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는 한국 사회의 당대적인 현상 중 하나다.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 일베에 들어가 게시글을을 죽 훑어 보고는 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나의 얄팍한 감상이다.

물론, 일베는 쓰레기통이다. 이용자들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자학 코드를 통해 자신들이 어떤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문득 문득 놀라게 되는 것은 일베 이용자들 중에는 전문적인 지식과 예리한 논리를 갖춘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내 옆의 어느 멀쩡한 누군가가 일베 이용자라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이른바 루저만이 일베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분위기는 역시 순진함인 것 같다. 혹은 수동성이라고 해야 할 기조.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일베의 댓글 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베ㄱ: 김무성 너무 꼰대 아니냐! 나 차라리 박원순이나 문재인 뽑을란다.
일베ㄴ: 그래도 박원순이나 문재인 뽑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일베ㄱ: 그건 그렇지... 씨바

이 심각한 순진함... 그러나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진실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종북 세력이 남한을 장악하고 있다는 세계를 내면화하고 있다.)

일베를 특징짓는 수동성이라는 기조는, 말하자면 자신의 자유에 대해 스스로가 취하는 태도의 한 양상이다. 이 경우는 자유가 함의하는 책임에 대한 회피로서의 자유에 대한 회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수동성은 자유의 회피이고 책임의 회피라는 것이다. 수동성은, 그러므로 자신의 자유 혹은 책임의 대상화, 즉 그것의 양도이다. 수동성은 자신의 자유를 권위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자유의 책임에 따른 부담을 덜고자 하는 행위 양태이다. 이 권위자는, 그 무한한 극으로서는 물론 신일 것이다. 좀 더 가깝게는 박정희, 전두환, 푸친 등이 그 권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친밀하게는, 그리고 흔하게는 아버지가 그 권위자가 된다.

전에 일베에 관한 어떤 연구 논문에서 일베의 가장 큰 연관어가 아버지라는 단어로 분석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즉, 일베는 아버지의 세계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일베 사이트에서 느낀 바도 그렇다. 즉, 일베는 구세대의 세계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물론 경상도)

그러므로 일베의 대부분의 특성은 구세대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구'세대의 세계이니만큼 그것과 현실과의 괴리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 혐오. 구세대의 세계에서 여성은 아무리 모자란 남성에 대해서도 그 하위에 위치해야 한다. 여기서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하고 그것이 여성 혐오로 표출된다. 

(이른바 능력있는 일베 이용 남성의 경우는 여성은 본질적으로 창녀라는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억압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또, 일베 특유의 자학 코드는 자신들의 세계와 정서가 현실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 기꺼이 일베가 쓰레기통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일베는, 이른바 루저에게는 자신과 현실과의 괴리를 토로함으로써 스스로가 루저임을 자인하는 곳이고, 이른바 능력자에게는 불편한 현대성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곳이다.

