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상투적인 설정이었다. 새로운 학년이 되었고, 같은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것, 뭔가 둘 사이에 중대한 사건이 있다는 것,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뽕 나타난 남자친구와 사회적인 명성과는 괴리감을 나타내는 남자친구의 어머니 등등. 그리고 비록 성적은 하위권이지만 발랄한 성격에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는 한 친구와,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행복하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학교에서도 외톨이인 또 다른 친구. 결정적으로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기차여행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상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유진과 유진’을 상투적인 설정과 교과서와 같은 진부함을 풍겨대며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 같은 표어를 읊어대는 소설로 생각한다면 정말 좋은 책을 무심히 손에서 흘려보내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나, 내 친구, 동생, 언니, 누나 또는 내 딸이 되어 있을 이 이름은 책을 덮고 나면 꼭 안아주고 싶은 아이들이 되어 있을 테니까. 

 키가 큰 것 말고는 그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유진은 새 학년이 되어서도 단짝친구 소라와 같은 반이 된 것이 기뻤다. 번호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나와 키를 재는 동안에도 소라와 나란히 번호가 되기 위해 키를 낮춘 노력 끝에 앞뒤 번호가 된 것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유진이라는 이름이 아무리 평범하기로서니 성까지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던 것. 더군다나 그 친구는 어릴 때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가 중간에 이사를 간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사건. 그런데 그 친구는 무안하게도 전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자꾸 나를 안다고 하는 이상한 애 정도로만 생각했던 유진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중요한 일을 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필요한 건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해 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따뜻한 대화 한 번 한 적 없는 엄마, 아빠를 새엄마 새아빠로 상상하고 그 분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고 공부를 잘 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어온 유진은 자꾸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엄마가 내 살갗이 벗겨지도록 타월로 밀고 밀면서 자꾸만 잊으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함성과 함께 들려왔다. 나는 그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려 본 적이 없었다. 정해진 길을 가는 데는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p. 167 

 최근 이슈가 되었던 몇몇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성폭력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을 결코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피폐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 후유증은 성폭력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으로 몰아넣으며 평생을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성년이 돼 가해자를 살해했던 사건 등 몇몇 대표적인 성과 관련된 폭력이나 학대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유진과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대로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분노와 좌절로 변해 아이들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한 유진은 연예인에 열광하고 부모님께 최신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고,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에게 이런 시를 쓰지 않게끔 당장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고 싶은 심정을 단짝친구와 나누는 평범한 여중생으로 자라게 된 반면, 또 다른 유진은 사랑받으려면 내가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할 만큼 하루하루를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일탈을 해 버리고 마는 행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유진이 겪었던 그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벌어진 뒤 그 사건을 받아들인 가족의 반응과 두 아이를 대한 부모님의 태도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일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주었던 부모님과 살갗이 벗겨질 만큼 피부를 문질러대면서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소리치며 기억을 잊게 한 부모님.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부모님과 딸에게는 기억을 잊게 했으나 정작 당신들은 잊지 못하며 깨진 그릇이 어떻게 될 지 늘 염려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각각 다르게 성장한 유진과 유진은 결국 어떤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이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삶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폭력을 주제로 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상과 감성을 세심하게 들여다 본 소설은 같은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이건 내 이야기잖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20-30대들에겐 막 빠져나온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미소 짓게 할 것이고, 자녀를 키우는 기성세대에겐 아.. 내 자녀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저마다 나름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유진과 유진에게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두 눈을 맞추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꺼내놓을 만큼.

「엄마는 그 동안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줬다. 어떤 것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챙겨 주기도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엄마와의 대화였다.」   p. 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