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더의 게임 클럽 오딧세이 (Club Odyssey) 1
올슨 스콧 카드 지음, 백석윤 옮김 / 루비박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처럼 엔더는 게임을 합니다.

488페이지 분량 중 40페이지를 남겨둔 448페이지까지 엔더가 게임을 하는 내용입니다.

남이 게임하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다보니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을 예전에 열심히 보던 게 떠오르긴 합니다.

임요한 등 다양한 선수에게 열광하며 저도 꽤나 스타 중계 방송을 챙겨봤습니다.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략에 깜짝 놀라서 입니다.

각각의 캐릭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상대편의 특성까지도 전략을 짜는 데 데이터로 활용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략과 전략이 부딪히는 게임은 정말

엄청난 캐미폭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엔더의 게임에도

엔더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이번에는 어떻게 행동할까

관음증 환자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엔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낼까 궁금해 합니다.


스타크래프트 중계 방송에서도

저번에는 이런 전략으로 승리한 선수가 이번에는 어떻게 승리할까가 궁금했던 것을 보면

캐릭터라는 것을 아는 재미는 게임 관람의 즐거움을 증폭시킵니다.


게임 하는 엔더, 자꾸 엔더에게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며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고 엔더가 승리할 수 있을지를 즐기는 그라프

이 둘이 가장 대립되는 두 사람이므로

실제로 2013년 '엔더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엔더스게임에서도 해리슨 포드가 그라프 역을 맡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엔더가 지켜야 할 지구와 엔더가 무찔러야 할 버거가 대립인 듯 그려지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적이 가장 큰 스승이라고, 적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실제 책 속에서 메이저 래컴이 읊는 대사이기도 한데요.


또한 엔더도 그라프의 속마음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나는 그라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마음이 비뚤어진 뚱뚱이.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

들의 삶을 조종해서 기계적이고 완벽한 지휘관들을 찍어내는 냉혹한 인간. 당신은 원하는 지휘관을 얻을 때까지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인류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인공 이 엔더란 아이는 작품 시작에서 아직 채 10살도 되지 않았습니다.

12살인지에 작품이 끝납니다.
때는 셋째를 낳는 것이 금지된 때
너무 머리가 좋은 유전자들을 낳는 까닭에(?) 이 집안에서는 셋째가 태어나게 됩니다.
아이에게 모니터를 달아 아이를 측정한 뒤, 군인으로서 자질이 있다 싶으면 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해 데려가는 건데요.
정말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런 아동학대를!!!

이란 생각을 작가도 했기에,
실제로 엔더를 지휘관으로 키운 그라프 등은 아동학대 등의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하지만 결국 난관에 봉착합니다.
엔더가 아니었다면 버거를 무찌르고 평화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라프가 엔더를 혹독하게 연습시키지 않았다면

지구인들은 영영 버거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쓸데없는 군사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실은 버거가 언젠가 침입해 지구인들을 말살시키는 데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보면 버거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밝힙니다)
이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엔더가 이미 버거들의 행성을 초토화시킨 이후이기에
아동학대 운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도 세상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결과가 나온 마당에야 그 부정적 측면에 대해 언급할 수 있지만
정말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그라프의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왜 엔더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들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어. 난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난 살인자가 아니야! 당신이 원한 건 내가 아니고 피터 형이야. 당신이 나를 끌어들인 거야, 나를 속였어!"
그는 울부짖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 우린 너를 속였다. 그게 가장 중요했어." 그라프가 말했다.
"그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넌 해내지 못했을 거다. 그것은 우리를 묶고 있던 끈이었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버거들과 공감하고, 그들처럼 생각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사람, 부하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버거들에게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우리가 바라는 냉혹한 전투기계, 어떤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넌 알다시피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만일 네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버거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메이저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반드시 어린아이여야만 했단다. 넌 나보다 빨랐고 나보다 영리했다. 난 너무 늙었고 조심성이 많았지. 일단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온 마음을 바쳐 전쟁에 뛰어들지 못한단다. 하지만 넌 전쟁을 몰랐지. 우리가 그렇게 되게끔 했단다. 너는 과감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렸지. 네가 태어난 목적이 그것이었다."


누구나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헤치는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어느 순간 내가 휘두른 용감이, 용기가 칼날이 될 때가 있습니다.
꼭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상처뿐이 아니라도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겹쳐 살다 보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나쁜 상사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실은 그렇게 돼 있는 거죠. 이건 예전 내 상사가 떠올라 써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용기나 용감을 휘두른 것도 아닙니다만.. 누구든 악으로만 간주하고 악을 처단한다는 듯이 행동할 수 없는 이유이죠. )


용감한 사람인 채로,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내 용기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기를
우리는 꿈꾸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그래서 저는 조용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고요.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저는 뭐든 시작하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인데

아무리 열심히 해보았자 결국

욕심쟁이 사장님 좋은 일 시키기

정도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뭐하려고 그렇게 해? 대충 해.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인생의 딜레마가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저는 천재도 아니고 인류를 위해 게임을 하지도 않지만요. 