이 일베 현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남부 백인 남성의 불안을 세력화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유킵이라는 극우 정당은 영국 워킹 클래스 백인 남성의 불안을 종자로 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사람들의 불안감, 소외감은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대의 방향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세계는 스스로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백인 남성이 중국인이 투자한 회사의 노동자로 일할 때 그런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영국이나 캐나다 등의 대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진실이다. (말하자면, 이들 나라의 백인 워킹 클래스 남성의 눈에 진보란, 인류의 보편성이란 도시인들의 이데올로기이자 비즈니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기본적인 기조도 시골성에 기반하여 도시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베에 있어서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일베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베 사용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현실과의 괴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현실을 들이밀면 된다. 사실 이런 압도적인 현실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밀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현실의 도래를 재촉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 생각에는 페미니즘인 것 같다. 일베를 극복한다는 것은 일베가 의존하고 있는 구세대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것인데, 이 세계관의 위계적인 구조를 그 근본에서부터 깨부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일 것이기 때문이다. 낙관적인 것은 한국에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이미 남성 이상이며, 각종 고시 제도 등을 통해 관료 조직으로 들어가는 여성의 수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오래 직장 생활하다 한국으로 돌아가 대기업 중역으로 계신 어떤 분은, 한국의 여성 직원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야무진데 비해 남성 직원들은 다들 어리버리하다며 한국은 곧 여성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정반대의 말도 있다. 어떤 기사를 보니, 어떤 대기업 임원 말에 의하면 신입 사원 면접을 볼 때 보면 여성들이 남성보다 말도 잘 하고 주관도 뚜렷하여 훨씬 우수한 것이 맞는데, 막상 뽑고 나면 여성들은 자기 생각이 하나도 없고 매사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대기업 임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즉, 남성이 여성보다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위계 조직에 더 잘 적응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구세대의 세계에서 비롯된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구조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진보는 페미니즘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진보를 꿈꾸는 사람, 특히 남성은 무엇보다 먼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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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5-12-12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보통 weekly 님 글을 읽으며 많이 배우고 생각하는데요, 지난 번 어떤 글 중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동양인이 아니길 바랬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데, 평소 페미니즘이나 진보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린 생각을 갖고 계시고 객관적인 사고를 하려고 언제나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아보이시는데, 어째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이 동양인이 아니길 바라셨던 건가요?

weekly 2015-12-12 06: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예... 무엇보다도 제가 남자, 특히 한국 남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남자로서의 편견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 글에서도 극복되지 않는 오지랖이라고 말씀 드린 것이구요. 또 저번에 메갈리아 관련 글에서 제가 그간 써왔던 글 중에서 남성 중심적인 글들이 많았다고 반성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포겟터블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글, 특히 바로 그 대목을 지칭한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허다한 잘못이 있겠지만요...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누군가 그런 모순을 지적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2015-12-13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3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4 0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에 어느 웹사이트에서 조계사에서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한상균씨를 잡기 위해서란다. 이 분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네이버에 들어가서 뉴스를 하나 열어 보았다. 민노총 위원장이란다. 음... 언제적 보던 뉴스던가? 시대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 박근혜 때문이다. 박근혜의 무능과 시대착오 때문이다. (공인은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얼마 전 이집트 영공에서 러시아 민항기가 추락한 일이 있었다. 이때 푸친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즉각 비상 회의를 소집하고, 총리에게 테러 가능성을 조사할 것을 지시하고, 유관 장관과 의료진 등을 태운 비행기를 이집트로 급파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러시아 사람들이 푸친을 지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푸친은 정당화될 수 없는 독재자이자 학살자이다.)

그런데 국가 재난시에 국가의 지도자가 이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뉴얼 대로 움직이면 되니까. 허술한 지도자라도 이런 일을 계기로 지도력을 선보이면서 지지율을 확 끌어올리곤 하지 않는가?

그런데 박근혜는 이런 것조차 하지 못한다. 세월호 사태 때 확인되었듯이 박근혜는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이다. 그러니 뜬금없이 유병언을 잡는다 어쩐다 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공권력을 과시한다. 이번 민노총 위원장 체포 사태도 비슷한 경우 아닐까? 대화 상대여야 할 노동 세력을 말로 설득하지 못하니(이런 걸 무능이라 한다) 힘으로 와해시키려 하는 것 아닌가? 어짜피 공권력을 과시하면 지지율은 올라간다. 꿩 먹고 알 먹기다. 

