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무수한 돌멩이들에 걸려 넘어지건 그 돌멩이로 무엇을 조각하건, 생의 길은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이 어디로 이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욕망은 성취로 이어지고 만족으로 이어지지만 어떤 욕망은 그 욕망이 야기했다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죄의 길을 걷게 하기도 한다. 왜 욕망이 그런 길을 걷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길을 따라 계속 갈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꿈과 같다. 우리는 가끔 달콤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악몽을 꾸기도 한다. 꿈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현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는 다른 세계다. 비약과 우연, 숨막히는 긴장 등 꿈은 현실 원칙(중력의 작용이라는 물리적 조건이 있음에도 나는 상상하고 꿈꾼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꿈이 기나길게 연장한 것일지도 모른다.)을 뛰어넘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작된 영상을 통해 비약과 우연을 삽시간에 삽입하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한다. 꿈이 진정 짧은 시간(인간이 꿈을 꾸는 시간은 몹시 짧지만 대부분 그 서사는 선명하다) 동안 서사를 완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2시간이 못 되는 동안 생(生)에서 사(死)로 이어지는 길지도 모를 시간을 모두 안으려 한다. 이 시간성 역시 꿈과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꿈의 구조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개개의 꿈마다도 다르다. 그러나 누구나 선호하는 구조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무의식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박찬욱은 욕망의 길을 따라 걷다 악몽과 부딪히는 구조를 선호한다. 박쥐도 마찬가지다. 태주 씨(김옥빈)의 욕망도 상현(송강호)의 욕망도 결국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악몽이란 엄청난 긴장을 일으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후회까지 꿈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후회까지 하다니.
「박쥐」 두 주인공의 욕망은 전혀 다르지만 그들을 악몽으로 인도한다. 태주가 심심하고 지루한 인생을 깰 탈출구를 원했다면 상현은 좁은문을 원했고 자기 희생으로 신성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둘은 결국 쾌락으로 만나고 쾌락으로 재가 되어간다.
욕망은 결국 쾌락을 원하는 것이다. 쾌락에 대해 프로이트는 긴장을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죽음충동과 만난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참조) 그런 면에서 그 둘의 욕망이 그 둘을 재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달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툭하고 떨어져 버릴 재에 이르기 위해 그 둘은 악몽의 시간을 지낸다.

박찬욱은 마치 악몽처럼, 영화 속에 가장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담는다. 특히 이번 영화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그것들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은 것 같다.
인물들간의 관계를 보자.
우선 뱀파이어와 신부라는 두 주인공의 관계가 눈에 띈다. 이 조합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꿈속까지 쫓아왔던 <엑소시스트>다. 물론 명확히 말하자면 엑소시스트에 등장한 소녀가 뱀파이어는 아니지만 결국 사탄에 씌인 가녀린 존재로 신부를 시험에 들도록 하며, 태주의 가녀린 육체는 이 소녀를 떠올리도록 한다. 그밖에도 뱀파이어와 신부의 결합은 고전적 뱀파이어 스토리 테오필 고티에의 약 200년 전 단편 소설「죽은 연인」(『뱀파이어 걸작선』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소재다. 이는 곧 선과 악에 대한 질문과 맞닿는다.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구절 ‘내 피를 마시라’는 구절처럼, 성경에선 종종 피에 대한 상징적인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한 영화들도 많다.) 종교에 대한 문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상현 스스로 시험에 들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실험을 자원했다는 점을 통해 쾌락과 성스러움의 문제에 대한 질문도 가능하다. 상현이 따른 길이 좁은 가시밭길이었는지 악마의 속삭임(지나친 희생에 대한 관념은 어쩌면 희생이라는 악마가 먹이를 얻기 위한 유혹의 속삭임일 수 있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진리만을 따르면 따를수록 그만큼 더 위험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 -팡세, 455(-863)’)
태주와 상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유혹하는 이브와 아담이라는 자극적인 주제 역시 끌어올 수 있다. 강우를 강에 빠뜨려 죽인 뒤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모습과도 같다. 태주는 동정심과 인간적 감정을 이용해 상현을 죄의 굴레로 끌어들인다.
이상하고 지독한 애정을 가진 엄마와 저능아 아들, 요부 기질을 가진 듯한 부인이라는 결합, 게다가 그들 가정은 버려진 딸이 며느리가 되는 극도로 신경증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마지막으로 상현이 죽인 그의 눈먼 스승을 통해, 사제 지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부인 스승은 보고 싶다는 정념을 버리지 못하고, 상현은 결국 그를 찔러 죽이며 사제 지간도 지독하게 강렬하고 기묘한 관계로 그려진다.
 

