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 느림으로 가는 정거장
풀꽃세상을위한모임 엮음 / 그물코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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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머니는 오늘도 작은 보따리를 들고 나오십니다. 이 꼭두새벽에 굳이 오늘까지 나올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내일부터는 나오라 해도 못 나오실 테니 타박 대신 서로 미소를 건넵니다. 연애할 당시 이 열차를 참 많이 이용했다는 부부는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 조금은 상기된 얼굴입니다. 이젠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많은 중년의 아저씨는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글픈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합니다.

2007년의 마지막 날. 군산의 꼬마열차는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길을 뚫고 그렇게 마지막 여행을 했습니다. 직접 키운 자식 같은 채소며 이것저것을 들고 옆 동네로 새벽시장을 나서시던 할머니와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하던 나이 어린 청년들을 태우고 달리던 꼬마열차는 고속철의 개통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더불어 도란도란 피어오르던 이야기로 가득했던 간이역도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TV에 담긴 꼬마열차의 마지막 여행은 한쪽 구석에 앉아 진한 상념에 잠긴 아저씨의 심정이라도 전해진 것처럼 쓸쓸한 기운을 남기고 맙니다.

간이역이라는 고운 단어가 주는 느낌은 추억과 아련함, 혹은 고향의 푸근함과도 같겠지만 이 책 ‘간이역’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도시의 삭막함에 지친 이들에게 독서가 간접적으로나마 전해 줄 수 있는 추억의 연장이 아닌 바로 그 추억과 아련함을 앗아가는 속도에 대한 반기입니다. ‘느림으로 가는 정거장’이라는 부제 속에 담긴 그 의미는 책을 펼친 순간 앗! 하는 당혹감에서 한 두 페이지는 넘기는 동안 차차 떠오르는 속도에 대한 고민을 넘어 종국에는 내 삶의 고요한 응시로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에 차오르는 건 알지 못했던 것들 혹은 외면해 왔던 진실에 대한 불편함과 사뭇 진지한 생각들, 미안함, 때론 스산함입니다.

“간이역은 분주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바람만 불고, 햇살 이글거리는 여름에는 매미소리만 가득 찹니다. 눈 내리는 겨울, 사람들은 오바깃을 세우고, 온통 마후라로 머리통 휘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완행열차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이 책의 초판은 2005년 1월. 내 손에 쥐어진 책도 2005년 1월 초판본. 이 책에 적힌 고민과 생각들은 현재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속철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서울과 부산이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에 대해 TV가 한동안 떠들어댔던 걸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이제야 읽는 건 참으로 무의미해 보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왜소하고 가냘프기만 했던 비구니를. 10분, 20분이 빨라진다는 속도를 위해 땅을 가르고, 산을 베어내고, 생명을 앗아가겠다는 세상의 거대한 힘 앞에 홀로 맞섰던 가녀린 여인이 있었음을.

발행 4년을 넘기도록 다음 판을 찍어내지 못한 책은 사람들에게 어떤 스침조차 주기 어렵겠지만 아직도 절판되지 않은 생명력을 발휘하며 끝내는 내게 읽히고야 만 이 책이 간이역과 같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재빠르게 거대한 물량을 찍어내고 사라지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느릿느릿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건네지고 읽힌 책 한권이 주는 반향은 호감보다 비난이 앞섰던 세간의 시선에 홀로 맞선 한 여인이 주었던 향기와 비슷합니다. 화려한 겉이 아닌 속에 담긴 진정함은 오랜 시간 은은한 향기를 남기는 법이니까요.

“간이역은 오랫동안 이 땅의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던 달구지같은 완행열차 정류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망할 속도중독증의 미친 세월을 만나, 이 땅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간이역은 다 떨어진 고무신짝처럼 버려지고, 허물어지고, 잊혀져 내동댕이쳐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꼬마열차가 운행하지 않게 된 날, 할머니는 새벽 무렵 부지런을 떨며 봇짐을 들고 나서던 걸음 대신 푸욱 달게 새벽잠을 잤을까요. 매일 출근을 하던 젊은 청년은 무엇을 타고 일터로 나갔을까요. 닭도 내리고, 흑염소도 내리고, 강아지도 내리던 간이역은 이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간이역으로 상징되는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심성의 사람들, 무서운 속도의 광증에 온몸을 내던져 ‘이게 아니오’라고 신음하고 있는 분들을 떠올리면서 풀꽃세상은 간이역이 회복해야 할 느림과 반개발의 가치를 절박하게 웅변하고 있다고 여겨, 제10회 풀꽃상을 ‘간이역’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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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이미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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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도’라는 이름은 꽤 오래전 신문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기사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극장자막에 대한 몇 가지 비밀(글자 수 제한 등등)에 대해 흥미 있게 읽었었다. 그다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무심코 지나쳤던 것에 가려진 뒷얘기들이 그때는 참 신기하기만 했었다.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는 우리나라 외화번역에 있어서 이제는 거의 상징적인 이름이 된 이미도의 산문집이다. 제목만으로는 얼핏 영어에 관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그리고 역시 언어를 가지고 노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언어유희다.

