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예전에는 좋은 책을 읽다가 덮으면 그 책에서 빛이 뻗어나가는 환상을 보곤 했다.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책에서는 성스러운 황금빛이 발하는 것을 나는 종종 경험하곤 했다. 활자들이 모여 소곤대는 소리가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는 다시 그 경험을 했다. 작고 네모지고 가방 속에 넣어 버리면 금방 감추어지는 한 권의 책, 그 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한 권의 책은 내가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더라도 실감은 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생생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가. 인간에 대하여, 인간이라는 개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얼마나 풍자적으로 그려놓았는가.


그것은 종종 당근과 채찍이라는 약간 묘한 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옛날에는 주로 나귀와 노새에게 적용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에게도 사용되었고 또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사 년 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이 머는 병이 찾아왔던 도시에 갑작스레 팔십삼 퍼센트라는 막대한 숫자의 인간들이 백지 투표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백지 투표를 했는가, 가 주요 질문이 될 것이다. 어떤 음모, 주술의 영향력으로 인한 집단 광기라는 뻔한 대답을 주제 사라마구는 넘어선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그들은 지겨워졌기 때문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 각처의 반응은 음모를 먼저 상상하고 대처한다. ‘모든 일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또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만의 독특한 반응 양식을 주제 사라마구는 압도적인 풍자의 정신으로 그린다.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적을 향한 공격은 수사, 수감, 거짓말 탐지기라는 인간만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면서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이거나 무례한 말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는 거대한 장벽을 만든다.



그러나 이 집단과 정치에 대한 풍자는 갑자기 방향을 튼다.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명 사건은 하나이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혼자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사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왜 그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한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마 여자와 여자를 추적하던 경정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해도 사실이 되고 마는 법칙 속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의 음모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버릴 백색 투표 질병의 주범으로 낙인을 찍을 여자를 쫓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정은 여자를 쫓으며 겪던 도덕적인 혼란 속에서 어떤 문구를 기억해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그리고 경정에게 어울릴 경고는 그의 삶에 적중한다.


조심하시오, 당신의 혼란은 도덕적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도덕적 혼란은 불안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그 뒤에는 당신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소.


개인이 집단을 만들고 사회가 이룩되는 순간, 진실, 불안한 진실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진실에는 늘 불안이나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에요, 나는 지금 단순히 삶이 덧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작은 불꽃이라서 언제 꺼질지 몰라요,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나는 이 소설을 미국에 대한 풍자로 읽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듯 사건을 꾸미고 그 사건에 멋대로 대응하는 정치 세력이 가장 융성한 국가. 평화롭게 내버려두어도 될 많은 이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강요하고 마치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양 구는 미국의 방식은 이 소설 속 정치가-총리, 대통령, 내무장관- 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허구를 사실로 강요하는 이들의 방식에 대한 주제 사라마구의 날카로운 풍자는 소설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실제로 소설 속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바보같이 세상이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렇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결국 바로 이곳, 지금,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


그 사람들이 찾아내든 못 찾아내든, 그 사람들이 옳다고 판명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미 옳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왔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란 모두가 똑같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화의 이야기꾼이 자신이 묘사한, 비록 여유작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묘사하고 있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는 아예, 아니 아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큰 벽에는 도시의 커다란 항공사진도 걸려 있으니 꼼꼼한 묘사로 한두 페이지를 채울 풍부한 기회가 있다. (중략)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장의 이마에 깊게 파인 불안한 주름들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이튿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시장과 운전사가 다시 만났을 때, 내일 본다는 것이 그 간단한 말과는 달리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암시를 하고 싶은 거요. 질문은 암시가 아닙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게 암시겠지요.


나는 멀리 갔을 뿐 아니라, 이미 도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누가 이렇게 완전히 죽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기가 사는 세상과 늘 전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요.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이런 말 뒤에 이어진 정적은 시간이라는 것이 시계, 그 생각하지 않는 기계와 느낄 줄 모르는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영혼도 없는 작은 기계가 말하는 시간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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