엔더의 게임은 꼭 읽어야 할 SF 목록에서 1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오슨 스콧 카드라는 작가의 이름도 작품 제목도 생소해서
바로 읽었습니다.
마침 설명은 정치, 과학, 철학이 녹아들어간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하더군요.

400페이지 가량이 게임을 하는 내용이지만
엔더의 게임은
게임하는 자의 심리, 게임을 지켜보는 자의 심리 등등에서 탁월합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인생에 대해 탁월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외에도 다양한 부분에서 작가가 깊이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적으로 나오는 외계생명체 버거
그들이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언어를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생각하면 다리가 움직이듯
그들은 다른 개체로 보이지만 한 몸입니다.
그래서 전략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보면, 인간은 전략이 있고 그 전략을 암호화해서 소통합니다.
이 소통 방식이 전쟁에서 핵심이라 암호를 푸는 게임이 전쟁 뒷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버거들은 소통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훨씬 인간들보다 우세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인간과 전쟁이 나면 인간이 지는 거겠구나
이런 디테일 면에서도 훌륭한 책입니다.


제가 SF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대단히 판타스틱한 것을 좋아하나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미래사회라는 새로운 세팅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결정짓는 심리가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기본, 인간이 인간인 조건이
SF에서는 거의 드러납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인 거죠.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1984에서 그랬습니다. 정말 끔찍한 작품인데,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등을 SF는 실험합니다.
엔더의 게임 역시 그런 작품입니다.

결국 엔더는 버거들을 초토화시키고 그들의 대변인으로 우주를 떠돕니다.
'여왕이 깨어나고 평화 속에서 번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찾는 여행자가 됩니다.

한 천재, 한 게임광, 한 전쟁광
아마 실제 세계라면 그에 대해 아주 많은 수사가 붙고 그 수사 중에는
비난이 담긴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천재는 마음에 대해서도 천재적이라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 평화와 번영을 찾는 마음에도 천재적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 끝이라 하지요.
아무 미련이 없는 상태라는 것 같습니다.
아직 미련이 많은 엔더는 죽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찾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듯이요.


P.S.


노래 가사 중에 '꺼내먹어요'를 좋아합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이 부분 때문이지요.

엔더의 게임에도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집에 가고 싶어, 엔더는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


엔더는 집을 찾아 떠돌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책을 다 읽고

글을 다 썼지만

여전히 집에 가고 싶은데

거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는 상황은 변한 게 없습니다.


소설이 좋은 점은

인생이 그런 거니라

그러니 받아들여라

얘기해준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5. 6. 2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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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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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랑이가 오지 않는 날과 오는 날은 모두 단 하루의 차이다. 이 두 날이 만나는 경계선이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됨을 믿어야 한다. 두 달 동안 안 왔으니 이제 올 확률이 높아졌겠지, 석 달 동안 안 왔으니 내일은 올 확률이 더 높아졌겠지,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점점 집중도를 높인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닮았다. 마라토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어져서 결승선을 밟듯이 발걸음 하나 호흡 하나 가다듬으며 막판 스퍼트를 준비해야 한다.

두 날이 단절된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안 왔는데 내일은 올까?' 점점 회의에 빠져들고, 두 날이 연속된다고 믿으면 '호랑이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미리 준비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하나하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배터리 하나, 물컵의 위치 하나까지 챙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호랑이가 와도 1.5볼트 건전지 하나가 없어 그냥 보내기도 하고, 선반의 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호랑이가 오기 전날, 호랑이가 오는 다음 날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을수록 임박했음을 믿는다.

기다림과 사소한 정성 사이를 오가며 세월을 보내다보면 예고 없이 문득 호랑이가 나타난다. 눈 덮인 수풀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호랑이가 스윽 나타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뜻한 느낌이 뭉클 솟아오른다. 이 녀석, 아무 사고 없이 돌아왔구나, 자신의 주기대로 살아가는구나, 그런 안도감이 호랑이를 기다리고 자신을 기다린 세월에 스며들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야릇한 감상도 잠시, 안도감을 밀어내고 살아 펄떡이는 긴장감이 심장박동을 타고 서서히 흘러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막판 스퍼트 하는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고 온몸의 모세혈관이 터질듯 야생호랑이를 영상 기록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결승선을 빛살처럼 통과하고 나면 잠시 환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곧이어 마라토너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호랑이도 언제 오기나 했었냐는 듯 소리 없이 사라진다. 심장 둥둥 울리는 환희에서 문득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면 다시 마라톤의 출발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호랑이를 보려면 자신을 바라보며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p. 273



여기서 그가 기다리는 대상은 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다.
모든 간절한 기다림은 저런 식으로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호랑이로 은유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정말 호랑이를 기다리는 남자의 기록이다.
1년 중 6개월 동안은 제 몸이 들어가면 끝인 비트에 틀어박혀 20년째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pd 얘기다.

