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 - Good Will Hu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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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극장에 가려다 실패하고

며칠 전 다운 받아놓은 굿윌헌팅을 봤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내용에 대해 들을 만큼 들어서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봐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며칠 전 새벽에 방송하는 라디오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니 잘못이 아냐 라고 말했다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직도 안 봤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예상보다 좋았다.

맷 데이먼은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순진한 청년이기 보다는 어릴 적 상처 입어 마음의 문을 닫아 건 청년이었다. 아마 더 영화에 공감한 것은 이 때문일 것 같다. 누구나 상처 입고 마니까. 진정한 천재라고 마음에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용이 단순하지 않아 좋았다. 로빈 윌리암스의 과거라든가 맷 데이먼의 천재성을 발견한 교수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또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육체 노동을 하고 싶다면 왜 MIT에서 청소부를 하느냐는 질문도 흥미로웠다.(이 부분도 친구가 예전에 이야기해줬다.) 목동이 되고 싶다는 맷 데이먼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유기하며 이리저리 핑계를 댄다. 세상에, 천재도 아닌데 그런 짓을 하며 자기 삶을 방기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아의 껍질 때문이고 어느 정도 세계의 껍질 때문이다. 그 둘이 적절하게 우리를 옭매고 만다. 껍질이 문제다. 툭 하면 깨지는 껍질이 아니라 신축성도 좋아 이리저리 늘어나는 껍질.

알맹이는 보이지 않고 껍질은 두터우니

삶이 어려울 수밖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우리 탓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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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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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딩 때 처음으로 극장가서 봤던 성인 영화는 터미네이터2다.  엄마아빠가 어디 간다고 오빠랑 둘이 극장 가라고 돈 주고 갔을 때 <나 홀로 집에>인가 <터미네이터2>인가 고민하다 결국 터미네이터2를 보러 갔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으니 그 영화 내용이 하나도 이해가 안 갔다. 눈 앞에서 뭔가 펑펑 터지고 너무 현란해서 완전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그때 역시 엄마아빠가 없던 날 오빠랑 사촌오빠랑 <터미네이터 1>을 보고 완전 충격에 빠졌었다. 그때 처음으로 미래랑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서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구나 하는 것. 텔레비전은 화면이 작아서 이해가 됐는데 극장은 화면이 너무 커서 당시 즐겨보던 <우뢰매>랑은 비교할 수 없이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다시 커서 본 <터미네이터 2>는 감동적이었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봤지만. 

그래서 나는 터미네이터를 좋아한다. 당시 초딩들을 열광시켰던 그 영화. 

오늘 아침에 조조로 보려다 실패하고 낮에 극장에 가서 봤다.  

역시 초딩들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현란했다. (사실 초딩 아닌 내가 봐도 현란하다.) 

이미 어느 정도 정보도 있어서 내용이 엉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터미네이터는 대단하다. 나는 맨날 인간이 뭔지 생각하는 피곤한 사람인데, 결국 기계와의 대비를 통해 터미네이터는 인간성을 이야기한다.  

사실 오늘 나는 인간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의리가 있고 사랑이 있고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지금 세상도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사는 세상은 더욱)

그래도 인간은 꿈을 꾼다. 욕망하고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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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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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전달한다. 도준(원빈)이네 엄마는 왜 그렇게 도준이를 좋아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는 관객이 맞추도록 하나 하나 힌트를 제시한다. 각각의 디테일은 서사와 각각의 인물이 사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위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직소퍼즐 맞추기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어려운 퍼즐 게임은 아니다. 쉽게 들어맞는 퍼즐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나 쉽게 퍼즐을 맞출 수 있다. 대부분 극장에서 일어서는 순간 바로 퍼즐 맞추기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퍼즐을 다 맞춘 뒤 그림을 보자마자 불쾌해진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불쾌한 존재니까. (봉준호는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너네를 좀 들여다봐, 너네라는 불쾌한 존재를! 이라고) 인간이란 이기적 동물이 개체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이며 그래서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모성애조차,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에 다름아니라는 불쾌한 결론으로 우리 함께 달려가자.

