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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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 인간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할 때 그는 절대적인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 사회들이 존재하는 한 어느 정도의 검열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어떻게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처럼 ‘이웃 사람을 위한 자유’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도 들어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바를 증오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네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겠다.’]   p. 13


고전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인터넷 국어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지만, ‘종이책 읽기를 권함’의 저자는 ‘중학교 때 읽기 시작해서 아직도 다 못 읽은 책’, ‘아직 읽지 않았으면서도 남에게는 읽었다고 하는 책’,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숙제와 같은 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고전의 정의는 ‘일단 한 번 읽어보면 알게 되는 책’입니다. 왜 고전인가. 왜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하며,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읽히는가. 그건 일단 읽어보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천한 저의 경험상 그러합니다.


1945년에 출간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그의 또 다른 소설 ‘1984년’과 함께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풍자한 걸작으로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두 소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과연 읽어 봤는가에 이른다면 아마도 이 소설을 알고 있다는 사람의 반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난 이제야 ‘동물농장’을 읽었지만, 과연 이래서 고전이로구나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10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우화는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그 어떤 철학서, 인문학서보다 통렬하게 전체주의와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며 풍자하고 있습니다.

 

‘동물농장’은 존즈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의 밤에서 시작됩니다. 농장 동물들에게 존경받는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전날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 꿈은 인간이 사라지고 난 뒤 있을 세상에 관한 꿈입니다. 메이저 영감은 생산은 않으면서 소비하는 생물인 인간의 폭정에 의해 비참한 노예와도 같은 생애를 사는 동물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인간을 몰아낼 것을 주장합니다. 사흘 뒤 메이저 영감은 숨을 거두게 되고, 메이저 영감이 주장한 봉기를 '동물주의‘라는 사상으로 추진하며 은밀히 준비했던 동물들은 어느 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성공적으로 수행됩니다.

 

 [우리는 ‘동물농장’의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들을 그대로 마르크시즘 이후의 소련사에 대입시킬 수 있다. 가령 동물농장의 예언자인 메이저 영감은 마르크스이며, 음험한 현실주의 독재자 나폴레온은 어김없는 스탈린이고, 스탈린에게 축출당한 트로츠키는 이 소설에서 이상주의자 스노볼로 등장한다. 그들의 봉기는 당연히 1917년의 대혁명이고, 이 혁명에서 영원히 멸망한 차르 정권은 매너 농장의 게으른 주인 ‘존즈’씨에 해당된다.]  p. 140

 

 ‘동물농장’은 누가 봐도 과거 사회주의 체제를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멀리 볼 것도 없이 북한의 실상과 비교해 봐도 아주 정확히 일치합니다. 봉기는 성공적이었으며, 잠시나마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실현시키지만 동물들이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두뇌 노동자인 돼지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한 쪽은 축출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완벽한 독재체제가 형성된 동물농장은 봉기 이전보다 더 많은 배급량을 받고 있다는 통계 발표에도 불구하고 노동량은 해마다 늘어나지만 배급량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불만을 품은 동물들은 숙청되고, 특권층이 된 돼지들은 물리적인 공포와 대중 동원, 항의의 봉쇄, 관심의 왜곡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결국은 두 발로 선 채 채찍을 휘두르며 피지배층인 동물들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내용 덕에 ‘동물농장’은 군사적 동맹국을 공격하는 책을 발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 당시 4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동물농장’은 소련에게만 한정된 것도, 사회주의 체제만을 풍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서문이 보여주듯 ‘동물농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재에 대한 풍자이며,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때 지구상의 반을 차지했던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무너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권력의 타락과 인간을 동물처럼 지배하는 권력의 만행은 비단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영국의 동물들아, 아일랜드 동물들아 / 온 누리 모든 땅 위의 동물들아 / 귀 기울여 들으라 / 황금빛 미래 향한 내 즐거운 소식을 / 언젠가 그날이 올지니 / 전제자 인간은 추방되리라 / 풍요한 영국의 들판에는 / 오직 동물들만 활보하리라 / 코에서는 굴레가 사라지리라 / 등에서는 멍에가 벗겨지리라 / 재갈과 박차는 영원히 녹슬리라 / 잔인한 회초리는 더 이상 소리 없으리.]  p. 31-32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죽음까지 착취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 줄 모르는 대중들과 침묵하는 지식인. ‘동물농장’에서 묘사하는 사회와 인간군상은 어쩌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 빼닮았기에 암울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동물들이 불렀던 노래는 희망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만들었던 세상은 그렇지 못했듯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희망과 절망은 세대를 거슬러 공존합니다. 완벽한 유토피아란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출발점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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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읽기를 권함 - 우리시대 어느 간서치가 들려주는 책을 읽는 이유
김무곤 지음 / 더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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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보다 더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그게 있다면 나에게 가르쳐주면 좋겠다.」 p. 155


이 책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안타까운 연애소설도, 지금 당장 일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소리치는 자기계발서도 아닌,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담담하게 책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그런 책일 뿐인데 말입니다.


