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전달한다. 도준(원빈)이네 엄마는 왜 그렇게 도준이를 좋아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는 관객이 맞추도록 하나 하나 힌트를 제시한다. 각각의 디테일은 서사와 각각의 인물이 사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위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직소퍼즐 맞추기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어려운 퍼즐 게임은 아니다. 쉽게 들어맞는 퍼즐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나 쉽게 퍼즐을 맞출 수 있다. 대부분 극장에서 일어서는 순간 바로 퍼즐 맞추기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퍼즐을 다 맞춘 뒤 그림을 보자마자 불쾌해진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불쾌한 존재니까. (봉준호는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너네를 좀 들여다봐, 너네라는 불쾌한 존재를! 이라고) 인간이란 이기적 동물이 개체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이며 그래서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모성애조차,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에 다름아니라는 불쾌한 결론으로 우리 함께 달려가자.
사랑은 개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고 좌절을 남기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는 부모가 자식을 망치고 자식이 부모를 망친다는 것을 모자 가정의 두 인물, 엄마와 아들을 통해 보여준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세계가 바로 악무한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아무래도 그 구조를 달아날 수 없다. 거미줄에 걸린 듯 움직일수록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온몸을 옭죈다.
이 영화는 반전 영화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이는 도준이 살인죄로 잡혀간다. 아마 애가 너무 멍청해서 누가 뒤집어씌운 것 같다. 도준이도 그렇게 말한다.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동네의 형사들은 너무 후져 보인다. 살인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던 동네고 그저 도준의 이름이 적힌 골프공이 하나 띡하니 떨어져있었다는 이유로 도준을 범인으로 몰아간다.(도준이 현장을 지나간 것은 맞다. 그 사이 골프공이 떨어졌을 수 있다거나 누군가 그 골프공을 던져놓았을 수도 있다는 그런 암시를 주도록 범행 사건은 처리된다.) 그렇다면 다른 범인을 찾자, 하면 좋겠지만 형사들은 그 사건을 도준의 범행으로 처리한다. 그래서 엄마(김혜자)가 나선다. 우선 도준과 가장 친했던 진구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진구는 도준의 모자람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영화 초반의 골프장 사건은 이런 의심을 부추긴다. 진구가 깨뜨린 백미러는 도준의 소행으로 사건이 처리되고 진구는 싸움 중에도 골프채까지 건지도록 미리 준비한다. 진구는 약은 놈의 전형이다.) 엄마 혼자 찾아간 진구의 후미지고 외딴 집은 그런 진구의 범행을 의심하도록 해준다. 저런 곳에 사는 범인이라면,이라고 생각하도록. 관객은 엄마의 편이 되어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진구의 책상에는 마침 대학민국 과학수사라는 책이 펼쳐져 있고(진구가 범인의 물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혼자서 준비중이라는 듯) 진구네 집에서 엄마는 붉은색 무언가가 묻은 골프채를 발견한다. 관객은 계속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잠이 든 진구와 그의 여자친구를 피해 도망가는 엄마가 혹시 걸릴까봐 안절부절하며. 그러나 진구의 골프채에 묻은 붉은색 흔적은 여자친구의 립스틱으로 밝혀진다. 그래도 의심을 놓을 수 없다. 어쩌면 약은 진구가 준비해놓은 그물은 아닐까. 수사는 그 동네 형사들의 방식대로 진구의 진술과 동영상에 기초해 엉성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구는 그렇게 악랄한 놈은 아니다. 단지 약았을 뿐이다. 진구의 목적은 돈이지 그 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진구는 돈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자신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말도 안 될 위자료를 청구한다. 엄마는 겁이 나서인지 그 돈을 주기로 한다. 진구는 그 보답인지 좀 더 머리를 굴려서인지 엄마에게 정보를 준다. 무식하게 아무나 마음 가는 대로 족치지 말고 피해자(죽은 여고생)의 주변을 조사하라는 정보다. 엄마는 진구의 말을 믿고 주변 조사에 착수한다. 동네 아이들에게 동전을 뿌리며 여고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여고생 친구에게 돈을 뿌려 여고생 핸드폰을 추적한다. 여고생은 막걸리를 좋아하는 치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가장이며 그녀의 핸드폰 속에는 범인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난무한다.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가 찾던 도중 또다른 용의자가 나타난다. 엄마 혼자 어찌해볼 수 없기에 엄마는 또 돈을 뿌려 진구를 행동 대장으로 삼는다. 그들은 본드에 취한 동네 조무래기 고등학생이고 그들로부터 여고생이 쌀떡소녀라는 것을 알아낸다. 쌀을 받고 몸을 팔아야 했던 아이라는 것. 그 여고생의 핸드폰 사진에 그 여고생과 잔 남자들 사진이 모두 있다는 것.
이제 사건은 점점 압축되어 간다. 문제는 핸드폰만 찾으면 될 것 같다. 엄마는 또 돈을 뿌려 핸드폰을 입수한다. 핸드폰은 어이없게도 여고생의 서글픈 일생을 압축하듯 쌀통 속에 들어있다. 그 핸드폰 속에는 그녀와 잔 남자 사진이 가득한다.
