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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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제목때문이었다. 이슬람 정육점. 교차점이 있을 수 없는 제목 아닌가. 무심코 스쳤다 눈에 들어온 책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슬람 정육점이란 제목은 정말 이슬람인이 정육점을 경영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은유적인 표현일까. 매우 모순적인 제목과 달리 표지는 꽤 유쾌해 보였다. 만화 주인공들처럼 모두 밝은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목의 비밀이 밝혀졌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하산이(그는 터키 출신의 무슬림이다.) 실제로 정육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식당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는 안나 아주머니조차도 그에게 어떤 고기가 좋은 고기인지 알려달라고 조를 정도로 좋은 고기를 골라내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는 제목 안에 어떤 대단한 은유적인 표현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약간의 기대는 그렇게 무너졌지만, 소설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이율배반적이었다. 이슬람 정육점. 그것은 평생을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또 다른 말이자, 그 상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얘야, 네가 겪어보지 못한 운명이란 없단다. - 이 불쌍한 녀석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 네가 태어날 때 너만 태어난 게 아니라 너의 운명도 함께 태어났거든." 그날 운명은 나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방심했던 탓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낯선 이가 찾아오면 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하산 아저씨를 보고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까맣게 모른 채 너른 개활지에 홀로 핀 들꽃처럼 서 있었던 거다.   p. 18

 

주인공 소년은 고아원에서 어느 날 하산아저씨에게 입양된다. 벌써 몇 번이나 다른 고아원에서 길러진 소년에게 낯선 아저씨(그것도 외국인)의 입양이 처음엔 해외입양인 줄 알고 두려웠지만(고아원 아이들 사이에 해외입양은 입양된 집 아이를 위해 장기가 적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곧 자신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대통령 사진이 없는 동네에 익숙해진다.

 

돼지고기를 난도질하는 무슬림, 식당을 운영하면서 온 동네 사람들의 배고픔뿐만 아니라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주는 안나 아주머니, 말은 더듬지만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유정, 자신이 벌써 몇 번째 거듭 태어났다는 맹랑한 녀석, 월세를 못 내 야반도주한 6명의 식구들이 살던 곳에 이사 온 매일 군가를 부르는 대머리아저씨, 세상의 온갖 개를 불러와 욕을 하는 쌀집 아저씨, 안나 아주머니 식당에 얹혀사는 그리스 병사인 야모스 아저씨 등등등. 사실 그런 익숙함은 바깥이라는 세상이 고아원과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고아원보다 더 이상했다.


야모스 아저씨는 전쟁터의 병사들은 누구나 자신이 천국에 갈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가 지금 견디는 이 세상이 지옥이기 때문이라고.     p. 27


신은 치사해.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제트기로 실어다 지옥에 처넣어버리거든. ... 정말로 이 세상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다면 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야 하고,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지녀야 돼. 그런데 나는 아무런 욕망이 없어. 그래서 죽지 못해. 억울해. 내가 태어나고 싶어한 것도 아닌데, 대체 누가 왜 내 엉덩이를 걷어차 이 세상으로 처넣은 걸까?   p. 44


가난과 상처. 이 책의 주제는 이 두 단어로 압축된다. 하산은 가난과 사랑은 바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서 내버려두어도 언젠가는 뚫고 나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뚫고 나오는 가난에 사람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는 어떤 이는 구성지게 군가를 부르게 만들고, 어떤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분홍 코끼리로 만들어 버렸으며, 또 어떤 이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된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처넣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저마다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주요한 원인은 전쟁이었다.

 

작가는 한국전쟁 전사자 명단에서 하산과 야모스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터키와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작가에게 말을 건넸고, 작가는 이 소설을 완성한다. 작가에게 이 소설은 어떤 의무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게도 지금 이 글은 어떤 의무감이다. 이 책을 읽은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런 어쭙잖은 의무감. 


한국전쟁 당시 전 세계에서 이 땅으로 온 그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왔으며 전쟁 이전과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기억하는 전쟁은 다르다기보다는 이제는 틀리다고 해야 할 정도다. 서로 네가 틀렸다고 한다. 각종 이슈에 등장하는 군복 입은 할아버지들과 구닥다리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은 전쟁 영웅들. 한 땐 비장했던 반공구호들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릴 만큼 세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몸부림을 쳤으며,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내가 맞든 네가 틀리든 전쟁이 남긴 것은 가난과 죽음, 온 몸에 남은 상처들 뿐. 다른 나라에서 온 병사들 역시 전쟁이 남긴 유산은 어김없이 물려받는다. 하산과 소년은 똑같은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다.


