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사랑에 대한 설레고 가슴 아픈 이야기
김성원 지음 / 넥서스BOOKS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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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을 한 송이 꺾습니다. 생글생글한 꽃잎을 하나하나 뜯으며 낮게 읊조립니다. '한다, 하지 않는다. 한다, 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은 꽃잎에 따라 우리는 빙그레 웃기도, 우울해 하기도 합니다. 하는 것, 하지 않는 걸 꽃잎이 결정해주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문득 노란색 꽃 한 송이를 또 꺾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마음의 꽃잎을 세어 보곤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고백을 해 왔을 때 선뜻 대답을 하기 전에 꽃잎을 떼어 봅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바쁘다며 내 전화를 퉁명스럽게 끊어버렸을 때도, 늦은 밤 보고 싶다면서 집 앞까지 찾아왔을 때도, 입맞춤이 더 이상 수줍지 않게 되었을 때도, 꽃잎을 뜯습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에도 간절하게 마지막 꽃잎을 셉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도 돌아서고 나면 더 이상 꽃잎을 셀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발신번호가 없는 전화가 걸려올 때, 소식이 느린 친구가 그의 안부를 물어올 때, 단골집 아주머니가 왜 혼자 왔느냐 궁금해 할 때, 새벽 무렵까지 자꾸만 뒤척이게 될 때도, 물기 어린 손으로 꽃잎을 세어 봅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만나고,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에겐 일상과도 같습니다. 그 일상을 감각적인 이야기로 담아 낸 책은 사랑은 판타지이며, 그 판타지에 과감하게 뛰어 들라고 종용합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엇으로 빛날 수 있을까요? 사랑 때문에, 앓지 않는다면, 잠에 깨 눈을 뜬 후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저녁놀이 내릴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요?"

사춘기 때는 열혈 라디오 청취자였으나 점차 세월을 먹으면서 라디오보다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3초 마다 채널을 바꾸는 심드렁한 TV 시청자가 돼버린 지금, 아쉽게도 [푸른 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라는 FM 프로그램에서 작가가 전하는 사랑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책으로 접한 작가의 진한 감수성은, 지난 [이소라의 음악도시]에서의 '그 남자 그 여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럼에도 '그 남자 그 여자'에서 맛보았던 배시시 비집고 나오는 웃음, 어쩐지 내 얘기 같은 뜨끔함과 간혹 맺히는 눈물에는 살짝 미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베개를 부여잡고 혼자 볼이 빨개지는 달콤함은 없지만, 씨익 미소 지을 만한 유머는 있습니다.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는 없지만, 한번쯤 뒤돌아 보게 하는 미련은 남깁니다. "자, 마음엔 무엇을 담을까요? 베이글을 반으로 자르는 동안, 브로콜리 크림 수프가 식기 전에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에 빠질 거라는 믿음" 

꽃잎을 세고 있습니까? 이런! 사랑에 빠지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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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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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0여년 전쯤이었을 거다. 신문의 사회면 한 귀퉁이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그맣게 난 그 기사를 본 것이. 틀림없다. 90년대 중반이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한 대학생이 소설 '태백산맥'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적용됐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교양과목 수강 중 교수님과 함께 태백산맥, 아리랑을 읽고 토론수업을 했었다.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한 명의 젊은이가 감옥에 갈 처지라니. 내가 꿈을 꾸었던 걸까? 싶지만 어렴풋함 속에 틀림없이 자리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현재의 우리보다 딱 한 세대 앞선 시기는 온갖 금기의 시대였다. 지금은 TV에서 웃기는 소재로 종종 쓰이기도 하지만, 그땐 작은 속삭임조차 조심스러웠던 하지 말라는 것, 듣지 말라는 것 투성이인 금지의 시대였다. 자연스럽게 터부시 되는 것들이 아닌 인위적인 금기는 인간을 메말라가게 함과 동시에 작은 것에도 탐닉하고 목마르게 한다. 우물이 바로 앞에 있을 때는 한 바가지는 마셔야 겨우 가시던 목마름은, 사막 한 가운데서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오아시스만으로도 인간은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뤄'는 부모님이 의사인데다 중학교를 마친 학력을 이유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 돼 재교육을 받으러 산골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인분을 나르고, 광산에서 벌거벗은 채 일하는 고된 나날들을 버텨낸다. 갑자기 뚝 떨어진 모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조금 큰 도시로 나가 영화를 보고 시골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줄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재봉사의 아름다운 딸, 비록 천 명 중 세 명의 가능성일지언정 말 잘 듣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그리고 발자크의 소설이었다.

