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구독하기 시작한 "뉴 레프트 리뷰"에 한국의 백낙청의 논문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반가웠지만 논문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은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나?" 라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담론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 내에서 어느 정도 현실적인 힘을 갖고 유통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알아 볼 일이다. 일단은 백낙청의 논문에 대한 나의 '편파적인' 인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두려 한다.
근대성이란 대체로 16세기 이후 서구가 경험하며 이뤄온 성과들(그리고 한계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이중적 기획이란 그러한 근대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상은 백낙청의 논문 제목에 나타난 개념들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백낙청은 그리 명료하지 않은 것 같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기획'을 언급했으면 그것의 주체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논문에는 이런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주체에 대한 온갖 철학적 논의들 다 집어치우고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만 거론해 보자. 서구가 근대성을 만들어가면서 그것의 극복을 고민하는 것과,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을 고민하는 것은 같은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 서구에게 근대성이 일차적인 경험이라면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에게 근대성은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되지만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미 현전하는 것으로, 수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은 매우 복잡한 양상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서구화(아침에 스타벅스를 들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등의 패턴화된 서구적 생활 양식), 표현의 자유 등의 규범적, 제도적 이념,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등이 혼합된 것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선택적 반응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선택적 반응이 변용일까, 극복일까? 백낙청은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 예를 들어 싱가폴과 같이 경제적으로는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있지만 근대성의 제도적 측면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싱가폴은 아직 근대성의 수용에 있어 불철저한가? 이러한 괴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가? 이러한 모순은 궁극적으로 지양될 것인가? 수용과 극복이라는 개념만 갖고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촛점을 한국으로 끌고 와 보자. 백낙청에 따르면 한국은 결핍된 나라다. 즉, 근대성의 주요한 징표인 민족 국가를 아직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족, 민족 국가라는 개념의 생성을 둘러 싼 온갖 논란들을 다 제쳐두고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만 제기해 보자. 한국이 북한과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의 근대성의 경험에 어떤 의의를 가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한국이 실질적 민주화를 확충하는 데 중요한 장애가 되는 것은 항상 종북 논리, 다시 말하면 분단 체제의 한계에서 온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통일은 이러한 한계를 걷어치우는 것이니 통일은 한국이 근대성의 규범적이고 제도적 측면을 온전히 누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까? 글쎄...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첫째, 분단 체제는 사실상 명목적인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은 더 이상 하나의 체제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하는 두 항으로 볼 수 없다. 분단체제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힘이 없다.
둘째,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된 후 새로 편입된 북한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게 표를 줄까, 민주당에게 표를 줄까? 난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누구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싱가폴과 일본을 보라. 한국이 한반도의 단일 국가를 형성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근대성의 중요한 요구를 만족한다고 해도 서구적 근대성의 이념적, 제도적 측면이 완성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나는 백낙청의 이론이 이러한 문제를 분석하는 틀도, 분석 결과에 따른 실천의 지시점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근대성의 담론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반성한 것인데 동아시아는 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발점은 동아시아의 구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고할 것은 수용과 극복이 아니라, 마주침과 변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