정혜윤의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린 시절 매일 소를 몰았다는 그의 이야기와 호랑이를 기다리는 pd가 된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호랑이를 기다리다 보면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 처절해지다가
또 사회로 돌아오면 다른 방식으로 고독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돼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이 고독감에 대한 부분은 예스24 채널예스 인터뷰에서도 나온다)


정말 시베리아에서 시베리아호랑이를 기다리고 잠깐씩 만나는 이야기다 보니
도입 부분은 약간 시간을 끌게 됐다.
나는 한번도 본 적도 없는 지형에 대한 설명과 우수리 원주민들 이야기
6개월 동안 호랑이가 다니는 길을 추적다니고
나머지 6개월 동안은 그 추적한 루트의 비트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는 사람 이야기가 정말 있는 그대로 쓰여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숨막히는 비트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독서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 호랑이가 오나 하다
정말 호랑이가 오면 같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인가

문명과 자연 사이에 길을 잃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그의 고백은 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게끔도 했다.

그냥 자연으로 젖어들고 싶게도 했다.
(6개월 동안 비트에 살 인내심도 없음에도ㅠ)


책은 그가 추적한 블러디 메리와 그의 자식들 천지백, 설백, 월백
그리고 설백과 월백의 아이들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인간과 호랑이로 대변되기도 하는 자연이 대비되기도 하고 어우러지도 하는 절묘한 순간들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실체를 보지 않아도 그 자취만으로 믿는 것, 이런 것이 자연에 대한 믿음이다.


잠복은 눈으로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무처럼 자연을 믿고 자연에 순응하면, 물고기가 물에서 아늑해하고 새들이 창공에서 자유롭듯이 한 평짜리 비트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자연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 쉬운 것 같지만 자연 속에서 이 마음을 지키기가 힘들다.

잠복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해준다.




채널 예스는 총 3편으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싣고 있다. 모두 재미있고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글이다.


http://ch.yes24.com/Article/View/19325


저는 이런 교감을 위해 모두 은자隱者가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과 이데올로기를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생활을 해내기 위해선 그 경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너머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종내엔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끔씩이라도 느끼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느끼면 개체는 다른 개체와 편안하고 인간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세월이 그것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편


호랑이가 없는 숲, 문명 속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들 위에 신처럼 군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충분히 상대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있는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호랑이가 오갔을 오솔길을 홀로 걷다 보면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우뚝 멈춰 서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황량한 겨울바람이 산비탈을 쓸어 올리기라도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왜소해질 때 비로소 자연과 더 깊이 대화하고 세월을 더 넓게 보게 됩니다. 인생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삶과 죽음 같은 자연 속에 떠다니는 어떤 감성들, 세월을 가로지르는 긴 흐름들을 느낍니다. 숲 속의 호랑이는 인간을 자연과 세월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2편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긴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짧은 흐름에 몸을 실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에도, 삶이 가져오는 생활에도 온전히 몸을 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짧은 흐름에 몸을 싣고 긴 흐름을 잊지 않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물과 기름처럼 짧고 긴 흐름이 잘 섞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짧은 흐름과 긴 흐름을 섞는 방법이 경묘해졌습니다. 평소에는 개체의 생활이라는 짧은 흐름에 충실하다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기로에 서면 모든 개체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긴 흐름을 기준 삼았습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을 죽음이라는 허무에 빠트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하루하루의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의 많은 번민과 갈등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편




2015. 6. 3. 17:57 

자연은 살아있는 영혼과 그 흔적들의 집합체이며 그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느낌들의 전체성이다. 느낌이라고 해서 단순한 추정이나 예감이 아니다. 인디언이나 우수리 원주민처럼, 오랜 세월 자연을 지켜보고 쌓아온 ‘객관적인 느낌‘이다. 숲에서는 이것이 곧 과학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흔적은 지표면에 남겨진 자취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은 존재의 하중을 자취라는 형태로 지구 표면에 남긴다. 이것은 냉정한 물리의 법칙으로 생명들이 대지에 남긴 삶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자취는 생명의 과거를 추측하고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 P106

자취를 관찰하는 것은 ‘모호‘에서 ‘구체‘로 한 걸음씩 옮겨가는 일이다. 거듭 관찰하고 추적해 나감에 따라 불명확했던 자취는 점점 선명해져, 마침내는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처럼 윤기 나는 하나의 작은 사실이 된다.하나의 사실은 새로운 사실에 연결되고 이렇게 작은 사실들이 조금씩 쌓여 결국 사실의 전체에 도달한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 사실의 미래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자취를 쫓는 것은 그 주인의 존재 양식을 쫓는 것이며 나아가 자연현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 P111