암울한 시기, 가슴이 답답할 만치 불행한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의 분위기는 밝다. "간단히 말해서 뤄와 나의 삶은 끝장난 셈이었다."는 문장에서조차 절박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익살스럽다. 이에 대해 작가는 몹시 서글프고, 힘든 시기였지만 가혹한 사회체제에도 불구하고 삶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품성만큼 뿌리 뽑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마오 주석에 관한 책이거나 순수학술서가 아니면 모두 불에 태워졌던 때, 부모가 모두 소설가에 시인이어서 옆 마을에 재교육을 받으러 끌여온 '안경잡이'에 의해 얻게 된 발자크의 소설 한 권으로 둘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책을 읽은 후에는 그 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본성과 감성, 사랑을 다룬 발자크를 비롯한 위고, 스탕달, 뒤마, 롤랑, 루소 등등의 소설이 전하는 것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뤄는 여자 친구인 재봉틀 소녀에게 발자크와 서양문학의 소설을 읊어주고, 소녀는 감탄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이 드러나며 서서히 사고를 깨치게 된다.

어쩌면 이런 책을 금서로 정한 마오 주석의 판단은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새롭게 접한 경이로움, 열린 감정과 사고는, 곱게 기다랗게 딴 머리를 단발로 자르게 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바느질만을 하던 순박한 시골 처녀를 도시로 떠나게 한다.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아버지든, 남자 친구든 모든 걸 버리고. 결국 마오가 두려워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전 세대가 겪었던 금기, 멀리는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중세의 금서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악착같이 막으려 했던 것들.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위험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는 언어와 내가 인간임을 알게 하는 책은 독재를 휘두르는 통치자일수록 위험을 넘어 위협으로 다가온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둑질을 해서까지 책을 얻으려 했던 뤄 역시 책을 불태우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멀리 도시로 가 버린 뒤다.

"가버렸구나"
"응, 대도시로 가겠대. 그 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뭐라고 했는데?"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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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 2008-02-1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놀란 책이었는데 읽고나니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느낀것도 많고 읽는 내내 유쾌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는것을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리뷰 너무 잘읽었고 제마음또한 이렇다는 것..^^

얼음무지개 2008-02-18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은 책일 것 같아서 사기는 했는데 사실 재미는 기대하지 않았었답니다. 그런데 좋은 책임과 동시에 아주 재밌기도 했지요.^^ 저는 리뷰는 쓰고 싶은데 잘 안써질 땐 잠시 다른 책 읽으면서 뭘 느꼈는지 생각해 보거나..다른 분들의 리뷰를 본답니다. 꼭 리뷰를 쓰려고 하는 책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잘 쓴 리뷰를 보다보면 아..맞아 나도 이렇게 느끼고.나도 이런 생각했었어..이런 표현도 좋구나..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죠. 그럼 그 느낌으로 리뷰를 씁니다. 잘 쓰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꼭 좋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어느 리뷰든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요.
 
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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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완벽히 넘어버린 나이라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나라는 사람이 상당히 무감각해졌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웬만한 것에는 감동도, 찡함도, 가슴 벅참도 느끼지 못하고, 대신 실망하고, 그럴 줄 알았지 내지는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하는 시니컬한 문장 밖에 내뱉지 못하는 나를 볼 때면 참 나도 이렇게 메마른 사람이 되어가는 건가 하는 썩 기분 좋지 않은 한숨이 종종 나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는 이 책 '구해줘'를 읽을 때도 내내 그랬다. '이것 참 뭐가 이래''사랑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주인공은 어디로 간 거야?''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등등을 중얼거렸을 뿐 좋은 감정으로 글자를 읽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나름 장점이 아주 없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3년 전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왔던 줄리에트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보다 나아진 거 하나 없이, 오히려  꿈조차 의미 없어진 현실 앞에서 그 꿈을 접고 프랑스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떠나기 이틀 전 룸메이트 콜린이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난 사이 충동적으로 친구의 비싼 옷을 입어본 줄리에트는 그대로 거리로 향하고, 타임스퀘어에서 우연히 자동차 사고로 의사 샘을 만난다.