국가의 지도부에 있는 사람이 무능한데다 고집이 세다보니(이걸 꼴통스럽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꼴통스러움으로 물든다. 예를 들면 어버이 연합이라는 단체가 있단다. 이름에 들어 있는 '어버이'라는 말은 토론을 거부하겠다는 함의를 갖는다. 국정 교과서를 '올바른' 교과서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똑같은 경우다. 딱 대통령의 사고 수준 그대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토론에 붙일 자신이 없다는 정직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이러한 상황이 바뀔 전망이 안보인다. 야권을 봐도 그렇고 우리 일개 시민을 봐도 그렇고 상황을 바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 한국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근거는 한국이 너무 커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은 국정 교과서 하나 마음대로 발행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다음 정권을 새누리당이 다시 잡는다고 하자. 국제적 압력, 일본 등과의 외교 문제, 세계 10위 권대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의 위신과 대외 영향력 등을 고려했을 때 누가 국정 교과서를 고집할 수 있을까? 반기문, 김문수, 오세훈 등은 분명 국정 체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김무성 정도가 자기 집권 기간 동안만이라도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위의 새누리당 후보군들은 최소한 상황 판단은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기에 김무성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나아가는 방향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학계에서, 관료계에서 다 똑같은 것을 목표로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이 기반을 몇몇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내팽개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간단한 예로 이 사람들이 어버이 연합을 동원한 정치를 하고 싶어할까? 이 사람들이 국정원 댓글 부대를 동원한 공작 정치를 하고 싶어할까? 이 사람들이 무능한 딸랑이들을 장관으로 임명해 국정을 운영해 나가고 싶어 할까? 이 사람들이 경제계 말만 듣고 기후 협약과 동떨어진 이산화탄소 배출 목표치를 고집하려 할까? 이 사람들이 국방부 말만 듣고 사병 복지에 무신경할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이 선진국 다 하는 여성 할당제를 거부하려 할까? 이 사람들이 노동 탄압 국가라는 오명을 계속 듣고 싶어할까?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은 대외적으로는 경제 강국이라는 한국의 대외적 위신과, 그러므로 정치 문화적으로 한국을 선진국 수준으로 고양시켜야 할 책임을 의식할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것이다. 또 이 사람들은 대내적으로는 박근혜의 프리미엄이었던 특정 계층의 굳건한 지지없이 자기 실력만으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어야 한다. 예컨대, 이 사람들이 박근혜가 세월호 사태때 했던 것처럼 대처했다가는 거의 정권이 날아갈 지경에 이를 것이다. 누가 이런 대통령을 옹호해 줄까?

그러므로 박근혜라는 최악의 대통령 시대가 가고 나면, 설사 정권이 바뀌지 않더라도, 나는 한국 사회에 다시 합리적인 공기가 돌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버이 연합의 악바리는 박근혜 자신이 자신을 설득시킬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방치된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논리를 갖춘 사람에게 이러한 악바리는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웰빙이 화두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 박근혜의 대선 제일 공약이 경제민주화였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박근혜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화두가 현실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부 기득권 세력이 이런 화두에 대한 고민 자체를 훼방놓기 위해 앞세운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아마 그 세력들에게 다음 꼭두각시를 만들어 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낙관에 근거를 더해 줄 것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보자. 김무성도 이에 비하면 준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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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12-1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클리님 말씀대로 합리적인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어야하는데.... 52%가 문제네요. 을 엄마나 시모만 봐도 요즘 애들말대로 노답입니다. 울 시모는 한 술 더 떠서 작금의 노동현실이 김대중 때문이라고 하는데, 하도 신경질나서 김대중 죽은지가 언젠데 김대중소리 하냐고 쏴 부쳤을 정도네요. 노인네들에겐 죽은 김대중이 현실정치 하나봅니다. 솔직히 저는 우리 부모라도 너무 미워요.

weekly 2015-12-10 17: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예... 저는 그 합리성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성별, 연령, 지역 등등)과 현재를 끊어내는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박근혜는 경상도 지역과 노년 세대의 기억과 경험에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합리성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분들은 박근혜가 잘되는 것만을 보고 싶어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긍정으로 여기시는 분들인지라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박근혜가 정치를 잘 하고 있다면 이분들도 굳이 김대중을 끄집어 내려고 하지 않을 것 같고요...

