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현 번역의 칸트 저작 하나(프롤레고메나)를 읽다가 번역이 참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백종현이 칸트의 저작들을 왕성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국의 칸트 학계는 든든한 기반을 갖춰가고 있는 셈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알라딘을 검색해 보았는데 엉뚱하게도 한국어판 칸트 전집 간행을 두고 백종현과 한국 칸트 협회 사이에 논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진행형인지는 더 알아보지 않았다.)
일단 논쟁점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가독성의 문제. 둘째, 칸트의 일부 전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 솔직히 별로 의미있어 보이는 논쟁점은 아닌 것 같다.
첫째, 가독성의 문제. 우선 확인할 것은 칸트 저작의 가독성 문제는 역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의 저술에 익숙했던 칸트의 친구 철학자도 <순수이성비판>의 원고를 읽다가 더 읽다가는 미칠 것 같아(칸트의 저작을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했을 바로 그 경험!) 읽기를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가독성의 문제를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로 구체화한다면 여기에 확실한 답이 없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나 자신은 의역을 선호하지만, 읽기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직역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용어 번역 문제. 문제가 되는 것은 아 프리오리, 트렌센던트, 트렌센덴탈, 이렇게 셋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것은 시장에 달린 문제이다. 칸트 철학 연구자나 칸트 저작의 독자들 뿐 아니라 칸트 이후 철학자들(예컨대 헤겔, 후설 등등)에 대한 연구자, 독자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트렌센던트같은 경우는, 어떤 것을 넘어서는 행위, 넘어서 있는 상태 등에 대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이미 '초월'이라는 용어로 안착되어 있다. 신은 세계를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며, 이 책상은 나의 정신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며, 인간 실재는 항상 주어진 것을 넘어 가치나 의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며... 등등. 칸트 철학 연구자들이 아무리 트렌센던트를 '초월' 이외의 다른 말로 번역하려 해도 이미 끝난 게임이다. 아 프리오리는 번역을 하지 않고 아 프리오리로 그대로 사용하든지, 선험적이라는 말을 쓰든지 내 생각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또, 칸트 이전의 철학사에서는 트렌센던트와 트렌센덴탈을 모두 '초월'로 옮겨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칸트 고유의 용어로서의 트렌센덴탈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 혹은 의식의 구조에 대한 탐구라는 본연의 의미를 옮길 적당한 용어를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내 생각엔 경험 이전만을 의미하는 '선험'보다는 경험을 넘어서 있으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에서, 그러므로 경험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특유의 방법론을 팔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너무 낯선 신조어를 도입하지는 않기로 한다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가 더 낫다고 본다. (혹자는 이 용어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대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라면 현대 한국어의 개념어 중 몇 개나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저 논쟁의 핵심은 가독성 문제나 용어 번역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가독성의 문제는 상대적이라는 것, 용어 선택의 문제는 시장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저 논쟁의 참여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아마 작은 시장에서 어쩌다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두 프로젝트가 경쟁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 같다. 예컨대, 백종현이 잘 하고 있는데 칸트 협회본 전집이 또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응답이 필요했을 것이다. 논쟁이 좀 모양 없게 진행되고 있는 점은 아쉽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이고 걸린 것이 많으니 이해가 아니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삼자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경쟁이 더 나은 번역본을 생산하고 칸트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환기할 수 있다면 사소한 잡음 따위는 충분히 미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