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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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평생을 쫓겨온 사람이 쓴 기나긴 서사시이다. 환상으로 도배된 독백들이 피어나고 스러져간다.

나는 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살았는지가 궁금했다. 단지 문학계에 대한 도전이라기엔 너무나도 길고 집요했던 그의 음모. 그리고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의 거대한 울림의 배후가 궁금했다. 결론은 여전하다. 사랑은 과장법으로 생에 기생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그 법칙을 알고 있었고 그 법칙에 신물나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신물나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로 환원된다. 평생 나는 나를 알 수 있을 뿐이므로.

또한 어디에도 진짜 삶은 없다. 그러면서도 삶은 나의 유일한 증거물이다. 젠장맞을 일임에 분명하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느끼는 그때, 그 사람은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는 내게서 아주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와힐리어까지 배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몹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와힐리어로 말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속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문맥과 아무런 관계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줄곧 찾고 있다. 동류 의식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나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소속된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는 문자들은 어떤 설명, 어떤 대답이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가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여기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해독되려고 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찌꺼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피노체트, CIA, 기업, 고통에 대한 증오를 경계하렴. 조심해야 해. 그런 증오를 품게 되면 소설을 쓰게 될 위험이 있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인간적일 뿐 아니라 역겨워지기까지 할 거야.”




내 시는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 없이 어떻게 시가 진실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부재不在의 기본인 것이다.




말들은 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은 말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쫓아낸다. 엄숙성과 공허와 가면을 빼앗기면 언어는 건강을 위협받는다. 그들의 싱싱한 두 뺨은 빛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건강한 상태를 겁낸다. 건강한 상태가 그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운명의 입장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이름이…… 가명인 셈이오.




‘그’가 거기 있었다. 어떤 사람, 어떤 정체성, 어떤 생명의 덫, 어떤 부재의 존재, 어떤 불구자, 어떤 기형적 존재, 어떤 절단된 신체가, 요컨대 ‘에밀 아자르’가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엾은 녀석, 인간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그는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해져갔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멋진 모습들로 무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명명할 수 없는 고통, 두려움 자체를 자각하지 못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절박성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름 없는 내 공포에다 합벅적인 대의를 부여해야 한다.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우리의 멋진 모습들이 내 공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내 공포는 명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다.




마침내 내 고통은 타당성을 갖게 되고 나는 이 세상에 편입된다. 우리가 잔인한 체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따금 자신이 부식되어 주변에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가루가 되어 스러져버릴 것 같은 상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침식되고 소모되고 내부에서부터 삭아버려 한 줄기 바람만 불어도 가루가 되어 날아가 없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르웨이의 한림원에서 노벨 평화상을 주기 위해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자 팔다리가 없는 사람, 요컨대 지금의 역사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신분열증 환자치고 인간은 혐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례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런 정신분열적 상태가 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잃기 위해 도박을 했던 것 같다. 그로서는 비극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비극은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제한당한다는 이유에서 정직성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스무 살의 그는 내면의 부르짖음에 못 이겨 시를 쓴다. 하지만 마지막 절규는 줄곧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절규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이윽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 절규는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중대한 과오는 그의 안에 갇혀 있었다.




시인이 되는 것 역시 사람들이 줄곧 시의 맛을 음미하기 때문에 시인으로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증세는 일상성과 익숙함이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이 도대체 나와 닮은 구석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였고 나 자신의 부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너는 글을 쓰는 거지? 어째서 누군가는 부르는 거지?” 하고 실체 없는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없는 질문은 무책임한 심리적 요소로 무장된 흉기를 든 손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요. 잘 숨겨야 할 것이 있다면 허무뿐이에요. 나는 아무도 타락시키고 싶지 않아요. 따라서 그 허무를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동안 문학에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단숨에 현실로 빠져나온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단다.




희화화된 존재들에겐 사랑이 허락되거든. 왜냐하면 그들에겐 과장하는 것이 허용되니까.




안녕, 완치된 아자르. 멋지게 위장하며 사시오. 그것이 인간이 따라야 할 법칙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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