“운명은 면식범이다.”   p. 17


운명은 우리가 이 세상에 처넣어질 때 같이 왔다. 그리고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린다. 운명이라는 녀석을 믿는 순간 녀석은 최초이면서 최후의 발길질로 간단하게 우리를 끝장낸다. 전쟁은 하산과 야모스를 이 땅에 보냈고, 소년은 하산에게 입양되었다. 하산은 왜 늙은 나이에 소년을 입양했을까? 이 땅은 그에게 빼앗기만 했을 뿐 준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세상에 흉터 없는 사람은 없단다. 모든 상처는 아무리 치료를 잘 해도 흉터가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로 이뤄진 가시덤불이라서 지상에 단 일 초를 머물더라도 상처 입지 않을 수가 없단다.” p. 111

 

주인공 소년은 여느 성장소설에서 보듯 하산 아저씨에게 입양되었다고 해서 따뜻한 보살핌으로 못된 아이가 점점 착한 아이로 달라진다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으로 환골탈태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 다국적인들이 살아가는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모든 게 허구라는 게 명백함에도 한 가지 진실만은 놓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한 없이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 따뜻하지도 않지만 삭막하지만도 않은. 그리고 늘 그렇듯 이별은 다가온다.


가난한 동네에 재개발의 열풍이 불고 하산은 재개발과 돈의 논리에 밀려 정육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다. 아랫동네부터 점점 기계들에 의해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던 하산은 결국 쓰러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너무 늙었다.


그는 11월 10일을 기다렸다.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하산 아저씨에게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추모해야 하는 날이었으므로.

...

“보자마자 알았다. 그 흉터가 무엇인지. ... 그건 총상을 입었음을 증명하는 흉터다.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생길 수 없는 흉터야.”

...

“언젠가 너는 알게 될 거다. 네게 상처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p. 235~236


책 전체에 줄을 그을 만큼 마음에 쏙쏙 박히는 말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주인공 소년의 생각으로 표현되지만 그보다 꼭 남겨야 할 말은 이 말이 아닐까 싶다. 이 땅에는 전쟁이 있었고, 코리아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른 채 먼 타국으로 파병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서 죽었다. 그들에게 감사와 명복을 빈다.


그에게 이곳은 신이 없는 땅이었다. 맨 처음 파견군으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었다. 내가 왜 그랬냐고 묻자 그는 신이 없는 땅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고 했다.

“이국의 병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갔단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 수없이 많은 나라의 수많은 군인들이 묻혔지. 인류 가운데 제일로 밤일을 잘하는 앵글로-색슨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그런 출중한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어찌 지구 곳곳에 퍼져 있을 수 있겠니? 앵글로-색슨이 더럽히지 않은 대륙과 대양은 이 지구에는 없단다-안데스에서 커피나 마시던 게으름뱅이에 허풍쟁이들이었던 콜롬비아인들, 춥다고 참호에 난로를 피워놓고 꼼짝도 안 하던 멍텅구리 태국인들, 그놈들과 전혀 분간이 안 되던 필리핀인들-오 신이시여, 더러운 이교도 놈들을 입에 올리는 걸 부디 용서해주시길-정원에서 튤립이나 기르면 꼭 어울릴 것 같던 네덜란드인들, 사내다움이라곤 전혀 없이 수탉처럼 꽥꽥대던 프랑스인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잔뜩 기가 죽어 지내던 겁쟁이 벨기에인들, 코딱지만 한 곳에서 장난감 같은 총을 들고 왔던 룩셈부르크인들, 유태인처럼 밤을 아침이라고 생각하던 고집쟁이 에티오피아인들도 있었지 ...... 어디까지 했지? 그래, 맙소사! 입만 열면 고약한 물담배 냄새와 계피 냄새가 나는 더러운 터키 놈들도 있었지. 보스포루스 해협에 오줌이나 갈겨대던 녀석들이 사내랍시고 우우 몰려왔지. 만약 이곳이 한국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총을 겨눈 건 그놈들이었을 게다. 우리 그리스인들이 튀르크들의 엉덩이를 크레타에서 치면 그놈들은 단번에 에게 해 위를 날아서 카파도키아에 곤두박질친단다.”   p.120-121



ps. 나는 왜 자꾸 이 책을 알라딘 정육점이라고 발음하는지 모르겠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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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인 여러분! 나의 이러한 평판은 내가 어떤 종류의 지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지혜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인간에 의해 확득될 수 있는 지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는 한도 내에서만, 나는 내가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민중을 멸시했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귀족이 아닌 중산층 출신이면서 말이다. 민중을 경멸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뒤에 그가 재판을 받게 되는 데 하나의 이유가 됐던 게 틀림없다.

민중 멸시는 당연히 민주주의 멸시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레타와 스파르타의 제도를 최상의 정치형태라고 찬양하고, 그 다음이 과두정이며 제일 못한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아테테인들을 '낙후된 자들'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 이후 죽음을 피해 다른 도시국가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법질서를 갖춘 나라라고 칭찬해 마지않던 스파르타나 크레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철학자를 환영하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와 대조적이었던 독재국가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동경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스리는 자의 직분은 해야 할 일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며, 피치자의 할 일은 이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는 그리스인들이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요구한 '피치자의 동의'를 외면하고 시민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인간사회를 시민의 자치제가 아니라 목자나 왕을 필요로 하는 무리로 보았다. 반면 아테네인들은 인간이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으며 폴리스에서 자치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이라고 믿었다.

