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가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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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7-25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룰루랄라 주인장님이세요?
일전에 심보선 시집을 읽고 계셨는데..
저는 이 시집의 우습고 담담한 씁쓸함이 참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반가워요~~~ 호들갑..
주말에 가끔가는 손님인데 2주째 안계셔서 그리웠는데 이렇게라도 뵈니 좋아요 훌쩍..

kangda 2009-07-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 저는 룰라랄라 주인장이 아닙니다. ㅎ
저도 그 카페 좋아하고 자주 가긴 해요~

무해한모리군 2009-07-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kangda 2009-07-26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한잔의 룰루랄라 말씀하시는 거 맞죠? ㅎ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7-2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ㅎㅎㅎ
룰루랄라님 언제 마주쳤을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