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 얼굴 없는 가면
루서 링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심산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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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극도의 혼란이 뒤섞인 존재이다. 사탄은 신학이 만들어낸 존재이며, 실용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학의 산물이며, 기묘하게 얽힌 회화적 전통의 산물이다. … 그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추상적 존재에 지나지 않으므로 얼굴을 가질 수 없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인물”이라는 확신감을 주지 못한 그는 하나의 사악한 힘으로 신빙성 있게 등장할 수도 없다. 그는 가면 밖에 없는 인간이다.」

미술에 있어서 도상학은 어떤 정해진 형태이고 상징이면서 어떻게 보면 약속이기도 하다. 도상학으로 우리는 그림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림안의 무수히 엉켜있는 인물들 중 누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다. 종교화 특히 기독교 회화에 있어서 도상학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림이고 뭐고 관심도 없고, 도상학? 그거 뭐지? 하는 사람일지라도 의외로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깊이 들어와 있다.

어떤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선한 눈동자에 적당히 마른 몸, 수염을 기르고 있는 남자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예수이며,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노인은 십중팔구 천국의 문지기 베드로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주로 파란색 옷을 입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의 긴 머리는 창녀의 허영심을 상징한다.(비록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하얀 옷에 날개를 달고 있는 백인이 천사라면, 까만 피부에 뿔을 달고 있는 험악한 인상을 한 인물은 악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악마 : 얼굴 없는 가면’은 악마는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까만 피부, 험악한 인상, 뿔, 갈고리 혹은 삼지창, 가늘고 긴 꼬리 등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그동안 많았지만, 사실 그것은 악마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예수와 마리아 등은 시각적으로 하나의 약속된 모양새를 만들어왔지만, 악마만큼은 도무지 형태를 짐작할 수도, 표현할 길 없었던 인간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의로 차용한 것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난 수세기동안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악마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무척 복잡한 문제이며, 과연 악마는 실재하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악마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악마는 루시퍼라 불리는 천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시퍼는  신에 의해 천국에서 추방당해 악마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루시퍼는 원래 ‘빛을 가져 오다’란 의미의 새벽별, 즉 금성을 뜻하는 단어였다는 것이다. 새벽별이 사탄이 된 것은 이사야서 14:12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그대는 어찌 하여 천국에서 추락했는가. 오 루시퍼, 아침의 아들이여!” 이 구절은 한 독재자 왕이 욕심을 부리다가 실패하고 지하세계로 떨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로, 독재자 왕이 빛나는 별로 은유되어 루시퍼가 되고, 독재자 왕이 악마와 동일시된 후 루시퍼는 악마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악마의 기원을 논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악마 역시 세상을 창조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꽤나 골치 아픈 딜레마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으니 악마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을 인정한다면 신은 악을 창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신학적 논쟁 사이에 원래는 적대자를 의미했던 사탄이란 단어는 악마와 동일어가 됐고, 원래 악이 아니었으나 악을 선택한 반란천사를 등장시켜 루시퍼와 악마, 사탄이 거의 같은 의미가 됐다.

악마의 생김새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알려진 것은 그리스의 목신 판, 사티로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나마 알려진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악마는 결국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뿔과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가진 악마는 그리스 신화의 목신과 유사하고, 삼지창은 포세이돈이 들었던 것과 같지만, 악마의 모습은 사실 어느 시기, 어느 때라도 정해진 모습은 없었다. 어느 그림에서는 이집트의 신과 닮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어느 조각상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어느 때는 천사와 별다를 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김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습과 상관없이 미술에서 표현된 악마의 역할이며, 그 역할이 결국 악마가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악마는 실재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결론짓고 있다.

오늘날에는 악마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지만, 사실 악마는 기독교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기독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확고하며, 기독교에서 악마의 역할은 창조주, 천사, 그리고 죄인과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진다. 미술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힘든 창조주 대신 천사 또는 그리스도가 악마의 상대자로 나선다. 이때 악마는 그리스도의 유혹자, 신의 적대자, 천사에게 패배해 지옥으로 쫓겨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지옥으로 쫓겨난 악마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을 관장하며 타락한 죄인을 벌주고 고통을 준다. 여기서 악마는 신의 대리인과도 같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신 대신 죄인에게 벌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악마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용, 뿔, 꼬리 등 어느 하나 현실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악마가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악마가 죄인을 다루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에서 이단을 처벌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갈고리, 화형, 뼈를 으스러뜨리는 기계 등에 의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은 이단을 고문하고 처형하던 모습 그대로이다. 지옥이라 묘사된 그림은 결국 현실에서 벌어진 실제 현장이었고, 생생하다. 교회는 이단자를 악마라 했으며, 서로 반목하던 세력들은 서로를 악마라 지칭했다. 악마는 누구인가? 악마는 뚜렷하게 지어진 형태가 없는 것처럼 그 존재 역시 때에 따라 달라지고 다르게 규정되었다.