아주 어릴 적,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저자의 집에 어느 날 엄청난 양의 책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을 먹을 때 불쑥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그것, 너희들 것이다.” 아버지는 동네 책방에 들려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은 다 배달해 달라”고 말씀하시고 집 안에 작은 서점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자의 치열한 책 읽기가 시작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책을 읽었을까 떠올려봅니다. 8살 때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처음 한글을 배웠으니 7살까지는 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집에 딱 한 질 있던 전래동화 전집을 수십, 수백 번 읽었던 기억,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우리 집에 없는 책들이 탐나 친구와 놀기보다 책을 발견한 그 자리에 앉아 읽었던 기억, 어머니께서 어디선가 한 권, 두 권씩 빌려다 준 책을 다 읽고 돌려주고 또 다시 새로운 책을 빌려오시고는 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서점에서 문제집이 아닌 책을 용돈을 모아 샀던 기억, 친구들은 잘 쳐다보지도 않았던 학급 문고를 잘 골라 읽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느낀 감정은 공감과 부러움이었던가 봅니다. 인사동 고서점과 미국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 일본의 진보초. 수많은 책들과 작가들, 그리고 책에 미친 사람들. 목적을 두지도, 인내를 요하지도 않는, 그저 즐거움이자 생활일 뿐이라는 그의 끝없는 책 예찬에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나도 지금 당장 저들처럼 스트랜드 서점의 좁은 통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수많은 서가를 뒤지고 싶은 작은 두근거림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동질감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미 당신은 책 바보일 확률이 높습니다.


고서점에 갔다가 책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통장에 있던 돈을 다 찾아들고 나간 사람, 돈이 없던 유학시절 옥스퍼드 영어사전 한 질을 너무 갖고 싶어 책 한 트럭을 내다판 사람, 인사동 고서점에서 혼자 책과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 한때는 책을 읽기 위해 기차를 탔던 사람, 책 읽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사람. 그 스스로 간서치(看書癡)임을 고백하는 글들은 목적 없는 독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권하는 저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묘하게 설득적입니다. 여타의 주석과 뭔가 다른, 본문과 비슷한 양의 주석마저도 소중합니다.


「종이책 읽기를 권합니다. 오늘날같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종이책을 읽는 일만큼 느리게 해야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갑갑함으로 인해 책을 멀리 하려는 충동을 느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이책에서 얻는 깨달음과 감동은 한번 얻으면 다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즐거움을 당신에게 드릴 것입니다.」 p. 5


공부로서가 아닌 책 읽기를 권합니다. 효용이 없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또는 아내에게 핀잔 받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야 말로 정말 쓸모가 있는 책 읽기라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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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 반反성장 복지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요시다 타로 지음, 송제훈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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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의료, 교육 등 인간개발지표를 충족시키는, 분명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이 두 기준을 충족시키는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단 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뭔가 염증을 느끼고 있다. 특별한 정치인이 아닌 사람도, 똑똑한 대학생이 아니어도, 환경운동가도 뭣도 아닌, 그저 바람이 불면 낮게 움츠리고 하루하루 고되게 일상을 사는 그런 우리들이 느끼기에도 뭔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염증은 불안으로까지 번져간다. 세계경제가 어떻고, 지구의 시계가 얼마나 남았다더라 하는 뉴스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제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언제까지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관타나모 수용소와 미국의 경제봉쇄, 오래된 독재국가이자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체 게바라. 우리에게 알려진 쿠바의 모습은 거의 이런 단어들로 조합된다. 사실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쿠바가 뜻밖에도 새로이 다가온 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영화 ‘식코’일 것이다.(아직도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있다면 꼭 보기를 바란다.) 미국 의료체계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폭로한 영화 ‘식코’에서의 쿠바는 미국과는 달리 매우 인간적인 나라로 등장한다. 아주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당황스럽다. 저 나라는 무서운 독재자가 다스리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나?


이 책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는 두 가지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한다. 정답은 모두 ‘아니오.’다. 우리는 오직 성장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며, 쿠바는 오랫동안 독재체제를 유지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의 어느 나라보다 더 안전한 나라이며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세계 유일의 지속가능한 국가. 그것이 쿠바이다.


