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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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오래 이 소설을 잡고 있었다. 놓지도 못하고 깊이 빠져들지도 못한 채로. 빠져들기엔 험버트 험버트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어지러웠고 놓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벨벳 코트를 입고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초연하고, 우아하고, 날씬한 사십 세의 병약자가, 자신의 사춘기 육체를 세포마다 땀구멍마다 알고 숭배했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그리고 조금은 지루하고,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사실―을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상스레 안경 쓴, 지친 잿빛 눈에서 우리들의 서툰 로맨스는 잠깐 떠올랐고 생각되었고, 그러고는 재미없는 파티처럼 치워졌다.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비 오는 날의 소풍처럼, 지루한 운동처럼, 어린 시절 주무르던 한 조각의 마른 진흙덩어리처럼.




추문의 뒷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한 사십 대 남자의 처연한 고백 앞에서 나는 잠시간 그를 동정하였다. 어린 소녀의 강간자인 한 남자를 동정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위대한 면이 있는 것일 게다. 소설이란 도덕을 뛰어넘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므로. 그러나, 사실 험버트 험버트(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는 것 같다)의 장광설, 풍광 묘사, 심리 묘사에 모두 감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의 이기적 속성을 반성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자신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모두 잃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과를 표하며. 그러나 그렇다하여도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의 극단적인 속성-결국 자신과 타인 모두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는-으로 사람은 상처입는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같은데,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가? 헌데 왜 그 방향은 종종 제멋대로인가?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퀼티는 사랑했었다. 대체 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으나 험버트 험버트는 사랑에 실패하고 결국 도취된 사냥꾼으로 머무르고 마는가? 아니,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모두 ‘도취된 사냥꾼’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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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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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추리소설이다. 어렸을 때는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고 그래서 거의 처음 접하는 장르인 것처럼 읽은 추리소설.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여러 번 봤어도 소설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초반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생(?) 후까시를 언제까지 내가 받아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캐릭터를 내가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때 까지, 또한 이 소설의 뒷받침이 되는 1950년대 미국 문화에 익숙해지까지는 좀 읽기 불편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이나 인간을 만나는 과정이나 비슷한 건지 결국 점차로 그 인물에게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필립 말로우의 생 후까시에서 점점 매력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고 인물의 개연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립 탐정인 그가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치 사람과 친해지는 것처럼 소설의 캐릭터를 따라가면 된다. 이 인물이 대체 사건을 어떻게 풀어갈지. 사건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신용하던 한 지인이 살인자로 몰리게 되고, 자살한다. 필립 말로우는 그가 살인을 하지 않았으리라 믿기 때문에, 단순히 이 믿음에 근거해 그 사건을 뒤쫓으려 하고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 한 알코올 중독 소설가를 돌봐달라는 사건이 중첩되며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지금 이렇게 써보니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인물들이 등장하며 사건은 결코 간단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의 다른 사건들도 한 번 보고 들춰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스타일을 팔아먹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결국 그의 스타일을 다시금 음미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사건 도중에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엿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지도 자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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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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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내게는 사랑도 권력이다'라고 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장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사랑에 숨겨진 권력이라는 속성을 기나길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연애라는 달콤함으로 포장 뒤에는 감정과 성조차 관계의 권력에 힘을 미친다. '두 사람이 연애를 했다'는 말은 낭만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듯이 보이지만 그 낭만과 함께 인간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온갖 악력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야한 영화로만 겉포장된 '경마장 가는 길'은 알고 보면 연애의 권력적 속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영화는 거의 가미된 요소 없이 소설을 압축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진정 성인 영화인 셈이다. 성인이 아니면 결코 연애가 얼마나 추악한 자신의 나락의 보여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남자를 이용한 여자와-어쩌면 그녀의 처음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알 수 없다.-그녀에게 이용당한 남자가 복수(?)하는 방식은 몹시 교묘하교 야비하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결코 인간이 인간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평생 영혼의 음악 따윈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왜 우리는 이기적으로 욕망하고 질리고 서로를 할퀴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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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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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평생을 쫓겨온 사람이 쓴 기나긴 서사시이다. 환상으로 도배된 독백들이 피어나고 스러져간다.