사랑은 개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고 좌절을 남기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는 부모가 자식을 망치고 자식이 부모를 망친다는 것을 모자 가정의 두 인물, 엄마와 아들을 통해 보여준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세계가 바로 악무한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아무래도 그 구조를 달아날 수 없다. 거미줄에 걸린 듯 움직일수록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온몸을 옭죈다.




이 영화는 반전 영화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이는 도준이 살인죄로 잡혀간다. 아마 애가 너무 멍청해서 누가 뒤집어씌운 것 같다. 도준이도 그렇게 말한다.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동네의 형사들은 너무 후져 보인다. 살인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던 동네고 그저 도준의 이름이 적힌 골프공이 하나 띡하니 떨어져있었다는 이유로 도준을 범인으로 몰아간다.(도준이 현장을 지나간 것은 맞다. 그 사이 골프공이 떨어졌을 수 있다거나 누군가 그 골프공을 던져놓았을 수도 있다는 그런 암시를 주도록 범행 사건은 처리된다.) 그렇다면 다른 범인을 찾자, 하면 좋겠지만 형사들은 그 사건을 도준의 범행으로 처리한다. 그래서 엄마(김혜자)가 나선다. 우선 도준과 가장 친했던 진구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진구는 도준의 모자람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영화 초반의 골프장 사건은 이런 의심을 부추긴다. 진구가 깨뜨린 백미러는 도준의 소행으로 사건이 처리되고 진구는 싸움 중에도 골프채까지 건지도록 미리 준비한다. 진구는 약은 놈의 전형이다.) 엄마 혼자 찾아간 진구의 후미지고 외딴 집은 그런 진구의 범행을 의심하도록 해준다. 저런 곳에 사는 범인이라면,이라고 생각하도록. 관객은 엄마의 편이 되어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진구의 책상에는 마침 대학민국 과학수사라는 책이 펼쳐져 있고(진구가 범인의 물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혼자서 준비중이라는 듯) 진구네 집에서 엄마는 붉은색 무언가가 묻은 골프채를 발견한다. 관객은 계속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잠이 든 진구와 그의 여자친구를 피해 도망가는 엄마가 혹시 걸릴까봐 안절부절하며. 그러나 진구의 골프채에 묻은 붉은색 흔적은 여자친구의 립스틱으로 밝혀진다. 그래도 의심을 놓을 수 없다. 어쩌면 약은 진구가 준비해놓은 그물은 아닐까. 수사는 그 동네 형사들의 방식대로 진구의 진술과 동영상에 기초해 엉성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구는 그렇게 악랄한 놈은 아니다. 단지 약았을 뿐이다. 진구의 목적은 돈이지 그 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진구는 돈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자신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말도 안 될 위자료를 청구한다. 엄마는 겁이 나서인지 그 돈을 주기로 한다. 진구는 그 보답인지 좀 더 머리를 굴려서인지 엄마에게 정보를 준다. 무식하게 아무나 마음 가는 대로 족치지 말고 피해자(죽은 여고생)의 주변을 조사하라는 정보다. 엄마는 진구의 말을 믿고 주변 조사에 착수한다. 동네 아이들에게 동전을 뿌리며 여고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여고생 친구에게 돈을 뿌려 여고생 핸드폰을 추적한다. 여고생은 막걸리를 좋아하는 치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가장이며 그녀의 핸드폰 속에는 범인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난무한다.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가 찾던 도중 또다른 용의자가 나타난다. 엄마 혼자 어찌해볼 수 없기에 엄마는 또 돈을 뿌려 진구를 행동 대장으로 삼는다. 그들은 본드에 취한 동네 조무래기 고등학생이고 그들로부터 여고생이 쌀떡소녀라는 것을 알아낸다. 쌀을 받고 몸을 팔아야 했던 아이라는 것. 그 여고생의 핸드폰 사진에 그 여고생과 잔 남자들 사진이 모두 있다는 것.