커다란 종교화이든 개인 소장의 작은 그림에서든 악마는 늘 존재한다. 그림 속에서 악마는 뚜렷한 특징도 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지고, 어디에서도 그 존재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주변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는 악마는 자체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반대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존재, 그것을 규정할 권력을 지닌 사람에 의해 정체가 결정되는 특이한 존재라는 것의 반영이다.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악마도 실재하지 않는다. … 역사적으로 악마는 자기가 반대하는 누구에게나 악마라는 딱지를 붙이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 올 수 있는 도구였다. 그것이 악마의 용도였다. … 항상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 얼굴 없는 존재, 오로지 가면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악마는 가장 순수한 타자(他者)였다. … 그것은 악마성이라기보다는 인간성 자체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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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콘서트 2 - 우리 동네 집값의 비밀에서 사무실 정치학의 논리까지, 불확실한 현실에 대처하는 경제학의 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2
팀 하포드 지음, 이진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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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 하면 입만 아프지만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책이란 것은 죄다 토익, 토플 영어책 아니면 실용서다. 돈 벌게 해 주는 책. 회사에서 살아나는 법. 주식 잘 하는 법. 한 마디로 우리 모두 부자 돼서 잘 먹고 잘 살아 봅시다! 이런 현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것조차도 이젠 진부해지려고 하지만, 독자의 이런 선택은 한 편으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발에 땀나도록 뛰어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내 주머니 털어 사는 책, 이왕이면 다시 내 주머니를 채워 줄 책을 사겠다는 건 독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멋진 여자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과 멋진 남자가 평범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어느 것이 비합리적일까? 전 재산을 날리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합리적인 일에 매달릴까? 땅 값도 싸고 공기도 좋은 시골 대신 왜 그렇게 사람들은 답답하고 땅값도 비싼데다 자칫 위험하기까지 한 도시로 모여드는가? 세상은 종종 이상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게 아니다. 그건 다 합리적인 인간의 선택이다.

사실 난 실용서고 이론서고 모른다. 어디까지가 실용이고, 뭐가 이론인지 그런 거 알만한 깜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고, 특히나 경제학이라면 더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경제학 콘서트 2’를 실용서를 가장한 이론서라 감히 지칭하느냐 하면 이 책은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합리적인 인간이고, 현재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실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각종 예를 들어 여러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중을 위한 쉬운 이론서일 뿐 삶을 살면서 활용할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자의 의도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경제학, 배웠으면 써먹어라!”라는 카피를 달고 전작 ‘경제학 콘서트’의 실전응용편이라는 이 책은, 실전응용이라기 보다는 원제 ‘The Logic of Life’ 그대로 우리의 생활이 알게 모르게 꽤나 논리적이라는 걸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집안일을 하고 남자는 돈을 버는 건 분화가 가져오는 효율성에 대해 합리적인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다. 도시에는 항상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이유, 골드 미스가 인기가 없고, 멋진 여성이 평범한 남성과 결혼하는 것도 모두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한 표가 대통령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지난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것도 미안하지만 유권자의 합리적인 무지에 근거한 결과였다.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는 끄덕이겠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이 책은 절대 실용서가 아니다. “써먹어라!!” 라고 말하지만, 어디에?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내가 현재 삭막한 도시에 살고 있는 이유는 알았지만, 이 책이 얘기한 데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면 나는 더 큰 도시에 가야 한다. 하지만 그곳은 멋진 싱글 여성이 득실거리고 있는 곳이기에 나 같은 평범한 노처녀는 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다. 그 멋지고 멋진 싱글 여성은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평범한 남성과 결혼할 것이기에. 그리하여 더 큰 도시에서 성공이라도 하겠다고 미국의 뉴욕이라도 갔다가는 나는 유색인종으로서 인종차별까지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부당하지만 합리적이다.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당신은 몇 명의 자녀가 있습니까? 당신의 수입은 얼마 입니까? 당신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런 거 심각하게 생각 안 하고 그럭저럭 살고는 있는데 가끔 어떤 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구요? 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쉬운 경제학 이론서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난해한 내용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문장, 앞 뒤 문맥상 맞지 않는 문장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번역을 논할 입장은 아니지만, 번역에 있어서도 좀 더 합리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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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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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나온 시간들을 뚝뚝 잘라 그 당시를 대표적인 단어 몇 개로 이 시대를 평가하고는 한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고 불린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 문예가 크게 부흥했던 때를 르네상스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또 근대의 어느 시기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라고도 한다.