「2006년 10월에 공표된 세계자연보호기금의 <리빙 플래닛 리포트>에 의하면 인간활동은 이미 지구의 한계를 25%나 상회하고 있다. 환경의 허용 안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이러한 나라의 주민은 대체로 의료, 교육, 빈곤 등에서 최저의 복지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후손에게 청구서를 지불하게 하는 일 없이도 유엔개발계획이 평균수명, 문자해독률과 교육수준, 1인당 GDP를 토대로 산출한 인간개발 지수 0.8이상을 충족시킨다! 이러한 두 기준을 충족하는 나라는 지금으로서는 지구상에 단 한 나라밖에 없는 것이다.」p.29-30


물론 쿠바가 완벽한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있고, 교육 수준은 높으나 능력을 활용할 마땅한 일자리는 많지 않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고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로 인한 중앙집권적인 하향식 체계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쿠바는 가난할지언정 비참하지 않다.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살고 있지만 집이 없는 사람은 없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해 죽는 사람도 없다. 대규모 농장으로 큰 이익을 내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생태 농업으로 공동체가 유지되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있다. 허리케인이 매년 불어 닥쳐 집이 무너지고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지만 그로 인한 사망자는 거의 없으며, 놀랄 만큼 빠르게 재건한다.


과거 소련의 원조에 크게 의지했던 쿠바는 소련이 무너지며 원조가 끊기고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고립에 처해지자 경제공황에 맞먹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석유가 수입되지 않게 되자 석유가 없이도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가며 현재까지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고 있어 대안 사회의 모델이 되며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언제까지나 서구식의 번영이 유지될 수는 없다. 경제성장이 되지 않으면 풍요롭지 않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세계는 이제 어떻게 하면 성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내려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으며 이미 지구는 인류를 지탱하기에는 한계점을 지나 버렸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환경에 일찍 맞닥뜨린 쿠바는 지구 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교육, 의료, 복지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충격적인 위기에서도 사람들은 비참해지지 않았으며 빈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초저공비행 국가, 몰락선진국 쿠바에게서 배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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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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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당히 상투적인 설정이었다. 새로운 학년이 되었고, 같은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것, 뭔가 둘 사이에 중대한 사건이 있다는 것,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뽕 나타난 남자친구와 사회적인 명성과는 괴리감을 나타내는 남자친구의 어머니 등등. 그리고 비록 성적은 하위권이지만 발랄한 성격에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는 한 친구와,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행복하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학교에서도 외톨이인 또 다른 친구. 결정적으로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기차여행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상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유진과 유진’을 상투적인 설정과 교과서와 같은 진부함을 풍겨대며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 같은 표어를 읊어대는 소설로 생각한다면 정말 좋은 책을 무심히 손에서 흘려보내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나, 내 친구, 동생, 언니, 누나 또는 내 딸이 되어 있을 이 이름은 책을 덮고 나면 꼭 안아주고 싶은 아이들이 되어 있을 테니까. 

 키가 큰 것 말고는 그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유진은 새 학년이 되어서도 단짝친구 소라와 같은 반이 된 것이 기뻤다. 번호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나와 키를 재는 동안에도 소라와 나란히 번호가 되기 위해 키를 낮춘 노력 끝에 앞뒤 번호가 된 것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유진이라는 이름이 아무리 평범하기로서니 성까지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던 것. 더군다나 그 친구는 어릴 때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가 중간에 이사를 간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사건. 그런데 그 친구는 무안하게도 전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자꾸 나를 안다고 하는 이상한 애 정도로만 생각했던 유진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중요한 일을 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필요한 건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해 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따뜻한 대화 한 번 한 적 없는 엄마, 아빠를 새엄마 새아빠로 상상하고 그 분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고 공부를 잘 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어온 유진은 자꾸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엄마가 내 살갗이 벗겨지도록 타월로 밀고 밀면서 자꾸만 잊으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함성과 함께 들려왔다. 나는 그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려 본 적이 없었다. 정해진 길을 가는 데는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p. 167 

