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디스트릭트9의 서사는 꽤 단순하다. 익히 보아온 헐리웃 액션(로봇, 펑펑 터지는 피의 난무극, 테러 작전 등)도 존재하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비극적 파토스를 흠뻑 뿜은 주인공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가 처음부터 비극적 파토스를 가진 초인은 아닌 일상적인, 연약한 한 가장이었다는 설정도 이미 꽤 보아온 설정이다. 게다가 정부측과 진정성의 대결이 아니라 거기 끼어든 남아메리카 갱단의 설정은 3중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 그 설정 역시 이제는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갈등이란 1:1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다양한 집단들의 대립이라는 인식 속에 세워진 이 갈등 구조는 가이 리치의 <락스탁 앤 투 스모킹 베럴즈>의 영화를 봤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이 영화는 ‘공존이 존재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적 우리로서는 힘들다는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공존이란 말의 달콤한 허구성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갈등을 해소할 아무런 비전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이 나빠서 강대국이고 착취하는 세력이며 아프리카가 착해서 약소국이 아니라 누구나 지배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외계인이라는 약간은 역겹게 생긴 이 존재들은 지구의 방식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약탈이라는 가장 일차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 본능을 이어나간다. 이런 외계인들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냉대는 인상적이며 또한 현실적이다.

그런 외계인들과 전혀 가까워질 마음이 없던 주인공은 약간의 호기심과 붕뜬 마음 때문에 외계 약품(유동액)을 뒤집어쓰고 외계인의 유전자와 자신의 유전자가 결합하는 기이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기이 체험은 극의 마지막 주인공의 다른 두 눈동자를 통해 잘 드러난다.(피터 잭슨은 눈 연기를 좋아한다. 킹콩에서도 킹콩의 눈으로 말하기 연기는 압권이었고 이번에 외계인 크리스토퍼의 눈도 깊은 말을 한다.) 대립된 양극 지점을 함께 가진 이에 대해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가 말하는 달콤한 공존은 실은 그것을 어떻게 상품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갱들의 측면으로는 그의 힘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말하자면 그는 소유의 문제로 취급되는 상품, 물건이다.  


그런 우리들에 대해 우리 자신이

얄팍한 희망인가 쓰디쓴 절망인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영화는 얄팍한 희망 뒤편에 도사린 쓰디쓴 절망을 이야기한다. 중간자적 존재는 차츰 외계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왕따로서 이 사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문, 이름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는 마지막은 씁쓸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올지도 몰라. ‘날아와 머리 위로 날아와’(패닉의 <UFO>) 라는 그날에 대한 주문이 남는다. 외계인의 3년이 우리의 3년과 같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언젠가는.(지구의 시간은 지구적 차원일 뿐, 우주적 차원이 아니다) 그날은 맑스주의자들이 말했던 혁명의 그날일까?(물론 이조차 얄팍한 소리일 테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혁명을 기다리던 그들처럼 우리도 혁명의 그날을 기다려야 할까.? 그 혁명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 구조의 해소가 아니라 우리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날일 테니 훨씬 더 지독할 것이다. 뿌리째 바꾸어야 할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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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09-10-1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우리 본성의 바뀌는 날이란 표현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