 

나는 믿을 만한 증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델포이의 신입니다. 이 신은 만일 나에게 지헤가 있다면 나의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지혜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말해 줄 것입니다.....그는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신탁을 구했던 것입니다. 델포이의 무녀는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그가 가장 즐겨 사용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일 것이다.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뜻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누구나 혼을 가지며 그 혼이 각자에게 가장 귀한 것이니 저마다 자신의 혼이 훌륭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혼'은 '정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훌륭한 정신을 갖도록 하라', 즉 '덕을 갖도록 하라'는 말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지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에서 덕이란 말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덕이란 말과 다를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덕이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있는 것이자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긴 생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즉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지식은 소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테네인들은 시민은 철학의 대가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이성을 가진 상식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덕과 지식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를 지식과 덕의 교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으므로 소피스테스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비난으로 인해 소피스테스는 두고두고 역사적으로 비난을 받게 됐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의 반민주적 사고 때문이다. 만약 덕과 지식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아는 자'가 통치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

둘째, 절대적 확실성의 부정이라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셋째, 자신의 제자 중에 반민주적인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테스들을 비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노예제도까지 부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민을 멸시했고,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내가 파멸한다면 이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멜레토스와 아니토스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은 이미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할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염려는 없습니다.

 

반민주주의자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에서 평생 자유를 누렸다. 그곳에서 일흔이 될 때까지 반민주주의를 마음껏 설교하며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시민이면 누구나 그를 고발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민주주의는 세 번 전복된 적이 있다. 이 세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된 내용에는 그가 30인 정권의 폭정에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30인정권의 독재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5명을 집행부로 불러들여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권은 독재를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후 살해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폭정을 부당하다고 여겨 명령에 불복종하고 다른 4명이 레온을 체포하러 살라미스로 갈 때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해를 면한 이유는 30인 정권의 수령인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옛제자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말하자면 권력의 비호를 받은 것이다. 30인 정권은 크리티아스가 전사함에 따라 8개월만에 끝났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의 독재자들을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망명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에 의해 망명을 했다가 고된 내전을 거쳐 민주정을 회복시킨 자였다. 그런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의 적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민주정이 회복되기 전에 이미 내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대사면 협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민주정 측은 크리티아스와 관련해 소크라테스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반민주적 과두파나 친스파르타주의자로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죄목이 애매한 '불경죄'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상의 불경죄로 처벌하기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귀신과 소통한다는 이유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가 더했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정이 회복된 뒤 2년 뒤, 그러니까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 30인 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져 공무원 자격심사에 의한 부적격 공직자의 추방이 강조된 시기에 열렸다는 점은 그의 실제 혐의가 30인 정권과의 관련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여러분에게 보내준 선물인 나를 처벌함으로써 여러분이 신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재판에 대해 살펴보자.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일흔의 나이에 재판에 회부됐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발자는 아니토스, 멜레토스, 리콘 세 사람이다. 아니토스는 장인과 정치인을, 멜레토스는 시인을, 리콘을 변론가를 각각 대표했다. 사건은 10개의 배심법원 중 하나에 배정됐고, 배심원은 선출된 501명이었다.

 

고발자의 목소리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 의해 후세에 각각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를 지었다. 또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지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했다.

 

이는 물론 실제 고발장의 내용이 아니라 후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쓴 저술을 통해 전해진 혐의일 뿐이다. 여기서 '국가가 인정하는 신' 또는 '나라가 믿는 신'이란 폴리스의 신을 뜻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란 외국의 다른 신격을 수입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격을 믿었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무신론이라고 했으나, 무신론은 실제 고발 이유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실제 이유는 그가 폴리스의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신을 믿는다'는 말은 폴리스의 '노모스(nomos)를 따르고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모스란 관습과 법률을 뜻한다. 노모스를 따르고 존중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의 상식이었고,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그가 아테네의 노모스를 위반한 데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반한 것인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저자는 플라톤도 크세노폰도 그것을 명시하지 않은 이유로 만약 그것을 명시할 경우 소크라테스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변호가 약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여러분은 내가 신 또는 정령의 신탁이나 신호를 듣는다고 여러 차례 여기저기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멜레토스가 소장에서 조소한 신도 바로 이 신입니다. 이 신호를 일종의 목소리로서 내가 어릴 때에 처음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는 어떠한가?  이 점에 대해 크세노폰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또 점을 친 것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령이 나에게 신탁을 내린다"고 말한 사실은 널리 훤전되고 있다. 생각하건데 새로운 신격을 수입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 현상에 대해 플라톤은 소리 형태의 신적이며 영적인 무언가가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심리현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크세노폰은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점을 본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그건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신령의 신탁에 따라서 여러 제자들에게, 혹은 그렇게 하라든가, 또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충고에 따른 자는 덕을 보고, 따르지 않았던 자는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을 일종의 신비적인 종교집단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겠단 얘기다.