이러한 자극적인 관계들은 강렬한 영상(개인적 환상에서 최악이라 평가될만한)을 덧입는다.  
우선,
온몸에 고름이 터져나올 듯한 종기가 돋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병, 그 병이 심해지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역시 끔찍하다. (영화 <미션>에서 신부님(제레미 아이언스)이 오보에로 성스러움을 실현했을 때의 감동을 역전시키듯 상현은 리코더를 불다 그 구멍으로 피가 튄다.)
맨발로 새벽 거리를 뛰는 여자(그녀의 가녀린 발목), 서로의 팔목에서 피를 빠는 남녀, 이를 지켜보는 시선(그들의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과연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하는 의문(카스테라 이야기를 했던 극 초반의 남성과 강우의 어머니 라 여사)은 관음증을 이중으로 건드리며 각 장면을 훨씬 더 자극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귀를 찢는 낚시바늘까지 나온다. 락앤락에 피를 담아 쪽쪽 빨아먹기도 한다. 이 정도면 자극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컬렉션의 조합은 너무 쥐어짜는 느낌이 강하다. 한번 볼래, 어디까지 가는지 하는 느낌. 그래서 한번 보지 뭐, 하고 싱거워진다. 원래 판을 깔아주면 하던 미친짓도 하기 싫어진다. 이미 판이 너무 깔려서 아무리 미친 짓을 해도 그만 그런가보다 하게 된다.
게다가 태주의 캐릭터, 이상하게 냉소적이며 아무런 활력도 없다가 갑자기 쾌활하고 순진무구하며 잔인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순수하게 재미와 호기심만을 위한 충동에 휩싸인 아이 같은 캐릭터도 새롭지 않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자주 보아왔기 때문일까?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워, 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좀 재미가 덜했다. (그래도 김옥빈이 연기는 잘 했다.)
마지막으로 사디즘적인 욕구를 강렬하게 표출하는 각종 물고 찢고 죽이는 장면 외에, 상현이 나병 환자인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마지막까지 그가 목숨을 포기하고 죽겠다고 결심한 직후에도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지고 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신은 없다는 것을 당당히 그들에게 전시하기 위해서인가? 굳이 이런저런 해석도 가능할 테지만, 이미 앞에서 충분히 자극의 압박을 했기에 멍해지고 만다.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판타지(강렬한 영상)와 현실(인물간 관계-특히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관계-의 찌질함의 극치, 갑자기 튀어나오는 현실적인 욕설)의 기묘한 조합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기묘하게 뒤틀려있고 생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역겨워 보일 때까지 그 집착을 드러낸다. 현실에서 감추고자 했을지도 모를 것들을 그는 까발린다. 그리고 즐기라고 한다. (관음증이란 이런 것일까?)


박찬욱의 영화 속에서 환상과 현실은 다르게 만난다. 아마 박찬욱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환상, 관계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부서지지만(상현이 태주에게 내뱉는 “이 씨발년아” 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없다. 태주가 상현에게 평온한 가정에 나타나서 가정을 망쳐놨다는 비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잘 되면 내탓, 잘못되면 남탓인데, 이건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신 새디즘적인 환상과 악몽 같은 영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벌여나간다. 대부분의 영화가 소망 충족이라는 형태로 판타지를 전시한다면, 박찬욱은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강을 건넌다.  
그래서인지 박찬욱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대하게 된다. 그 기대 심리의 이면에는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심사를 뒤틀어놓을까 하는 그런 작용이 있다. 사람은 이런 기묘한 데에도 기대를 품게 된다. 박찬욱은 관객의 이런 뒤틀린 기대 심리를 주무른다. (<박쥐>를 보며 때때로 그가 그 기대 심리를 응시하고 그 시선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박찬욱은 욕망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우리를 어렵게 하고 우리를 미칠듯이 괴롭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괴롭히는 방식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야기한다. 누구나 모순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단정하고 깔끔한 삶을 살기에 생은 길고 길며 우리가 원하는 스펙트럼은 너무 넓다. 그래서일까? 그는 욕망과 불쾌 사이의 줄 위에서 놀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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