모든 자취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다. 바람은 자취를 쓸어버리고 비는 자취를 씻어버리며 눈은 자취를 덮어버린다. 숲 속의 청소부들은 온갖 생물의 사체를 해체하고 세월은 계절의 흔적조차 소리 없이 지워버린다. 자연은 생명들의 자취를 녹여 스스로 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나마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뼈다. 다른 자취들은 시간의 흐름과 기후의 침식에 따라 곧 사라지지만 뼈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그 모습을 오래 유지한다. 뼈는 한 생명이 남기는 마지막 자취다. 그래서 뼈의 자취는 뼈들의 세계, 그 너머로 이어진다. 숲 속에서 뼈를 발견하면 오래전 한 생명이 내쉬었던 숨결이 다가온다. 그 뼈가 살아생전 지녔을 투쟁과 감성의 흔적을 마음속 깊이 느낀다. 뼈는 숲 속의 역사이며 불후의 고전이다. 고전을 읽고 마음이 울리듯 뼈에서 숲의 역사를 읽고 영감을 받는다. 자취란 물리적인 것이면서 때로는 영혼을 울리는 영적인 것이기도 하다. - P111

그래서 고귀한 자취들은 늘 마음속에 남아 영원의 주변을 맴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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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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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청전의 플롯을 따온 이야기다. '연인 심청'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목숨을 바치고 다시 살아나 국모가 되는 심청 플롯에 사랑 이야기가 얽혀 들겠구나 짐작하게 된다. 짐작대로다. 심청은 이성과의 사랑을 한다. 윤상이란 남자와다. 그러나 사랑은 이야기 속에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인 심청일까.


심청의 플롯은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이 들어 뻔하게만 느껴졌다. 아비 눈을 뜨게 하겠다고 실제로 이뤄질지도 모를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 석을 내기 위해 목숨을 바다에 바친 여인. 요즘으로 따지면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굴 만한, 정말 말도 효심의 주인공이다. 차라리 내리사랑이라면, 자식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몸을 바친 부모 얘기라면 오히려 있을 법한 일인데, 여자는 나이든 부모를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다. 아직 세상사 즐거움도 누려봤는데, 혈기방장한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수도 없이 많을 나이에. '' 인간의 기본 도덕이라지만, 실제로는 부모를 버리는 '고려장' 풍속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대에도 독거노인이 많은 것만 봐도 심청 정도의 '효심' 평범을 넘어서있다.


너무 뻔해서 들여다볼 생각도 했지만, 그저 효도하라는 교훈으로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싶지만, 년을 넘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런 여자 흔하지 않다. 여자 속에는 뭐가 들어차있었던 건가,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서라도 아비를 구하려 했는가, 곰곰 생각해보면 속이 궁금해진다.


답부터 말하자면, '가치 있는 ' 위해서 였다고 방민호 작가는 풀어냈다. 신산한 삶을 끝내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을 심청은 택한 것이라고, 그녀 마음속으로 들어가본 방민호 작가의 해설이다. 여기 운명이 더해진다. 오래전에 짜여진 인연의 그물 속에서 심청과 아비인 심봉사는 질긴 인연줄로 얽혀있었다는 . 이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수궁에서 알게 , 심청은 모르는 작가와 독자만 아는 얘기다. 옥황상제의 궁궐 자미원에서 탕약을 다리던  '유리'라는 이름의 여인은 유형 선관을 사랑해 죄를 짓고 만다. 죄의 대가로 이승으로 떨어져 사랑할 없는 사이인 아비와 딸로 만나게 . 우리가 스스로도 이해할 없는 어떤 선택을 , 어쩌면 선택의 이유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나긴 인연의 줄을 우리가 잡고 가고 있는 것이라 '연인 심청' 말한다. 불교의 윤회설에 닿아있는 이야기이자, 합리로 설명될 없는 부분을 환상 혹은 상상으로 채워넣어 이야기의 매듭을 정교하게 하는 소설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심봉사가 부처에게 공덕을 바쳐 눈을 뜨고자 이야기의 도입부를 보자면, 마지막까지 불교 논리는 '연인 심청' 끌고 가는 축이다. 아비와 딸로 만나 봉사와 심청은, 봉사가 눈을 뜸으로써 그들 인연이 영영 끝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연이 풀릴 때까지 계속 살아내 모든 인연을 완전히 풀어내 마음에 남는 바가 하나 없으면 해탈이라 불교에서 했듯, 적어도 사람의 인연의 질긴 끈은 심청이 목숨을 바쳐 끊어낸다.


