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난 네가 싫어..”

내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는 말. 목소리조차 또렷하다. 혼자 그네를 탔고,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두 줄서기임에도 내 옆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다급하게 체육복이나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 이상 해가 지나고 반이 바뀌면 나를 보러 놀러 오는 친구는 없었다. 난 그런 아이였다.

「에바는 몸을 웅크리고 왼쪽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뽑아냈다가 새로 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가 이름을 불렀다. ... 에바는 끈을 꿰는 속도를 더욱 늦췄다.」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문제를 풀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에바는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지우개를 찾는다. 체육 시간에 팀을 짜기 위해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에바는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다시 꿰기 시작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에바는 혼자 청어 조각이 든 샐러드를 먹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산사나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땅바닥에 앉아서.

에바는 뚱뚱하다. 뚱뚱한 에바는 친구가 없고, 늘 사람들의 관심에서 빗겨나 있다. “어머! 에바가 있었구나.” 잘 살피지 않으면 뚱뚱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에바가 있었는지 모를 만큼 자신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아이. 우리 곁에는 늘 에바가 있었다.

‘씁쓸한 초콜릿’은 그랬던 에바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점점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주 우연하게 만난 남자친구 미헬로부터 시작된다. 미헬은 우리나라로 치면 상업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학교를 마치면 돈을 벌기 위해 떠날 계획을 이야기한다. 에바는 남자친구 미헬이 왜 뚱뚱한 자신을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미헬에게 에바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똑똑한 아이였고, 그것이 자랑이었다. 에바에게 미헬이 가난과 학교가 아무렇지 않았던 멋진 남자친구였던 것처럼, 미헬에게 에바는 뚱뚱한 체격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똑똑한 여자친구였다.

「에바는 침대 옆에 있는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초콜릿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 부드럽고도 쓴 맛이 났다! 다정한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슬픈 흐느낌처럼 씁쓸했다.」

에바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엄마는 초콜릿을 줬다. 그것은 부드럽고 쓴 맛이 난다.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에바는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다 먹고 나면 먹기 전보다 에바는 더욱 비참해진다.

학창시절을 이제는 추억하는 나이가 된 지금도 나에게 그때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고 몰려다니며 추억을 쌓기 바빴던 그 때의 난, 추억을 쌓아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아이였고, 체육시간에 팀을 짤 때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에바를 발견할 때면 난 온전히 가슴 안에서 상처가 덧나고야 만다.

하지만 에바는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초콜릿을 먹던 자신을 아프게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미헬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할 줄 알게 된 에바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점차 자신의 가치를 빛내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그늘에 있는 에바가 아닌, 수학을 잘 하는 에바,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견을 제시할 줄 아는 에바가 되어 간다. 체형을 가려줄 짙은 색깔의 원피스 대신 밝은 색의 티셔츠를 입을 줄 에바, 거짓말을 하고 음식을 버리다가 밤에 몰래 허겁지겁 먹어대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저칼로리 식단으로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에게 얘기할 줄 아는 에바.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할 만큼의 장점. 그리고 어쩌면 단점은 애초부터 단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 자신만이 어쩔 줄 몰라하고 필사적으로 가리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건 여린 감수성을 지닌 사춘기뿐만이 아닌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씁쓸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나에게 에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묻는다.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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