저는 박근혜가 한국의 바닥인 거 같습니다. 남기문, 오세훈, 김문수, 김무성 등에게 노년 세대와 경상도 지역이 지금과 같은 묻지마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세월호 잠수사셨던 분이 동료 잠수사의 사망에 대해 지휘 감독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관료 조직 끼리 책임 전가하다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운 꼴이라고 봅니다. 대통령이 정부 조직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 테구요. 또, 이러니 사람들이 헬조선이라고 한탄하는 것이 테구요... 결국은 한국의 국가 역량에 전혀 맞지 않은 박근혜의 무능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가 바닥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송모군의 표절 사태 이야기를 들었다. 송모군이 해외 저널에 낸 논문이 지도교수의 10여년 전 학회 발표문을 표절한 것이며, 송모군이 직접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식도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것으로 평가를 받아 게재 철회되었다는 것이다.

7년 간의 연구를 결산하는 박사 학위 논문의 일부로 제출된 작품이 저작권 저촉을 염려할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복제(80%정도라고 하더라)된 것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할 수 밖에 없다. 해당 학생은 연구자로서의 소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연구 윤리가 절대적으로 미비하다는 것. (물론, 현상적인 파악이다.)

송모군이 해당 기관에서 퇴원되는 것도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해당 기관에서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수여하게 된다면 앞으로 이 기관은 자신이 생산한 연구 결과나 자신이 배출한 연구자들에 대해 어떤 공신력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모군은 대학을 중퇴하고 학점은행을 이용해 학사 자격을 얻어 지금의 석박사 통합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송모군은 왜 대학을 중퇴한 것일까? 송모군측의 이야기로는 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한 연구 욕구를 대학 강의가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모군의 통합과정 지도교수는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첫 2년 동안은 학부 과정을 다시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모군이 대학을 중퇴한 것은 송모군이 학부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어서 대학에서 더 배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야망은 양자 컴퓨터, 블랙홀, 끈이론 등을 연구하는 것인데 현실은 강의실에서 일반 물리학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송모군은 현실과 바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현실과 바람의 차이... 이쯤해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끌어들여 보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 인간이 선택하는 것 = 인간이 행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명제대로라면 현실과 바람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그 사이에 존재자들을 개입시킨다. 나의 현재와 나의 목적(바람, 미래) 사이에 현실의 존재자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통해 관념론과 실재론을 동시에 극복했다고 믿는 것 같다. 관념론은 현실과 바람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며 실재론은 목적, 미래, 바람과 같은 비존재를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송모군은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현재의 나와 멋진 박사학위 논문을 탈고한 미래의 나 사이에는 현실의 충만한 존재자들이 놓여 있다. 이 존재자들은 무엇보다도 수십 권의 두터운 교과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바람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이 존재자들을 나의 목적에 비추어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그것이 곧 나의 연구 활동을 정의할 것이다. 즉, 내가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의 존재자를 이러저러하게 구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체화는 물론 고유성을 갖는다. 

송모군은 수십 권의 책과 수백 편의 논문을 읽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를 자신의 주제에 맞게 재배치하지는 못한 것 같다. 즉, 구체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와 바람 사이의 존재자들은 나의 주제의 빛에 따라 통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채 내가 그 존재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교과서의 비체계적인 단편들이 될 것이다. 나는 물상화된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그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상화된 것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나는 송모군의 유튭 비디오를 몇 개 찾아 보았다. 짧은 것들이고 송모군은 매우 어렸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교과서에서 오려낸 듯한 답변을 하고는 했다... 

