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고 미래에 지금 당장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단지 무수하게 분할되는 끝없이 분할되는 순간이 있을 뿐이며 그 순간과 순간 사이의 접면을 분할하는 미시적 한계. 그 순간 미시는 무수한 숫자로 환원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힘을 휘두른다. 순간만이 영원에 닿아있다는 것. 기억은 나라는 것을 관통하는 어떤 상이지만, 이 기억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머릿속을 영화로 만들 수도 없고, 혹 그런 시도를 한다면 점점 빠져나가는 것들이 많아지고 만다.
이론에 따라 헐겁게 얘기하자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힘을 받아 팽창한다면 각각의 은하(?)는 점점 서로간에 중력이 작용해 가까워지며 빈공간이 커지고 언젠가 남는 것은 어둠 혹은 허공밖에 없게 된다고 한다.
불확정성을 통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코펜하겐>에 대하여
코펜하겐은 인과율이 적용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립되는 지점인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과의 허울, 기억의 허울에 대해 두 저명한 과학자의 이론-불확실성의 원리, 상보성의 원리 등-을 직접 도입하며 과학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한다.
보어: 이건 물리학이에요.
마그렛: 정치이기도 해요.
과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에 대해 희곡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는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알게 될 때는 미끄러지고 있는 물체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위치를 알게 되는 순간 속도는 이미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도입한 어떤 힘을 받아 변했으며 따라서 명확한 속도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록한 흔적은 두 힘이 충돌하는 순간의 기록일 뿐이지 순수한 전자의 기록은 아니므로. 그러나 이동하는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록 장치가 필요하므로 결국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확률일 뿐이다. 결국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것을 규명하고 정의하려는 순간 그 힘에 의해 그 순간에서 미끄러져 나간 기록을 얻게 된다.
보어: 아인슈타인에서 시작되지. 과학에서의 모든 논의가 의존하는 바로 그 측정이란 게, 냉철한 보편성으로 이뤄지는 비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걸 보였어. 측정도 인간의 행동인 거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관점에 따라 수행되는 특정한 인간의 행동, 그리고는 20세기 중반의 그 3년 동안 우리는 명확하게 규정 가능한 세계가 없다는 걸 발견하지. 여기 코펜하겐에서. 세계는 근사의 연결로만 존재한다는 걸 밝힌거야. 보편적인 인간의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는 거지. 세계 안에서, 특정한 인간과 세계의 주관적인 관계로만 관찰할 수 있다고. 세계는 인간의 머리 속에 잠시 머무는 사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경우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다. 인간이 어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있을 때는 결코 자신이 지금 몇 시간을 지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기억을 통해 그 순간을 되돌릴 때만 그 순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란 불순물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이미 주관적으로 굴곡이 진 통로를 통해 나온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그: 우리는 구멍 두 개가 아니라 구멍 스물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해야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지나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는 것 뿐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와 직접 연결된다. 나는 누구든 무엇이든 내 두 눈으로 보고 그 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라는 상은 거울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이미 한 번 걸러졌을 때만 볼 수 있다. 누구나 평등하게, 죽을 때까지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다. 누구나 세계의 중심축으로 서있지만, 절대 자신만을 볼 수 없는 채로.
하이젠베르그: 세상 20억명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내가 볼 수 없도록 항상 감춰진 단 한 사람입니다.
마그렛: 하지만 그 한 명의 영혼이 세계의 황제였어요. 우리 하나하나하고 똑같았지요.
보어: 무엇에든 손이 닿기도 전에, 삶은 끝이 납니다.
하이젠베르그: 우리가 누군지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보기도 전에, 우린 죽고 먼지가 되어 쌓입니다.