아늑한 술집이름으로 ‘몸둘BAR’를 지어보았다며 ‘몸 둘 바 모르겠다’에서 착안했으나 ‘함께 있는 연인은 몸이 둘이니까, 연인이 함께 와서 몸을 두어 아늑하게 쉬는 BAR’라는 그럴듯한 뜻을 내세우기도 하는 재간에서 과연 언어를 조탁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의 즐거움과 감각이 느껴진다.

책장을 넘기면 프롤로그에 이어 영화에 대해서, 번역에 대해서, 또 영어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놓는다. 영화 [벅’스라이프]에서 “It's tough to be a bug”를 각운에 맞게 “곤충의 고충, 너흰 모른다!”라고 번역한 재능이나 [슈렉]의 “Far, Far Away Kingdom”을 “겁나먼 왕국”으로 번역한 재치에서는 빙긋 웃음이 지어지고, 영화 속 명대사와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구절을 읊어주는 데 이르러서는 줄을 긋고 싶어지기도 하다. 물론 모든 명대사와 지침을 영어로 수록해주는 건 당연한 배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보면서 영어라는 게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순간뿐이라는 게 문제지만...

언어가 업인 직업을 갖고 있지만 전문글쟁이가 아니니 깊은 맛보다는 자잘한 재치를 품고 있는 책이다. 영어를 잘 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영어를 조금은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어찌됐든 간에 그가 부럽다.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일을 무척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영화를 늘 접하는 일이다 보니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사색과 의미를 찾고 있는 것도 같고. 또 그런 생각들을 모아모아 책도 내고. 자신의 재능과 좋아하는 것이 일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참 행운아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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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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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전쟁 자체로 왈가왈부되지는 않는다. 그 어느 전쟁도 누가 누구와 싸워 이겼다더라 하는 단순한 논리로 재단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비록 그 이면은 추악할지언정 인류는 전쟁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꿔왔고,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그래왔듯 세계 4대 해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과 그 승자들은 명성에 걸맞게 이후의 모든 역사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결국 역사라는 건 이긴 자의 기준에서 재편되기 마련이니 이제 와서 투덜댈 건 없겠다. 실제의 역사가 어떠했든 간에 그것이 진리다.

그래서 살라미스 해전의 진리는 동양의 야만으로부터 서양의 가치를 지킨 전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과 물질의 충돌이었고, 정신의 승리였다. 살라미스 해전은 동양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와 서양으로 대표되는 아테네와의 전쟁이자, 당시 대제국으로서 여러 나라를 복종시키고 각기 다른 민족을 대동하는 물량공세를 펼쳤던 물질 대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정신과의 전쟁으로 기록된다. 정신은 이겼고, 아테네는 자유를 지켰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헬레니즘은 역사의 무대에 좀 더 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을 지배한다. 문명은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 영국, 프랑스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되고, 세계의 역사는 서양, 즉 서유럽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 이르기까지 살라미스의 유산은 그 승리의 맹위를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떨치고 있다.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아테네는 해전에서의 맹활약으로 그리스의 폴리스 중 단연 앞서 나가게 되고, 민주주의는 한 도시국가에 발생한 독특한 정치의 형태에서 인류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과연 살라미스는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세계가 잃을 뻔한 것은 그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의 교활함과 탐욕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난생 처음 맛보게 해주었다. 살라미스 덕에 아테네는 자유를 얻었고 그리스는 노예가 되었다. 민주주의가 살아남은 대신 아테네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오점에 대한 치열한 논쟁. 그 전통이야말로 살라미스의 진정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승리했다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문명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책 ‘살라미스 해전’ 저자의 주장이지만, 어찌됐든 승리했고, 문명은 지켜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벌어졌음에도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 ‘300’에서 컴퓨터 그래픽 없는 근육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군과 괴물과도 같은 모습을 한 페르시아군의 모습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을 그 시작부터 전쟁 후까지 다루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서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책처럼 당시를 재구성하여 역사의 한복판을 들여다보는 흥미에 읽는 맛까지 가미돼 있다.