이제 사건은 점점 압축되어 간다. 문제는 핸드폰만 찾으면 될 것 같다. 엄마는 또 돈을 뿌려 핸드폰을 입수한다. 핸드폰은 어이없게도 여고생의 서글픈 일생을 압축하듯 쌀통 속에 들어있다. 그 핸드폰 속에는 그녀와 잔 남자 사진이 가득한다.

점점 용의자선상을 좁혀가는데 도준도 한 몫 한다. 계속 기억을 해내려 애쓰던 도준은 그날밤 한 노인을 봤던 것을 겨우 깨닫는다. 마침 핸드폰 속에는 노인의 사진이 있다. 변태 새끼! 라는 마음 속 비명과 함께 이제 관객은 엄마와 함께 그 노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마침 그 노인은 엄마가 이천 원 주려고 사려던 고물 우산 값을 천 원만 받았던 할아버지다. 가난할지언정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반전인가, 하며 영화를 쫓아가게 된다.

노인은 고물상을 하며 진구처럼 또 혼자 외딴집에서 살고 있다. 진구네 집보다 더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연쇄살인범이 살던 곳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엄마는 노인을 슬슬 구슬린다. 대체 그는 그날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터무니없다. 그는 도준이 범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도준이 그 여학생을 죽였는지 수긍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영화는 그것을 수긍하도록 거미줄을 쳐나갔던 셈이다.

도준에게 엄마가 가르친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지능이 모자라고 그래서 엄마는 누군가 그를 쉽게 보고 놀릴 경우 어떻게 해야하는지만 가르쳤다. 도준은 누군가 자신을 바보라고 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멘트를 달달 외울 만큼 엄마에게 교육받고 자랐다. 여고생은 그날밤 재수없게도 도준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던 셈이다. 바보라고. 심연에서 날아온 돌은 여고생이 도준에게 던졌던 것이고 도준은 역반응으로 돌을 던져 여고생을 맞춘다. 마침 새로운 범인이 잡혀 도준이 풀려났을 때 도준은 말한다. 자기가 생각을 해봤더니 여고생이 피가 많이 나니까 병원에 데려가라고 시체를 위에 올려놓았을 거라는 말도 한다. 결국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키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교육을 주입함으로써, 도준을 살인범으로 만들었다.

도준이 살인을 한 다른 이유는 바보이기 때문인데, 도준을 바보로 만든 것 역시 엄마라는 게 밝혀진다. 도준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한 말, 엄마가 도준이 다섯 살 때 독이 든 박카스를 먹였다는 말로 도준의 지능 저하를 영화는 설명한다. 가난한 가정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라는 심사로 약을 먹여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그러나 그 일가족 자살에 실패한 뒤 도준은 바보가 되었다. 말하자면 부모는 몇 번의 잘못된 계획과 교육으로 자식을 바보에 살인자로 만든다. 말하자면, 영화 초반 엄마는 왜 그다지도 도준을 아끼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도준이 바로 엄마가 만들어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고물상 노인을 죽여 증거를 인멸한다. 어느 정도 우발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 엄마가 내뱉는 말은 섬뜩하다. ‘우리 도준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대체 어떤 근거로?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생각들 속에 산다. 자기 자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자기가 우선시해서 강요한 가치가 최고라는 생각을 끝까지 유지하려 든다. 실제로 엄마의 세계 속에서 노인은 도준의 발톱의 때만도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 체계를 세계에 납득시키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보다 가난하고 그래서 힘없는 이들이다. 영화에서 피해자인 세 사람은 가난하다는 도준네 형편보다 못한 이들이다. 모자에게 살해당한 여고생과 고물상 노인 이외에 범인으로 잡혀들게 된 남자(엄마조차 없는)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자신보다 못한 계급을 갈취하고 죽이며 계속되고 있다. 그 살인이 우발적이건 의도적이건 관계없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영화는 항변한다.

