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지만 적극적으로 물어보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은수가 연신내에 산다는 것, 연신내의 그 집은 겨울이면 비탈길이 꽝꽝 얼어서 차는 물론이고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곳에 있는데 해마다 누군가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밧줄을 백 미터도 넘게 묶어놓아서 그것을 잡고 사람들이 오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수는 그 광경이 좋아서 어쩐지 겨울을 기다리게 되지만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매어놓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게 왜 좋아, 그게 왜, 하고 물으니까 은수는 재밌잖아요, 했다. 붙들 것이 있다는 게 누나는 재미있지 않아요? - P48

내가 그동안 누렸던 것들이 아쉬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로커룸에서 머리를 맞대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거기에서 나와 모두 잠든 사이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을 누볐던 그 시간들이 뭔가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면 그것이 멈춰져야 하는 데도 일종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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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하나만 해도 그래. 영어는 ‘나‘도 ‘저‘도 전부 ‘I‘지.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평소 흔히 하는 말도 편지에서는 왜 좀더 격식을 차릴까? 평소에는 ‘그대‘라고 부른 적도 없고 ‘당신‘이라고 불린 적도 없어. 이모와 이모부 편지를 따라서 시작한 거지만 편지 속에서 ‘당신‘이라고 불리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솔직히 당신이 편지를 써달라고 했을 때는 메일이 어때서 싶었어. 무엇보다 나는 달필이 아니야. 직업상 남들 앞에서 글씨를 쓰기는 하지만 칭찬받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기본적으로 메일로 보내고 편지는 반년에 한 번만 보내야지 하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부임하자마자 정전이야. 당신하고 연락하려면 편지를 쓰는 수 밖에 없어.
그게 지금은 전화선이 복구돼도 메일은 최대한 피하고 당신하고 주고받는 편지를 즐기려 해.
메일로는 ‘당신‘이라고 불러주지 않겠지? 편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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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는 자세로
엄청나게 견디고 있다
이번 삶이 날 터뜨리진 않았지만
자꾸 쏘아올릴 것 같아서

-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몸과 마음의 고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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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놓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철종, 《미래를 여는 핵의학과 함께 핵의학 외길 반세기》, 새한사업, 2014, 7쪽)

잠시 책탑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사는 까닭은 뭘까. 그야 자명하다. 내 삶은 실비아 플라스와 마찬가지로 의문형이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이 써보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작품을 잘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할까?

(타니아 슐리, <실비아 플라스>,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 2016, 118쪽)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산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작품을 잘 쓰기 위해 책탑을 쌓는다.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삶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하여 아마 나는 계속 덕후의 삶을 살 듯하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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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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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하나뿐인 주인공 한아는 이런 사람이다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의 소유자자주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에직접 짠 니트와 걸을 때마다 편안하게 접히고 움직이는 긴치마를 입은 사람의상디자인과를 졸업했고수선과 업사이클링 그 어느쯤에서 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 '환생'을 운영한다.


그런 한아에게 있어 최근의 고민은만난지 11년된 남자친구 경민이다경민이 가 있었던 캐나다 밴쿠버 근교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소형 운석이 떨어져 천체 관측중이던 시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고한국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경민이 이상했다촉감이 개구리 같아서 개구리 채 친 것 같다며 먹지 않던 가지무침을 먹질 않나, 11년 동안 본 적 없는 표정을 짓질 않나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한아가 홍대입구역의 공중전화에서 누구나 다 아는 번호 111번을 누르게 만든 건 경민이 분리수거를 하던 어느날이었다.


"이건 플라스틱이야페트야?"


혼잣말을 하던 경민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입에서 강렬한 빛줄기를 뿜었다그 빛은 경민의 손에 들린 일회용 음료수병을 핥았다순간이었지만 레이저처럼 강렬했고한아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한아가 경민에 대한 의혹을 나날이 키워갈 무렵경민은 한아에게 청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아의 친구 유리에게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는데제동이 걸렸다.


"나 생각할 게 좀 있어서며칠만 연락 없이 지내자."

 

경민은 청천벽력같은 한아의 말에 안절부절했다한아와 헤어진다니이제와 겨우 같이 있게 되었는데왜냐하면 경민은 그때와 다른 경민이었기 때문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드라마 '닥터 후덕분인지나는 한아와 외계인과의 로맨스에 거부감없이 빠져들었다겨우 두 대에 걸친 닥터를 보았을 뿐이지만닥터가 딱 그런 외계인이었기 때문이다외형은 사람이지만 속은 외계인인 존재.


"나는 안 될까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그래도 나는 안 될까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기다릴게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이거면 됐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데려간 국립공원에서 경민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생물이기는 하냐는 한아의 물음에 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이라고 대답하는 외계인아니 이전과는 다른 경민이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2만 광년을 건너왔다니계속되는 이야기는 더 달달했다.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나는 너의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다른 경민이 제 별에서 본 한아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이며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고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일관된 태도로 환경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인공 한아그런 한아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다 사랑에 빠진 외계인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사랑이야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한아와 경민 주위에 사람들은 또 어떤가한아의 하나뿐인 친구 유리뮤지션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사는 주영한아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었기에 우주로 떠난 진짜 경민까지 소설 속 인물에게 마음을 준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다시금 깨닫게 해 준 멋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책을 올 여름 휴가지였던 여수와 순천에 머무는 동안 읽었다폭염으로 고생했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달달하고 말랑말랑했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9. 9. 1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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