할렘가에서 살다 그곳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의사가 된 샘은 자살로 아내를 잃은 후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다. 폭설이 내린 뉴욕의 거리는 번잡했고,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자신의 차 앞에 있던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 핸들을 돌리지만 가벼운 사고가 나고, 그 일로 인해 줄리에트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둘은 그 날 밤 사랑에 빠진다.

어떤 식이었든 삶을 지속할 이유를 잃었던 두 남녀는 사랑에 빠졌고, 순간적으로 빠져든 감정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동안 줄리에트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러브스토리였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결말에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예기치 않은 전환을 한다. 비행기 추락사고가 난 것. 샘이 줄리에트를 붙잡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을 자책하는 사이, 줄리에트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몇분 전 난동을 부려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추락사고에 관한 심문을 받는다. 더군다나 갑자기 샘 앞에 나타난 그레이스라는 여인은 샘에게 줄리에트는 살아있으나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샘은 그레이스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그녀는 10년 전 죽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점차 알 수 없어짐과 동시에 이 소설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생긴다.

소설 속에서 '구해줘'라는 간절한 단어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은 다들 구해달라는 외침을 가슴에 품고 있을 만큼 커다른 상처를 안고 있다. 줄리에트는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고 초라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샘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의사였으나 정작 부인은 임신을 한 상황에서도 너무 많은 상처로 인해 자살을 했고 샘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고, 자신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었는지 의문을 갖은 채 부여받은 임무대로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지러 지상에 왔다. 그레이스의 오랜 동료인 루텔리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레이스를 떠나보냈다는 슬픔에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렸고, 그레이스의 딸 조디는 엄마가 죽은 후 마약에 찌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을 겪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주인공들의 과거와 맞물려 진행되는 사건들은 지나친 우연의 반복과 빤히 들여다보이는 설정으로 강한 감정의 파편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예정된 수순을 밟아간다. 쉬운 대중 소설로서 별다른 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영화로 치자면 극장가서 보기는 조금 돈 아깝지만 내심 궁금하기는 해서 비디오 기다려서 봐야지 하고 마음 먹게 되는 정도의, 큰 매력까지는 가지지 못한 적당한 재미의 킬링타임용 소설쯤으로 보면 되겠다.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 앞을 막아설 운명은 없습니다' 소설의 카피는 그렇지만 소설은 그와 반대로 운명이 있다고 말한다. 샘과 줄리에트의 만남은 단 1초의 어긋남이라도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운명이었고, 그레이스가 하필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져가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 또한 운명이었다. 얽히고설킨 운명과 결국은 다 풀어내야 할 과거의 상처들. 그리고 용서. 좀 더 멋진 이야기가 됐을 뻔 했는데 작가의 내공이 아직은 부족한 듯.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다지 두드러진 개성이 돋보이지도 않고. 술술 책장은 잘 넘어가는 그럭저럭 읽을만한 프랑스산 대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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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팩션이라는 건 아이디어다. 팩션의 승부처는 기막힌 아이디어와 역사와 절묘하게 얽히며 풀어나가는 스토리, 누구나 무릎을 칠 만한 역사적 재해석에 있다 하겠다. 어떤 영화, 어떤 소설, 어떤 드라마는 본래의 장르와 아이디어 등이 맞아 떨어져 하나의 사회현상으로까지 퍼져가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라는 건 작가의 내공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필수적 요소이자, 작품의 승패는 그 지점에서 갈려 나갈 수밖에 없다. 

 

  ‘이데아의 동굴’은 무척 흥미 있는 책이었다. 마치 암포라에 새겨진 그림을 연상시키는 표지와 더불어 제목인 ‘이데아의 동굴’부터 강하게 고대그리스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쳤을 때 시작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아카데메이아 학생이었던 한 아름다운 젊은이가 죽었다. 사인은 늑대의 습격.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의심을 품은 철학자와 그에 동감하는 해독자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지닌 이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에 써진 「이데아의 동굴」이라는 소설과, 이 소설을 번역하는 번역자의 이야기가 겉을 두르고 있는 액자소설이다. 첫 번째 장을 넘어갈 때까지 중심이야기가 되는 「이데아의 동굴」과 주석처럼 띠를 두르고 있는 번역자의 이야기 둘을 동시에 소화해야 했고, 짧은 장이었음에도 이야기는 다소 복잡했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에이데시스’라고 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개념을 이해해야 했고.