우리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를 숭상한 성리학의 시대였고, 왕이 다스렸지만 선비, 즉 사대부가 지배했던 시대였다고 일컬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책 ‘조선이 버린 여인들’을 보자면 조선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시대이다. 여성에게만 가혹했고, 하층민일수록 가혹함은 더 했다. 법은 있으되 소용이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긴 뭐.. 이것이 조선시대만의 일도 아니니, 21세기인 현재도 먼 훗날 어찌 기록될 지 그것은 역사만이 알 일이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은 자신들에게 가혹했던 조선을 몸으로 견뎌내다 사라진 여인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이었고, 노비, 기생, 첩이었기에 그녀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조선이 얼마나 이 여인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했나 하는 것은 그녀들의 삶을 비극으로 종결시킨 그 사건들이란 것이 오늘날에는 가십거리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그칠 간통이나 연분의 죄였고, 더욱 의아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강간 등 오히려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피해자가 제일 먼저 추국 당했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제목 그대로 조선은 그녀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 버림은 당사자는 억울하고 원통했으나 시대는 아무렇지 않게 용인했고, 그것이 당연하다 인정했다.

왜 시대는 그것을 용인하고, 당연하다 하는가. 남녀 간에 연분이 나고 간통이니 강간이니 하는 것은 분명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으며 때로는 쌍방이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거늘 어째서 한쪽만 유달리 억울했는가. 남성들은 조사조차 받지 않거나, 장 몇 대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얼마든지 관직에도 나가도 불편 없이 살았거늘. 왜 여성에게만 잔인했으며 하층민일수록 그 가혹함은 더했는가.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지 신분제 사회였으며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사회였다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원문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스러져간 하층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저자에 의해 탄생한 책은, 그 33가지의 이야기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조선 전기에 벌어진 일이며, 특히 성종과 세종 때의 일이 주를 이룬다. 특히 성종 때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왜일까?

실록이라는 것이 워낙에 방대하여 아직 연산군 이후는 작가의 손길이 못 미쳤을 수도 있고, 유독 성종과 세종 때에 특이할 만한 연분사건 발생률이 높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시대 통 털어 가장 태평했다는 성종과 성군 중의 성군이라는 세종 때에 연분사건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이 참 재밌는 일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간에 조선 중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조선 전기에 몰린 이야기는 유달리 하층 여성들에게 가혹했던 것에 그 원인을 더했을 지도 모른다.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이런 남녀추문 사건은 단순히 그 사건에만 국한시켜 해석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조선 전기.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선은 나라를 안정시켜야 했고,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조정은 유교로 그 일을 수행하려 했고, 단순히 풍기를 단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라를 지배하기 위한 권력에 의해 재편되고, 필요에 의해 가혹했다. 수직적 사회를 지향한 조선은 개국공신을 비롯한 각종 공신을 위해야 했으며, 고려의 귀족이 아닌 새로이 등장한 사대부 양반의 권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책에 수록된 이야기가 모두 조선 전기에 벌어진 일이며, 노비, 첩, 기생, 비구니였던 여성과 양반 남성이라는 대결 구도는 필연적으로 여성에게만 잔인했던 결과가 나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대는 남성에게는 눈을 감았고, 여성에게만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잣대를 들이댔다. 상위계층에게는 그럭저럭 반듯하게 적용되던 법도 하층에게로 오면 그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졌다. 실상 조선시대가 이미 불평등한 사회였고, 법 자체가 그런 불평등함을 바탕으로 규정되어 있으니 법문을 올곧게 들이댄다 해도 이미 게임은 끝이었다. 그리고 그 잣대는 후대로 갈수록 더욱 강해져 수많은 열녀가 탄생했고, 그 그늘 밑에서 여성은 숨이 막히고 하염없이 눈물지었다.

책으로 돌아오자면 일단 이 책은 아주 잘 써진 역사책은 아니다. 진중한 논의보다는 과연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 구성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에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구성도 그다지 촘촘하지 못하고, 편집자가 보기 좋게 다듬었을 것임에도 서툴고 엉성한 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이 이런 연분사건을 깊이 다뤘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하층 여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이 이 책의 큰 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됐든 이런 책이 출간된다는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태정태세문단세로 대표되는 역사교육을 벗어나 한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조선의 역사는 위의 역사이건 아래의 역사이건 왜 이리 피로 물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음에는 조선을 좀 더 밝게 볼 수 있는 책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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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한빛문고 6
박완서 글, 한병호 그림 / 다림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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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착한 아이가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 아이는 청계천 뒷골목 전기용품 도매상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어찌나 부지런하고 일을 잘 해내는지 주인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던 아이는 어느 바람이 세게 불던 날 세찬 바람때문에 하필 자동차로 넘어진 자전거로 인해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민에 빠진다. 자동차 수리비 오천원을 가져오면 자전거를 돌려주겠다는 자동차 아저씨가 없는 틈에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마저 일자 아이는 자전거를 들고 냅다 도망을 친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착한 아이는 도둑질을 한 것 마냥 마음이 편치 않은데 전기용품 주인 아저씨는 그런 아이에게 돈도 안 물어주고 자전거도 가져왔다며 칭찬을 한다. 아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날 밤 시골로 내려 갈 짐을 싼다.