그러면 심청은 해탈해 다시는 살아있는 목숨을 받지 않을 있게 되었을까. '연인 심청' '심청' 다시 태어날 것만 같다. 그녀 속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에 먼저 '연인 심청'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 심청과 대립되는 인물이자, 그녀의 희생의 원인인 봉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연인 심청' 제목에서부터 '심청' 내세우고 있음에도, 심청이 죽은 심청과 봉사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했다. ? 이야기상 봐도, 그래서 심청이가 목숨을 바쳐 얻은 공양미 삼백 석으로 봉사는 눈을 떴나, 다들 궁금해하게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하니, 호기심이 증폭한다. 여기가 '연인 심청' 가장 풍성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내놓는 장면까지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인데다, 나와는 다른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줄줄 읽어내려갔다.  오히려 가장 아프게 읽은 대목은 심청이 죽은 심봉사의 행적이었다.

눈이고 몸이던 딸을 내놓고도 육욕에 얽매이고 세상사 재미를 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늙은 육신의 남자. 겉모습만 초라한 아니라 마음까지 초라한 남자. 그의 돈을 뺏기 위해 달려든 동네 사람 만덕 아범과 기생에게 심봉사는 놀아난다. 주색잡기에 몸도 마음도 내놓았다. 혀를 쯧쯧 만큼 한심하다, 서경 기생이 아님을 알면서도 재미에 빠져, 심지어 절간에 내놓기로 딸의 목숨값 삼백석마저 절반을 잘라내 줘버린다. 공덕을 올리기로 칠석 날에는 피곤하다고 잠자다 제대로 공덕을 올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심봉사야말로 우리 모습이 아닐까. 온몸과 마음으로 뜻을 지켜나가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심청보다야, 심봉사야말로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닐까.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으나, 지금 눈앞의 욕망에 눈이 가는, 그래서 그만 어제 결심하고 오늘 부서뜨리는, 중요하다 해놓고 잊어버리는, 순간의 쾌락에 그만 알게 뭐람 해버리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는 했다. 많은 과장도 아니고 조금의 과장이다. 그래서 쯧쯧쯧 혀를 차고 한심해하다 그만 아팠다. 나는 쾌락 앞에서 얼마나 강한가 해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서, 게임, , 연애 금방 몸에 닿는 쾌락에 대해 나는 순순히 거부할 있겠느냐 하면 그렇지 않을 것만 같아서, 연약한 인간 존재인 ''라는 평범한 사람이 봉사로 구현된 것만 같았다. 혀를 차며 한심해하던 대상이 나이니, '심청'처럼 가치를 실현해가는 여인보다는 오히려 대립각으로 부각된 인물이야말로 나의 모습과 닮아있는 같으니, 연약함과 나약함 때문에 아팠다.

이야기가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라면, '심청'보다는 ' 봉사' 통해 나는 ''라는 사람이 보이는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라는 사람이 특별히 욕망이 커서는 아닐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졸렬함에 대해 통렬히 아파했을 , 시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듯 '연인 심청' 독자들도 ' 봉사' 행적과 속마음을 보며 혀를 차며 한심해 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쿡쿡 쑤시는 자신을 보게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 봉사' 대해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가수 심수봉이 불러 유명한 대중가요 '백만송이 장미'. 우연히도 가수의 성도 심인데,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미움 없이 아낌 없이 사랑을 주면 백만 송이 꽃을 피워낼 있다고 한다. 심청은 봉사에게 노래 가사 같은 사랑을 베푼다. 목숨과 바꾼 공양미 삼백 석으로 눈을 뜨기는 커녕, 더럽고 추한 몰골로 맹인 잔치에 나타난 아비에게 대체 돈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행색이냐 따져 묻지 않는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미움도 본성이라 나는 여전히 과거 직장 상사가 밉고 사랑을 주고도 그만큼 받지 못한 듯한 남자가 미운데, 여자 미움을 내색조차 않는다. 그게 진심이라 한다. 오히려 마음의 연인 '윤상' 두고 매창에 걸린 아비를 구하기 위해 정성을 들인다.

방민호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제목 '연인 심청' 제목의 이유를 밝힌다. 만인의 연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지만, 누구도 주기 힘든 사랑을 주는 여인, 이를 통해 '가치'라는 것이 인간 세상에 존재할 있음을 입증해준 여인,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품고 살고 싶게 해준 여인이 명쯤은 이야기 안에서나마 살아있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심청은 다시 태어날 같다 했다. 봉사는 회한도 없이 떠난다. 눈을 뜸과 동시에 개안하여, 마음 단비를 맞는다. 각질 밑에 숨죽이고 있던 풀꽃들이 틔운다 한다. 그러나, 심청 마음에는 자신이 돌보지 못해 한을 품고 죽은 남자가 남아있다. 바로 그녀가 마음으로 사랑한 윤상이다. 슬픔이 사랑을 불러냈다 한다. 아비가 있으나 아비라 부르지 못한, 만인이 평등한 세상에서 태어나 자기 능력을 실현하고 싶어한 남자 윤상을 심청은 마음에 둔다. 마음이 심청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 세상 어딘가에 살게 것이다. '연인 심청' 불교 논리에 따르자면, 맺지 못한 마음은 다시 삶을 부르므로, 아마 심청은 어떤 세상에든 나타나 마음을 풀어낼 것이다.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사는 수밖에 다른 삶의 방도가 없는 사람이 만나 사랑할 있는 세상 이야기가 남아있을 것이라 한다.

