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티 블루 - 37.2 Degrees in the Morn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자유에 대한 증오와 한계에 대한 증오는 일치한다. 결국 무한은 가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자유에 대한 인식이며 한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잘 된 이야기들은 죽음을 수반한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승화다.
베티블루의 주인공인 장은 베티를 만나며 인생의 변화를 겪는다. 어느 정도 안일하게 사는 게 목적이던 그는 자기 내면에 감추어진 자유에의 의지를 베티를 통해 발견한다. 그녀와 동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히틀러’를 가지고 역사 소설을 쓰는 인물이기 때문인가? 히틀러라는 독재자, 그의 내면의 광기에 대해 장은 알고 있었고 말하고 싶어 한 인물이기에?
그러나 당장은, 현실 앞에서 무너져 녹아내리는 중 베티는 그런 장을 다시금 그곳에서 구출한다. 장은 점점 베티로 인해 변해간다. 아니 자기 내면에 다가간다고 해도 좋다. 베티는 그런 장을 응원한다. 장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베티는 설득하고 이끌어낸다. 장 역시 이런 베티에 조응하며 여장을 하고 돈을 훔치는 등 사장이 페인트칠을 하라면 하던 순진함을 지워내고 자기 동물성을 마주한다. 그러나 베티의 내면은 광기로 가득 차 있으며 동물성이 그녀를 지배하는 순간, 그녀는 세계가 피의 바다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지독하다. 세계의 질서는 그녀라는 인물에게 가혹하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는 작품 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지독한 자기 혐오, 운명에 대한 응시(곧 한계에 대한 응시, 죽음에 대한 응시, 혹은 전능할 수 없음에 대한 응시)는 그녀가 스스로 눈알을 파내도록 만든다. 모두 피의 바다이며 힘의 역학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데도 마치 그것이 아닌 듯 행동하고 가증스럽게도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걸까.
그 뒤 베티는 의식을 잃는다. 장은 생도 사도 아닌 경계 속에 머무는 베티를 자유와 한계가 없는 죽음의 영역으로 놓아준다.
모든 죽음이 승화의 과정은 아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생명이라는 게 가진 힘(피의 역동성)을 다 쏟아 붓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이만큼이 되기 위해 엄청난 피를 쏟아 부었듯이.
모든 생명은 다 살아갈 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어디에 작용시키느냐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다. 세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자전축을 바꾸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당할 수도 있다.
장은 베티를 통해 자신이 가진 힘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베티라는 한 인물의 죽음은 그의 내면에서 죽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발견과 예술로 승화한다. 결국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진 힘)을 발견하는데 한 평생을 보내는데, 그래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에서 그는 베티를 만난 것이 행운인 셈이다.
베티 블루는 사랑의 실천이 죽음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이해 불가의 형식이며, ....주인공 남성의 발언, 어디든 피의 바다야 라는 그의 대사는 와닿는다. 낭떠러지 앞에서.
그래도 음악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