도준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동물이라 엄마에게조차 그것을 숨겼는지 아니면 기피하고 싶은 마음과 기억력 장애로 실제로 범행 사실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은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지독한 가능성만 남겨둔 채 영화는 끝난다. 도준은 엄마가 불지른 고물상에서 침통을 가져와 엄마에게 내민다. 이런 것을 잊어버리면 어떡해, 라는 도준의 대사는 그가 엄마를 증인 인멸을 위해 이용했던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너무나도 나빠서 그저 엄마의 중요한 침통이기에 그런 말을 한지 모른 채 끝이 난다. 그러나 형사의 말은 맞다.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일 망정 제 몸, 제 안위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악마를 품고 있다. 영화를 보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라고 봉준호는 말한다.

봉준호는 시종일관 피해자의 입장에서 동조하며 영화를 보던 관객이 실은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반전 구조를 택했다.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정의로운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우리를 착취할 때 힘없이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더 못한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봉준호는 이와 같은 폭로를 위해 가난에 대한 우리의 심리를 이용한다. 가난이 유발하는 공포 심리는 진구네 집, 여고생 집, 고물상 노인 집에서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작용한다. 우리는 그 가난이 그들의 죄를 입증하는 물증일 수 있다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한다. 각 장면은 그런 심리를 부추기도록 돼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 종반부에 이르면 이 뒤틀린 심리는 죄책감을 유발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그는 가난에 대한 공포 심리를 최대한도로 이끌어낸 뒤 이 심리를 비판한다. 또한 영화는 도준의 가정이 가난하기에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초반 전제를 통해 동정심과 감정이입을 유발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한 감정이나 정의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서사에 따라 적당히 동정하고 적당히 공포하는 속물일 뿐이다. 엄마가 영화 내내 맺힌 속을 풀어준다고 말하던 침은 그녀가 맞아야 할 침이며 또한 이 세계의 구조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가 맞아야 할 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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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와의 대화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만 대화의 시작은 부츠와, 부츠와의 대면을 

혀가 딱딱하게 굳고 침을 삼키기 어려워진다면 

부츠와의 대화를 시도해 

철갑을 두른 듯 검고 푸른 대화를 이어나가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두를 신은 것 같다고 

흑인에 대한 인상을 말해도 좋아 

순서가 바뀌었어 하이힐, 하이힐과 대화를 

맥없이 툭 떨어지는 팔처럼 

깊은 수렁에 빠진 듯 경련하는 다리처럼 

순간 사라져도 좋지만 되돌아와도 좋아 

 