그러나 이런 '불경죄'는 명목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 자가 장작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정식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나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다면, 청년이든 노인이든 간에 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나는 보수를 받아야만 대화한 것이 아니어서,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든지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사람이 되든 선한 사람이 되든 그 결과는 나의 탓이 아님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혐의는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둘러싼 변론에 대해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서술은 다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타락시킨 젊은이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고 기록해 놓았다.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부친보다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다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적인 면에서 그랬다고 답하고, 자신은 교육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그것이 사형당할 이유냐고 반문한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해 크세노폰의 <회상>에는 네 가지를 지적한다. 이는 소크라테스 처형 이후 반대파가 내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관리를 추첨으로 정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기존의 국법을 멸시하는 압제자가 되게 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설득과 압제의 차이를 밝히면서 소크라테스는 설득은 했지만 압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반론하고 있으나, 소크라테스가 평등주의적 추첨제와 민주주의를 멸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변론하지 않는다.

두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 시대의 탐욕, 압제, 잔인의 거두인 크리티아스와 평민정치 시대의 황음, 오만, 압제의 화신인 알키비아데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그들이 소크라테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런 압제자가 되기 전으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던 시절의 그들은 사려깊은 사람들이었고 소크라테스가 30인 정권 시절에는 폭정을 엄중히 비판했으며 이 때문에 사이가 헙악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대화상대로 등장해 그 어느 대화에서도 그를 비난하지 않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연애 분위기에서 인기있었던 자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세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부친이나 근친자들을 모독하게 했고, 친구들에게 친절은 무용하다고 가르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이치를 모르는 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네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시를 곡해하여 사람들에게 악행을 행하게 하고 독재자로 만들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변론에서 자주 인용한 호메로스의 시에 독재자를 옹호하는 부분이 여러 곳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해서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불경죄보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한 변론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론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는 멜레토스에게 "누가 그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나요?"라고 물어 그를 궁지에 빠트렸다. 이에 대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아테네인들이 청년들을 더욱 선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청년들을 선하게 했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청년들에게 복된 일이지 해악이 되는 일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악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종국에는 자신도 해를 입게 될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고의로 청년들에게 해를 끼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변론에서 고발자인 멜레토스가 고발 원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능하여 신용할 수 없음을 네 차례에 걸쳐 명백하고 밝히고 있다. 즉, 고발자와 고발의 신용과 신빙성을 부정함으로써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부정한 것이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상대로 직접 반론을 펴자 그를 무신론자로 공격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경죄는 죄목이 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며 멜레토스는 고발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답변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기소할 만한 죄목을 찾기 어려워지자 엉터리 불경죄를 뒤집에씌운 것임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이어 그는 자신이 세 차례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며, 죽음을 두려워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철학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무지라고 말한다. 나아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철학활동을 포기하겠다는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자랑스럽게 자기를 아테네의 양심에 비유하며 자기를 죽이는 것은 아테네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말한다. 즉, 자신을 비판적 언론인이라고 자부한 것이다.

 

여러분한테든 또는 어떤 대중한테든 진정으로 맞서서 많은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나 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으로 들고서도 무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올바른 것을 위해 정말로 싸우려는 사람은, 그러고도 그가 잠깐이나마 살아남으려면, 그는 반드시 사인으로 지내되 공인으로 지내질 않아야 되니까요.

 

즉,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기 위해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비판적 언론인인 자신을 죽이는 일이 아테네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는 행위라는 말과 모순된다. 게다가 올바르지 못한 일들과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일삼는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맞섰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엄청난 모독이다.

나아가 이 말은 그리스 민주주의 기본정신에 대한 도전이자 모독이기도 하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올바른 것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동의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누구'에는 고발자들이 말하는 자신의 나쁜 제자들도 포함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지만 저는 누구의 선생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왔다고 자부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선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유죄의 투표에 대해 내가 비탄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는 예상했고, 다만 찬반 투표 수가 거의 같다는 데에 놀랐을 뿐입니다. 나는 나에게 불리한 투표가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차 투표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1표(또는 280표), 무죄 220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만약 유죄 표 가운데 30표만 무죄 표로 옮아갔더라면, 가부동수일 때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한다는 원칙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무죄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놀라워했다.

 

양형의 순간에 고발자는 사형을 신청했다. 소크라테스는 형량에 대해 변론할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은 형벌 대신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또 다시 배심원들을 자극했다. 그가 말한 상이란 '영빈관에서의 식사 대접'이었는데 영빈관은 당시 아테네의 민회 건물로 관례에 따라 가장 영예로운 민주시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어쨋든 이 행동은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배심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확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아테네인 여러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항상 추방지를 변경하고, 또 항상 쫓겨나야 하는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내가 어디를 가든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청년들이 나의 곁으로 몰려오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청년들을 쫓아낸다면 청년들의 요구로 연장자들은 나를 쫓아낼 것입니다.

