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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는 책이다. 막내 동생이 어릴 때 여러 전집을 비교한 끝에 구매한 ‘삼성 전래 동화’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이 책을 처음 읽은 날 반해버린 뒤로 내 책장에 고이 보관해오고 있다. 글 송재찬, 인형 박진덕의 전래 동화 『정신없는 도깨비』.
옛날에 한 가난한 아이가 남의 집 일해 주며 혼자 살았다. 하루는 돈 서 푼 받고 신이 나서 겅중겅중 집으로 가고 있는데, 웬 키가 댓 발 장대만 한 것이 아이의 앞에 훌쩍 나타났다. 이름을 두 번 부르고 손뼉을 두 번 친다는 도깨비다. 아이는 깜짝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왜 그러느냐?” 물었고, 도깨비는 내일 줄 테니 돈 서 푼만 빌려 달라 한다. 수중에 딱 서 푼 있는 걸 알고 그러는 건지 아이는 주섬주섬 돈 서푼을 꺼내서 도깨비에게 내주었다.
이튿날 저녁, 이 도깨비가 정말 돈 갚으러 오나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짝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옜다, 어제 빌린 돈 서 푼.” 도깨비는 돈 서 푼을 주더니 휑하니 사라졌다. 아이는 그 도깨비, 약속 한번 잘 지키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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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 저녁, 도깨비가 다시 찾아와 “옜다, 어제 빌린 돈 서푼.”하며 돈을 갚는다. 아이는 어제 갚지 않았냐고 받아치지만 도깨비는 “허 참. 너 참 정신도 없구나. 어제 돈 빌리고 오늘 처음인데 내가 언제 갚아?”하며 우기는 통에, 아이는 할 수 없이 돈을 받았다. 이쯤 되면 아이의 다음 날이 그려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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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도깨비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음 날의 다음 날에도 서 푼을 갚으러 왔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어김없이 돈을 갚으러 온 도깨비가 웬일인지 가지를 않고 머뭇거린다. “아무개야, 나 놀다 가도 되나?” 아이는 도깨비의 부탁에 선뜻 응한다. “그러지 뭐. 뭐하고 놀고 싶으냐?”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 고구마도 쪄 먹고 한참을 노는데, 도깨비의 눈에 찌그러진 솥이 들어온다. “이 솥 너무 찌그러졌다. 새것으로 갖다 주랴?” 나쁠 것 없지. 아이는 그러라고 했다.
다음 날 저녁 도깨비는 돈 서 푼과 함께 새 솥을 가져다주었다. 아이가 이튿날 아침 새 솥에 밥을 지었는데, 고슬고슬 탱글탱글 밥 때깔이 다른 거다. 점심때가 되어 밥을 지으려고 솥뚜껑을 열었는데,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가득하다. 그렇다. 도깨비가 가져다 준 솥은 요술 솥이었다. 도깨비가 새 솥을 계속해서 가져다주니 집에 솥이 쌓여만 가서, 아이는 이럴 게 아니라 솥을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기로 한다. 아이의 나눔으로 온 동네가 요술 솥으로 떠들썩 신이 났다.
하루는 아이가 또닥또닥 다듬이질을 하고 있는데, 도깨비가 찾아왔다. 어김없이 돈 서 푼과 요술 솥을 들고 말이다. 아이가 손에 쥔 다듬잇방망이를 보더니 다 닳았다며 새것으로 갖다 주랴? 묻는다. 이번에도 마다할 것은 없어서 아이는 그러라고 했다.
이튿날 저녁 도깨비는 돈 서푼, 솥, 방망이를 가져왔다. 솥이 그랬던 것처럼 방망이 역시 일반 방망이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말만 하면 그것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하루 종일 남의 집 일하고 돈 서 푼 받던 아이한테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는 돈이며 솥이며 방망이를 동네 사람들한테 골고루 나눠 주고 모두가 덩실덩실 살판이 난 어느 날이었다. 훌쩍훌쩍 하늘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눈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도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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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 왜 거기 떠서 울고 있느냐?”
“살림을 헤프게 해서 벌 받으러 간다. 집에 있던 돈이랑 솥이랑 방망이가 다 없어졌다는구나.”
듣고 보니 아이는 도깨비가 참 안쓰러웠다. 그런데 이 도깨비가 이렇게 덧붙인다. “너한테 빌린 돈 서 푼도 갚아야 하고, 솥이랑 방망이도 주기로 했는데 미안하다.” 도깨비는 울면서 하늘 저 멀리 사라졌고, 그 뒤로 아무도 그 도깨비를 보지 못했다.
정신없는 도깨비를 보고 있으면, 내리사랑은 이 도깨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까지 너한테 빌린 돈 서 푼을 갚아야 하고, 새 솥과 방망이를 주기로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도깨비를 보는데 왜 내가 눈물이 나던지. 어제 준 것을 잊고, 오늘 다시 돌려 주러 왔다가 부족한 것이 보이면 그것도 주고 싶고, 넘쳐도 주고 싶은 것이 돈 서 푼 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랑으로 읽혔다. 물론 도깨비가 아이를 사랑해서, 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누군가의 사랑이 이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도깨비가 있다. 최근엔 첫눈처럼 너에게 가는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가 여심을 흔들었고, 아이들이 채널을 고정하게 만드는 100살이 넘은 도깨비 ‘신비’도 있고, 어릴 때 무서워 무서워 하면서도 열심히 챙겨봤던 꼬비꼬비도 있는데, 나는 이 책 『정신없는 도깨비』를 읽은 뒤로 도깨비하면 이 정신없는 도깨비 생각부터 난다. 도깨비는 벌 받으러 올라간 하늘에서도 어제 빌린 돈 서 푼을, 찌그러진 솥과 닳은 방망이 대신 가져다주기로 했던 새 솥과 새 다듬잇방망이를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도깨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