 

만인의 연인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누구나 바라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현으로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직 살아야 날이 많은 우리에게 보아야 희망이 남아있다고, 누구 사람의 희생으로 구현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복된 세상이 때까지 우리는 태어나고 태어나며 아파하고 바라고 하는 것이라고 '연인 심청' 그때까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아닐까. 언젠가 우리의 삶도 맑아질까 하는 기대 속에서 살기 위해. 마음에 남은 희석시키지 못한 미움을 한번쯤은 씻어내는 '사랑' 우리 삶에서도 기적처럼 일어날 있도록.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억겁의 세월과 무한 우주의 힘까지 더해 이뤄내고자 하는. 휴지처럼 가벼운 마음도 목련처럼 피어날 있는 날을 기다리도록.




2015년 5월 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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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가지고 싶은 책이다.

가졌다고 그 책을 꺼내보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이번 이사에서는 그런 책이 아니면 다 버려야지 했지만

버림도 하나의 행위이고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라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또 가지고 싶은 책이 생겼다.

이런 제길

이만 가져야지 했는데

어떤 생각들은 몇 번이고 다시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우리 고양이를 다시 쓰다듬어도 늘 기분이 좋은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행복해지고 말았다.


이런 일 많지는 않은데.


너 왜 책을 읽어


라고 스스로 묻다가 혹시 이거 지적 허영 아니야 요새 그런 생각도 많이 하던 차 (요새는 허영은 다 갖다버리고 알맹이만 부둥켜 안고 살고 싶어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멀리하고 있다)인데, 이 책은 "그래 그래서 나는 책을 읽어"라고 말하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이런 책이 있는데 말이야"라면서 얘기한 것도 여러 번이다.


인생과 신념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것은 거의 예술의 경지


이 자본주의 최고봉 한국사회에서 돈 말고 신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은

얼마나 강해야만 하는 일인지

해보려 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말들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했으나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고

거짓된 혁명을 꿈꾸게 하고

거짓된 도취로 춤을 추다

남는 것은 무도회복을 사느라 진 빚과

무대를 치워야 하는 청소부


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위축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 지나갔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 딱딱하게 굳어진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 예전에는 어떻게 할 지 잘 모르겠어란 말을 자주 하긴 했어도, 실제로는 어떻게든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일 때, 뭔가 굴복해버린 느낌이 들 때,  왜 그랬어, 너? 혼자 물어도 보는데, 그때 넌 뭘 믿었던 거야

물어보면 실은 것도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믿었는데...

지금은, 이러던 차...


지금 과정에 있는 거잖아


라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이유는 아래 인용 문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딱딱해지면 읽어야지. 이런 문장들을.



-2015년 4월 7일 화요일



네 책에서는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면 저항군이 되더구나. 이것은 카뮈의 말과도 같아. 고독한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반항이라고. 난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 적응을 말하기보다 저항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건 사랑과도 같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 너를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사랑 안에 이런 맘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지? 무엇을 위해 싸우지? 무엇을 보호하지? 무엇에 분노하지? 뭐라고 표현했든 나는 네가 네 책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 질문들 없이 우리가 미래를 위해 최선을 행동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미래가 만약 갓 태어난 갓난아기라면 우린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고 그 아기를 최선을 다해 잘 키워볼 수 있을까?


네 고민의 무게는 깊어도, 네 고민의 중심이 끌어 앉히는 힘은 막강해도, 너는 "에구, 그래도 어떻게 좀 움직여보자."라고 말하는 듯했어. '곰처럼 무거워도 나비처럼 난다'라고나 할까? 고민은 무거워도 행동은 가볍게, 거창한 질문 앞에 우리의 행동은 사소한 것부터, 이것이 한 점 중심에서 네가 출발할 수 있었던 이유야.


우린 확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야. 자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지. 자신의 삶이 하나의 알리바이(이 세상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에 불과하길 원치 않으니까.


네가 평소에 가장 잘 하는 말이 뭔지 알지? "그럼 나라도 어떻게든 해볼게. 그런데 기왕 할 거면 잘하자." 야.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 '음, 이놈은 천재다.' 너는 절실함에서 천재야. 영혼의 부지런함에서 천재야. 너는 가만히 있지 못함에서 천재야. 그래서 너는 '나비처럼 나는 곰' 혹은 '나비의 날개를 단 곰'이 될 수 있었어. 비록 잘 날진 못해도 날긴 날아. 그러니 신랄해도 귀여울 수밖에 없어. 네가 좋아하는 표현을 옮기자면 너는 일종의 시적인 동물이야.