나는 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살았는지가 궁금했다. 단지 문학계에 대한 도전이라기엔 너무나도 길고 집요했던 그의 음모. 그리고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의 거대한 울림의 배후가 궁금했다. 결론은 여전하다. 사랑은 과장법으로 생에 기생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그 법칙을 알고 있었고 그 법칙에 신물나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신물나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로 환원된다. 평생 나는 나를 알 수 있을 뿐이므로.

또한 어디에도 진짜 삶은 없다. 그러면서도 삶은 나의 유일한 증거물이다. 젠장맞을 일임에 분명하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느끼는 그때, 그 사람은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는 내게서 아주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와힐리어까지 배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와힐리어로 말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문맥과 아무런 관계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줄곧 찾고 있다. 동류 의식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나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소속된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는 문자들은 어떤 설명, 어떤 대답이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가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여기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해독되려고 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찌꺼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피노체트, CIA, 기업, 고통에 대한 증오를 경계하렴. 조심해야 해. 그런 증오를 품게 되면 소설을 쓰게 될 위험이 있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인간적일 뿐 아니라 역겨워지기까지 할 거야.”




내 시는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 없이 어떻게 시가 진실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부재不在의 기본인 것이다.




말들은 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은 말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쫓아낸다. 엄숙성과 공허와 가면을 빼앗기면 언어는 건강을 위협받는다. 그들의 싱싱한 두 뺨은 빛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건강한 상태를 겁낸다. 건강한 상태가 그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운명의 입장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이름이…… 가명인 셈이오.




‘그’가 거기 있었다. 어떤 사람, 어떤 정체성, 어떤 생명의 덫, 어떤 부재의 존재, 어떤 불구자, 어떤 기형적 존재, 어떤 절단된 신체가, 요컨대 ‘에밀 아자르’가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엾은 녀석, 인간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그는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해져갔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멋진 모습들로 무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명명할 수 없는 고통, 두려움 자체를 자각하지 못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절박성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름 없는 내 공포에다 합벅적인 대의를 부여해야 한다.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우리의 멋진 모습들이 내 공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내 공포는 명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다.




마침내 내 고통은 타당성을 갖게 되고 나는 이 세상에 편입된다. 우리가 잔인한 체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따금 자신이 부식되어 주변에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가루가 되어 스러져버릴 것 같은 상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침식되고 소모되고 내부에서부터 삭아버려 한 줄기 바람만 불어도 가루가 되어 날아가 없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르웨이의 한림원에서 노벨 평화상을 주기 위해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자 팔다리가 없는 사람, 요컨대 지금의 역사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분열증 환자치고 인간은 혐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례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런 정신분열적 상태가 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잃기 위해 도박을 했던 것 같다. 그로서는 비극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비극은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제한당한다는 이유에서 정직성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스무 살의 그는 내면의 부르짖음에 못 이겨 시를 쓴다. 하지만 마지막 절규는 줄곧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절규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 절규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중대한 과오는 그의 안에 갇혀 있었다.




시인이 되는 것 역시 사람들이 줄곧 시의 맛을 음미하기 때문에 시인으로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증세는 일상성과 익숙함이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이 도대체 나와 닮은 구석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였고 나 자신의 부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글을 쓰는 거지? 어째서 누군가는 부르는 거지?” 하고 실체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없는 질문은 무책임한 심리적 요소로 무장된 흉기를 든 손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요. 잘 숨겨야 할 것이 있다면 허무뿐이에요. 나는 아무도 타락시키고 싶지 않아요. 따라서 그 허무를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동안 문학에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단숨에 현실로 빠져나온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단다.




희화화된 존재들에겐 사랑이 허락되거든. 왜냐하면 그들에겐 과장하는 것이 허용되니까.