희곡의 진행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죽은 뒤까지도 하이젠베르그가 보어를 찾아간 일에 대해 대화하고 대화 속에서 그 상황을 되돌려보지만 그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확률적인 몇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지만 확실하고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과학자 하이젠베르그가 전시 상황에서 보어를 찾아갔을 때, 원자 에너지를 실용적으로 개발하는 연구를 할 도덕적 권리가 물리학자에게 있는지 물었을 때, 그때 하이젠베르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 순간 하이젠베르그조차 몰랐거나 몰랐던 것과 같다. 그 한 순간 존재했지만 그것이 보어에게 전달된 불완전한 형태의 언술 행위는 오해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중지시켰고, 하이젠베르그는 후일담으로 그 기억을 다시 되돌리며 자신에게 합리적인 몇몇 기억을 첨가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화를 했던 날이 9월 마지막날인지 10월인 엇갈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했던 장소에 대해서 조차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미 각자의 여과 장치에 걸러져 영영 진위를 가릴 수 없게 된 순간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인과율이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전 순간의 명확한 지점이 결코 설명되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의 선택이 어떤 원인의 결과인지 명확히 측정할 수 없다. 우린 아주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으므로 생각만 하지만, 분명 그것은 존재했다. 전달되지 않았기에 있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을 테지만. 미시의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입자들은 우리 생각하고 다르게 운동하고 마찬가지로 시각을 바꿔 거시의 세계에서 보자면 인간이라는 미시의 세계는 거시의 눈동자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운동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 그러나 그 가능성의 세계에 폭탄이 투하되면 누군가 죽고 누군가 상처입고 그 상처가 고스란히 가슴에 남는 세계. 결국 현존하는 순간만이 존재하고 현존하는 것들만이 존재하는 실존주의로 가는가? 실존은 본질에 앞서게 되는?
하이젠베르그: 주위에 갇힌 사람들을 둘러보면 사람이 타죽어가는 단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타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이럴 때 신을 여벌의 신발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에요.
하이젠베르그: 그때가지는, 이 가장 소중한 동안에는, 존재합니다. 팰리트 공원의 나무들, 하머팅겐도 비베라흐도 민델하임도. 우리 아이들도 아이들의 아이들도. 가능성일 뿐이지만, 코펜하겐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절대로 규정되거나 정의되지 않을 어느 사건이. 사물들의 중심에 있는 그 불확정성의 마지막 핵심이. 그것들을 지켜냅니다.
결국 작품은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론이 사회와 혹은 인간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동안 이야기는 몇 번이나 중첩된다. 보어가 그의 아들을 구하지 않아 죽었을 때의 과거가 대화의 형태로 중간중간 삽입되는가 하면-보어의 인간적 윤리, 보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물리학 이론들- 하이젠베르그와 보어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들이 물리학계의 중심이 되던 3년 동안 함께인 듯 했지만 실은 모든 이론을 혼자 있을 때 완성했다는 것, 하이젠베르그가 독일 패전 이후 겪었던 두 번의 상처. 거기서 보았던 눈물들. 그런 와중에 누가 진정 죽음의 선을 잡아당겼고 누가 잡아당기지 않았는지 마저 엇갈린다. 몇 번이나 역설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이미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보어의 아내인 마그렛은 두 과학자들의 대화를 좀더 쉽게 만들어주는 우리와 같은 청중이며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제 3자이다.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결국 전달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아지는 한계에 대해 떠올리도록 해준다. 그런가하면 전달이란 문제를 통해 인류가 연결됨을, 세계의 중심이 손을 맞잡게 되는 광경이 그려지기도 한다. 타인이 없으면 자신도 없는 이 세계. 이상한 일이다. 철저한 고립과 철저한 연대의 세계가 공존하는. (마치 빛처럼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건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기획 연구소였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장에서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는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했던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자조가 담긴 그의 독백이 이 희곡을 보고나자 훨씬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왔다. 그런가하면 전쟁 뒤 고통에 빠진 이들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묘사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희곡의 논리를 따라 좀 더 생각하자면,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다. 곧 미래에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장자지몽은 이런 얘기인가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결국 나의 우주의 끝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심연과 마주치게 된다. 먼 미래에, 이대로 우주가 팽창을 계속하다보면-대체 왜 우주의 팽창을 이끄는 힘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지만- 남는 것은 암흑과 허공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우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만 대체 왜 사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불확정성은 결국 허무주의와 맞닿을 수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울림이 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