 
연쇄살인범을 쫓는 추리소설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시킨 그 발상자체만으로도 ‘살인의 해석’은 여느 독자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단번에 치솟을 만했다. 발상은 획기적이었고 소설의 내용은 궁금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와우.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대단하다. 프로이트가 미국 땅을 밟았던 1909년. 당시의 미국을 그대로 재현한 소설은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융과 그 외 실존인물들을 소설에 그대로 등장시켜 시작부터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다빈치코드’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의 팩션 블록버스터 소설. 그 기대는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조금씩 삐걱댄다.

‘이데아의 동굴’과 ‘살인의 해석’은 추리소설의 형식만을 빌렸을 뿐 각각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담고자 했고, 프로이트 학설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데아의 동굴’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나, ‘살인의 해석’은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첫 번째 장의 난해함과 낯설음을 가뿐히 넘기고 두 번째 장으로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데아의 동굴’은 점차 독자들에게 한 가지씩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세 번째 장. 네 번째 장. 다섯 번째 장… 장을 넘길수록 이해해야 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은 많아지지만 그만큼 책에 몰입하게 되고 빠져들게 되는 속도도 빨라진다. 마지막 최종 열쇠는 정말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도대체 뭐지? 무엇이 진실일까? 하는 사이에 반전은 거듭되고, 최종 열쇠가 밝혀지는 순간 설마설마 하다 머릿속이 멍- 해지고, 어느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데아의 동굴’은 영화로 비견하자면 숨겨진 걸작독립영화와 같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구석구석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꼭꼭 채워진 완벽한 영화.

반면 ‘살인의 해석’은 규모는 블록버스터 급이지만, 너무 거대한 나머지 그 모양새조차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난 영화 ‘고질라’처럼 한껏 크게 가졌던 기대는 중반부로 갈수록 그 기대치를 점점 낮추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엥? 하다 끝나 버린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실존 인물들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는 등장하나마나에 머물다 말고, 오히려 추접스런 그들의 사생활만을 밝히다 쏙 이야기의 뒤로 사라진다. 프로이트가 던진 몇몇 조언들을 제외하면 굳이 그네들이 거기에 있지 않아도 사건의 해결이나 진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의 학설을 근거로 추리소설을 만들고자 했다고 해서 굳이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할 당시를 시점으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프로이트 이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학설은 그의 저서만으로도 충분하다. 55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에서 프로이트의 미국 방문과 제자 융과의 갈등 등 같이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빼더라도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살인 사건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융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한때 떠오르기는 하지만, ‘살인의 해석’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용의자로서의 가능성을 두는 방식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데아의 동굴’은 칭찬만 가득 써놓고, ‘살인의 해석’은 부족한 점만 부각시킨 것 같다. ‘이데아의 동굴’은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칭찬만 해도 모자랄 만큼 훌륭한 책임은 틀림없지만 ‘살인의 해석’의 경우 장점이 없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점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결국은 처음에 언급하고 있듯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아이디어로만 본다면 ‘이데아의 동굴’이나 ‘살인의 해석’ 둘 다 끝내주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롯한 그의 학설을 함축하면서 동시에 입증하고 있는 ‘이데아의 동굴’은 사건의 진행방식이나 반전,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저 완벽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야기가 충실한 것이다. 잘 짜진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마저 넘기면서도 손에서 쉽게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성과 본능의 충돌, 논리와 감성의 뒤섞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고를 해나가게 만드는 지적인 글쓰기는 책읽기를 마친 순간, 더없는 만족감을 준다.

기막힌 발상과 프로이트 등장,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방식인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혐의두기 방식을 통해 초반에는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지만 ‘살인의 해석’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아이디어와 작가가 가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에 반해 이야기는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끝으로 향할수록 빈약한 이야기는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결론마저 이르면 쩝 하고 입맛을 다시게 되는 아쉬움이 든다.