어찌 알겠는가. 2400년 전의 진실을. 페르시아군의 원정. 짓밟힌 아크로폴리스. 살라미스로의 결전을 거부했던 그리스 동맹국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른 채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던 노잡이들. 살라미스 최초의 전투. 페르시아의 퇴각. 저자는 이 모든 것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기준으로 아이스킬로스의 희극과 플루타르코스 등 남겨진 조각들을 붙들고 가장 그럴 듯하게 이어 붙인다.

 

전쟁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것보다 더욱 극적이고, 전쟁의 영향력 아래 놓인 우리들에게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일부의 진실이자 일부의 허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것들은 결코 허구가 아니니 멀리 갈 것도 없이 교과서만 펼쳐 보라. 살라미스의 증거가 눈앞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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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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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을 여는 중저음. 복도를 울리는 일렬종대의 발자국 소리. 멈추지 마! ‘13계단’은 어느 사형수의 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제발 내 앞에서 멈추지 말아달라던 한 사형수의 방을 아홉 발자국 지나쳐 불시에 끊긴 소리는 곧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발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저승사자가 비켜간 그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상에 한 줄기 희망을 걸고 편지를 쓴다.

추리소설은 독자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사건이 진행됨에 있어 한 순간도 독자는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트릭. 단서. 혐의. 용의자. 반전. 그 모든 과정에 작가는 독자와 동행하는 척 하지만 실은 한 발 앞서간다. 추리소설의 쾌감은 동행 한다 생각했던 순간, 한 발 앞서 있던 작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순간 최고에 이른다. ‘13계단’은 추리소설이 갖춰야할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상해치사로 2년형을 받고 복역 중 가석방을 허락받아 보호 관찰을 받게 된 준이치와 교도관으로 평생을 근무하였으나 이제는 그곳을 벗어나려는 난고가 기억을 잃은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과정은,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으로 일단 이 일에 동행한 이상 절대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진짜 범인이 누구든 어쨌든 범죄는 잔인했고, 범인인 이상 사형을 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진짜 범인을 잡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는다. 몸서리 처지는 사건의 한가운데, 작가는 묻는다.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결과는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고와 준이치가 증거를 발견하고 범인을 추론하는 와중에 던져지는 물음은 인간의 오랜 물음과 일치한다. 살인과 사형. 신의 용서와 인간의 형벌. 뉘우침과 인과응보. 사형은 인간에 의해 또 다시 저질러지는 살인인가? 정당한 죄의 대가인가?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원초적인 끝도 없는 물음과 답의 반복일 뿐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신이라 해도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또 한 사람을 사형대로 보내는 일이라 해도 난고와 준이치는 최소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사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 이제 그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남은 시간 3주. 기한은 점점 다가오고 있고, 범인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가능성을 가진 여러 용의자가 있을 뿐이다. 사형집행이 확정된 문서는 마지막 절차를 앞두고 있다. 하나하나 13명의 손을 거쳐야 하는 문서는 한 사람의 서명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귀찮고 꺼림직한 것을 이리저리 미루다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도망치듯 틀림없이 서명을 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한마디로 훌륭하다. 모든 면에서. 일단 책을 펼쳤으면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야한다. 어떤 상황이든 묘사는 눈에 그대로 그려지고, 한 순간도 느슨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그 와중에 작가는 묵직한 주제마저 던진다. 추리소설로서도, 주제의식을 가진 소설로서도 양쪽 다 완벽하게 해낸다. 13계단.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계단이기도 했고, 살리는 계단이기도 했다. 사형수에게는 집행까지 걸리는 단계이기도 하다. 또 소설의 종반. 가장 긴박한 장면을 연출해 내는 공간이 13계단이다.

새벽 1시경 잠이 들 때까지 조금만 읽자 했던 것이. 정확히 오전 7시 37분. 읽기를 마쳤다. 그제야 편안히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아마도 온라인상의 누군가에게 추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의 추천은 옳았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아프다. 끊임없이 저질러지는 극한 범죄와 사형수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반복될 것이 틀림없으니까. 또 저승사자의 발자국 소리에 발악을 하고, 살려 달라 빌어 댈 사형수. 또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또 하나의 살인. 합법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교도관들. 그 고통이 끝날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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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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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들 중 건물 수위 아줌마인 르네는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합니다. 처음 편집자에게 보낸 원고에서 나는 이 여인을 약간의 저급하고 비속한 말을 상투적으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풍자가 요구하는 수위들의 화법처럼 말이지요. 그러자 편집자이자 소설가인 장 마리 라클라브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소설가입니다. 당신의 수위 아줌마도 게르망트 공작부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할 수도 있고, 완곡하게 돌려 말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식은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부자들의 오만함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거니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니 굳이 내가 그런 진흙탕에 발을 딛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록 그들의 오만함에 구역질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도도함과 예의 없음에 넌더리가 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럴 자격도, 갖춘 것도 없다며 나를 감추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나는 내 공간 안에서 행복하다.

