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엔더의 게임 ㅣ 클럽 오딧세이 (Club Odyssey) 1
올슨 스콧 카드 지음, 백석윤 옮김 / 루비박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처럼 엔더는 게임을 합니다.
488페이지 분량 중 40페이지를 남겨둔 448페이지까지 엔더가 게임을 하는 내용입니다.
남이 게임하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다보니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을 예전에 열심히 보던 게 떠오르긴 합니다.
임요한 등 다양한 선수에게 열광하며 저도 꽤나 스타 중계 방송을 챙겨봤습니다.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략에 깜짝 놀라서 입니다.
각각의 캐릭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상대편의 특성까지도 전략을 짜는 데 데이터로 활용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략과 전략이 부딪히는 게임은 정말
엄청난 캐미폭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엔더의 게임에도
엔더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이번에는 어떻게 행동할까
관음증 환자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엔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낼까 궁금해 합니다.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에서도
저번에는 이런 전략으로 승리한 선수가 이번에는 어떻게 승리할까가 궁금했던 것을 보면
캐릭터라는 것을 아는 재미는 게임 관람의 즐거움을 증폭시킵니다.
게임 하는 엔더, 자꾸 엔더에게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며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고 엔더가 승리할 수 있을지를 즐기는 그라프
이 둘이 가장 대립되는 두 사람이므로
실제로 2013년 '엔더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엔더스게임에서도 해리슨 포드가 그라프 역을 맡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엔더가 지켜야 할 지구와 엔더가 무찔러야 할 버거가 대립인 듯 그려지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적이 가장 큰 스승이라고, 적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실제 책 속에서 메이저 래컴이 읊는 대사이기도 한데요.
또한 엔더도 그라프의 속마음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나는 그라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마음이 비뚤어진 뚱뚱이.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
들의 삶을 조종해서 기계적이고 완벽한 지휘관들을 찍어내는 냉혹한 인간. 당신은 원하는 지휘관을 얻을 때까지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인류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인공 이 엔더란 아이는 작품 시작에서 아직 채 10살도 되지 않았습니다.
12살인지에 작품이 끝납니다.
때는 셋째를 낳는 것이 금지된 때
너무 머리가 좋은 유전자들을 낳는 까닭에(?) 이 집안에서는 셋째가 태어나게 됩니다.
아이에게 모니터를 달아 아이를 측정한 뒤, 군인으로서 자질이 있다 싶으면 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해 데려가는 건데요.
정말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런 아동학대를!!!
이란 생각을 작가도 했기에,
실제로 엔더를 지휘관으로 키운 그라프 등은 아동학대 등의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하지만 결국 난관에 봉착합니다.
엔더가 아니었다면 버거를 무찌르고 평화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라프가 엔더를 혹독하게 연습시키지 않았다면
지구인들은 영영 버거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쓸데없는 군사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실은 버거가 언젠가 침입해 지구인들을 말살시키는 데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보면 버거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밝힙니다)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엔더가 이미 버거들의 행성을 초토화시킨 이후이기에
아동학대 운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도 세상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결과가 나온 마당에야 그 부정적 측면에 대해 언급할 수 있지만
정말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그라프의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왜 엔더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들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어. 난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난 살인자가 아니야! 당신이 원한 건 내가 아니고 피터 형이야. 당신이 나를 끌어들인 거야, 나를 속였어!"
그는 울부짖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 우린 너를 속였다. 그게 가장 중요했어." 그라프가 말했다.
"그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넌 해내지 못했을 거다. 그것은 우리를 묶고 있던 끈이었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버거들과 공감하고, 그들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버거들에게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우리가 바라는 냉혹한 전투기계, 어떤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넌 알다시피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만일 네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버거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메이저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반드시 어린아이여야만 했단다. 넌 나보다 빨랐고 나보다 영리했다. 난 너무 늙었고 조심성이 많았지. 일단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온 마음을 바쳐 전쟁에 뛰어들지 못한단다. 하지만 넌 전쟁을 몰랐지. 우리가 그렇게 되게끔 했단다. 너는 과감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렸지. 네가 태어난 목적이 그것이었다."
누구나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헤치는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어느 순간 내가 휘두른 용감이, 용기가 칼날이 될 때가 있습니다.
꼭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상처뿐이 아니라도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겹쳐 살다 보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나쁜 상사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실은 그렇게 돼 있는 거죠. 이건 예전 내 상사가 떠올라 써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용기나 용감을 휘두른 것도 아닙니다만.. 누구든 악으로만 간주하고 악을 처단한다는 듯이 행동할 수 없는 이유이죠. )
용감한 사람인 채로,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내 용기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기를
우리는 꿈꾸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그래서 저는 조용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고요.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저는 뭐든 시작하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인데
아무리 열심히 해보았자 결국
욕심쟁이 사장님 좋은 일 시키기
정도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뭐하려고 그렇게 해? 대충 해.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인생의 딜레마가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저는 천재도 아니고 인류를 위해 게임을 하지도 않지만요.
엔더의 게임은 꼭 읽어야 할 SF 목록에서 1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오슨 스콧 카드라는 작가의 이름도 작품 제목도 생소해서
바로 읽었습니다.
마침 설명은 정치, 과학, 철학이 녹아들어간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하더군요.
400페이지 가량이 게임을 하는 내용이지만
엔더의 게임은
게임하는 자의 심리, 게임을 지켜보는 자의 심리 등등에서 탁월합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인생에 대해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외에도 다양한 부분에서 작가가 깊이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적으로 나오는 외계생명체 버거
그들이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언어를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생각하면 다리가 움직이듯
그들은 다른 개체로 보이지만 한 몸입니다.
그래서 전략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보면, 인간은 전략이 있고 그 전략을 암호화해서 소통합니다.
이 소통 방식이 전쟁에서 핵심이라 암호를 푸는 게임이 전쟁 뒷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버거들은 소통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훨씬 인간들보다 우세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인간과 전쟁이 나면 인간이 지는 거겠구나
이런 디테일 면에서도 훌륭한 책입니다.
제가 SF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대단히 판타스틱한 것을 좋아하나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미래사회라는 새로운 세팅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결정짓는 심리가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기본, 인간이 인간인 조건이
SF에서는 거의 드러납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인 거죠.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1984에서 그랬습니다. 정말 끔찍한 작품인데,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등을 SF는 실험합니다.
엔더의 게임 역시 그런 작품입니다.
결국 엔더는 버거들을 초토화시키고 그들의 대변인으로 우주를 떠돕니다.
'여왕이 깨어나고 평화 속에서 번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찾는 여행자가 됩니다.
한 천재, 한 게임광, 한 전쟁광
아마 실제 세계라면 그에 대해 아주 많은 수사가 붙고 그 수사 중에는
비난이 담긴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천재는 마음에 대해서도 천재적이라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평화와 번영을 찾는 마음에도 천재적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 끝이라 하지요.
아무 미련이 없는 상태라는 것 같습니다.
아직 미련이 많은 엔더는 죽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찾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듯이요.
P.S.
노래 가사 중에 '꺼내먹어요'를 좋아합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이 부분 때문이지요.
엔더의 게임에도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집에 가고 싶어, 엔더는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
엔더는 집을 찾아 떠돌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책을 다 읽고
글을 다 썼지만
여전히 집에 가고 싶은데
거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는 상황은 변한 게 없습니다.
소설이 좋은 점은
인생이 그런 거니라
그러니 받아들여라
얘기해준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5. 6. 23.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