 

배심원들이 자신에게 추방형을 내리려 한다고 짐작한 소크라테스는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국 방랑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에게 추방형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의 권유를 핑계삼아 벌금형을 제안했다.처음에는 은화 1므나를 제시했으나 뒤에 플라톤 등의 제의에 따라 벌금액을 30므나로 높여 제안했다. 이는 무척 거액으로 처음부터 30므나를 제안했으면 배심원들이 어느 정도 납득했을지 모르나 나중에 말을 바꾸었고, 배심원들은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을 비웃는 행동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만일 재판이 하루 만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더라면 배심원들이 그의 무죄를 확신했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재판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2차 투표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표결은 360대 140으로 1차 투표 때보타 소크라테스에게 더욱 가혹했다. 결국 오만하고 뻔뻔하게 이를 데 없는 발언으로 배심원들의 분노를 삼으로써 사형을 자초한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크리톤>에서 감옥에 갇여 있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많은 이들에게 탈옥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탈옥 권유를 뿌리치며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고, '훌륭하게'는 '아름답게' 및 '올바르게'와 동일"하다는 논증을 편다. 그리고 탈옥은 훌륭하게 사는 것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탈옥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정의의 3원칙은 올바른 일을 해야 하고,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올바른 합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원칙들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켜 탈옥 거부의사를 더욱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올바른 일이 아니기에 탈옥을 할 수 없고, 잘못된 판결로 사형에 처해졌다 해도 그것에 불복해 탈옥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에 잘못된 행위로 대응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으며, 합의된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탈옥하는 것은 합의를 기만하는 행동이므로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불의에 대한 저항도 옳지 못한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은 국가와 동등할 수 없으며 어떤 안에 대해 국가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말은 한동안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저자는 과거 우리의 군사정권이 한 철학자의 힘을 빌어 악법을 합법화하는 길을 터주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가 가진 여러 한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를 인정했고 민중을 멸시한 반민주주의자였으며 전제주의자였고 반인권주의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아테네인들에게 유죄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아테네의 민주적 전통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자신을 변호했다면 그는 당연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경멸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죄여야했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용납되어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테네를 지지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보호돼야 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주의 역사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지적한다.

 

 

......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의 저자는 보통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분리하는 것과 달리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테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생각으로 보고 논의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다. 지난 수천년동안 현명한 철학자를 죽인 중우정치라고 매도되어 온, 소크라테스의 프로페셔널리즘에 의해 부정되어 온 아마추어리즘인 '민주주의'에 대한 명예회복 선언인 셈이다.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꽤나 많은 자료들을 실례로 들고 있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써져 있어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어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2005년 12월 즈음에 작성했던 글..

네이버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이곳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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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가를 잊을 정도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한마디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2,400백년 전 70세의 한 노인이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름 소크라테스. 오늘날 위대한 철학자, 인류의 성인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는 그는 왜 사형을 선고 받았을까?

대중의 무지를 지적하고 '너 자신을 알라'며 진리를 설파한 그를 우매한 대중이 죽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은 스파르타의 법정이 아니다. 최초의 민주주의. 온 인류가 추앙해마지 않는 바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법정'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아테네 민주주의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배운다. 특히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로 비록 여자와 노예, 외국인에게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민권이 있는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였으며,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 판결했던 민주법정 또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주의만은 우매한 민주주의이다. '아테네 민주법정'과 '소크라테스'. 어느 쪽이 옳은가? 소크라테스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선 나는 보다 오래된 고발과 최초의 고발자들에 대해 답변하고, 다음에 그후의 고발과 고발자들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고발자들이 나를 여러분에게 거짓 죄목으로 수년에 걸쳐 고발해 왔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 재판을 이야기할 때 민주주와는 별개로 논의를 해왔으나,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한 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으로서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만 알아보도록 하자.   

 

기원전 8세기에 미케네 시대의 왕정이 무너지고 그리스는 귀족이 지배하기에 편리한 언덕(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살면서 폴리스가 성립됐다. 기원전 683년부터 임기 1년의 아르콘 9명이 정권을 잡은 이후 아테네에서 귀족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의 금권정치가 이어진다. 기원전 561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참주정이 들어서고 참주정이 종식된 뒤 기원전 508년에는 솔론계의 평민파였던 클라이스테네스가 집권해 민주정의 기초를 세웠다.

클라이스테네스는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중심적 부족 구획을 지역적인 10개 구로 나누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를 구성했다. 이어 명문 가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여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 질서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원전 469년에 소크라테스가 태어난다.

 

이어 등장한 페리클레스의 15년 계획의 시대에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참된 중심이 된다. 그러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기원전 411년에 적국 스파르타와 공모한 불만세력이 민주정을 전복시키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을 '400인 과두정'이라 하는데 이 공포정치는 4개월만에 끝났으나, 아테네가 패전을 하게 되는 기원전 404년에 '30인 독재정'이 수립되어 8개월이나 지속되고 그 정도도 너무도 끔찍했다고 한다. 

기원전 403년에 민주정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기원전 401년에도 민주정 전복을 기도한 세력이 있었고, 이 세 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그리고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는다.