골목이 삼키는 뜨거운 발자국들 

그러나 상관없어 

대화의 미학은 다리에서 시작되지 

부츠, 부츠와의 대화를 

뾰족한 것은 언제나 열쇠와 같다 

나는 대화를 시도해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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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Thirs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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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무수한 돌멩이들에 걸려 넘어지건 그 돌멩이로 무엇을 조각하건, 생의 길은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이 어디로 이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욕망은 성취로 이어지고 만족으로 이어지지만 어떤 욕망은 그 욕망이 야기했다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죄의 길을 걷게 하기도 한다. 왜 욕망이 그런 길을 걷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길을 따라 계속 갈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꿈과 같다. 우리는 가끔 달콤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악몽을 꾸기도 한다. 꿈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현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는 다른 세계다. 비약과 우연, 숨막히는 긴장 등 꿈은 현실 원칙(중력의 작용이라는 물리적 조건이 있음에도 나는 상상하고 꿈꾼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꿈이 기나길게 연장한 것일지도 모른다.)을 뛰어넘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작된 영상을 통해 비약과 우연을 삽시간에 삽입하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한다. 꿈이 진정 짧은 시간(인간이 꿈을 꾸는 시간은 몹시 짧지만 대부분 그 서사는 선명하다) 동안 서사를 완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2시간이 못 되는 동안 생(生)에서 사(死)로 이어지는 길지도 모를 시간을 모두 안으려 한다. 이 시간성 역시 꿈과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꿈의 구조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개개의 꿈마다도 다르다. 그러나 누구나 선호하는 구조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무의식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박찬욱은 욕망의 길을 따라 걷다 악몽과 부딪히는 구조를 선호한다. 박쥐도 마찬가지다. 태주 씨(김옥빈)의 욕망도 상현(송강호)의 욕망도 결국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악몽이란 엄청난 긴장을 일으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후회까지 꿈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후회까지 하다니.
「박쥐」 두 주인공의 욕망은 전혀 다르지만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태주가 심심하고 지루한 인생을 깰 탈출구를 원했다면 상현은 좁은문을 원했고 자기 희생으로 신성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둘은 결국 쾌락으로 만나고 쾌락으로 재가 되어간다.
욕망은 결국 쾌락을 원하는 것이다. 쾌락에 대해 프로이트는 긴장을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죽음충동과 만난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참조) 그런 면에서 그 둘의 욕망이 그 둘을 재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달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툭하고 떨어져 버릴 재에 이르기 위해 그 둘은 악몽의 시간을 지낸다.

박찬욱은 마치 악몽처럼, 영화 속에 가장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담는다. 특히 이번 영화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그것들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은 것 같다.
인물들간의 관계를 보자.
우선 뱀파이어와 신부라는 두 주인공의 관계가 눈에 띈다. 이 조합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꿈속까지 쫓아왔던 <엑소시스트>다. 물론 명확히 말하자면 엑소시스트에 등장한 소녀가 뱀파이어는 아니지만 결국 사탄에 씌인 가녀린 존재로 신부를 시험에 들도록 하며, 태주의 가녀린 육체는 이 소녀를 떠올리도록 한다. 그밖에도 뱀파이어와 신부의 결합은 고전적 뱀파이어 스토리 테오필 고티에의 약 200년 전 단편 소설「죽은 연인」(『뱀파이어 걸작선』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소재다. 이는 곧 선과 악에 대한 질문과 맞닿는다.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구절 ‘내 피를 마시라’는 구절처럼, 성경에선 종종 피에 대한 상징적인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한 영화들도 많다.) 종교에 대한 문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상현 스스로 시험에 들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실험을 자원했다는 점을 통해 쾌락과 성스러움의 문제에 대한 질문도 가능하다. 상현이 따른 길이 좁은 가시밭길이었는지 악마의 속삭임(지나친 희생에 대한 관념은 어쩌면 희생이라는 악마가 먹이를 얻기 위한 유혹의 속삭임일 수 있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 -팡세, 455(-863)’)
태주와 상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유혹하는 이브와 아담이라는 자극적인 주제 역시 끌어올 수 있다. 강우를 강에 빠뜨려 죽인 뒤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모습과도 같다. 태주는 동정심과 인간적 감정을 이용해 상현을 죄의 굴레로 끌어들인다.
이상하고 지독한 애정을 가진 엄마와 저능아 아들, 요부 기질을 가진 듯한 부인이라는 결합, 게다가 그들 가정은 버려진 딸이 며느리가 되는 극도로 신경증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마지막으로 상현이 죽인 그의 눈먼 스승을 통해, 사제 지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부인 스승은 보고 싶다는 정념을 버리지 못하고, 상현은 결국 그를 찔러 죽이며 사제 지간도 지독하게 강렬하고 기묘한 관계로 그려진다.
 