 최근 이슈가 되었던 몇몇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성폭력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을 결코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피폐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 후유증은 성폭력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으로 몰아넣으며 평생을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성년이 돼 가해자를 살해했던 사건 등 몇몇 대표적인 성과 관련된 폭력이나 학대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유진과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대로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분노와 좌절로 변해 아이들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한 유진은 연예인에 열광하고 부모님께 최신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고,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에게 이런 시를 쓰지 않게끔 당장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고 싶은 심정을 단짝친구와 나누는 평범한 여중생으로 자라게 된 반면, 또 다른 유진은 사랑받으려면 내가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할 만큼 하루하루를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일탈을 해 버리고 마는 행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유진이 겪었던 그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벌어진 뒤 그 사건을 받아들인 가족의 반응과 두 아이를 대한 부모님의 태도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일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주었던 부모님과 살갗이 벗겨질 만큼 피부를 문질러대면서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소리치며 기억을 잊게 한 부모님.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부모님과 딸에게는 기억을 잊게 했으나 정작 당신들은 잊지 못하며 깨진 그릇이 어떻게 될 지 늘 염려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각각 다르게 성장한 유진과 유진은 결국 어떤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이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삶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폭력을 주제로 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상과 감성을 세심하게 들여다 본 소설은 같은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이건 내 이야기잖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20-30대들에겐 막 빠져나온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미소 짓게 할 것이고, 자녀를 키우는 기성세대에겐 아.. 내 자녀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저마다 나름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유진과 유진에게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두 눈을 맞추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꺼내놓을 만큼.

「엄마는 그 동안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줬다. 어떤 것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챙겨 주기도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엄마와의 대화였다.」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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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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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싫어..”

내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는 말. 목소리조차 또렷하다. 혼자 그네를 탔고,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두 줄서기임에도 내 옆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다급하게 체육복이나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 이상 해가 지나고 반이 바뀌면 나를 보러 놀러 오는 친구는 없었다. 난 그런 아이였다.

「에바는 몸을 웅크리고 왼쪽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뽑아냈다가 새로 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가 이름을 불렀다. ... 에바는 끈을 꿰는 속도를 더욱 늦췄다.」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문제를 풀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에바는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지우개를 찾는다. 체육 시간에 팀을 짜기 위해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에바는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다시 꿰기 시작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에바는 혼자 청어 조각이 든 샐러드를 먹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산사나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땅바닥에 앉아서.

에바는 뚱뚱하다. 뚱뚱한 에바는 친구가 없고, 늘 사람들의 관심에서 빗겨나 있다. “어머! 에바가 있었구나.” 잘 살피지 않으면 뚱뚱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에바가 있었는지 모를 만큼 자신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아이. 우리 곁에는 늘 에바가 있었다.

‘씁쓸한 초콜릿’은 그랬던 에바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점점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주 우연하게 만난 남자친구 미헬로부터 시작된다. 미헬은 우리나라로 치면 상업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학교를 마치면 돈을 벌기 위해 떠날 계획을 이야기한다. 에바는 남자친구 미헬이 왜 뚱뚱한 자신을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미헬에게 에바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똑똑한 아이였고, 그것이 자랑이었다. 에바에게 미헬이 가난과 학교가 아무렇지 않았던 멋진 남자친구였던 것처럼, 미헬에게 에바는 뚱뚱한 체격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똑똑한 여자친구였다.

「에바는 침대 옆에 있는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초콜릿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 부드럽고도 쓴 맛이 났다! 다정한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슬픈 흐느낌처럼 씁쓸했다.」

에바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엄마는 초콜릿을 줬다. 그것은 부드럽고 쓴 맛이 난다.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에바는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다 먹고 나면 먹기 전보다 에바는 더욱 비참해진다.

학창시절을 이제는 추억하는 나이가 된 지금도 나에게 그때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고 몰려다니며 추억을 쌓기 바빴던 그 때의 난, 추억을 쌓아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아이였고, 체육시간에 팀을 짤 때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에바를 발견할 때면 난 온전히 가슴 안에서 상처가 덧나고야 만다.

하지만 에바는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초콜릿을 먹던 자신을 아프게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미헬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할 줄 알게 된 에바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점차 자신의 가치를 빛내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그늘에 있는 에바가 아닌, 수학을 잘 하는 에바,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견을 제시할 줄 아는 에바가 되어 간다. 체형을 가려줄 짙은 색깔의 원피스 대신 밝은 색의 티셔츠를 입을 줄 에바, 거짓말을 하고 음식을 버리다가 밤에 몰래 허겁지겁 먹어대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저칼로리 식단으로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에게 얘기할 줄 아는 에바.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할 만큼의 장점. 그리고 어쩌면 단점은 애초부터 단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 자신만이 어쩔 줄 몰라하고 필사적으로 가리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건 여린 감수성을 지닌 사춘기뿐만이 아닌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씁쓸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나에게 에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묻는다.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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