 

자, 그러면 나는 변명을 시작해야 하며, 짧은 시간 내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비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성공이 나나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라면 내가 성공할 수 있기를, 또는 나의 변명이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아테네의 최초 입법은 기원전 7세기 말에 드라콘이 만든 드라콘법이었지만 수십 년 뒤 솔론이 정치와 경제를 개혁할 때 드라콘법을 폐지하고 법제를 민주적으로 개혁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론의 국제(國制)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특징을 갖는 것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대부의 금지다. 둘째는 피해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를 대신하여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인정한 점이다. 셋째는 민중재판에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 번째가 바로 헬리아이아(Heliaia)라고 하는 민중법원이었다. 이것은 시민이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 재판관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 최초의 법원이었다. 솔론이 창설한 법원이란 아테네의 민회를 말하며, 그 민회가 재판 목적으로 열린 경우 그것을 '헬리아이아'라고 했다. 이처럼 법원에 상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재판을 하는 최종 권한이 민중에게 있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그 상소는 무료로 보장됐다.

'헬리아이아'는 작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다카스테스(배심원)에 의해 집행된 공개재판이었다. 공개재판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중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헬리아이아'였다.

 

아테네에서 소송은 공법상의 소송과 사법상의 소송으로 나뉘었다. 공법상 송사는 국가 공동의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고, 사법상 소송은 소송당사자간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재판관, 검찰, 변호사가 따로 있지 않았고 시민이면 누구나 그 모든 역할을 담당하는 아마추어리즘이 철저했다.

배심원의 자격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모두 갖춘 30세 이상인 자로 그 임기는 1년이었으나,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시민이라면 누구나 희망하기만 하면 종신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매년 6천 명의 배심원이 추첨에 의해 선발됐고(위협이나 수뢰를 방지하기 위해), 10개의 법원에 각각 5백 명씩 배치됐으며, 나머지 1천 명은 예비였다.

 

재판은 피고나 피고인의 증인 앞에 구두로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현재와 같은 검찰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고소를 할 수 있었다. 원고나 고발자는 공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고발 이유, 사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청구 원인을 법적 기초와 함께 서면으로 작성해 5일 이내에 담당 아르콘에게 보내야 했다. 소환된 피고 또는 피고인은 자신의 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법적 쟁점을 담당 아르콘 앞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구두변론이 공판 전의 예심절차로 행해졌다. 여기서 공판 준비로서 아르콘이 소송당사자를 심문하고 증명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도왔다. 소크라테스 재판의 경우에는 바실레우스라는 아르콘이 예심절차를 담당했다.

예비심문 절차가 종료되면 아르콘이 구두변론과 공판의 기일을 지정해 10개의 배심법원 가운데 하나의 법원에 그 사건을 회부하고 공판 심리를 주재했으나, 그 자신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구두변론과 공판을 하는 날에 소송당사자는 증인과 지지자를 데리고 사건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법원에 출두한다. 공중이 방청을 의해 둘러싸고 그 중간에 법정이 형성됐다. 법정의 정리가 공개절차의 개시를 고시하면, 법원의 서기가 당사자의 소장 및 반소(反訴)를 낭독했다.

그 후 양 당사자는 높은 대 위에 서서 자기주장을 전개했다. 이때 시간제한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 재판처럼 공법상 소송인 경우에는 사법상 소송의 경우보다 변론시간이 길게 주어졌다.

당사자의 변론이 끝나면 배심원이 사실문제, 법률문제, 형평문제에 관해 투표로 평결을 했다. 평결은 투표의 과반수로 결정되고, 동수로 표가 나뉠 경우에는 피고의 승소 또는 무죄가 됐다. 배상액이나 양형이 법률상 정해지지 않은 사건이면 양 당사자가 주장하는 배상액이나 양형 중 하나를 배심원이 투표로 선택했다.

 

대규모의 배심원단은 개인의 책임감을 떨어뜨리거나, 데마고그(자파의 이익을 위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의 선동에 의해 정치적인 도구로 악용되거나, 법정변론에 의해 정치적 편견이나 감정의 호소에 치우치게 되는 등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배심원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1회적 결론만을 내렸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법적 추론이 발달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법은 '이론을 결여한 법'으로 불렸다. 또한 사법의 작용이 여러 국가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소송비용이 무료인 데 따르는 소송남용이 비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재판은 강력한 범죄자를 교정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기관으로 기능했다. 배심원은 추첨으로 선발됐기 때문에 소송당한 사람은 사전에 배심원의 구성을 전혀 알 수 없었으며, 배심원 또한 자신이 맡은 사건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투표의 비밀이 보장됐기 때문에 권력자가 배심원을 협박하거나 수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사적인 분쟁은 반드시 중재를 거쳐 재판에 회부됐던 점도 민중재판의 발달된 모습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상의 장단점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정치이론에서는 사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면 적극적인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배심에 의해 실현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배심재판의 결점은 시민의 양식에 의해 보완돼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들은 나를 고발한 자들이므로 나는 소장(訴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하는 자이며 괴상한 사람이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청년타락죄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당시 고대 그리스는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반드시 명확한 법률적 근거에 의해서만 기소나 고발이 가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죄목으로 언급된 혐의들은 그 내용이 분명하지 못하고 애매하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불문법에 의한 지극히 예외적인 재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재판은 문제시 되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명확히 항변하지 않는다.