이러한 자극적인 관계들은 강렬한 영상(개인적 환상에서 최악이라 평가될만한)을 덧입는다.  
우선,
온몸에 고름이 터져나올 듯한 종기가 돋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병, 그 병이 심해지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역시 끔찍하다. (영화 <미션>에서 신부님(제레미 아이언스)이 오보에로 성스러움을 실현했을 때의 감동을 역전시키듯 상현은 리코더를 불다 그 구멍으로 피가 튄다.)
맨발로 새벽 거리를 뛰는 여자(그녀의 가녀린 발목), 서로의 팔목에서 피를 빠는 남녀, 이를 지켜보는 시선(그들의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과연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하는 의문(카스테라 이야기를 했던 극 초반의 남성과 강우의 어머니 라 여사)은 관음증을 이중으로 건드리며 각 장면을 훨씬 더 자극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귀를 찢는 낚시바늘까지 나온다. 락앤락에 피를 담아 쪽쪽 빨아먹기도 한다. 이 정도면 자극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컬렉션의 조합은 너무 쥐어짜는 느낌이 강하다. 한번 볼래, 어디까지 가는지 하는 느낌. 그래서 한번 보지 뭐, 하고 싱거워진다. 원래 판을 깔아주면 하던 미친짓도 하기 싫어진다. 이미 판이 너무 깔려서 아무리 미친 짓을 해도 그만 그런가보다 하게 된다.
게다가 태주의 캐릭터, 이상하게 냉소적이며 아무런 활력도 없다가 갑자기 쾌활하고 순진무구하며 잔인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순수하게 재미와 호기심만을 위한 충동에 휩싸인 아이 같은 캐릭터도 새롭지 않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자주 보아왔기 때문일까?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워, 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좀 재미가 덜했다. (그래도 김옥빈이 연기는 잘 했다.)
마지막으로 사디즘적인 욕구를 강렬하게 표출하는 각종 물고 찢고 죽이는 장면 외에, 상현이 나병 환자인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마지막까지 그가 목숨을 포기하고 죽겠다고 결심한 직후에도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지고 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신은 없다는 것을 당당히 그들에게 전시하기 위해서인가? 굳이 이런저런 해석도 가능할 테지만, 이미 앞에서 충분히 자극의 압박을 했기에 멍해지고 만다.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판타지(강렬한 영상)와 현실(인물간 관계-특히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관계-의 찌질함의 극치, 갑자기 튀어나오는 현실적인 욕설)의 기묘한 조합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기묘하게 뒤틀려있고 생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역겨워 보일 때까지 그 집착을 드러낸다. 현실에서 감추고자 했을지도 모를 것들을 그는 까발린다. 그리고 즐기라고 한다. (관음증이란 이런 것일까?)


박찬욱의 영화 속에서 환상과 현실은 다르게 만난다. 아마 박찬욱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환상, 관계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부서지지만(상현이 태주에게 내뱉는 “이 씨발년아” 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없다. 태주가 상현에게 평온한 가정에 나타나서 가정을 망쳐놨다는 비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잘 되면 내탓, 잘못되면 남탓인데, 이건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신 새디즘적인 환상과 악몽 같은 영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벌여나간다. 대부분의 영화가 소망 충족이라는 형태로 판타지를 전시한다면, 박찬욱은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강을 건넌다.  
그래서인지 박찬욱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대하게 된다. 그 기대 심리의 이면에는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심사를 뒤틀어놓을까 하는 그런 작용이 있다. 사람은 이런 기묘한 데에도 기대를 품게 된다. 박찬욱은 관객의 이런 뒤틀린 기대 심리를 주무른다. (<박쥐>를 보며 때때로 그가 그 기대 심리를 응시하고 그 시선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박찬욱은 욕망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우리를 어렵게 하고 우리를 미칠듯이 괴롭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괴롭히는 방식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야기한다. 누구나 모순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단정하고 깔끔한 삶을 살기에 생은 길고 길며 우리가 원하는 스펙트럼은 너무 넓다. 그래서일까? 그는 욕망과 불쾌 사이의 줄 위에서 놀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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