나짐은 희망들의 넝마가 되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하는 듯해. 여전히 누군가는 정의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느냐고. 이 말은 아주 의미심장해. 희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었을까?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다는 의마가 무엇일까? 나는 이 말에 대답하고 싶어졌어.


인간은 수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을 죽는다는 말이 있지. 우리 안에는 우리가 쓰지 못한 힘, 탐험하지 못한 모습, 발견하지 못한 보물, 미처 능력을 드러내 못한 자아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리는 그중 최악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끄집어낼 수 있게 서로 도와야 해.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모습을 혐오스럽게 보지 않도록 서로 도와야 해.


그러려면 저항군이 될 수밖에 없어. 왜냐고? 어떤 사람으로 죽고 살아야 하는지조차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으니까. 어떤 삶이 최선의 삶인지조차 이미 정해진 것 같으니까.


-p.20~22



훗날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어서 숲을 헤맬 때 나는 죽은 사슴의 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우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면서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잊습니다. 내가 원래 뭘하고 싶어 했던가, 이것을 잊습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오솔길과 변두리의 철학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슴 뼈를 떠올립니다.


나는 밤길을 걸으면서 낮 동안 일어났던 일을 사소하게 느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낮의 사소함과 사슴 뼈의 의미는 선택과 행동의 순간에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했었고 뭐가 사소했던가?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살 것인가? 하지만 나는 또한 모든 개체는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큰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은자가 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 두 생각이 내겐 정-반-합(harmony)의 세계로 이해됩니다. 현실적인 조건 즉 인간의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자연의 규칙들 사이의 소통, 이것이 내겐 진정한 마음속 소통입니다. 저 시베리아 우데게족 최고의 신은 엔두리입니다. 엔두리는 바로 화합(harmony)의 신이죠. 내게 화합은 이런 모습입니다.


-p. 51~52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바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아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더불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입니다.


나는 땅 밑에 홀로 누워 카메라를 바라보며 끝없이 갈등합니다. 호랑이를 보고 싶은 욕망과 얼른 돌아가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거대한 자연을 보고 싶다는 욕망과 낯익고 편안한 관계 속에 있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고 싶은 욕망과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이냐고 절규하고 싶은 순간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나는 평생 이런 고민들 속을 떠돌았습니다. 나중엔 사람이라 불리는 하나의 존재,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으니 아무나 만나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쩔 땐 녹차 통에 적혀있는 상품 정보 글자를 읽고 또 읽습니다. 그때 글을 잘 썼느냐 못 썼느냐가 아니라 읽을 게 있다는 것, 그것만이 좋단 생각이 듭니다. 올바른 길이 있어도 그 길을 가고 싶은 욕망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의 갈등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저 산속에서 추위와 눈과 싸우고 있을 때 도시에선 사소한 이전투구들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황폐함 속에 오래 있으면 도시의 삶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산에서 고독하듯이 도시에서도 고독할 것이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참지 못하고 도시에 전화를 겁니다. 내가 온갖 방법을 다 통해서 겨우겨우 전화를 한 통 걸면 이런 답변을 듣습니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하세요." 산에서의 고독은 인간이 보고 싶어 생기고 도시에서의 고독은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 생깁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잠복에서 또 뭔가를 알게 됩니다. 도시에서 중요했던 것들이 산에서는 사소해지고 도시에서 사소했던 것들이 산에선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잠복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알 수 있는 걸 미리 알게 해줍니다. 삶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 돌아가서 살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비트는 호랑이를 보는 곳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비트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눈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항상 숲으로 이어지는 길의 입구 같습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틀렸다고만 합니다.

하는 만큼 알 수 있다는 말도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하는 만큼 보입니다.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한 발을 든 정지 상태로 5분을 참는 호랑이의 모습이야말로 저에게 천재란 단어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까뮈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천재란 스스로의 절도를 창조해내는 반항아다." 절도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를 천재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 자기 삶의 용감한 관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일을 자기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찾아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에도 고통에도 행운에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한계는 한탄하고 장점은 과장하는 그런 태도 말고요. 한계도 장점도 길을 내딛는 하나의 원료로 쓰는 거지요. 어차피 한계와 결핍과 고통에서 모든 중요한 것들이 다 나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서글픈 일은 아닙니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없기만 바란다면, 고통이 없는 척한다면,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둔다면 우린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중간적 존재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적 존재,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의, 현실과 꿈의, 어둠과 빛의, 기쁨과 슬픔의,  출발점과 목적지의, 어제와 내일의 중간적 존재입니다.