자전거 도둑 아닌 자전거 도둑이 그날 밤 짐을 싼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만은 아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어느 날엔가는 진짜 도둑이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그리고 필시 자신의 아버지였다면 혼을 냈을 진정한 어른을 그리워했기 때문이고, 또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이런 몹쓸 일이 생기는 도시 대신 우아하게 바람을 타는 보리밭이 있을 고향이 보고팠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를 읽을 때면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곤 한다. 하나는 순수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아이와 우리의 자연을 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흐믓한 미소를 짓게 되는 한편, 이런 이야기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박완서님의 단편 동화집인 '자전거 도둑'은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시인의 꿈' 등 총 6편의 잘 써진 동화가 담겨있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박하고 착한 아이와 따뜻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등장하고 어른들은 대부분 물질 문명에 찌들어 있다. 도시와 문명의 편리함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의 소중함과 민들레 한송이마저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는 소박하고 뜨뜻한 시선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들이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뻔하기도 하고, 짐짓 식상하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들은 어떻게 보면 달달 외워서 시험만 볼 뿐 실생활에서 그다지 적용되지 않는 도덕교과서와 같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그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뻔함마저 다시금 일깨울만큼 동화에서 묘시하고 있는 것들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이며, 동화를 읽을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 진정함이 가장 필요한 교육일 테니까 말이다. 보편적인 주제와 단선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진정함이야말로 동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이다. 

'자전거 도둑'은 어른이 읽는 동화라기에는 '어린왕자'가 가진 순백의 아름다움이나 '연어'의 세련됨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아이들에게는 순수함과 교훈을 어른에게는 동심을 돌이켜보게 할 이야기이고, 박완서님의 손에서 뽑아져 나온 고운 우리말로 써진 예쁜 동화이다. 뻔함이고 진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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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도서관 - 세계 오지에 3천 개의 도서관, 백만 권의 희망을 전한 한 사나이 이야기
존 우드 지음, 이명혜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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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생각만으로 그쳐서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라던가 에이 그렇게 했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이런 건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론 후회를 남긴다. 한 발짝 내딛으면 낭떠러지일 것 같지만, 실은 그저 한 계단이었을지도 모르고, 낭떠러지이기는 했으되 충분히 살 수 있는 높이였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 또 낭떠러지가 아니라 오히려 붕붕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배낭여행을 갔다가 네팔의 학교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은 존 우드 역시 마이크로소프트를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네팔의 도서관에서 본 책이라는 것이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성인잡지 같은 것 몇 권뿐이었을지라도, 또 그것마저 너무 소중해서 열쇠로 잠궈 놓은 걸 보고 말문이 막혔다 할지라도, 통장 잔고가 ‘0’이 되어버릴 미래, 그리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과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친구, 연인, 가족들, 손에 쥐고 있는 수많은 기회와 계획들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결론을 내리고야 만다. 전 세계가 선망하는 마이크로소프트 대신, 전 세계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의 꿈과 기회를 선택한다. 무언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최악의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니까.

난 전적으로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가난한 나라에 학교와 도서관을 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야 물론 두 말 할 것 없지만, 무엇보다 왜 학교와 도서관을 짓느냐는 것이다. 기금을 모으기 위해 가졌던 한 모임에서 학교를 짓고 나면 그 학생들이 후에 가져올 결과부터 묻는 성급한 질문에 그는 그냥 기회를 주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냥 기회를 주는 것. 교육을 받을 기회. 책을 읽을 기회. 우리는 당연한 듯 누렸던 기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당장 눈앞에 가져올 결과가 아니라 기회를 갖고 그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미래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에 기쁘게 동참했고, 그들이 기부한 돈이 도서관이 되고, 학교가 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존 우드가 설립한 ‘룸투리드’는 처음 네팔을 시작으로 캄보디아를 거쳐 이제 전 세계에 3,000개의 도서관과 학교를 짓고 소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물론 매년 그 규모는 커질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가 선택한 무언가는 그 자신만 날 수 있는 날개가 아닌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달아준 날개였고, 기적과 같은 희망이었다. 그의 선택과 가치관, 그 모든 것에 완전한 동의와 기꺼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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