안녕, 완치된 아자르. 멋지게 위장하며 사시오. 그것이 인간이 따라야 할 법칙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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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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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좋은 책을 읽다가 덮으면 그 책에서 빛이 뻗어나가는 환상을 보곤 했다.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책에서는 성스러운 황금빛이 발하는 것을 나는 종종 경험하곤 했다. 활자들이 모여 소곤대는 소리가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는 다시 그 경험을 했다. 작고 네모지고 가방 속에 넣어 버리면 금방 감추어지는 한 권의 책, 그 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한 권의 책은 내가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더라도 실감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생생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이라는 개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얼마나 풍자적으로 그려놓았는가.


그것은 종종 당근과 채찍이라는 약간 묘한 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옛날에는 주로 나귀와 노새에게 적용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에게도 사용되었고 또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사 년 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머는 병이 찾아왔던 도시에 갑작스레 팔십삼 퍼센트라는 막대한 숫자의 인간들이 백지 투표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백지 투표를 했는가, 가 주요 질문이 될 것이다. 어떤 음모, 주술의 영향력으로 인한 집단 광기라는 뻔한 대답을 주제 사라마구는 넘어선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그들은 지겨워졌기 때문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 각처의 반응은 음모를 먼저 상상하고 대처한다. ‘모든 일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또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만의 독특한 반응 양식을 주제 사라마구는 압도적인 풍자의 정신으로 그린다.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적을 향한 공격은 수사, 수감, 거짓말 탐지기라는 인간만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는 거대한 장벽을 만든다.



그러나 이 집단과 정치에 대한 풍자는 갑자기 방향을 튼다.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명 사건은 하나이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혼자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사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왜 그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한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마 여자와 여자를 추적하던 경정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해도 사실이 되고 마는 법칙 속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의 음모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버릴 백색 투표 질병의 주범으로 낙인을 찍을 여자를 쫓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정은 여자를 쫓으며 겪던 도덕적인 혼란 속에서 어떤 문구를 기억해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그리고 경정에게 어울릴 경고는 그의 삶에 적중한다.


조심하시오, 당신의 혼란은 도덕적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도덕적 혼란은 불안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그 뒤에는 당신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소.


개인이 집단을 만들고 사회가 이룩되는 순간, 진실, 불안한 진실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진실에는 늘 불안이나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에요, 나는 지금 단순히 삶이 덧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작은 불꽃이라서 언제 꺼질지 몰라요,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나는 이 소설을 미국에 대한 풍자로 읽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듯 사건을 꾸미고 그 사건에 멋대로 대응하는 정치 세력이 가장 융성한 국가. 평화롭게 내버려두어도 될 많은 이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강요하고 마치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양 구는 미국의 방식은 이 소설 속 정치가-총리, 대통령, 내무장관- 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허구를 사실로 강요하는 이들의 방식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날카로운 풍자는 소설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 속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바보같이 세상이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렇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결국 바로 이곳, 지금,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


그 사람들이 찾아내든 못 찾아내든, 그 사람들이 옳다고 판명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옳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왔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란 모두가 똑같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화의 이야기꾼이 자신이 묘사한, 비록 여유작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묘사하고 있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는 아예, 아니 아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큰 벽에는 도시의 커다란 항공사진도 걸려 있으니 꼼꼼한 묘사로 한두 페이지를 채울 풍부한 기회가 있다. (중략)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장의 이마에 깊게 파인 불안한 주름들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이튿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시장과 운전사가 다시 만났을 때, 내일 본다는 것이 그 간단한 말과는 달리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암시를 하고 싶은 거요. 질문은 암시가 아닙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게 암시겠지요.


나는 멀리 갔을 뿐 아니라, 이미 도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누가 이렇게 완전히 죽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기가 사는 세상과 늘 전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요.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이런 말 뒤에 이어진 정적은 시간이라는 것이 시계, 그 생각하지 않는 기계와 느낄 줄 모르는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영혼도 없는 작은 기계가 말하는 시간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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