도박으로 날리며 그것도 모자라 전당포에 살림살이를 맡기던 이 남자의 희안한 윤리 의식, 죽은 형 미하일의 가족을 책임지고 형의 다른 살림 여자와 그 자식, 죽은 첫 아내의 의붓아들을 떠맡아 기르며 아무리 쪼들려도 그들에게 생활비를 대는 임무만은 지키던 이 남자. 민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민중에 대한 신비적인 믿음으로 무장하고 그 의식을 소설 속에 용해해내는 백치 같기도 한 이 남자. 흥분 속에서 생을 마쳤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자기에 대한 절제가 없는가 하면 그러한 절제가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그런 자신의 의식의 수렁 속으로 낚시줄을 들이미는 이 남자. 몇 겹으로 둘러쳐진 인간의 내부를 알고 있으며 그 내부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폭로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이 남자.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차가워지며, 그 중간을 용납하려 들지 않던 이 남자는 이제 문학의 대변자가 되어 서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심한 면이 있었을 지언정 그런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것.


-문제적 인간을 쓰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대체 문제적 인간이 뭐란건지, 첨예한 의식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타개해야할 중요 사안이 있는 인물인가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자 문제적 인간을 쓰라는 말이 무언지 실감이 된다. 말하자면, 그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지하생활자의 주인공, 카라마조프들은 문제적 인간이다. 그들은 세계의 문제, 인간의 문제와 온 정신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생애 정리-엉성하게

가난한 의사의 아들-차남(8형제 중)

도시 작가

페테스부르크 육군공과학교 입학

친구 시들로프스키 방탕-수도원 행-낭만주의적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농노에 의한 살해)

유산(遺産)-낭비벽

육군성 공무과

프랑스 문학-번역 등 상업으로써의 문학

지방 전출 명령-사표

『가난한 사람들』 성공- 자랑

가난-선불제

「조국 잡지」 크라예프스키의 고용 문인

벨린스키와 절교(1847)

문학 페트론 귀족 응접실-발레리안 마이코프

당시: 센티멘털 소설, 괴기소설, 자연주의 소설-고골

페트라셰프스키 서클-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유토피아 연구 열중

듀로프 아파트 회합

4년 동안 감옥 생활-민중, 도덕률 너머의 것 발견

병사-연애-마리아 드미트리예프이나 이자예바-결혼

친구-브랑겔 남작

트베르로 전출

다시 페테스브르크로

형 미하일 담배 제조업→브레미야(시대) 잡지 창간

잡지에 잡문 기고

유럽의 퇴보, 러시아 발전

농민(민중-나로드) 주목-이상화

대학생 반정부적 시위

브레미야 온건적으로 변화

해외 여행-여자(수슬로바)

헤르쩬 만남

브레미야 출간 금지

연애-욕정

아내 죽음

의붓아들 폴의 방탕

형의 죽음-그의 가족 부양

안나 코르빈 크루코프스카야

마르타 브라운 만나 연애

다른 안나(속기사)와 결혼

죄와 벌

미성년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푸쉬킨 제막식 연설 중 대중들의 열광

죽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