흥행으로 보자면 ‘살인의 해석’은 대박을 터트렸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달간을 머물렀고, 여전히 서점에 가면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다. ‘이데아의 동굴’은 글쎄.. 몇 만부나 팔렸을까. 그나마 2005년에 출간된 이 책이 아직까지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서점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승패를 따진다면 단연 ‘이데아의 동굴’을 꼽는데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겠다. 뭐, 스포츠도 아닌데 이기고 지고를 굳이 따질 것도 없겠지만 그저 좋은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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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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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은 전복(顚覆)이다. 다 뒤엎는다는 것이다. 유괴범은 모조리 다 몹쓸 놈들이라는 당연한 판단을 뒤엎고, 유괴를 당한 할머니가 오히려 유괴극을 진두지휘하게 된다는 기발한 착상은 여타의 발상 자체를 뒤엎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들이 어찌됐든 해내고야 마는 것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고, 여하튼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을 뒤엎는다.  

감옥에서 만난 3인조 어리바리 유괴단이 할머니를 유괴했다. 물론 목적은 돈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가 아니다. 엄청난 갑부인데다 하필 그 할머니를 타깃으로 정한 건 유괴단의 우두머리 격인 겐지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다. 고아원에 있었을 때 산타클로스처럼 많은 걸 주었던 인자한 할머니. 처음부터 해칠 계획은 없었던 거다. 그냥 잠깐 데리고 있다 돈만 받고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원하는 돈은 5천만엔. 그거면 된다. 그런데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나름 철저했던 계획은 할머니를 유괴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먹혔다. 워낙 한적한 시골이라 동네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 노력도 했고, 도시에 유괴 후 할머니를 데리고 있을 방도 마련해 놨다.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 스케줄도 다 확인했다. 그래서 어찌하여 유괴까지는 성공. 그런데 웬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유괴에 생각지도 못한 허점이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다. 더군다나 몸값이 5천만엔이라는 말엔 불같이 화를 낸다. 할머니는 내가 어떤 사람인데 겨우 5천만엔이냐며 버럭 화를 내시더니 100억엔에서 한 푼도 못 뺀다고 호통을 치신다. 자-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1970년 후반에 발표되었다고 하는 이 책은 2007년 현재 읽어도 거의 과거라는 시대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세련됐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과 달리 문체는 투박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전개를 펼쳐나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 때문이리라.

유괴를 처음 계획할 당시에도 우두머리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유괴를 반대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절대 해치지 않을 거고, 어린아이가 아닌 할머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동참을 하는,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고 다른 쪽으로 보자면 참 인간적인 유괴범이다. 할머니를 유괴할 때에도 당시 같이 있던 젊은 여인은 상관없으니 풀어달라는 설득에 그대로 넘어가 풀어주는데다 이후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동감하며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는 유괴범들이니 이들이 유괴범이라는 자체가 상당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냥 할머니 말 잘 듣는 돈이 좀 필요한 젊은 청년들이라고나 할까.

「이 나라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 이 나라는 내게 뭘 했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몸값을 100억엔으로 올리고, 유괴극을 앞장 서 지휘하면서까지 유괴범들에게 동참을 했을까? 할머니는 전쟁통에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부자였으나 돈만 모으기 보다는 많은 자선사업과 본래 타고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할머니는 막상 나이가 여든둘이나 되고 보니 깊은 회한이 밀려들었다.「산촌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납득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쓰일 수 있다면 그동안 키워온 보람도 있다. 국가라는 허울을 쓴 권력자들에게 과연 그런 기특한 생각이 있을까?」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은 할머니의 유괴극 동참에 자식들의 불효라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자식을 앗아가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죽은 후 평생 자신과 이웃들이 땀으로 일구어 낸 재산마저 세금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빼앗아 권력자들의 배나 채워줄 나라에 대한 불신과 원망에서 출발한다. 

모든 상식의 전복에서 시작한 책은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결국은 다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사실은 한 번도 뭔가가 뒤집어졌던 적은 없다. 힘없는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 항상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살아온 탓에 언제부턴가 범죄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이들이 오히려 누구보다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지개 동자. 할머니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유괴범들은 멋지고 씩씩한 할머니와 함께 폼나게 세상을 한 번 들었다 놨다. 정말 크게 한 건 터트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하루를 잘 살면 되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만큼의 돈만 필요한 평범한 사람들. 그렇다면 100억엔은 어떻게 됐을까?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진부하다 싶더라도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의 결말이 좀 더 그럴 듯 하지 않나 싶지만... 우리의 우상 할머니는 절대 한 푼도 허투루 쓸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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