아마 송모군이 연구를 하고 싶었다면 대학 일반 물리학 책을 갖고도 충분했을 것이다. 만약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음... 잔인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거기서 누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당연히 송모군이지!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순진하다. 우리는 타인의 즐거움을 대신 사는 경우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람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송모군이 천재인가를 물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논해온 것은 근본적인 좌절이기 때문이다. 천재소년과 80% 가량 복제된 학위 논문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거기서 근본적인 좌절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좌절이란 실패만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상황 속의 나를 의미한다. 다행인 것은 그 실패 역시 나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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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3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모군 표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송모군보다는 그 지도 교수(들)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송모군 같은 천재가 나와도 국내에서는 키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천재를 낳을 수는 있지만, 양육할 능력은 한국(인)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한국에서 숱한 신동/천재가 나타났었고 나타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그 천재를 천재 이상으로 키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천재라는 꽃이 만개할 수 있는 환경/시스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한국적 현실! 한국에서 천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조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권력지향적인 한국인들, 음주가무지향적인 한국인들, 끼리끼리 친목질지향적인 한국인들, 패거리지향적인 한국인들... 명예욕지향적인 한국인들... 앞으로 100년 존속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weekly 2015-11-30 15: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1. 이번 표절 사태를 고립시켜 생각해 보아도 책임 소재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 보면 해당 연구소와 지도교수가 송모군을 천재로 키워내기 위해 세금을 끌어다 송모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프로젝트 말미에 도저히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자 지도교수가 송모군과 공모하여 논문을 대신 써줬다는 것이 사태의 본질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주된 책임은 해당 기관과 지도교수, 그리고 송모군에 돌아갈 것입니다. 반면 표절 자체에만 촛점을 둔다면 주저자이자 책임 저자인 송모군에게 가장 큰 책임을 지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 원글은 다른 층위도 보자는 이야기고요.

2. 이번 사태를 한국 교육 제도의 실패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학위 과정에 들어가기 전 송모군의 공교육 이력은 초등6학년 과정 1년, 대학 학부 과정 1년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한국의 교육 제도... 문제가 많죠.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국도 영국 학생들의 학력이 심각하게 떨어지자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교육 제도를 연구하고 있고요, 잘 아시겠지만 미국도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 제도를 열심히 칭찬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4. 저는 한국 교육이 약점도 있지만 강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에 대해 영재를 위한 엘리트 교육 제도의 창설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여론이 흘러간다면, 이는 정말 끔찍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5. 제 기본적인 생각은 이번 일이 천재를 갈망하는 사회가 빚은 사태라는 것입니다. (송모군의 부모는 송모군에 대해 그러한 사회의 매개 역할을 한 것이구요.) 저는 천재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모두가 다 천재이거나요. 물론 이는 패러다임의 문제이이고요...

6. 한국이 다양성과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고쳐나가야 하는 부분이겠죠. 저는 한국이 지금의 수준까지 오는 데는 성취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패거리지향적인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인 것도 분명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아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하이트헤드가 인용하여 말한 것처럼 우리의 출발점은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분명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남아 있는 이원론적 사고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의 도입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방법론은 현상학적이라 불리든, 경험론적이라 불리든, 비판론적이라 불리든, 변증법적이라 불리든, 실천론적이라 불리든 결국은 단일한 현대의 정신을 공유하는 셈일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현대 철학의 진보를 선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흔한 예이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가 시를 하나 썼다.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뛰어 왔더니 심장이 쾅쾅 뛰고 얼굴이 발그레해졌단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우리는 아이의 경험의 절대성을 주창할 것인가, 아니면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 물론 둘 다 아니다. 아이의 경험을 상대화하고, 즉 그것을 타자화하고,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며, 다시 그 구성적 힘(사회적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아이의 경험과 아이가 경험으로서 그 구성적 힘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때 매개항을 고려한 사유가 곧 변증법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엡도 테러 당시 파리 시민들이 내건 "자유, 평등, 박애"의 표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현대적'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사상가들이 약간은 예전 사람들이고, 약간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어제 읽은 이번 호 "뉴 레프트 리뷰"의 "Why the Euro Divides Europe"(by Wolfgang Streeck)이라는 논문은 내게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예전 사상가들'의 익숙한 논리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유로존 위기를 색다르게 조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 도달했다면 돌아볼 곳은 역시 방법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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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용.
    from 하나와 앨리스를 위한 작은 방 2015-12-06 04:11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n...
 