또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는 당시 무신론이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고발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발당했고 재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운다는 소위 '산파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라고 불리는 이런 대화방식은 많은 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당대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소피스테스들에게...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싫다고해도 그를 욕할 수는 있어도 그런 이유로 고소를 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는 불특정 다수의 배심원들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몇사람에게 미움을 샀다고 해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마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이고, 무지한 대중은 이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말도 안되는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평생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웠던 그는 어찌하여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을 변론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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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디 하기스 지음, 이경아 외 옮김 / 상상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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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의 일상을 쫓아가 보자.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휴지를 쓴다. 차나 커피를 마시려면 티백이나 필터가 필요하다. 시리얼도 포장지에 담겨 있다. 낮에는 공부나 일을 하면서 엽서, 전단지, 지하철 표, 일기장, 서류, 공책, 복사지, 스티커를 쓴다. 저녁에는 극장에 가서 표를 사고 종이 봉지에 담긴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 물건을 사면 상표, 가격표, 영수증이 생긴다. 집 안을 둘러보라. 키친타월, 각종 고지서와 광고지, 한쪽에 쌓여 있는 신문이 보이지 않는가! 세상에는 새로운 오락거리와 신기술이 넘쳐 나지만 종이의 무궁무진한 쓸모를 따라올 적응의 귀재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p. 13


그동안 종이를 아낀다는 것은 일종의 돈을 절약한다는 의미였다. 이면지를 쓰고, 프린트를 하기 전에 한 번 더 틀린 글자가 없나 살펴보고,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씻은 후에는 손수건을 사용하고,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집에서든 사무실에서든 다른 무엇보다 비용을 절감하자는 측면이 컸다는 것이다. 물론 무분별하게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보호하자는 뜻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종이 사용을 줄임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동안 나무에 또 지구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기 시작했다. 종이를 사용하는 건 단순히 자원을 낭비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잘못 인쇄된 프린트 한 장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릴 때, 화장지로 손의 물기를 닦아 내고, 뜯어보지도 않은 고지서가 그대로 쓰레기봉투에 묶여 나갈 때, 지구의 허파가 되고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생명을 주었던 숲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숲이 사라진 땅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땅이 돼버리고 만다.


현재 산업 분야에서 사용하는 원목의 42퍼센트는 종이의 원료인 펄프가 된다. 이들 원목은 어디서 나고 자란 나무를 벌목한 것일까?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대부분의 원목은 원시림에서 벌목 되었고, 지금도 계속 원시림을 벌목하고 있다. 그중에는 대체 불가능한 산림도 있다. ... 자연스럽게 형성된 숲의 생태계가 파괴되면 자생 동식물의 삶의 터전도 사라진다. 단일 수종에다 외래종을 심은 나무농장에서는 원시림에서 볼 수 있는 생물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가 수많은 생물의 삶의 터전을 훼손한 결과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p. 29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종이의 라이프 사이클을 추적한다. 원시림에서 나무가 베어지는 현장부터 벌목된 나무가 제지 공장으로 실려가 물과 섞여 펄프가 되고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종이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는 사람들이 쓰기 편하게 각종 크기로 재단되고 팔려나간다. 화장지가 되던, A4종이가 되던, 영수증이 되던 저마다 소용이 다한 종이는 분리수거가 되어 재생용지로 다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비율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세계 최대 폐지 수입국인 중국으로 전 세계에서 폐지를 보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이용하게 된다.


이제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떠 화장실에 갈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 하루 종일 한 사람이 사용하는 종이는 셀 수도 없다.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전 세계가 단 하루 동안 사용하는 종이를 생산하려면 1,20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많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답은 원시림이다.


우리는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곳을 보호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인도네시아 등 남반구의 많은 나라의 숲이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어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곳에 조성되어 있는 숲은 사실 숲이 아니라 원시림을 베어낸 후 다른 나무에 비해 더 많은 펄프를 얻기 쉬운 단일종의 나무를 심은 나무농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그리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열대림과 온대림을 휩쓴 제지산업은 이제 하얀 눈으로 뒤덮인 북쪽의 아한대 지역에도 손을 뻗고 있다.