점점 용의자선상을 좁혀가는데 도준도 한 몫 한다. 계속 기억을 해내려 애쓰던 도준은 그날밤 한 노인을 봤던 것을 겨우 깨닫는다. 마침 핸드폰 속에는 노인의 사진이 있다. 변태 새끼! 라는 마음 속 비명과 함께 이제 관객은 엄마와 함께 그 노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마침 그 노인은 엄마가 이천 원 주려고 사려던 고물 우산 값을 천 원만 받았던 할아버지다. 가난할지언정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반전인가, 하며 영화를 쫓아가게 된다.
노인은 고물상을 하며 진구처럼 또 혼자 외딴집에서 살고 있다. 진구네 집보다 더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연쇄살인범이 살던 곳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엄마는 노인을 슬슬 구슬린다. 대체 그는 그날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터무니없다. 그는 도준이 범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도준이 그 여학생을 죽였는지 수긍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영화는 그것을 수긍하도록 거미줄을 쳐나갔던 셈이다.
도준에게 엄마가 가르친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지능이 모자라고 그래서 엄마는 누군가 그를 쉽게 보고 놀릴 경우 어떻게 해야하는지만 가르쳤다. 도준은 누군가 자신을 바보라고 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멘트를 달달 외울 만큼 엄마에게 교육받고 자랐다. 여고생은 그날밤 재수없게도 도준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던 셈이다. 바보라고. 심연에서 날아온 돌은 여고생이 도준에게 던졌던 것이고 도준은 역반응으로 돌을 던져 여고생을 맞춘다. 마침 새로운 범인이 잡혀 도준이 풀려났을 때 도준은 말한다. 자기가 생각을 해봤더니 여고생이 피가 많이 나니까 병원에 데려가라고 시체를 위에 올려놓았을 거라는 말도 한다. 결국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키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교육을 주입함으로써, 도준을 살인범으로 만들었다.
도준이 살인을 한 다른 이유는 바보이기 때문인데, 도준을 바보로 만든 것 역시 엄마라는 게 밝혀진다. 도준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한 말, 엄마가 도준이 다섯 살 때 독이 든 박카스를 먹였다는 말로 도준의 지능 저하를 영화는 설명한다. 가난한 가정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라는 심사로 약을 먹여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그러나 그 일가족 자살에 실패한 뒤 도준은 바보가 되었다. 말하자면 부모는 몇 번의 잘못된 계획과 교육으로 자식을 바보에 살인자로 만든다. 말하자면, 영화 초반 엄마는 왜 그다지도 도준을 아끼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도준이 바로 엄마가 만들어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고물상 노인을 죽여 증거를 인멸한다. 어느 정도 우발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 엄마가 내뱉는 말은 섬뜩하다. ‘우리 도준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대체 어떤 근거로?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생각들 속에 산다. 자기 자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자기가 우선시해서 강요한 가치가 최고라는 생각을 끝까지 유지하려 든다. 실제로 엄마의 세계 속에서 노인은 도준의 발톱의 때만도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 체계를 세계에 납득시키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보다 가난하고 그래서 힘없는 이들이다. 영화에서 피해자인 세 사람은 가난하다는 도준네 형편보다 못한 이들이다. 모자에게 살해당한 여고생과 고물상 노인 이외에 범인으로 잡혀들게 된 남자(엄마조차 없는)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자신보다 못한 계급을 갈취하고 죽이며 계속되고 있다. 그 살인이 우발적이건 의도적이건 관계없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영화는 항변한다.
도준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동물이라 엄마에게조차 그것을 숨겼는지 아니면 기피하고 싶은 마음과 기억력 장애로 실제로 범행 사실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은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지독한 가능성만 남겨둔 채 영화는 끝난다. 도준은 엄마가 불지른 고물상에서 침통을 가져와 엄마에게 내민다. 이런 것을 잊어버리면 어떡해, 라는 도준의 대사는 그가 엄마를 증인 인멸을 위해 이용했던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너무나도 나빠서 그저 엄마의 중요한 침통이기에 그런 말을 한지 모른 채 끝이 난다. 그러나 형사의 말은 맞다.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일 망정 제 몸, 제 안위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악마를 품고 있다. 영화를 보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라고 봉준호는 말한다.
봉준호는 시종일관 피해자의 입장에서 동조하며 영화를 보던 관객이 실은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반전 구조를 택했다.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정의로운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우리를 착취할 때 힘없이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더 못한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봉준호는 이와 같은 폭로를 위해 가난에 대한 우리의 심리를 이용한다. 가난이 유발하는 공포 심리는 진구네 집, 여고생 집, 고물상 노인 집에서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작용한다. 우리는 그 가난이 그들의 죄를 입증하는 물증일 수 있다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한다. 각 장면은 그런 심리를 부추기도록 돼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 종반부에 이르면 이 뒤틀린 심리는 죄책감을 유발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그는 가난에 대한 공포 심리를 최대한도로 이끌어낸 뒤 이 심리를 비판한다. 또한 영화는 도준의 가정이 가난하기에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초반 전제를 통해 동정심과 감정이입을 유발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한 감정이나 정의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서사에 따라 적당히 동정하고 적당히 공포하는 속물일 뿐이다. 엄마가 영화 내내 맺힌 속을 풀어준다고 말하던 침은 그녀가 맞아야 할 침이며 또한 이 세계의 구조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가 맞아야 할 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