 
무진무진 2015-11-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신없이 몇 시간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국시간으로 7시가 넘었네요. 에티카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영어는 잘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저 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논문도 검색해보다 우연히 weekly님의 사적인 공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많이 배워갑니다...자주 들리고 싶은 공간인 것 같아요. 땅을 한 곳만 깊게파면 옆의 토양이 점점 무너지듯이 weekly님이 쓰신 글들을 보고 그런 깊음과 넓음이 느껴져서 좋네요. 다쓰고 나니 이 글 <방법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weekly 2015-11-24 15: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찬이시구요... 여기 있는 글들의 한계는 제게도, 제삼자에게도 명확한 거 같아요. 그 점이 항상 고민스럽지만 이곳이 저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그나마 면피책으로 삼게 되네요.

좋은 하루 되시기를...
 

새로 구독하기 시작한 "뉴 레프트 리뷰"에 한국의 백낙청의 논문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반가웠지만 논문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은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나?" 라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담론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 내에서 어느 정도 현실적인 힘을 갖고 유통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알아 볼 일이다. 일단은 백낙청의 논문에 대한 나의 '편파적인' 인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두려 한다.

근대성이란 대체로 16세기 이후 서구가 경험하며 이뤄온 성과들(그리고 한계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이중적 기획이란 그러한 근대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상은 백낙청의 논문 제목에 나타난 개념들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백낙청은 그리 명료하지 않은 것 같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기획'을 언급했으면 그것의 주체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논문에는 이런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주체에 대한 온갖 철학적 논의들 다 집어치우고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만 거론해 보자. 서구가 근대성을 만들어가면서 그것의 극복을 고민하는 것과,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을 고민하는 것은 같은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 서구에게 근대성이 일차적인 경험이라면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에게 근대성은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되지만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미 현전하는 것으로, 수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은 매우 복잡한 양상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서구화(아침에 스타벅스를 들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등의 패턴화된 서구적 생활 양식), 표현의 자유 등의 규범적, 제도적 이념,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등이 혼합된 것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선택적 반응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선택적 반응이 변용일까, 극복일까? 백낙청은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 예를 들어 싱가폴과 같이 경제적으로는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있지만 근대성의 제도적 측면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싱가폴은 아직 근대성의 수용에 있어 불철저한가? 이러한 괴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가? 이러한 모순은 궁극적으로 지양될 것인가? 수용과 극복이라는 개념만 갖고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촛점을 한국으로 끌고 와 보자. 백낙청에 따르면 한국은 결핍된 나라다. 즉, 근대성의 주요한 징표인 민족 국가를 아직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족, 민족 국가라는 개념의 생성을 둘러 싼 온갖 논란들을 다 제쳐두고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만 제기해 보자. 한국이 북한과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의 근대성의 경험에 어떤 의의를 가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한국이 실질적 민주화를 확충하는 데 중요한 장애가 되는 것은 항상 종북 논리, 다시 말하면 분단 체제의 한계에서 온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통일은 이러한 한계를 걷어치우는 것이니 통일은 한국이 근대성의 규범적이고 제도적 측면을 온전히 누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까? 글쎄...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첫째, 분단 체제는 사실상 명목적인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은 더 이상 하나의 체제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하는 두 항으로 볼 수 없다. 분단체제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힘이 없다.  
둘째,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된 후 새로 편입된 북한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게 표를 줄까, 민주당에게 표를 줄까? 난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누구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싱가폴과 일본을 보라. 한국이 한반도의 단일 국가를 형성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근대성의 중요한 요구를 만족한다고 해도 서구적 근대성의 이념적, 제도적 측면이 완성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나는 백낙청의 이론이 이러한 문제를 분석하는 틀도, 분석 결과에 따른 실천의 지시점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근대성의 담론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반성한 것인데 동아시아는 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발점은 동아시아의 구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고할 것은 수용과 극복이 아니라, 마주침과 변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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