러시아와 캐나다가 보유하고 있는 숲은 각각 전 세계 숲의 26퍼센트와 25퍼센트에 이르지만, 선택적 벌목으로 원시림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던 러시아는 과거와 달리 푸틴이 집권한 뒤 돈을 벌기 위해 벌목을 권장하고 있으며, 캐나다는 목숨을 건 원주민들의 저항이 있고서야 겨우 4%정도의 숲을 원주민들의 땅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의 저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시림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들에게 수많은 동식물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카시아나무 농장만 가지고 있으면 보여 줄 것이 없겠죠... 지금과 같은 속도로 벌목 되고 나무농장이 세워지면 얼마 못 가 리아우에서 원시림은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지대에 있는 토탄지대는 바다에 잠기고 고지대의 비옥한 흙은 사막이 될 겁니다.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어요. 우기에는 홍수가 나고 건기에는 가뭄으로 타는 지역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매해 반복되는 재해지요. p. 144 


물론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출판사인 레인코스트 북스사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재생지로 찍기로 결정했고, 한 번의 인쇄로 나무 39,000그루를 살렸다. 고지서를 종이가 아닌 이메일로 바꾸고, 은행 ATM기에서 명세서를 받을 지 받지 않을지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종이 사용을 줄임과 동시에 기업은 비용을 절감했다. 하지만 이미 현실은 우려의 수준을 넘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무차별적인 제지 산업은 원시림의 종말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현재 중국에서 전통방식으로 생산되는 종이는 나무 펄프를 사용하지 않다는 것을 예로 든다. 짚, 사탕수수에서 버리는 부분과 꾸지나무 껍질을 사용해서 만들며 그들은 모두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제지 공장은 기계화로 일해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잃게 한다.


장인은 사라지고 현재 5.000개 이상의 중소규모 종이공장에서 2.000명 가량이 종사하는 중국의 종이 산업은 현대식 제지공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한 공장에서 500명 정도의 직원이 수천 배 많은 종이를 생산해 낸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 낸 종이는 쓰레기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원시림의 파괴로 인해 아주 오래 전부터 원시림을 이용해 삶을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것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제지 산업은 매해 고용 직원이 급감하고 있다.


1982년 640만 헥타르였던 원시림이 1996년에는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벌목이 진행되면 2015년에는 원시림이 50만 헥타르도 남지 않을 것이다. 30년 후에는 리아우 주 면적의 78퍼센트를 차지하던 원시림이 6퍼센트로 급감할 것이다. 세계 최대의 펄프공장 두 개가 이 지역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 151


문제는 다양성과 정의의 상실이다. 단일종의 나무농장이 아닌 원시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나무가 빽빽이 있는 자체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나무와 새로운 나무 죽은 나무가 더불어 존재해야 만이 숲을 이루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생명이 살 수 있다. 이끼가 끼고 죽은 나무를 기반으로 사는 벌레가 있어야 벌레를 먹고 사는 짐승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풀이 있어야 초식 동물이 생존할 수 있으며 육식 동물이 살아갈 수 있다. 오직 펄프를 얻기 위해 단일종만을 심는 나무농장은 그 어느 것도 살 수 없으며 죽은 땅과 같다.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원시림에서 사람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산다. 약초를 캐기도 하고,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채취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한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자연에서 얻는 것으로 다양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원시림이 벌목되면 사람은 나무를 벌목하거나, 제지 공장에 취직해 기계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그마저도 고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자연과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사람을 위해서 희생되는 게 마땅한 자연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멈추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마치 모든 소리가 표백되고 정적만 남은 것 같았다. 어느 방향을 봐도 똑같은 나무들이 줄맞춰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커다른 녹색 잎사귀는 햇빛을 들이마시고, 숨겨진 뿌리는 지하수를 빨아들이고 거기에다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렸다.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지겨운 모기의 윙윙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숭이 요란한 울음소리도, 쉭쉭거리는 뱀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 일행과 아카시아나무들뿐이었다. p. 127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12가지를 제시하고 있지만 부록으로 덧붙여진 정은영님의 글에서는 9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지구의 숲을 지키는 즐거운 종이생활

- 집에서, 일터에서 쓰는 복사용지를 재생종이로 바꾸기

- 휴지는 재생종이 휴지로 바꾸기

- 공책, 메모지, 다이어리 등 재생종이 문구를 사용하기

- 이면지나 자투리 종이로 나만의 공책이나 메모지를 만들어 쓰기

- 명함, 청첩장, 알림장, 보고서 등 인쇄물을 재생종이로 만들기

- 비닐봉지나 종이가방 대신 천으로 만든 장바구니 챙기기

- 티슈 대신 손수건 사용하기

- 일회용 종이컵 대신 사무실에서는 머그컵을, 외출할 때는 텀블러는 가방에 챙기기

- 출판사에 재생종이로 출판할 것을 요구하기


일회용 컵 대신 머그컵은 이미 사용하고 있지만 우선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습관부터 들여야 할 듯하다. 그리고 선물 받았지만 빨기 귀찮아서 집에 두고 다녔던 손수건도 다시 꺼내야겠다. 이면지 사용은 물론이거니와 파지도 다시 보고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사용하려는 노력도 해야겠다.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것부터 당장 시작해야 한다. 숲이 없다면 삶도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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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 고고학자 김병모의 역사 추적 시리즈
김병모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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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신화가 역사가 되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40년 이상의 연구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해 역사학자가 어떻게 연구를 해 가는 지도 알 수 있다. 저자에게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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