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정도 일정으로 한국에 갔다가 어제 영국에 돌아왔다. 간단히 빠르게 인상만 적어보자.


한국의 인천 공항을 나서는 순간 두텁고 습한 공기 덩어리에 당황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날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풀 꺽인 것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다음날 일을 보느라 강남 거리를 쏘다녀야 했는데 사람들 복장에 의아함을 느꼈다. 날은 더운데 올-블랙 패션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열에 두 엇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올 블랙이었던 것 같다. 어떤 가게에 갔다가 그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상하복 전부 까만 옷을 입고 있는 게 너무 신기하네요." 그러자 가게 여주인이 당황해했다. 나는 그제서야 카운터 밑으로 그 분의 하의도, 그러므로 상하의 모두가 까만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사람들이 까만 옷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이 유행이 시작된지 10년도 더 된 것 같긴한데..." - 아, 10년도 더 전에 시작된 유행이라고... 현상은 그렇게 거기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미처 챙겨보지 못했다. 그리고 몇 칠 후 뉴욕 타임스의 구독 메일로 한 기사가 배달되어 왔다. 전세계적으로 올 블랙 패션이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그리고 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그것을 지역적으로 고유한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무반성적인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세계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복잡성을 연결성으로 정의한다면 현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복잡성 때문에 비롯된 일군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원자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필요한 것은 총체화의 태도라는 것을.  


예외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빠릿빠릿하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어떤 금융사에 갔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왔는데요..." "그건 3층에서 해요. 한 층 더 올라가셔야 해요." 그러나 2층 그 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그 건에 관해 설명해 주며 도와주었다. 3층에 올라가자 담당자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 직원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도와주었다. 유니클로에서 바지를 샀다. 바지를 사고 피팅을 하고 기장을 줄이고 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손님의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신발을 사러갔다. 남직원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손님을 응대하고 창고를 뒤지고 있었고 여직원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끈을 매어주었다. 피팅을 마치고 나서 더 이상 응대할 손님이 없자 목청을 높여 "세일이요, 세일~"을 외쳤다. 나는 저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럴 자신도 없다. 예외? 어떤 편의점에 갔는데 모자를 내려쓰고 마스크를 눈밑까지 끌어올린 직원이 계산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선을 핸드폰으로 향하며 응대의 종료를 선언하는 모습. 유튭같은 데서 종종 희화화되는 장면의 실사 버전.


어디를 가든 그랬다. 이번에 한국에 가기 직전에 영국에서 치주 질환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한국에 간 김에 한국에서도 치과를 찾아가보았다. 영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저렴하게, 비교도 할 수 없이 짧은 대기 시간에 (그리고 내 생각에 훨씬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만을 가지고 한국의 시스템이 영국의 시스템보다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한층 위에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한국의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한 마디로 말해서 경쟁일 것이다. 그러나 경쟁만을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더 적절하게 말하면 아마도 그것은 그러한 경쟁을 허용하는, 혹은 복돋우는 사회 문화적 환경일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고객들이 응당 기대하는 서비스의 수준은 높을 것이고, 서비스 제공자들은 고객의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교보 문고에 갔더니 사람들로 바글 바글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거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글쎄, 재고 있는지 확인하고 매장이 왔더니 재고가 없다더라구요. 재고가 없을 수는 있지요. 근데 직원이 "검색해서 확인하셨어요?" 라고 하는데 그 말투가~"   


나는 번 아웃이라는 말을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세대에 있어 번 아웃의 역치가 지나치게 낮은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한 바로는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친척 중에 병특 중인 20대 후반의 젊은 친구가 있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뛰어난 인재다. 병특 1년 반이 되어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기, 혹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 친구들과 대화하다보면 종종 놀랄 때가 있다. 거의 판에 박은 듯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듣게 될 때가 그렇다. 그 중 백미는 어떤 친척이 아들에게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자립적인 사람이 못된 건 아버지가 나를 자립적인 사람으로 키우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예요?") 그 친구의 아버지는 현재의 직장에서 병특을 마쳤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그 친구는 이직할 마음이 강한 것 같다. 자신의 역량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 자신이 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는지 등에 대해 빠르게 계산해보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뉴-노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 세대의 의견이 옳은지 젊은 세대의 의견이 옳은지가 문제가 아니라 젊은 세대의 의견이 그냥 현재의 상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현 젊은 세대의 선택 성향이 전반적으로 옳았음이 경험적으로 증명된다면 그 성향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 세대의 선택 성향은 좀 더 보수적이 될 것이다. 그 친구의 여자 친구는 현재 고연봉의 전문직이다. 그런데도 투 잡을 하고 있고, 거기다 더해 CPA 공부를 준비하고 있다. 노후 준비까지 병행하는, 우리 늙은 세대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완벽주의! - 나는 이런 완벽주의에 젊은 세대의 일부도 숨막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경향성은 그러한 경향성을 산출하는 이러 저러한 조건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한국의 낮은 출산률은 이러한 조건들의 결과의 결과의 결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단, 두가지는 분명하다. 첫째, 이 조건들은 어설픈 세대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조건들과 그 산출물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즉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두 가지 자명한 점을 인정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모적 논쟁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론은 별도로 하고 소모적 논쟁을 여전히 즐기게 될 것이기는 하다.


보고 느낀 것이 아직 많은데 여기서 대충 줄이도록 하자. 광화문, 창덕궁, 종로3가 갈매기살 집, 신당동 중앙 시장 등등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아마 몇 칠 뒤면 모두 잊어먹어 버릴 것일 테지만...


(추. 이제 슬슬 한국에 사는 것과 영국에 사는 것의 장단점에 대해 말할 때인가? 분명한 사실은 이제 영국 등의 이른바 선진국 국가에 이주해 산다는 것의 분명한 장점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미 선진국이므로. 포르투갈로 이주한 어떤 영국 할머니는 이런 질문에 대해, 영국을 떠나 아쉬운 점은 런던에서 매일 열리는 콘서트들을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이고,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얻는 가장 큰 이득은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라고 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에 사는 영국인은 굳이 포루투갈의 정치 뉴스에, 그리고 영국의 지긋지긋한 정치 뉴스에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도 이 할머니와 같은 의견이다. 나라마다 이러 저러한 장단점이 있지만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떨어져 살게 되면 거의 100% 확률로 그 사회의 이방인이 된다. 한국의 살인적인 경쟁에서 빠져나오고 싶은가? 그러나 빛의 속도로 제공되는 한국의 서비스들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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