까뮈의 문장이 있습니다. 까뮈는 '나는 비참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하진 않았다. 나에게는 태양이 있었다."라고 말했지요. 비참과 태양 사이에서 그는 태양 쪽으로 걷고 싶어 했습니다. 태양이 있는 쪽으로, 빛 쪽으로, 또다시 빛 쪽으로 결코 눈을 떼지 않고 그러나 환상은 없이, 그렇게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중간적 존재인 우리에게 그 중간 지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그게 별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는 말이 있지요. 박수용 감독은 "구하라, 인내하라, 극복하라."라고 말하네요. 찾을 것이라는 말은 그에게 이르러 '극복하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 전환이 좋습니다. 뭔가를 끝까지 추구하면서 찾아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극복했다는 것을요. 끝까지 한번 다 태워봐야만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혼자 있어봐야지 비로소 간신히 이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지쳐 떨어질 때까지 싸워봐야지 화해다운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p. 76~77

 

'게니우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 그의 수호자가 되는 신(수호천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아감벤의 말에 따르면 게니우스는 우리의 기원인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니우스랑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자아이자 자아가 아닌 것과 늘 함께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인격적인 것이 게니우스이고 우리는 이 낯선 존재와 떨어지지 못하고 가장 은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끔 이 게니우스를 느낍니다. 바로 감동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왜 감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때 '게니우스를 불안이나 기쁨, 안심이나 동요로 경험'합니다. 감동하는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상황과 처지도 내려놓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어린아이(순수함)야말로 끈질기게 우리를 타자에게 향하도록 만드는데, 우리 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바로 그런 감정을 우리는 타자 속에서 찾는다. 마치 어떤 기적처럼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이 명확하게 비춰지고 해명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 거울이 나옵니다.

우리는 게니우스, 즉 '우리의 비밀스러운 환희와 자랑스럽고 고결한 고뇌'를 타자 속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아래서라면 타인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너무 중요해집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내가 보는 것이 나의 게니우스라니, 타인이 나의 거울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감응하는 타인의 맨얼굴은 너무도 중요해집니다.

-p.156~157


만약 내가 바쁘다면 평소의 한 순간을 영원처럼 빛나게 하느라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고 싶어. 만약 내가 걸레라면 내가 닦은 부분을 살펴보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점점 한가지 틀로 세상을 보고 있어. 그렇게 보는 한 결코 눈치채지 못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 P20

우리는 살고 있는 나와 살아보지 못한 나를 다 거느리고 미래를 향해 여행 중이야. 미래에 우리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무엇인가의 대표자가 될 거야. - P23

그래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닮아가는 거야. 우리 자신이 보고 싶은 미래 자체가 되어가는 거지.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내 마음속의 생각은 우리가 변화해야만 그날이 온다는 것이었어. 우리가 변화해야만 세상이 아름답게 바뀐다는 말이었어. 이것이 희망을 이 사이에 넣어둔다는 말이야. 희망을 깨문다는 말이야. 희망은 별처럼 먼 곳에 있지만 그 별을 입으로 옮겨놓는 거야. - P24

스피노자는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참아내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 삶의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관하는 대신 어떤 행동을 할 때만은 비로소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그런 후에야 자기 자신에게 갖는 슬픔과 기쁨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고 타인과 세상을 향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지요. 누구를 만나서 말이라도 해봐야지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남이 중요해집니다. - P153

우리는 한 인간이면서 한 인간이기만 한 존재는 아닙니다. 자식이자 부모이자 친구이자 동료이자 배신자 이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되어봤다가 다시 한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로 돌아옵니다.
- P159

카프카는 자신이 미비하다고 느껴질 땐 공통성에 의존하자고 했습니다. 왜냐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저도 실은 그렇게 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나랑 같이 힘을 내자!" 그러면 저기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소년들이 농구공을 튕기고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소리들이, 바람 부는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꽃이 벌을 부르는 소리가 서서히 귀에 들어옵니다. 다시 어린아이 같아집니다. 다시 일상입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 P160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가 낳은 걸작입니다. - P180

저는 자신을 키우려는 자는 동물의 장점과 인간의 장점을 다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의 장점은 자신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중략)
그리고 인간의 장점은 작가적 시점을 가질 수 있단 겁니다. 즉 삶에서 좀 물러서서, 좀 떨어져서 마치 하늘에서 자신을 보듯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P182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 P183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것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소만이 마이크로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자신의 친구나 애인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 P185

한 사회의 인문학적 수준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개인의 문제로 돌리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말을 할 때 내면의 고백으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말을 사회적인 발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발언으로 우리 사회 역시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길 멈추고 사람을 옹호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 P252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수록 우린 너무나 바쁘고, 사회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습 그대로 쌩쌩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린 기대와 희망을 착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가능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저는 인간 마음의 핵심에는 간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어도 성스러운 마음은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존엄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간절함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길 원합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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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전집 1 미야자와 겐지 전집 1
미야자와 겐지 지음, 박정임 옮김 / 너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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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쏙독새의 > 미야자와 겐지 본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떤 못생긴 . 핍박 받지만 꿈이 있는

그래서 별이 되었지만

결국 그의 생에서의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별이 수는 있었습니다.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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