르네는 고급 아파트인 그르넬 가 건물의 수위 아줌마다. 늙고, 뚱뚱하고,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면서 하염없이 텔레비전을 보는 수위 아줌마라는 사회적인 믿음에 딱 들어맞는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여느 수위 아줌마가 아니다. 르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베니스의 죽음’을 보면서 예술의 기적 앞에 황홀해한다. 네덜란드 정물화를 좋아하고, ‘오즈’의 영화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공작부인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수위 아줌마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열두 살인 팔로마는 열세 살이 되는 날 자살을 결심했다. 그르넬 가의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부모는 부자고, 집안은 부유하다. 문제는 너무 별나게 똑똑하다는 거다. 팔로마는 자신만큼 똑똑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도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고, 결국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들처럼 끝을 맺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인이 되어도 삶의 부조리에 저항할 수 없는 이상 여기서 끝낼 것이다.    

[그녀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가시로 뒤덮여 있어 진짜 철옹성 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밈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고 난 직감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 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가시로 덮인 고슴도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춘다. 철저하게 본 모습을 가리고 그들이 원하는 수위 아줌마가 된다. 하지만 온갖 위선으로 가득하고 우아함을 가장한 천박한 부자들이 떠나고 나면 그 뒤에서 고슴도치는 참 유난스럽고, 호들갑스럽다. 쉼표(,)의 사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시제라도 한 번 잘못 썼다간 멍청한 사람으로 그대로 낙인찍힌다. 타인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 수위실 문을 꽝 닫으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세상의 온갖 사람들을 모두 속물적이고, 멍청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고,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일본의 모든 것을 동경한 나머지 6층의 음식평론가가 죽은 후 새로 이사 온 일본인에게 지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 일본인은 예상대로 무척 예의바르며, 그는 ‘안나 카레리나’를 비롯한 놀라울 만큼의 공통점으로 우정이 싹트고 있는 중. 그리고는 혹여 이런 자신이 들킬까 매사 노심초사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르네의 반응과 생각은 단지 부자이고 상류계층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은 못 배우고 가난한 수위 아줌마보다 나을 것도, 우월할 것도 없고 때로는 모자라는 것도 많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임을 알겠다. 소설은 르네와 팔로마의 사색을 통해 눈으로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님을, 삶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황홀함을 가르친다.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고 한다. 우아함이 우아함으로 머물지 않고 넘치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보다 극단적으로 말해 작가의 개인적 취향의 집합체이다. 르네와 팔로마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단어와 취향, 사색, 책 속의 모든 설정은 온통 작가가 동경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고, 작가는 그것들이 얼마나 좋은 지 또 당신들이 얼마나 무지한 지를 독자들에게 일일이 가르친다. 어떻게 보면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정도는 알아들어야 당신도 뭐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는 해야 당신도 똑똑하고 예의 바른 범주에 속한다. 이 정도는 향유할 줄 알아야 당신도 우아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동감할 줄 모르는 이상 당신도 실은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만 요란한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작가가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 줄 알았다면 끝간데없는 잘난 척에 나자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쉰네 살 수위 아줌마와 열두 살 천재소녀의 감동 어린 만남!’이라는 카피에도 불구하고 둘의 만남은 너무 늦는데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채 르네는 사고로 죽고, 팔로마는 자신의 자살 계획이 별문제 없는 사춘기 소녀의 사치이자, 관심을 끌기 원하는 부잣집 여자애의 합리화였음을 깨닫고 계획을 취소한다. 

고슴도치는 철옹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오만한 부자들은 아무리 르네의 입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나와도, ‘오즈’ 영화의 경이로움을 찬탄해도 늙고 뚱뚱한 수위 아줌마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 도착할 소포를 제대로 전달해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세상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우아함을 이야기하는데 잡다할 만큼의 유식한 문장과 유난스러울 정도의 비아냥까지 내세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르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끼 위의 동백꽃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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